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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현대철학자들 개관

문학과 예외의 언어: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생명과 서사의 윤리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3. 30.

 

 

 

친구는 항상 나에게 말한다. “학교 그만두고 창작에 몰두해라.” 그 말은 언제나 나를 강하게 흔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이승의 소풍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창작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웃음으로 넘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의 갈림길에서, 창작과 철학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창작을 위해 철학을 배우고, 철학을 통해 창작의 깊이를 더한다. 그 상호작용은 내 사유를 끝없이 확장시켜 주었고, 내가 처음 창작을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채워지지 않는 충만감을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그것이 내가 창작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환경이 되어 주는지 확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친구에게 열 번, 스무 번 설명해도, 그가 내게 끊임없이 말하는 창작의 길이 내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충만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오늘, “문학과 예외의 언어: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생명과 서사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정리하며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분석해 보았다. 이 작업은 마치 빈 캔버스 위에 점점 나타나는 잉여의 의미처럼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 깨달음은 단순히 고통의 재현이나 서사의 완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작품들이 전달하는 침묵의 공간 속에서, 내가 그동안 몰랐던 언어의 잠재성과 그 무한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아감벤의 비작동과 벌거벗은 생명의 개념처럼, 그 작품들은 말하지 않음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말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철학적 상상력을 더욱 확장해 갔다. 그 감각은 내게 거대한 충만감을 안겨 주었고, 나는 그 충만감 속에서, 비로소 내 내면의 목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충만감 속에서, 나는 내가 앞으로 쓸 작품들이 모호하고 침묵하는 부분을 덧붙여 가는 과정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문학은 사유의 공간을 빚어내고, 철학은 그 공간에서 숨 쉬게 하는 힘이 된다. 내가 앞으로 쓸 작품들은 단순한 언어의 재현을 넘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무언의 깊이를 탐험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내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말해지는 이야기가 아닌, 말해지지 않는 것들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길이자, 내가 창작하는 길이다. 장자의 무위는 문학을 자유롭게 만들고, 아감벤의 비작동은 그 문학을 윤리적으로 무겁게 만든다. 이 두 철학은 내 언어를 이끌어 갈 것이다. 나는 이제 그 두 철학이 만들어낸 침묵의 언어와 말하지 않음의 힘을 느끼며, 내 작품들이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감각을 창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내 글은 이제 존재의 떨림을 표현하는 언어가 되고, 나는 그 떨림을 따라 사유의 미로를 걸어가게 될 것이다.

 

 

 

 

문학과 예외의 언어: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생명과 서사의 윤리

 

 

목차:

. 서론

1. 연구 배경 및 문제 제기

2. 아감벤 철학의 문학적 적용 가능성

3. 연구 목적과 방법

4. 선행 연구 검토 및 본 논문의 차별성

 

. 조르조 아감벤: 생애, 지적 배경, 철학적 궤적

1. 아감벤의 생애와 지적 성장

2. 미셸 푸코와의 사상적 연관성

1) 생명정치(Biopolitics) 개념의 수용과 비판

2) 권력과 삶의 관계에 대한 확장적 사유

3.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사상적 연관성

1) 존재론적 사유와 언어 개념

2) ‘잠재성(Potenza)’무능력(Impotenza)’ 개념의 전개

4. 발터 벤야민과의 사상적 연관성

1) 신학적, 정치적 사유: ‘법의 중지폭력개념

2) 메시아적 시간과 언어의 중단

5. 정치적·사회적 맥락과 아감벤 철학의 실천적 의미

6. 9.11 이후의 예외 상태와 테러 법제

7. 예외 상태의 일상화: 팬데믹, 감시 사회, 난민 문제와 아감벤의 사유

1) 팬데믹과 생명 정치의 극한

2) 감시사회와 생체 권력의 확장

3) 국경과 난민 문제: 법 없는 삶의 경계선

8. 주요 개념 정리

1)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2) 예외상태 (State of Exception)

3) 호모 사케르 (Homo Sacer)

4) 남은 시간 (Messianic Time)

 

. 아감벤의 문학적 사유: 예외상태와 언어의 윤리

1. 문학은 예외상태를 어떻게 사유하는가

2. 법의 중지로서의 문학적 언어

3. ‘의미의 유예와 메시아적 시간의 서사

4. 문학과 생명정치: 재현의 한계와 윤리적 잠재성

 

. 문학 텍스트 분석: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서사 읽기

1. 한강 소년이 온다: 벌거벗은 생명과 기억의 윤리

1) 국가 폭력과 예외상태의 서사화

2) 증언 불가능성과 침묵의 전략

3) 문학적 재현과 윤리적 응시

2.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메시아적 시간과 언어의 유예

1) 기다림의 시간성과 도래하지 않는 타자

2) 언어의 무능력과 탈주체화된 존재

3) 예외상태의 미학적 형식과 윤리적 가능성

 

. 문학과 철학의 접점: 예외의 미학과 생명정치의 중지

1. 문학은 어떻게 예외상태를 드러내는가

2. 서사를 통한 생명정치 비판의 가능성

3. 문학의 윤리적 상상력과 실천적 잠재성

 

. 결론

1. 연구 결과 요약 및 이론-텍스트 적용 평가

2. 아감벤 사유의 문학적 가치와 비판적 시사점

3. 향후 연구 방향과 철학-문학의 교차 가능성

 

. 부록: 연구자의 소회

1. 아감벤 사유를 문학에 적용하며 겪은 내적 변화

2. 문학이 갖는 철학적 잠재성에 대한 재인식

3. 이론과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비평적 여정에 대하여

 

. 에필로그: 사유의 경계를 다시 묻다

 

 

 

문학과 예외의 언어: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생명과 서사의 윤리

 

 

목차:

. 서론

1. 연구 배경 및 문제 제기

현대 문학은 단순한 허구적 재현을 넘어서, 존재론적 위기와 정치적 폭력, 윤리적 무력함의 현장을 직면하는 서사로 진화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은 문학과 만날 수 있는 강력한 이론적 장을 제공한다.

아감벤은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도 법의 작동 조건이 되는 예외 상태의 개념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통과하고 있는 폭력의 구조를 드러낸다. 특히 그가 제시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 개념은, 권력에 의해 생명 자체로 환원된 인간의 조건을 고발하면서, 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급진적 질문을 던진다.

또한, 아감벤이 남은 시간에서 제시한 메시아적 시간개념은, 시간의 선형성과 재현 가능성을 흔들며 언어, 윤리, 형식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요청한다. 이러한 철학적 통찰은 단순히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의 구조, 인물, 목소리, 침묵을 해석하는 데 실제적인 열쇠가 된다.

2. 아감벤 철학의 문학적 적용 가능성

아감벤은 본격적으로 문학 이론을 전개한 사상가는 아니지만, 그의 철학은 문학의 형식과 윤리를 사유하는 데 필요한 심층적 도구를 제공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지점에서 문학과의 접점이 형성된다:

예외 상태: 문학은 국가, 권력, 사회가 만든 법/제도/윤리의 경계를 탐색하며, ‘예외로 배제 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포착해 낸다.

벌거벗은 생명: 문학은 인간의 생존 그 자체를 응시하고, 그 삶을 존엄하게 구성하는 방식으 로 서사를 조직한다.

언어의 중지와 남은 시간’: 문학은 언어가 무력화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언어의 잠재성을 발휘 하는 장르이며, 의미의 유예 속에서 윤리적 응시를 가능하게 한 다.

이처럼 아감벤 철학은 문학의 윤리적 실천성과 재현의 한계를 함께 사유할 수 있게 하며, 생명과 언어의 관계를 새롭게 조망하도록 요청한다.

3. 연구 목적과 방법

본 논문은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문학 분석의 이론적 틀로 삼아, 그의 사유가 문학의 윤리적 가능성과 생명 정치적 구조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둔다. 특히 소년이 온다(한강)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를 중심으로, 예외 상태에서 말하는 주체의 불가능성, 벌거벗은 생명의 문학적 재현, 메시아적 시간성과 언어의 윤리 등을 텍스트 내부에서 세밀하게 분석한다.

방법론적으로는 문학비평 이론과 철학적 독해를 결합하여, 서사, 인물, 언어, 시간성 등을 중심으로 아감벤의 개념들을 적용하고 확장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4. 선행연구 검토 및 본 논문의 차별성

아감벤에 관한 기존 연구는 정치철학, 신학, 법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문학 분야에서는 주로 생명 정치의 개념을 현대소설이나 시에 적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 상당수는 개념의 도입에 머무르거나, 문학 텍스트와의 깊은 구조적 대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가 많다.

본 논문은 아감벤 철학의 이론적 뿌리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그것을 단지 문학에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갖는 형식적이며 윤리적 힘을 아감벤의 사유를 통해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예외 상태남은 시간을 문학의 시간성과 언어 윤리로 해석하고, ‘벌거벗은 생명을 인물 구조나 서사의 윤리적 중심축으로 삼는 방식은 기존 연구들과의 차별점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

 

. 조르조 아감벤: 생애, 지적 배경, 철학적 궤적

1. 아감벤의 생애와 지적 성장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1942422,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유럽은 전후의 정치적 혼란과 철학적 절망 속으로 진입하던 시점이었다. 아감벤이 태어난 집안은 중산층 이상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지식인 계층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에서도 고전 교육을 중시하는 인문주의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는 훗날 그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중세 신학과 법률 사상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는 기반이 된다.

로마 대학교(La Sapienza)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철학과 문학, 특히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의 글에 심취했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과 언어, 존재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고, 이러한 관심은 점차 존재론적 철학과 정치철학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로 발전해 갔다. 특히 1960년대 말, 아감벤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직접 참여하며 그의 사유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는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인 언어, 존재, 역사성에서 중요한 영향을 받았고, 이후 자신의 개념 중 하나인 잠재성(potenza)’무능력(impotenza)’ 개념을 하이데거적 존재론의 틀 안에서 정교화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의 유작 정리 작업에 참여하면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 ‘법의 중지’, ‘메시아적 시간개념을 깊이 탐구했다. 벤야민은 아감벤의 철학적 정체성에 결정적인 방향성을 부여한 인물로, 아감벤은 자신의 저작에서 벤야민을 반복적으로 호출하며 그 사유를 정치 신학적 영역으로 밀고 나간다.

1970~8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감벤은 문학이론, 언어철학, 미학, 정치철학을 넘나드는 저술 활동을 시작한다. 초기에는 도상과 성사(Stanze: La parola e il fantasma nella cultura occidentale, 1977)를 통해 서구 문화에서 이미지와 언어의 관계를 탐색했으며, 푸코의 생명정치개념과의 접속은 1990년대 중반 이후로 본격화된다. 그는 푸코가 마지막 생애 동안 전개한 권력의 생명적 작동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대표작 호모 사케르(Homo Sacer)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감벤은 철학자이면서도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 지식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20019.11 테러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강화된 국가의 긴급 권력과 예외 상태의 상시화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이 시기를 민주주의의 종언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형식이 제도화되는 시점으로 보았다. 이는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2003)에서 집약적으로 다루어진다.

아감벤은 철저히 제도 밖에서 사유하려는 철학자다. 그는 한때 베네치아 건축대학, 베로나 대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학문적 명예보다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을 더 중시했다. 또한 그는 2004년 미국의 지문 정보 수집 정책에 항의해 프린스턴 대학의 초빙 교수직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감벤은 자신의 사유를 단지 개념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철학을 일치시키려는 실천적 지식인의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의 철학은 법이 중지된 자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하며, 문학, 예술, 정치, 신학을 횡단하는 존재론적 정치철학으로 귀결된다. 아감벤은 철학을 탈권력화의 도구로, 문학과 예술을 예외상태의 언어를 상상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로 간주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그의 사유는 문학과도 가장 깊숙한 접점을 형성하게 된다.

2. 미셸 푸코와의 사상적 연관성

1) 생명정치(Biopolitics) 개념의 수용과 비판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미셸 푸코가 말년에 전개한 생명 정치 개념에서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이어받는다. 푸코는 성의 역사 1(1976)과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특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생명 관리와 국가 이성)에서 근대 권력이 생명 자체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과정을 분석했다. 그는 근대 이전의 권력을 죽게 할 수 있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근대의 권력을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구분하며, 근대 국가가 생명 그 자체를 관리와 개입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출생, 질병, 위생, , 인구와 같은 삶의 조건들이 권력의 핵심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다.

푸코는 이러한 생명 정치를 두 가지 권력 양식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으로, 학교, 군대, 병원, 감옥 등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개인의 신체를 규율하고 최적화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규제권력(regulatory power)’으로, 이는 출산율, 기대 수명, 질병, 노동력, 인구 분포 등 집단 전체의 생물학적 조건을 통계화하고 조절하는 방식이다. 푸코는 이 두 양식이 근대 국가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태를 생명 장치(dispositif)’라 명명했다. 생명 장치는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기보다는, 삶의 조건을 규정하고 관리하며, 통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권력의 기술이다. 푸코의 이론은 자유주의적 통치성과 생명의 밀접한 결합을 드러냄으로써, 통치가 어떻게 점점 더 삶의 내부로 침투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아감벤은 이러한 푸코의 통찰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생명 정치의 기원을 단지 근대 통치 기술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생명과 법, 생명과 주권의 관계가 이미 고대 정치철학의 법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구조가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에서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개념을 새롭게 철학화한다. 호모 사케르는 누구든지 그를 죽일 수 있지만, 제의의 희생으로는 바쳐질 수 없는 존재다. 그는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채, 죽음조차 제도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제거 가능한 생명이다. 이처럼 호모 사케르는 법 안과 밖,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존재이며, 아감벤은 이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는 핵심 개념을 정식화한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단지 이론적 은유가 아니라, 아감벤에 따르면 현대 정치가 실제로 만들어낸 구조적 인간 조건이다. 그가 주목한 대표적인 사례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등장한 무스울만(Muselmann)’이라는 존재이다. 이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반응을 상실한 수감자들로, 언어를 잃고 고통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생물학적 생존 이외의 모든 삶의 징후를 상실한 상태에 이르렀다. 심지어 동료 수감자들조차 그들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피할 정도로, 무스울만은 생명과 죽음, 말과 침묵,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놓여 있는 존재였다. 아감벤은 이들을 통해 생명이 어떻게 법과 공동체의 보호 밖으로 밀려나고, 정치적 주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단순히 제거 가능한 상태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사유는 아감벤이 푸코의 생명 정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그것을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확장하게 된 배경이 된다. 푸코는 생명 정치를 통치의 미시적 기술로 보았지만, 아감벤은 그 기술이 예외 상태를 통해 언제든 생명을 배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 주권 권력의 구조로 조직되어 있다고 본다. 이는 그가 수용소(camp)’를 현대 정치의 결정적 장소로 지목하는 철학적 근거이기도 하다.

아감벤에게 수용소는 전체주의 체제의 특수한 유산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내부에 구조적으로 내장된 예외 공간이다. 그는 유럽과 지중해 연안의 난민 캠프, 이민국 구금소,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 감염병 격리소, 공항의 생체 정보 수집 구역 등을 이러한 예외 공간의 현대적 예로 지목한다.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법적 시민권도, 공동체적 소속도 갖지 못한 채 생물학적 존재로만 환원되며, 언제든 법의 적용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는 상태에 놓인다. 이처럼 수용소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특정 장소가 아니라, 일상 속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비가시적 구조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정치의 중심 무대로 작동한다.

이처럼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정치 개념을 철저히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예외 상태, 법의 중지, 죽일 수 있는 권력의 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현대 정치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사유는 단지 정치철학에 국한되지 않고, 문학과 예술이 다루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재현 불가능한 존재, 경계에 놓인 생명들을 어떻게 언어화하고 사유할 수 있을지를 묻는 이론적 토대가 된다.

2) 권력과 삶의 관계에 대한 확장적 사유

아감벤의 생명정치 사유는 단순히 푸코의 개념을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권력과 삶의 관계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재구성한다. 푸코에게서 권력은 주체 바깥에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내부에 침투하여 신체를 규율하고, 집단을 관리하며, 담론과 제도를 통해 주체를 생산하는 내재적 작동 원리였다. 특히 그는 권력이 억압이 아니라 생산이라는 명제를 통해, 현대 통치가 인간 존재의 삶 전체를 조직하는 복합적 장치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푸코가 생명 정치의 작동 방식을 기술하는 데 집중했다면, 아감벤은 그 작동이 전제하고 있는 주권적 구조, 다시 말해 생명을 법의 바깥으로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의 조건에 주목한다.

이러한 전환은 아감벤이 생명 정치를 단순한 통치 기술이 아닌, 서구 정치 전체의 형이상학적, 신학적 구조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가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생명은 언제 정치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리고 정치는 언제부터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 되었는가?” 푸코는 이 질문에 대해 근대를 답으로 제시했지만, 아감벤은 그 기원을 훨씬 더 오래된 서구 정치철학, 특히 주권 개념과 예외 상태 개념의 결합에서 찾는다. 그는 칼 슈미트가 주권을 예외 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한 데 주목하며, 주권 권력의 본질이 법을 적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중지함으로써 생명을 정치화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

아감벤의 분석에 따르면, 근대의 생명 정치적 권력은 생명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술을 표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든 생명을 제거 가능한 상태로 환원할 수 있는 주권의 잠재력이 숨어 있다. 이로써 생명은 통치의 대상인 동시에, 법이 중지된 자리에서 무권리로 추락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가 된다. 그는 이러한 존재를 벌거벗은 생명이라 부르며, 그것이 정치적 질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질서를 작동시키는 내적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생명이 정치의 외곽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이 역설적 구조는, 생명을 배제함으로써 권력이 정당화되는 근대 주권의 논리를 폭로한다.

이 과정에서 아감벤은 푸코의 미시 권력 분석이 간과한, 법과 폭력의 구조적 관계, 그리고 정치 신학적 유산을 본격적으로 호출한다. 그는 서구 정치의 원형이 로마법과 기독교 신학의 결합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법의 중지와 예외 상태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생명이 신성한 제거 대상으로 전환된다고 본다. 이는 호모 사케르 개념을 통해 구체화되는데, 호모 사케르는 생명을 누리되 그 어떤 법적, 제의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며, 주권 권력은 바로 이 살해 가능하지만 희생 불가능한 생명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정초한다.

이러한 권력과 삶의 구조는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그대로 지속된다. 아감벤은 수용소와 같은 공간에서 벌거벗은 생명이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결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주권 권력이 생명 정치를 통해 일상적으로 생산하는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본다. 팬데믹 상황 속 감염병 격리소, 공항의 생체 정보 구역, 국경을 넘지 못한 난민 캠프 등은 더 이상 일시적 예외 공간이 아니라, 법이 중지된 상태에서 권력이 생명을 직접 다루는 통치의 장소다. 이 공간들에서 인간은 더 이상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생물학적 정보로 환원된 통제 가능한 존재로 기능하며, 이는 푸코가 그린 생명 장치보다 더 근원적이고 위험한 권력의 실체를 드러낸다.

아감벤은 이처럼 권력과 삶의 관계를 근대의 통치 기술이 아닌, 생명을 제거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구조로서의 정치로 파악함으로써, 생명 정치의 함의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다. 이는 단순한 개념적 비판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 윤리의 영역에까지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 법과 언어의 바깥으로 밀려난 생명들, 혹은 살아 있으나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이제 단순한 피해자의 위치가 아니라, 정치와 윤리가 마주해야 할 핵심적 물음의 자리로 부상한다.

이처럼 아감벤이 푸코의 사유를 확장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생명은 언제나 정치의 대상이었으며, 주권 권력은 그것을 보존하는 이름으로 제거할 수 있는 체계를 내면화해 왔다. 이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한, 통치와 보호라는 명목 아래 생명은 지속적으로 예외 상태로 몰려갈 것이다. 따라서 아감벤의 사유는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게 할 뿐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을 어떻게 언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학적·윤리적 성찰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아감벤의 철학은 단순히 이 폭력의 구조를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예외 상태의 지속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법과 권력의 장치들로부터 벗어나는 삶의 형식이 가능할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그가 제안하는 전복의 방식은 혁명이나 파괴가 아니라, 기존의 장치들을 비작동화(dis-activation)하거나 다르게 사용하는 것에 있다. , 제도의 외부로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그대로 두되 그것이 작동하지 않도록 중지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사용의 개념에서 강조되며, 법과 제도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유함으로써 통치 장치로서의 기능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그는 잠재성에서 무능력(Impotenza)’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보다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더 근본적인 윤리적 잠재성으로 상정한다. 이는 삶을 어떤 규범이나 실천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 자체로 열린 가능성의 공간으로 존중하는 태도다. 이는 억압적 언어의 강요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말하기의 가능성을 생성하는 윤리적 전환이기도 하다.

아감벤이 도래할 공동체에서 제시한 어떤 누구들의 공동체 역시 이러한 대안적 사유의 연장선에 있다. 이는 소속과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 각자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공통된 장에 머무를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는 국민’, ‘정체성’, ‘권리와 같은 법적 분류 체계 바깥에서, 소속되지 않음으로서 함께 존재하는 삶의 윤리를 제안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유의 시간적 지반으로는 남은 시간에서 제시된 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이 놓인다. 이는 과거의 끝과 미래의 도래 사이에서, 기존 질서가 종결되었으나 새로운 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예의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통치의 구조를 단절하거나 대체하지 않더라도, 그 작동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의 틈을 열 수 있다. 이 메시아적 시간은 문학과 예술의 형식 안에서도, 말과 의미의 유예, 침묵과 기다림의 장면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아감벤의 사유는 권력과 생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그 구조의 작동을 중단시키고 그 바깥에서 또 다른 삶의 형식을 상상할 수 있는 실천적 철학의 기초를 마련한다. 이는 더 이상 법과 주권의 틀 속에서 정의되지 않는 존재들이 윤리적 주체로 다시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언어이며, 문학은 그 언어가 탄생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 된다.

3.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사상적 연관성

1) 존재론적 사유와 언어 개념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서구 형이상학이 오랫동안 망각해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제기한다. 그는 존재를 단지 사물들의 총합이나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고, 시간적 사건으로서의 드러남, 즉 진리(알레테이아)의 운동으로 파악한다. 존재는 정태적인 상태나 배후에 있는 본질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과정, 드러남과 숨겨짐의 움직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사유는 일상 경험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 예컨대 안개 낀 새벽, 산의 능선은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 안개가 걷히며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산이 거기에 있었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산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존재함은 단지 물리적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보이고 경험되는가에 달려 있다. 또 다른 예로, 늘 곁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떠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부재를 통해, 그 사람이 내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뚜렷이 자각하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드러남과 은폐, 인식과 망각 사이에서 자신을 일으키는 사건이며, 진리는 이러한 존재의 드러남 자체로 이해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진리를 인간 실존을 통해 사유한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존재, 현존재(Dasein)’로 정의한다. 현존재는 실현된 상태가 아니라,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이다. 이때의 가능성이란 단지 앞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미래 지향적 의미를 넘어, 죽음을 향한 선취 속에서 아직 아님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열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의 가능성을 자기 안에 지니며, 시간의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형성해 간다.

아감벤은 1960년대 후반 하이데거의 철학 세미나에 직접 참여하며 이러한 존재론의 핵심 사유를 깊이 있게 체득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존재의 드러남 자체보다는, 존재가 어떠한 조건 속에서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가, 침묵과 배제의 형태로 존재가 은폐되고 정지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동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이 형이상학적 사유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서 정치적, 윤리적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존재는 단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 구조와 제도 속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며, 아감벤은 바로 그 지점을 철학적으로 추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발전시킨 잠재성(potenza)’무능력(impotenza)’ 개념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가능성에 열려 있는 존재이며, 그 가능성은 죽음을 향한 시간 구조 속에서 존재를 구성한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이어받되, 가능성을 단지 실현으로 향하는 잠재력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실현되지 않은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잠재성의 윤리에 주목한다. 아감벤에게 진정한 잠재성은 어떤 것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현을 중지하거나 유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사유는 단순한 가능성의 확장이 아니라, 하지 않음의 실천, 중지된 행위의 정치성, 무위의 존재 방식을 긍정하는 철학적 전환을 이룬다.

언어 개념 역시 이 존재론적 전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표현하며, 언어를 통해 존재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 언어가 반드시 의미를 생산하는 말하기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는 언어가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의미의 정지, 침묵, 유예, 말할 수 없음을 통해 존재의 진실을 더 깊이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침묵의 언어, 혹은 중지된 언어는 법적 제도에서 배제된 존재들, 정치적 주체가 되지 못한 생명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들의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하이데거는 후기 사유에서 기술적 세계상과 존재의 망각을 비판하며 존재로의 귀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감벤은 그 요청을 존재론 내부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권력과 법, 언어의 작동 구조 속에서 존재가 어떻게 드러남을 차단당하고 침묵화 되는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치적 언어와 제도, 통치의 장치들과 접속시키며, 존재의 문제를 윤리와 정치의 문제로 옮겨놓는다.

이런 같은 방식으로 아감벤은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단순히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변형한다. 존재는 드러남의 사건이며, 인간은 그것을 언어를 통해 받아들이는 존재지만, 그 드러남은 언제든지 중지되거나 침묵 당할 수 있다. 아감벤은 존재가 말해지지 않는 그 지점, 존재가 권력에 의해 침묵 당하는 지점에서, 무위와 잠재성의 윤리, 말할 수 없는 자를 위한 언어의 재구성,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사유한다. 이로써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언어와 시간, 윤리와 정치가 교차하는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으로 다시 열어 보인다.

2) ‘잠재성(Potenza)’무능력(Impotenza)’ 개념의 전개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에서 잠재성(potenza)’은 단지 어떤 행위가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감벤에게 잠재성은 실현되지 않은 채로 머무를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impotenza)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단순한 가능성의 확장이 아니라, 실현을 유예하고 중지함으로써 가능성을 보존하는 윤리적 형태를 의미하며, 아감벤 철학의 핵심적 전환점으로 작동한다. 이 사유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 특히 가능성과 실존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전개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존재인 현존재(Dasein)’가능성에의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은 현재에 머무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열어두는 존재이며, 이러한 가능성의 구조 안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간다. 특히 그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죽음을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자각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이때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말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올지 알 수 없는 절대적 가능성으로 이해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죽음을 선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인간은 죽음을 미리 끌어당겨 자각함으로써,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현재의 삶 속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존재 방식에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응답이 바로 결단(Entschlossenheit)’이며, 인간은 이 결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다 진정한 방식으로 성취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 하이데거의 가능성 개념이 지나치게 실현 중심적이라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삶을 가능성의 실현으로 이해하지만, 아감벤은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즉 유예와 중지로 머물 수 있는 잠재성 자체로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무능력(impotenza) 개념이다. 아감벤은 무능력을 결핍이나 실패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잠재성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윤리적 형식으로 간주한다. 진정한 잠재성이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음에도 그것을 유예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자기 존재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 않음의 가능성은 단순한 무위나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행위의 조건을 스스로 중단하고, 권력이나 기능, 규범이 요구하는 작동을 멈춤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을 여는 윤리적 실천이다. 예술과 문학, 일상적 실존, 정치적 저항에서 이러한 하지 않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컨대 어떤 시인이 고통의 경험을 겪고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공백의 방식으로 서술을 유예할 경우, 그는 표현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 침묵은 무기력이 아니라, 재현 불가능한 감각과 윤리를 존중하는 선택이며, 문학이 비가시적인 존재를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억압적 체제에서 침묵하거나, 국가가 요구하는 언어와 역할을 일부러 거부하는 행위 역시,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음, 혹은 기능할 수 있지만 기능하지 않음을 통해 권력의 작동을 중지시키는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될 수 있다.

아감벤은 이러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무작동의 상태를 비작동(dis-activation)’이라 부른다. 이는 권력 장치를 파괴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작동을 멈추게 하는 방식의 저항이며, 실천 가능성의 또 다른 양태다. 이 개념은 그의 사용의 개념남은 시간에서 철학적으로 정교하게 전개된다. 인간은 단지 기능하고 생산하며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을 전유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자기 삶의 형태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잠재성과 무능력 개념은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확장된다.

문학 작품 속 인물이나 문체에서도 이 하지 않음의 윤리는 중요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증언하지 못한 자들의 고통을 말하려는 대신, 말해지지 않는 서술, 침묵의 반복, 공백의 구조를 통해 독자에게 응시를 요청하는 방식은 아감벤적 의미에서의 무능력의 미학이다. 또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어떤 인물이 끊임없이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면서도, 결정적인 말을 끝내 하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의미화를 중지시키는 방식 역시 비작동의 윤리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하지 않음으로서 존재를 고수하고, 의미와 권위의 구조를 보류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응답하고 있다.

이처럼 아감벤이 말하는 잠재성과 무능력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현대 문학과 예술, 정치와 윤리의 경계 지대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유의 기반이 된다. ‘하지 않음은 단지 거부나 침묵이 아니라,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 삶의 형식, 존재가 스스로를 보존하는 잠재적 운동, 말할 수 없는 생명을 위한 윤리적 감응으로 읽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명확하다. 말할 수 없는 생명을, 재현될 수 없는 고통을, 문학과 언어는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아감벤은 이 물음에 대해 윤리적 실천이란 말하는 것보다 말할 수 없음을 끝까지 견디는 것이라고 답한다. 말해지지 않는 자리를 억지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 자체를 언어의 내부로 받아들이고, 그 침묵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존재들이 포섭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로, 정체성과 소속이 없는 도래할 공동체를 상상한다. 이는 공통된 기원을 요구하지 않고,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이름 없는 존재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방식으로의 공존을 지향한다. 이처럼 아감벤에게 철학의 역할이란 말할 수 없는 생명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침묵이 언어로 다시 열릴 수 있는 틈을 마련하는 데 있으며, 이는 곧 문학의 윤리가 감당해야 할 사유의 깊이이기도 하다.

4. 발터 벤야민과의 사상적 연관성

1) 신학적-정치적 사유: ‘법의 중지폭력개념

조르조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의 후기 정치신학적 사유에서 중요한 철학적 동력을 끌어온다. 특히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1)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제시된 법, 폭력, 시간, 종말론에 관한 개념들은 아감벤의 주권, 예외 상태, 생명 정치 이론의 핵심 기초가 된다. 아감벤은 벤야민의 사유를 단순히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치철학과 문학 윤리의 장으로 확장하며, 말할 수 없는 생명과 언어의 윤리를 사유하는 이론적 토대로 삼는다.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벤야민은 근대 사회의 법체계가 정당화하는 폭력의 이중 구조를 날카롭게 해체한다. 그는 모든 법적 질서가 본질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법을 창출하는 폭력, 즉 법정립적 폭력(Gewalt setzend)이다. 이 폭력은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기존의 법적 구조를 전복하거나 무효화 하는데 사용된다. 예컨대 한 국가의 독립전쟁, 혁명, 쿠데타와 같은 사건들은 기존 법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헌정 질서를 세우기 위한 폭력을 포함하며, 그 폭력은 법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의 기원이 된다. 법 정립적 폭력은 따라서 단지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창설을 전제하는 초법적 행위로 기능한다.

둘째는 법을 유지하는 폭력, 즉 법유지적 폭력(Gewalt erhaltend)이다. 이 폭력은 이미 성립된 법체계의 권위를 지탱하고 집행하는 데 사용된다. 국가의 경찰력, 군사력, 사법적 강제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범죄에 대한 형벌, 시위에 대한 진압, 이민자에 대한 추방, 국경 통제와 같은 일상적 행정조치는 모두 법 유지적 폭력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폭력이 법의 지속을 보장한다는 명목 아래, 폭력을 제도화하고 일상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비판적이다. 그는 이러한 법체계의 구조가 정의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과 폭력이 공모하는 구조라고 보았고, 따라서 이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맞서 벤야민이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신적 폭력(divine violence)이다. 이는 어떤 목적도, 수단도 가지지 않으며, 기존의 법과 제도의 토대를 완전히 무화하는 폭력이다. 신적 폭력은 제도적 정의나 형벌의 정당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법과 정의의 이분법 자체를 무효화하고 폭력, 법의 결합 구조를 깨뜨리는 파국적 힘이다. 벤야민은 이를 법의 중지라는 개념으로 사유하며, 인간이 만든 질서와 의미의 체계가 붕괴되는 그 틈새에서, 새로운 윤리적 감응의 가능성이 발생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둔다. 이때의 폭력은 목적 없는 순수한 행위이며, 기존 정치 질서와 전면적으로 단절하는 종말론적 사유의 핵심 요소가 된다.

아감벤은 이 사유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현대 주권 권력이 어떻게 폭력과 법의 경계를 흐리며 법의 중지를 통치 기술로 삼고 있는가를 분석한다. 그는 호모 사케르에서 법은 더 이상 정의와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라, 법을 중지함으로써 오히려 주권 권력을 드러내는 예외의 장치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주권은 법을 집행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권력과 법의 결탁 구조를 보다 은밀하게 유지한다. , 법은 중지되지만 권력은 작동하고, 생명은 그 사이에서 무력하게 노출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권력 구조가 벤야민이 지적한 법-폭력의 기원을 뒤틀린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아감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벤야민의 신적 폭력개념을 더욱 세속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그는 사용의 개념에서 법의 중지를 단지 제도와 권력의 전복이 아니라,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사용(use)’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사용은 기존 제도의 기능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드는 비작동(dis-activation)의 윤리적 형식이다. 이는 신적 폭력이 제도 전체를 무효화하는 파국적 사유였다면, 아감벤에게 사용은 비폭력적이며 실천 가능한 공동체 윤리의 사유로 전환된 형태다.

더 나아가, 아감벤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나타난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자신의 철학적 시간성으로 이어간다. 벤야민은 역사를 선형적으로 진보하는 시간으로 보지 않고, 과거와 현재, 기억과 정지 사이의 지금-여기(Jetztzeit)’에서 역사적 전환의 가능성을 본다. 이 시간은 종말론적이며,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아직 오지 않은 질서가 열리는 틈의 시간이다. 아감벤은 이를 남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변형하여, 법과 언어, 질서와 공동체가 모두 정지된 상태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이와 같이 아감벤은 벤야민의 급진적 정치신학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초월적 파국의 철학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대의 정치적 공간, 생명 정치의 질서, 문학과 언어의 실천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생명, 법과 공동체의 언어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 앞에서, 폭력 없이, 권력 없이, 질서를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드는 사유의 윤리를 요청한다. 이로써 아감벤은 벤야민의 법의 중지를 침묵, 중지, 사용, 유예의 철학으로 구체화하며, 철학과 문학, 윤리와 정치의 접점을 새롭게 구축한다.

2) 메시아적 시간과 언어의 중단

조르조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개념을 자신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시간 구조로 계승하고 변주한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에서, 역사를 선형적 진보나 인과적 연속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역사주의에 반대하면서, 그에 맞서는 지금-여기(Jetztzeit)’의 시간, 즉 메시아적 시간을 제안한다. 이 시간은 과거와 현재, 의미와 질서, 폭력과 응답 사이의 연속성을 중단시키는 급진적 파열의 시간이며, 기존의 질서가 정지된 채 새로운 윤리적 개입의 가능성이 열리는 틈의 시간이다.

이 개념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메시아적 시간의 성격을 구체화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805월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반복적으로 소환되고 응시되는 응축된 시간의 기억이다. 계엄령 하에서 자행된 국가폭력, 시민의 죽음, 침묵과 은폐의 시간은 단지 그 당시에만 존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현재 속에서도 윤리적·정치적 응답을 요구하는 살아 있는 시간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기존의 정치 질서가 무력화되고, 새로운 질서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순간, 고통과 침묵이 현재를 급작스럽게 중단시키는 그 자리가 바로 벤야민이 말한 메시아적 시간의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프랑스 혁명처럼 역사적 질서가 한순간 파국적으로 붕괴하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정의, 시민, 인권의 개념이 급격히 부상하는 시기 역시 벤야민이 말한 기존의 시간 질서가 정지되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중첩되어 이전에 말해질 수 없던 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강렬하게 말해지는 순간, 시간은 벤야민이 말한 지금-여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감벤은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자신의 철학 전체에 걸쳐 철저히 재구성한다. 그는 남은 시간에서 메시아적 시간을 곧 남은 시간’, 혹은 유예된 시간으로 명명한다. 이 남은 시간은 기존 질서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무너진 상태이며,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이미 도래한 것처럼 열려 있는 불안정한 중지의 시간, 혹은 전환의 틈새로서의 시간이다.

아감벤에게 이 시간은 단지 종말의 시간이나 기대의 시간이 아니라, 질서, 언어, 의미, 권력이 모두 잠시 멈추고 존재가 다시 응시되는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언어 역시 변화한다.

아감벤은 메시아적 시간 안에서 언어의 중단(suspension)이 일어난다고 보며, 이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구조로 전환된다. 이는 단지 침묵이나 결핍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윤리적 응답을 가능케 하는 구조다.

예컨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고통은 직접적으로 기술되지 않고, 침묵, 회피, 단절된 서술을 통해 말해지지 않음의 윤리를 구성한다.

이처럼 언어는 기능하지 않음으로써 더 근원적인 윤리적 감응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아감벤은 언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할 때, 비로소 진리의 공간이 열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는 벤야민의 순수 언어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벤야민은 언어의 본질이 의미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이라고 보았으며, 아감벤은 그 전제 위에서 침묵, 중지, 비의미, 반복, 유예와 같은 언어의 주변 구조들이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생명을 위한 윤리적 장치로 작동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처럼, 메시아적 시간과 언어의 중단은 기존 질서가 무너지지만 새로운 질서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틈에서,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비로소 응시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철학적 시간 구조다. 그것은 과거의 고통이 현재를 중단시키고, 그 중단의 틈에서 새로운 윤리와 공동체의 가능성이 도래하는 급진적 현재의 형태이며, 시간과 언어가 모두 멈춘 그 자리에 문학, 철학, 정치, 윤리가 교차하는 가능성의 장이 열리는 순간이다.

5. 정치적·사회적 맥락과 아감벤 철학의 실천적 의미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은 현실의 권력 구조와 무관한 추상적 사유가 아니다. 그의 주요 개념들은 철학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 특히 법, 주권, 생명, 공동체를 둘러싼 위기적 상황에 응답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그는 고대의 개념들인 호모 사케르, 예외 상태, 메시아적 시간 등을 단지 이론적 원형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정치·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분석적 도구로 재구성한다.

아감벤이 집중하는 핵심은 근대 이후의 정치가 어떻게 생명 그 자체를 통치의 대상으로 삼아왔는지, 그 과정에서 법과 폭력, 주권과 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맞물려 작동해 왔는지에 있다. 이러한 분석은 푸코의 생명 정치 개념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확장된다.

그에게 생명 정치는 단지 통치 기술의 하나가 아니라, 현대 정치가 도달한 근본 구조이며, 그 구조는 항상 법의 중지와 예외 상태를 통해 생명을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포섭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 철학은 단순한 이론적 진단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철학이 현실에 개입하는 하나의 윤리적 실천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 그는 기존의 제도나 권력 체제를 직접 전복하거나 파괴하기보다는, 그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유예하거나 멈추는 비작동(dis-activation)’의 실천을 제안한다.

, 법과 제도, 언어와 질서가 모든 삶을 포섭할 수 있다는 전제를 흔들고, 그 작동을 정지시킴으로써 질서 바깥의 삶이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윤리적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그가 구상하는 도래할 공동체개념과도 긴밀히 연결된다.

정체성과 소속에 근거한 기존의 공동체는 언제나 어떤 기준에 따라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해 왔다. 이는 곧 생명과 권리를 둘러싼 포섭과 배제의 이중 구조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토대였다.

예컨대 근대 국민국가는 시민권, 국적, 혈통, 언어, 종교 등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타자'를 나누고, 그 외부의 존재들무국적자, 난민, 불법체류자 등을 법적 보호와 정치적 권리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제해 왔다.

2000년대 이후 유럽의 국경관리 시스템, 지중해 난민 사태, 중동·아프리카 난민에 대한 유럽연합의 이중적 수용 기준 등은 이러한 배제 메커니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아감벤은 소속되지 않음으로써 함께 존재하는 존재들, 즉 이름 없는 자들, 경계에 위치한 존재들을 포섭하는 새로운 공동체 윤리를 상상한다.

그에게 공동체란 더 이상 동일성의 기반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존재들(whatever being)이 서로를 강제하거나 배제하지 않고도 함께 머무를 수 있는 비동일성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가능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조짐이 실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중해 연안이나 프랑스 칼레 정글등지의 난민 자치 캠프에서는 국적,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생존과 연대를 기반으로 한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 또한 일부 오픈소스 디지털 커뮤니티에서는 참여자의 정체성이 중요하지 않으며, 기여 그 자체만으로 관계망이 만들어지고, 정체성 없는 공동 실존의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실천들은 완성된 형태의 도래할 공동체는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예고하는 예언적 징후로 이해될 수 있다.

아감벤의 이러한 사유는 이후 그가 9·11 테러, 테러 법제, 팬데믹, 관타나모 수용소, 난민 캠프 등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현실에 반응하며 자신의 철학을 갱신해 가는 방식 속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구체화 된다. 그 각각의 사안은 그의 철학이 단지 개념의 유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세계와 접촉하고 개입하는 윤리적 사유의 실천임을 증명한다. 결국 아감벤의 철학은 현실 세계의 위기 국면에서 생명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감응할 것인가, 그리고 그 감응을 어떤 언어와 공동체의 형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를 묻는 철학적 행위이자, 문명 비판적 윤리로 작동한다.

6. 9.11 이후의 예외 상태와 테러 법제

2001911,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은 전 세계적인 정치 질서를 급속히 변화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 권력은 안전과 안보를 내세우며 전례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고, 법과 권리, 주권과 생명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구조 속으로 편입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핵심을 예외상태의 제도화”, 혹은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규정한다. 미국은 테러 직후 애국법(Patriot Act)’을 제정하여 광범위한 정보 수집과 시민 감시, 사법 절차 없는 구금과 추방, 비밀 재판 및 재산 몰수 등을 합법화했다.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국가 안보시민 보호를 목적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법률이 효력을 중지한 채 권력만이 작동하는 구조, 즉 아감벤이 말한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의 현실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관타나모 수용소다. 이곳은 전쟁 포로도 아니고, 정식 재판을 받은 범죄자도 아닌 이들이 법률적 근거 없이 무기한 구금되는 공간이다. 아감벤은 예외 상태에서 이 수용소를 현대 정치가 만들어낸 새로운 주권 공간의 전형으로 분석한다. 이곳은 법이 중단되었지만 폭력은 허용되는 장소이며, 수용자는 시민권도, 권리도, 인간으로서의 법적 지위도 박탈당한 채 살해 가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 이들은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사유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며, 그 존재 방식은 생명을 제거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생명 정치의 실천적 전개이다. 더 나아가 아감벤은 이러한 예외 상태가 단지 일시적인 조치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 내부에서 정당화되고 지속되는 새로운 통치 패러다임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예외 상태를 정당화하며, 이제 비상사태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근대적 헌정 질서가 전제한 권리 보장의 법치국가모델이 무너지면서, 법과 권력, 생명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변형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러한 예외 상태의 논리가 단지 테러리스트나 적국에 대한 적용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법정 밖에서의 처벌과 고문이 묵인되는 상황 속에서, ‘시민의 경계는 유동적이고 불투명해졌으며, 어떠한 정당한 권리도 언제든지 정지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 되었다. 이는 아감벤이 예외상태를 단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대 정치의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하게 된 배경이 된다.

이러한 분석은 아감벤이 2004년 미국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 사건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생체 정보 수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고, 이는 그가 말하는 생명에 대한 직접적 통치”, 즉 개인의 신체가 통제 대상이 되는 생명 정치의 실재를 몸소 경험한 사건이었다.

이 경험은 그가 이후 사용의 개념, 남은 시간, 어디에 있는가(Where Are We Now?)등의 저작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하고 철학을 정치적 실천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아감벤에게 9·11 이후의 세계는 이론적 개념들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였다. 예외 상태는 더 이상 긴급 대응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법을 중지시킴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통치의 본질이며, 그 안에서 인간은 점점 더 법적 지위가 제거된 생물학적 존재로 환원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먼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언제든지 벌거벗은 생명으로 추락할 수 있는 구조적 조건 속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9·11 이후 세계는 예외 상태가 구조화된 정치의 전형을 드러냈으며, 인간은 언제든 법적 권리를 상실한 생물학적 존재로 추락할 수 있는 조건 속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러한 비관적 현실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기존의 정치 질서를 전복하거나 대체하는 급진적 이상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구조를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드는 존재 방식, 즉 법과 권력의 호출에 응답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는 잠재성을 사유한다.

그것은 작동을 멈추는 삶의 실천, 응답하지 않음의 윤리,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는 공동체의 상상,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생명을 위한 언어적 감응의 가능성이라는 방식으로, 기존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비폭력적 저항과 윤리적 응시를 요청한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해석이 아니라, 예외 상태가 일상화된 세계에서 삶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비가시적 사유의 실천이며, 우리 모두가 언제든 벌거벗은 생명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조건에 대한 윤리적 응답의 형태이기도 하다.

7. 예외 상태의 일상화: 팬데믹, 감시사회, 난민 문제와 아감벤의 사유

1) 팬데믹과 생명 정치의 극한

COVID-19 팬데믹은 21세기 초 인류가 맞닥뜨린 가장 전지구적인 위기이자, 삶의 조건이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감염병은 단지 보건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고, 그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대응은 인간 존재를 생물학적 데이터로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봉쇄, 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백신 패스, 접촉 추적, 이동 제한 등은 공공의 안전을 명분으로 정당화되었지만, 실제로는 법의 중지와 권리의 유예라는 구조 위에서 작동했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사태를 단순한 비상조치나 보건 대응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팬데믹 상황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가장 근원적 작동 원리인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와 생명 정치(biopolitics)가 현실 속에서 제도화되는 순간이라고 진단한다.

Where Are We Now?(2021)에서 그는, 감염의 위험이 존재하는 한, 법은 언제든지 유보되고, 생명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단지 살아 있음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구조가 작동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그는 감염 가능성이라는 미래적이고 통계적인 조건이 실제적 권리의 정지 사유가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개인은 시민이기 이전에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는 생명, 즉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가격리자는 물리적 공간에서 분리되고, 확진자는 감염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배제와 법적 유예의 상태에 놓인다.

공항의 방역 게이트, 격리소, 병원 등은 더 이상 의료적 공간이 아니라, 생명을 선별하고 배제하는 수용소적 장치로 기능한다.

아감벤이 경고한 바와 같이, 우리는 예외 상태를 일시적이고 외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정상 상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그는 팬데믹 시기 사회 전체가 보여준 무비판적 순응과 질서에 대한 질문 없는 수용이야말로 생명 정치의 가장 성공적인 구현이라 진단한다. 질병에 대한 공포는 이견을 억누르고, 통제에 대한 신뢰는 복종을 강화하며,

비판의 중지는 윤리적 미덕으로 포장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감벤은 기존의 정치 질서나 위계적 구조를 대체할 다른 시스템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는 보다 급진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질서가 작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삶의 방식, 즉 비작동(dis-activation)의 윤리를 제시한다.

이것은 권력의 호출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지 않고, 기능하라는 요구에 멈춤으로 응답하는 삶의 실천이다. 이 실천은 실패나 저항이라기보다는, 삶이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윤리적 선택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비작동의 윤리는 아감벤의 도래할 공동체(the coming community)’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가 상상하는 공동체는 국적, 시민권, 언어, 정체성과 같은 동일성의 기반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존재들의 공존이다. 그는 이를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존재들(whatever beings)”이 서로를 정의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함께 머무는 방식이라 설명한다.

팬데믹은 이러한 공동체의 가능성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보여준 계기이기도 했다. 결국 아감벤은 팬데믹 시대에 삶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기존 질서의 작동을 멈추고, 그 틈에서 존재가 다시 응시되고 감응되는 방식이라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윤리란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저항이 아니라, 작동을 유예하는 삶의 방식, 그리고 정체성 없이도 함께 머무는 공동체의 상상이다. 그러한 존재 방식만이 예외 상태를 내면화한 사회에서 삶이 다시 윤리적으로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열어줄 수 있다.

2) 감시 사회와 생체 권력의 확장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외적 폭력이나 물리적 억압을 통해 통치되지 않는다. 권력은 감시, 분류, 기록, 추적과 같은 비가시적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통제 가능한 정보로 환원시키고, 그 통제는 일상 속에 스며든 채 작동한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러한 감시 권력의 확장을 단순한 기술 발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직접 통치, 즉 생명 정치의 기술적 정점으로 읽어낸다. 아감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생체 정보의 수집과 저장, 활용이다.

그는 2004, 미국 입국 시 지문과 얼굴 정보를 요구받았을 때 이를 거부하고 미국 방문을 포기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불편이 아니라, 신체를 정보로 환원하고, 그 정보를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근대 권력의 본질적 전환을 상징한다. 그에게 있어 이와 같은 생체 정보 수집은 단지 보안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가 생명 그 자체를 통치 대상으로 삼는 결정적 지점, 즉 생명의 데이터화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는 공항의 출입국 심사대, 병원의 의료 기록 시스템, 코로나19 시기의 QR 코드, 안면 인식 CCTV,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 분류 방식 등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공간에서 구현된다. 이곳에서 인간은 법적 주체나 정치적 존재라기보다는, 체온, 혈압, 위치, 반응 패턴, 얼굴 윤곽, 생체 리듬 등의 데이터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호모 사케르에서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또 다른 형식이며,

법적 지위를 갖기 이전에 이미 감시되고 분류된 정보로서의 생명이다.

아감벤은 이와 같은 통치 구조를 현대 수용소의 비가시적 확장으로 본다. 과거의 수용소가 울타리로 둘러싸인 폐쇄 공간이었다면, 오늘날의 수용소는 정보의 흐름과 기술의 작동 속에서 작동하는 네트워크형 장치다. 공간은 더 이상 폐쇄되어 있지 않지만, 그 안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기록되고 추적되며, 통제 가능한 객체로 전환된다. 이러한 감시 기술은 종종 안전’, ‘효율’,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시민 다수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아감벤은 이처럼 자율적 동의를 기반으로 한 감시 구조야말로 가장 정교한 형태의 생명 정치라고 비판한다. 자신이 정보로 환원되는 줄도 모른 채 스스로를 시스템에 제출하는 존재,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아도 체제에 복종하는 존재는 단지 기술에 의해 통제당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질문을 상실한 상태로 삶을 내맡기는 존재다.

이러한 비판은 단순한 기술 혐오나 반현대주의가 아니다. 아감벤은 오히려 기술의 사용(use)에 주목한다. 기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작동 가능성과 무능력 사이에 놓이게 할 것인가, 즉 기능하지 않도록 유예하거나, 제도적 작동에 응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삶을 재조율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비작동(dis-activation)의 윤리이며, 감시 체계 속에서도 삶이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사유는 단순히 감시와 데이터화된 통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 구조를 무너뜨릴 혁명적 대안이 아닌, 그 구조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존재하는 방식, 즉 삶의 형식 자체를 비틀고 전환시키는 윤리적 실천의 감응을 사유한다.

그렇다면 이 작동 중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형식을 통해 가능할까? 아감벤은 몇 가지 실천적 방향을 제시한다.

우선, 그는 법적 신분이나 정체성에 대한 응답을 중단하는 삶, 국민’, ‘시민’, ‘피의자와 같은 명명 자체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의 호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도록 만드는 비응답의 윤리를 말한다. 그가 미국 입국 당시 생체 정보 제공을 거부했던 선택은 이러한 존재 방식의 상징적인 실천이었다. 또한 그는 사용의 개념에서 기술을 폐기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작동하지 않도록 다르게 사용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얼굴 인식 기술, 데이터 수집, 알고리즘 기반 분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삶이 그 기술의 목적에 봉사하지 않도록, 사용을 유예하고, 흐름을 멈추고, 응답을 연기하는 삶의 형식이 바로 그 작동하지 않음의 윤리다.

이러한 사유는 언어의 영역에서도 작동한다. 아감벤은 침묵, 반복, 의미의 유예, 말하지 않음과 같은 형식을 통해 언어가 존재를 분류하고 정체화하는 권력의 도구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고자 한다. 말할 수 없는 생명 앞에서, 오히려 말하지 않음이 더 윤리적인 응답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문학과 예술의 표현 방식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철학적 제안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지 않음의 가능성, 즉 무능력(Impotenza)을 능력(Potenza)의 소극적 결핍이 아닌, 삶을 보존하는 더 근원적인 윤리로 제시한다. 권력이 요구하는 모든 동원과 작동 앞에서 할 수 있음만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음에 머무를 수 있는 존재, 그 유예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존재가 바로 생명 정치의 세계 속에서 삶을 윤리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이, 아감벤의 비작동의 윤리는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침묵, 멈춤, 유예, 사용하지 않음이라는 미세한 실천을 통해 감시와 통제의 구조가 일상 속에서 더 이상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못하게 만드는 철학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3) 국경과 난민 문제: 법 없는 삶의 경계선

현대의 국경은 단순히 땅과 땅 사이를 나누는 지리적 경계가 아니다. 아감벤에게 국경은 법과 권리가 작동하지 않는 예외 상태의 공간, 그리고 인간이 정치적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하는 지점으로 기능한다. , 국경은 더 이상 단지 통행과 이동을 조절하는 선이 아니라, 누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누가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지를 가르는 정치적 장치다. 특히 난민, 무국적자, 불법체류자처럼 시민권을 갖지 못한 존재들은 이 경계에서 법적 보호와 정치적 권리를 상실한 채 머물게 된다. 이들은 살아는 있지만, 국가에 속하지 못하고, 어느 법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이들이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대표적인 실례다.

이러한 상태를 그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호모 사케르는 죽일 수는 있지만, 제의의 희생으로 바칠 수는 없는 존재이며, 법의 안과 밖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권리 없이 제거 가능한 생명이다. 오늘날 난민 캠프, 구금소, 이민국 대기 구역, 국경 철책 너머에서 떠도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존재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유럽의 난민 캠프, 미국-멕시코 국경의 ICE 수용소, 프랑스 칼레 정글’, 중동 지역의 임시 정착촌 등을 들 수 있다. 이 공간들은 더 이상 전쟁이나 긴급사태의 예외적 상황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안에서도 제도화된 형태로 지속되는 수용소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정치적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와 시민권, 국적, 공동체에 기반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은 모든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체계에서 밀려난 자들을 법의 외부로 추방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난민은 단지 보호가 필요한 타자가 아니라, 현대 정치가 권리를 어떻게 배분하고 예외를 설정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아감벤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어떤 정체성도 강제하지 않으며, 소속되지 않음으로써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도래할 공동체(the coming community)’를 상상한다. 그에게 이 공동체는 특정한 국적이나 신분, 소속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생명들이 강제 없이 서로를 감응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경에서 배제된 생명은 더 이상 법적 보장이 유예된 피해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공동체의 조건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다. 아감벤은 이들을 통해 정치 공동체의 구성 방식 자체를 재사유하고자 한다.

8. 주요 개념 정리

1)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은 조르조 아감벤 철학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으로, 그는 이 용어를 통해 정치적인 보호와 권리로부터 벗겨진 채,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로만 남은 인간의 상태를 정의한다. , 벌거벗은 생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 법적 지위,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로만 존재하게 된 생명을 의미한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통해 정치가 생명을 어떻게 구성하고 통제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특히 그는 근대 정치가 단지 권리를 보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생명을 배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내장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때 벌거벗은 생명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정치 권력이 자기 정당성을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호출하고 배제하는 대상이다.

이 개념은 호모 사케르에서 처음 철학적으로 정식화되었으며, 아감벤은 고대 로마법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개념에서 그 이론적 근거를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누구나 죽일 수 있지만, 종교적 제의에 바쳐질 수는 없는 존재로, 법의 내부와 외부, 신성과 속됨 사이에 놓인 경계적 인간이다. 이러한 존재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도 법 바깥으로 완전히 추방되지 않은 상태, 즉 법에 의해 포섭되되, 동시에 배제된 존재다.

이 이중 구조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단지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무스울만(Muselmann), 즉 극단적 탈인간화 상태에 처한 수감자를 벌거벗은 생명의 실례로 분석하며, 이 개념이 현대 정치의 현실적 조건임을 강조한다.

무스울만은 살아 있지만 거의 반응하지 못하고, 말도, 고통의 표현도, 관계 맺음도 중단된 존재로, 다른 수감자들조차 그들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법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으면서도 수용소라는 통치 구조 안에 여전히 포섭되어 있는 생명이었다. 이처럼 벌거벗은 생명은 죽임당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생명, 공동체에 속하지 않지만, 그 경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생명이다.

아감벤은 이를 통해 근대 이후의 정치는 억압의 외피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생명, 권리와 제거 가능성 사이의 구조적 관계 자체로 성립된 것임을 드러낸다. 오늘날 벌거벗은 생명은 난민, 무국적자, 불법체류자, 격리자, 감시 대상자, 혹은 팬데믹과 같은 위기 속에서 법적 권리를 유예당한 시민들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출현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특정한 계층이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으로서의 생명 상태를 뜻하며, 아감벤의 철학 전반을 꿰뚫는 핵심 구조라 할 수 있다.

2) 예외 상태 (State of Exception)

예외 상태’(lo stato di eccezione)는 조르조 아감벤 철학에서 법과 권력, 생명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핵심 구조이다. 이 개념은 근대 정치체제의 비상조치긴급사태를 단순히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가 자신을 유지하는 방식 자체가 예외 상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급진적 통찰을 담고 있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으로부터 계승하면서도 그 의미를 철저히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칼 슈미트는 정치신학(1922)에서 주권자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말하며, 법이 정지된 상태에서 오히려 법의 근원적 권위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 법은 일상적 질서의 수단이 아니라, 그 질서가 중단되는 상황에서도 법의 이름으로 작동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이라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러한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그 결과가 현대 정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명에 대한 통제와 제거로 이어지는지를 파헤친다.

그는 예외 상태(2003)에서, 현대의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구분되는 방식으로 예외 상태를 제도화하고 있으며, 비상사태가 일시적인 중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통치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예외 상태는 법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법은 존재하지만,

그 법의 적용과 정지가 동시에 선언되는 중간 지대를 통해 법이 생명을 배제하면서도 통치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예외 공간은 법의 바깥이면서도 동시에 법에 의해 규율되는 장소, 즉 법과 무법이 겹쳐지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예는 관타나모 수용소다. 그곳은 전쟁포로나 범죄자로 규정되지 않은 사람들을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하는 공간이며, 국가의 주권은 유지되지만 법적 권리는 정지된 상태에서 생명을 통제하는 구조다.

이처럼 예외 상태는 특정한 장소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 정치가 작동하는 가장 일반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더욱이 아감벤은 예외 상태가 단지 국가의 폭력적 통치 방식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윤리적 무응답을 통해 정당화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팬데믹 상황 속에서 국가의 통제 조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공공의 안전을 명분으로 한 감시 강화는 모두 예외 상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단지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권리 그 자체가 언제든지 중지될 수 있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외 상태는 그래서 단지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언제든 진입할 수 있는 경계이며, 현대 정치의 본질적인 구성 방식이라는 것이다.

3) 호모 사케르 (Homo Sacer)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1995)에서 제시한 개념은 현대 정치의 구조적 폭력을 파악하기 위한 강력한 틀이다. 고대 로마의 법에서 비롯된 호모 사케르죽일 수는 있으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존재, 즉 법의 보호 밖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의 질서 내에 포섭되어 있는 예외적 존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중적 지위는 아감벤에게 있어 주권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이다. 주권자는 예외를 선언하는 자이며, 법의 일시적 정지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갱신한다. 이로써 예외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에서 점차 항구적인 정치 형태로 자리잡는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통해 생명에 대한 정치(biopolitics), 즉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 정치 권력의 핵심이 되는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벌거벗은 생명은 인간이 정치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단지 생물학적 생명으로만 간주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국가의 통치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관리와 통제, 배제를 통해 작동하며, 이때 호모 사케르는 정치적 공동체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철저히 배제된 존재로 자리한다.

이러한 구조는 계엄령이라는 시간적 예외 상태에서도 반복된다. 아감벤에 따르면 계엄령은 법이 정지되지만 여전히 법의 형태를 띠는 상태, 즉 법의 외부에서 법이 작동하는 역설적 시간이다. 이 시간 속에서 주권은 생명 자체를 직접 다루며, 특정 존재를 살려두되 죽일 수 있는비인간적 상태로 몰아넣는다. 문학 텍스트에 등장하는 이중의 삶인 정상적인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국가 폭력이나 통치의 예외 아래 놓인 삶은 바로 이 호모 사케르의 형상을 반영한다.

예컨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은 계엄령 하의 광주라는 예외 상태 속에서 벌거벗은 생명으로 전락한다. 그를 죽인 군인은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으며, 소년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기보다 국가에 의해 제거 가능한 생명으로 다뤄진다. 이처럼 호모 사케르는 단지 이론적 개념을 넘어, 문학이 다루는 정치적 주체의 윤리적 위기와 깊이 연결된다. 독자는 호모 사케르의 시선에서 타자의 고통을 목도하고, 법과 정의,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4) 남은 시간 (Messianic Time)

아감벤은 시간이 남아 있다(Il tempo che resta)에서 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이라는 독특한 시간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과거-현재-미래로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시간(크로노스)과는 다르며, 단지 미래에 도래할 구원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 들어와 있지만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시간, 남아 있는 시간(the time that remains)’을 가리킨다. 이 시간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유래하는데, 바울은 때가 단축되었다고 말하며 구원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 종말의 도래와 유예가 동시에 작동하는 시간의 긴장을 말한다. 아감벤은 이 메시아적 시간을 통해 지금-여기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잠재성과 중단의 가능성을 사유한다. 예컨대 사형이 선고된 인물이 집행일까지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할 때, 그 시간은 단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든 현재를 지배하면서도 아직 그 죽음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되는 고도로 농축된 시간이다. 시간은 유예되었고, 삶은 중단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오히려 삶의 의미는 더 강렬하게 의식된다. 이와 유사하게,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떤 고도를 기다리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반복한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지만, 도래할 가능성은 인물들의 삶 전체를 정지시키고 동시에 유지시킨다. 그들의 시간은 목적 없이 지속되는 듯 보이지만, 기다림속에는 어떤 급진적인 윤리적 질문인 과연 이 기다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 잠재되어 있다. 이는 바로 도래하지 않음 속에 머무는 시간, 이미 시작되었으나 끝나지 않은 종말의 시간, 메시아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이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를 두고 끝없는 망설임에 빠지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유예된 그의 시간은 단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 자체를 새롭게 묻는 철학적 시간이 된다. 또한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학살을 겪은 이들이 폭력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 유령이 되어 남은 존재들의 침묵과 망설임 속에도 메시아적 시간의 잔향이 감지된다. 이미 끝나버린 과거의 사건이 여전히 현재를 중단시키고 있으며, 말과 증언이 멈춘 그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장 윤리적인 응시와 책임의 가능성이 솟아오른다. 아감벤에게 메시아적 시간은 이러한 중단 속에 깃들어 있으며, 법과 권력, 언어와 의미의 체계가 작동을 멈출 때 나타나는 무위(non-operativity)’의 시간이다. 이는 파괴나 반항의 시간이 아니라, 체계가 스스로를 비활성화함으로써 삶과 정치, 주체와 언어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비결정의 윤리적 공간이다. 문학은 바로 이러한 시간을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서사의 선형적 흐름을 정지시키고, 결말 없이 열린 채로 남아 있는 장면들, 의미가 말해지기보다는 유예되거나 침묵 속에 머무는 형식들은 메시아적 시간의 미학을 구현하며, 문학을 통해 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이 조용히 도래한다.

 

. 아감벤의 문학적 사유: 예외 상태와 언어의 윤리

1. 문학은 예외 상태를 어떻게 사유하는가

문학은 언제나 법과 질서, 규범과 언어의 중심에서 밀려난 경계적 삶, 즉 예외 상태 속의 존재들을 사유해 왔다. 아감벤의 철학에서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는 법이 정지되었으나 여전히 법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모순된 시간이며, 주권이 생명에 직접 개입하는 공간이다. 이 예외 상태는 단지 정치적·법적 비상 상황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삶이 체계와 제도의 언어로부터 추방된 상태, 즉 벌거벗은 생명으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문학은 이러한 존재들을 언어로 불러내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언어는 질서의 언어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것, 재현 불가능한 것, 의미와 침묵 사이에 위치한 중지된 언어다. 아감벤에게 예외 상태는 단지 비상조치가 아니라, 근대 정치의 구조 자체이며, 일상이 예외화되는 시대에 문학은 그 예외의 중심에서 응답 불가능성, 증언의 불가능성, 언어의 무력함을 사유하는 장소가 된다.

문학은 바로 그 무력함 속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제시하는 죽일 수는 있으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의 개념은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비인간화된 주체들인 난민, 망자, 유령, 정신적 타자와 겹친다. 이들은 법적 주체도 아니고, 완전한 타자도 아닌 경계적 존재로서, 문학적 서사 속에서 공동체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계기가 된다. 특히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생명을 말하는 언어의 방식이다. 증언 불가능한 사건, 예컨대 전쟁, 학살, 국가폭력을 문학이 다룰 때, 언어는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윤리적 압력 속에서 재구성된다. 문학은 그리하여 말이 중단되는 순간, 침묵 속에서 탄생하는 타자의 윤리에 응답하는 공간이 되며, 이는 아감벤이 말하는 법의 중지언어의 중단개념과도 긴밀하게 맞닿는다.

나아가 문학은 아감벤의 사유에서처럼 '예외 상태'를 단지 고발하거나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예외적 시간성과 공간성을 새롭게 사유하는 형식적·미학적 실험장이 된다. 메시아적 시간, 무위의 윤리, 말의 무능력이 모두는 문학 텍스트 내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예컨대 문학은 서사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반복과 정지를 통해 시간의 선형성을 파괴하며, 말이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진실 앞에서 의미의 유예와 언어의 흔들림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문학이 언어적 제도와 법적 권력의 틈새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재현하는 방식이자, 예외의 삶에 응답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학은 예외 상태를 단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해체하거나 중단시킴으로써, 체제 내에서 작동하지 않는 삶의 가능성, 즉 도래할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열어젖히는 공간이 된다.

2. 법의 중지로서의 문학적 언어

조르조 아감벤은 법의 중지(Lo stato di eccezione)에서, 주권 권력이 법을 정지시키는 순간에도 여전히 법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의 역설을 분석한다. 이 상태에서 법은 실질적으로 정지되지만, 그 정지 자체가 다시 법의 권위로부터 유래하는 한, 예외는 단지 법의 외부가 아니라 법의 내면에 구조적으로 내장 되어있는 것이다. 이때의 권력은 생명 자체를 지배하는 생명 정치의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며,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통제 가능한 생물학적 실체로 환원된다. 아감벤에게 있어 이 지점에서의 중요한 사유는 단지 정치적 현상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의 문제, 특히 문학적 언어의 잠재성과 구조에까지 확장된다.

문학은 이러한 법의 중지상태를 형식적, 내용적으로 재현할 뿐 아니라, 언어 자체를 중지시키는 방식으로 그 구조를 해체한다. 문학적 언어는 단지 사건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적 언어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데 실패하고 머뭇거리는 파열의 언어, 혹은 침묵과 간격을 남기는 언어다. 이러한 언어는 의미 생산의 기계로서의 언어 기능을 중단하고, 바로 그 중단을 통해 의미의 윤리적 공간을 생성한다. 아감벤은 이처럼 기능을 멈춘 언어, 다시 말해 제도의 언어로서 작동하지 않는 언어를 무위(non-operativity)’ 상태의 언어로 개념화하며, 이는 법이 중지된 상태에서조차 여전히 법의 형식을 띠는 예외 상태와 구조적으로 유비를 이룬다.

문학의 언어는 이처럼 법적 언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다룬다. 법의 언어는 명시적이며 명령적이고, 의미를 고정하는 힘을 갖지만, 문학의 언어는 유예되고 흔들리며, 종종 의미를 미끄러지게 한다. 이 언어는 바로 그 미끄러짐과 모호함을 통해 타자의 고통이나 침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윤리적 형식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논의한 것처럼, 증언 불가능한 고통은 말로 재현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문학은 그 재현 불가능성 자체를 형식으로 끌어안음으로써 하나의 윤리적 응답을 구성한다. 따라서 문학은 법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 제도의 언어가 포섭하지 못하는 생명, 즉 호모 사케르의 자리를 말하기 위해 법과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언어의 질서를 형성한다.

이처럼 문학적 언어는 법의 중지로서 기능하는 형식, 혹은 예외 상태에 응답하는 언어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그것은 법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장소에서, 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에, 말하지 않음과 말할 수 없음의 경계를 따라 새로운 윤리의 가능성을 생성한다. 아감벤에게 이러한 중단된 언어야말로 말의 궁극적 잠재성, 즉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열어두는 언어이며, 문학은 이를 가장 치열하게 실험하고 형상화하는 예술이다.

3. ‘의미의 유예와 메시아적 시간의 서사

문학은 시간의 예술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종종 정지되고 반복되며 파열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조르조 아감벤이 시간이 남아 있다에서 제시한 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은 이러한 문학적 시간성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로 작동한다. 메시아적 시간은 단순히 미래에 도래할 구원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지금-여기에 스며들어 있으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남아 있는 시간이다. 말하자면, 메시아적 시간은 미래에 어떤 결정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예감 때문에, 지금-여기의 시간이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고 유예되고 중단된 채로 지속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종말과 도래, 유예와 현존이 중첩되는 긴장의 시간이며, 선형적 시간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잠재성의 시간이다. 아감벤은 이 시간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법적 질서뿐 아니라, 언어와 삶의 작동 자체를 중단(dis-activation)시키는 윤리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문학은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의 구조를 서사적으로 형상화하는 고유한 형식을 발전시켜 왔다. 반복되는 하루, 무한히 유예되는 결말, 행동을 결단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인물, 또는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기다리는 이야기들, 이러한 문학적 장치들은 서사 내에서 시간을 정지시키고, 의미의 닫힘을 유예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유예는 단순한 서사 지연이 아니라, 지배적 의미 체계의 작동을 중지시키고, 그 안에서 다른 존재 방식과 타자의 목소리를 감지하게 만드는 윤리적 간극이다. 의미가 명확히 도출되지 않고, 해석이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이 유예의 상태에서, 독자는 오히려 더 깊은 방식으로 존재와 언어, 삶의 윤리를 사유하게 된다.

아감벤은 이러한 유예의 상태를 무위(non-operativity)’라 명명하며, 이는 법적·정치적 체계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동시에 언어와 삶의 잠재력을 드러내는 상태로 간주한다. 문학은 바로 이 무위의 시간 속에서, 말이 침묵으로 가라앉고, 결말이 도래하지 않으며, 인물의 행위가 유예되는 그 지점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 혹은 다른 공동체의 윤리적 상상력을 작동시킨다. 이는 단지 구조적 전복이 아니라, 의미를 닫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끝나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게 만드는 윤리적 실천이다.

따라서 의미의 유예는 문학이 메시아적 시간 속에서 수행하는 윤리적 중단의 전략이자, 법과 질서, 역사와 현실의 시간 속에서 타자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간 감각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이 유예의 서사 속에서 문학은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를 넘어, 존재론적 예외 상태에 처한 인간에 대한 응답의 공간으로 기능하며, 정치와 윤리, 그리고 삶의 근본을 다시 묻는 철학적 장소가 된다.

4. 문학과 생명 정치: 재현의 한계와 윤리적 잠재성

조르조 아감벤의 생명 정치 사유는 정치와 권력의 문제를 단지 제도나 체제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통제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그는 호모 사케르에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여전히 그 내부에 포섭되어 있는 역설적인 존재, 호모 사케르를 설명한다. 이러한 생명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죽일 수는 있으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는 존재로, 인간이 법적·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학적 신체로 환원된 상태를 가리킨다. 아감벤은 근대 이후 주권 권력이 점차 생명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통치하게 되었다고 분석하며, 이 과정에서 예외 상태는 점점 일상화된다. 생명은 더 이상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통제되고 선별되는 대상으로 전락하며, 이는 감옥, 수용소, 병원, 국경 심사대 등에서 구조화된다.

문학은 이러한 생명 정치의 체계에 의해 비인간화된 존재들, 즉 말할 수 없는 자, 재현되지 않는 자들을 언어로 호출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때 문학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생명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생명을 재현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이다. 학살, 고문, 난민 수용소, 전쟁과 같은 극단적 폭력의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더 이상 시민도 주체도 아닌, 단지 살아 있는 신체로 존재한다. 이 생명을 문학적으로 재현하는 일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응답의 문제로 전환된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이러한 증언 불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가장 완전한 증인은 말할 수 없는 자, 즉 죽은 자들이다라고 말한다(Agamben, Remnants of Auschwitz, 1999). 그에 따르면 진정한 증인은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고 죽은 자, 무언의 증언자이며,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그 부재의 자리를 끊임없이 가리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은 이 말할 수 없는 자들을 말하기 위해, 전통적인 재현의 기법을 넘어서야 한다. , 문학은 말이 되지 않는 말, 침묵과 결여, 중단과 파열이라는 형식을 통해, 말해지지 않는 생명의 잔존을 언어적 윤리로 형상화한다. 예컨대 학살이나 학대의 피해자를 정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문학은 때로 그 현장을 비워두고, 침묵을 남기며,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로 떠도는 유령적 언어를 택한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기법이 아니라, 생명의 파괴 앞에서 언어가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잠재성의 최대치다.

문학은 단지 생명 정치의 피해자를 말해주는도구가 아니라, 법과 언어, 국가가 포착하지 못한 잉여적 생명, 혹은 살아 있지만 이름 없는 존재의 자리를 상기시키는 매체로 작동한다. 아감벤이 말의 침묵은 언어의 가장 깊은 진실이라 말했듯이(같은 책), 문학은 바로 그 침묵 속에서 비가시적 생명을 윤리적으로 응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 문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말이 침묵으로 전환되는 순간, 바로 그 틈에서 생명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아감벤의 생명 정치 개념은 문학이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하며, 동시에 문학이 말의 무력함을 껴안음으로써 타자에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 잠재성을 열어둔다. 문학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형식 속에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생명의 비가시성과 비재현성, 그리고 그것을 포착하려는 언어의 윤리적 갈등을 내면화한다. 이로써 문학은 생명 정치의 시대에 단지 생명을 기술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의 윤리적 중지와 되묻기를 통해 타자의 고통과 존재를 사유하는 공간으로 자리한다.

 

. 문학 텍스트 분석: 아감벤의 철학을 통한 서사 읽기

1. 한강 소년이 온다: 벌거벗은 생명과 기억의 윤리

1) 국가 폭력과 예외 상태의 서사화

한강의 소년이 온다19805월 광주라는 구체적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단지 기록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 폭력 아래 놓인 생명과 그 삶의 언어적 잔여에 주목하는 서사다. 이 소설은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자행한 폭력을 드러내되, 이를 단지 고발이나 묘사로 처리하지 않고, 예외 상태 속에서 작동하는 생명 정치의 현실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소설 초입부에서 시체 안치소에 놓인 죽은 아이들과 그 시신들을 관리하는 인물의 시점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살아 있음'의 경계를 질문하게 만든다. 여기서 시신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더 이상 보호받지 않는 생명, 즉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형상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며, 법적 권리나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적으로 버려진 존재들, ‘죽일 수는 있으나 애도할 수는 없는예외 상태의 삶들이다.

이 소설에서 예외 상태는 단지 비상계엄령이라는 제도적 조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강은 법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지된 상태, 즉 아감벤이 말하는 법의 중지상황을 서사의 구조 속에 풀어낸다. 계엄령 하의 광주는 실질적으로 법이 정지된 공간이지만, 법의 이름으로 군대가 시민을 학살한다. 이 모순된 상태법이 유효하지만 동시에 무효인 상태는 바로 아감벤이 말한 예외 상태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이때 국가는 더 이상 정치적 합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명 자체를 배제하고 선별하며 파괴하는 주권 권력의 실체로 드러난다.

한강은 이러한 국가의 얼굴을 정면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소설은 반복해서 죽은 자, 사라진 자, 목소리를 잃은 자들의 시점을 빌려오며, 그들을 중심에 둔다. 이는 생명 정치의 체계에 의해 말살된 이들의 시선을 통해, 그 구조 자체를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서사 전략이다. 예외 상태 속에서 죽은 자들은 단순히 희생당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 무엇을 기반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내는 증거로 기능한다. 이들은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말한 말할 수 없는 자들”, 즉 법과 언어, 정치의 질서에서 완전히 탈락한 존재들이며, 이 소설은 그 탈락된 자들의 위치로부터 서사를 구축한다.

특히 소년 동호의 시점은 국가 권력에 의해 철저히 추방된 생명의 감각적인 기록자로서 작동한다. 그는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체를 수습하며, 죽은 자의 육체에 깃든 마지막 흔적을 마주한다. 그는 말할 수 없지만, 보는 자이며, 감각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이는 곧 주권 권력의 살인 행위를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서에 말려들지 않는 위치에서, 침묵과 감각의 언어를 통해 예외 상태를 증언하는 주체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소년이 온다는 단지 국가 폭력을 서사의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폭력이 어떤 시간성과 공간성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그것은 선형적이고 인과적인 서사가 아니라, 정지된 시간, 반복되는 감각, 침묵과 죽음의 언어가 겹쳐진 예외 상태의 서사이며, 독자는 그 안에서 단지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윤리적 관계,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고통의 흔적에 응답하게 된다.

2) 증언 불가능성과 침묵의 전략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의 학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고통과 죽음 이후에 남은 자들의 침묵, 망설임, 언어의 결핍을 중심에 둔다. 이 소설이 지속적으로 호출하는 것은 사건의 생생한 재현이나 구체적 설명이 아니라, 그 사건이 결코 온전히 말해질 수 없다는 전제이다. 이는 조르조 아감벤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제시한 문제의식과 깊이 연결된다. 아감벤에 따르면 가장 완전한 증인은 말할 수 없는 자, 즉 죽은 자이며,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언제나 그 부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결여된 진술일 수밖에 없다(Agamben, Remnants of Auschwitz, 1999). 이때 진정한 증언은 증언할 수 없음 자체에 대한 증언, 다시 말해 침묵을 드러내는 증언으로 변형된다.

한강은 이 점을 깊이 이해한 듯, 소년이 온다에서 침묵 그 자체를 언어로 삼는 서사 전략을 택한다. 소설의 첫 장은 죽은 소년 정대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정대는 동호의 친구로, 광주의 시민군 활동에 함께 참여했고, 끝내 죽임을 당한 후 유령의 시점으로 독자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목소리는 육성이라기보다는 비물질적 존재가 세상을 응시하는 침묵의 시선이며, 살아 있는 자들의 몸짓과 고통을 감각하지만, 직접 말하지 못한다. 정대는 아감벤이 말한 말할 수 없는 완전한 증인”, 즉 죽음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자이지만, 말할 수 없기에 더욱 근본적인 윤리적 울림을 전한다. 이 유령의 시점은 단지 장치적인 기법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고통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서사 구조로 작동한다.

또한 살아남은 자들인 은숙, 동호의 어머니 등의 말하기 역시 단절과 머뭇거림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말하기를 시도하지만, 그 말은 종종 중단되거나 내면으로 침잠하고, 기억은 선명한 회상보다는 회피, 왜곡, 정지된 이미지의 형태로 남는다. 은숙이 목격한 고문 장면, 어머니의 몸짓에 스며든 상실감은 모두 말해지지 않음을 매개로 증언된다. 이는 아감벤이 지적한 언어의 침묵성’, 말이 가장 깊은 곳에서 도달하는 한계지점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강은 말해지지 않는 고통 앞에서 말하기의 윤리를 묻는 대신, 말하지 못함의 윤리를 구축한다. 소년이 온다의 증언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과거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자를 호출하고, 그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 다시 말해 윤리적 응시의 실천이 중심이 된다. 문학은 이 지점에서 단지 사건을 기록하는 매체가 아니라,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고통과 죽음 앞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윤리적 공간으로 자리한다.

이처럼 소년이 온다는 증언의 소설이지만, 그 증언은 단지 재현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침묵의 형식으로 껴안고, 그 안에서 타자의 고통과 윤리를 되묻는 서사다. 이 소설의 언어는 비어 있음, 파열, 응시와 같은 비언어적 형식을 통해 윤리적 감각을 전달하며, 독자는 그 침묵 속에서 고통의 진실을 경험하게 된다.

3) 문학적 재현과 윤리적 응시

소년이 온다는 타인의 고통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과연 말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강은 서사 속 인물들의 고통을 외부에서 관찰하거나 기술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고통의 중심에 말할 수 없음을 놓고, 독자가 침묵의 공간 안에서 타인의 고통과 마주하게 되는 방식을 택한다. 이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증언의 불가능성”,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자를 응시하는 윤리의 문학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을 문학이 재현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사실을 전달하는 재현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감각, 즉 윤리적 망설임의 형식이 된다.

이 소설은 그 망설임을 서사의 구조 자체에 각인시킨다. 회상은 중단되고,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배열되며, 인물의 시점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를 넘나든다. 서사는 고통을 완결되게 설명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독자가 그 고통 앞에 멈춰 서게 한다. 정대의 유령 시점, 동호의 감각적 체험, 은숙의 파편화된 기억 등은 모두 재현의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형성된 서사적 응시다. 특히 죽은 자가 화자가 되는 설정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보는 행위 자체를 윤리적으로 긴장시키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처럼 소년이 온다는 재현이 결코 투명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말해지지 않는 것을 둘러싸는 언어의 윤리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고통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설명되지 않음 자체를 서사의 핵으로 삼는다. 아감벤이 말은 가장 깊은 곳에서 침묵으로 도달한다고 했듯이, 이 작품에서 언어는 의미를 생성하는 도구가 아니라, 의미가 도달하지 못하는 경계의 흔들림을 구성하는 장치가 된다.

독자는 이 흔들림 속에서 사건을 이해하기보다, 이해 불가능한 고통에 감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이미지, 침묵의 공기 속에서 독자는 재현되지 않은 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그 존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응시의 자세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독자의 위치는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서 응답 가능한 존재, 윤리적 주체로 구성된다.

이와 같이 소년이 온다는 무엇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보다, 어떤 방식으로 응시하고 응답할 것인가를 문학의 과제로 제시한다. 이는 문학이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함을 감당하고, 침묵을 끌어안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응시의 공간을 창조하는 윤리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2.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메시아적 시간과 언어의 유예

1) 기다림의 시간성과 도래하지 않는 타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전통적인 갈등, 전개, 결말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자체이며, 그 중심에는 기다림이라는 특이한 시간 경험이 자리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떤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도가 도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물은 계속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 즉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남은 시간(the time that remains)’의 형식과 깊이 연결된다.

아감벤에게 메시아적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선형적으로 이어지는 시간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미래의 사건이 이미 현재를 구조화하고 있지만, 그 사건 자체는 끊임없이 유예되는 시간이며, 따라서 현재는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고 정지된 상태로 지속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바로 이 메시아적 시간이다. 그들은 과거의 원인이나 미래의 목적 없이, 단지 도래할 가능성만을 붙잡은 채, 지금이라는 시간을 계속해서 머무르는방식으로 살아간다. 이 기다림은 의미나 해석을 통해 정리되지 않고, 끝없이 반복되는 오늘,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게 없다"는 시간의 무력한 순환 속에 놓인다.

이러한 시간 구조 속에서 고도라는 인물은 더욱 중요해진다. 그는 작품 내내 등장하지 않지만, 그의 부재는 오히려 등장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무대를 지배한다. 고도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단지 온다는 소식만이 전달될 뿐이다. 이로 인해 고도는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도래해야 하지만 도래하지 않는 타자, 다시 말해 기다림을 무한히 연장시키는 타자성 자체로 기능한다. 그는 도래할 수도,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이기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삶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 곧 비결정성의 시간 속에 갇힌다.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이 무가치하거나 허무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베케트는 그 기다림의 시간성 자체가 삶의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어떤 목적이나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 지속되는 삶, 불확실성과 유예, 반복의 구조 속에 있는 존재야말로 현대적 조건 속에서 가장 진실한 삶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의 사유와 연결지어 보았을 때, 이러한 기다림은 체제와 규율의 시간 속에서 벗어난, 기능하지 않음(non-operativity)의 시간이며, 정지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잠재성의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기다림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도래하지 않는 타자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행위, 다시 말해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기다림이다. 그것은 주어진 체계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머물 것인가, 도래하지 않는 것과 어떻게 함께 있을 것인가를 묻는 형식이다. 이는 남은 시간을 사는 존재로서, 베케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독특한 시간 경험이며, 아감벤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가장 강력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 언어의 무능력과 탈주체화된 존재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등장인물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위는 대화지만, 그 대화는 의미 전달이나 논리적 전개를 지향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말은 반복되고, 방향을 잃으며, 종종 무의미한 농담이나 순환 구조 속에 갇힌다. 이들의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라기보다, 말하기 그 자체가 목적화된 공허한 말의 반복이며, 이는 아감벤이 말한 무위(non-operativity)”의 언어, 즉 의미를 생산하지 않고 기능을 정지한 언어 상태와 맞닿아 있다. 말은 더 이상 행위를 이끌지 않으며, 의미를 고정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무력한 언어의 반복은 체계의 외부에서 언어를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파열의 기점이 된다.

이러한 언어의 무능력은 단지 말의 실패가 아니라, 주체성의 붕괴와 연결되어 있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확고한 자아를 가지지 않으며, 스스로의 위치, 정체성, 기억을 지속적으로 의심한다. 에스트라공은 자신이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블라디미르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확인하면서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이들은 주체로서의 일관된 중심을 상실한 존재, 즉 아감벤이 말하는 탈주체화된 벌거벗은 삶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말하고 있으나 말의 중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유동적 존재들이다. 주체가 해체되고, 말이 흔들리는 이 공간은 아감벤의 철학에서 비결정성, 무위, 존재의 탈형식화가 드러나는 장소다.

특히 인물들의 언어는 언제나 무언가를 말하기 직전에 중단되거나, 완결되지 않은 채로 떠돌아다닌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이어지고, 대화의 주체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말이 말 자체로 붕괴된다. 이는 아감벤이 언어와 죽음에서 말한, 언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킬 수 없는 구조적 한계, 즉 언어가 언어의 외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존재론적 긴장을 베케트가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지만, 그 말은 진실이나 의미를 향해 수렴되지 않으며, 오히려 무한한 지연과 자기 반복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무능력은 역설적으로, 말의 기능이 아닌 말의 윤리적 가능성을 드러낸다. , 말이 무너질 때 오히려 말하지 못한 것, 말할 수 없던 것, 말을 통해 도달할 수 없던 것이 가시화된다. 이 무능력은 포기나 침묵이 아니라, 언어가 제 기능을 멈추었을 때 남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존재의 맨 얼굴, 탈 형식화된 인간의 상태를 응시하게 만든다. 아감벤의 철학에서처럼, 베케트의 언어는 체계 안에서 의미를 구성하지 않음으로써, 그 체계의 바깥에서 말의 조건과 윤리를 되묻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와 같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언어의 실패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통해 말의 윤리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언어가 의미 전달의 기능을 멈출 때, 우리는 오히려 말해지지 않는 것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인물들은 무의미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언어가 무너진 자리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 무위의 존재로 머무는 방식을 실험하는 중이다. 이 실험은 문학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넘어, 언어가 멈추었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묻는 철학적 윤리의 자리에 문학을 위치시킨다.

3) 예외 상태의 미학적 형식과 윤리적 가능성

고도를 기다리며는 관습적인 극 형식을 벗어난다. 전통적인 희곡에서 기대되는 갈등, 발전, 절정, 결말의 구성은 이 작품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시간은 흐르지만 사건은 발생하지 않고, 인물들은 대화를 이어가지만 의미는 전진하지 않는다. 이 정지되고 파열된 서사 구조는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체계 안에서 무언가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 즉 예외 상태의 문학적 형식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예외 상태를 법이 정지되었으나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유지되는 정치적 공간이라 설명한다. 이는 법이 스스로를 중지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역설적인 조건이며, 그 상태에서 삶은 법의 보호 밖에 놓이게 된다.

베케트의 작품은 이러한 예외 상태의 개념을 극적 형식 속에서 구현하고 있다. 인물들은 시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시간은 목적이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고 정지되어 있다. 언어는 흐르지만 소통은 일어나지 않으며, 인물들은 무대 위에 있지만 행동이나 사건은 전개되지 않는다. 이처럼 기능을 정지한 요소들로 구성된 연극은 하나의 작동 중지가 미학적 원리로 채택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아감벤이 말한 무위의 윤리는 이 지점에서 미학적 형식으로 전환된다. 서사가 멈추고 언어가 부유할 때, 작품은 의미 생산의 체계가 아니라 그 체계의 한계와 균열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베케트가 구성한 무대는 법과 언어, 시간과 주체가 모두 정상적인 작동을 멈춘 공간이다. 인물들은 기다림이라는 수동적 시간을 반복하며 무대 위에 머물고, 그 반복은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지 않지만 그것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이 상태는 체제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라기보다는, 그 체제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방식의 실험이다. 이는 아감벤이 예외 상태의 권력 논리 안에서 제시한 하나의 가능성, 즉 체계에 포섭되지 않음으로써 체계를 드러내는 방식과 닿아 있다.

또한 이 극의 형식은 관객에게 능동적인 해석이나 몰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은 서사를 따라가며 감정 이입하거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대신,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과 침묵, 예고 없는 장면 전환을 지켜보게 된다. 이로써 관객은 극 안에 몰입하는 대신 극의 바깥에 위치하며, 지속적으로 판단을 유예 당한다. 판단의 유예는 윤리적 사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이는 미학이 기능을 중단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윤리적 틈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서사와 구조의 해체를 통해 예외 상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통해 독자가 일상적 시간 감각과 이해의 틀을 벗어난 감각을 경험하도록 구성된다. 베케트의 연극은 현실 세계를 고발하거나 재현하는 대신, 세계가 이미 재현 불가능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정지된 언어와 반복된 기다림 속에서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정치적 언어가 소진된 자리에서, 미학이 어떻게 윤리적 감응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지를 사유하게 만든다.

 

. 문학과 철학의 접점: 예외의 미학과 생명 정치의 중지

1. 문학은 어떻게 예외 상태를 드러내는가

문학은 사유의 형식이자 감각의 구조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감각의 구조를 통해, 철학이 이론적으로 제시한 개념들을 삶의 표면으로 끌어올리고, 사유 이전의 층위에서 마주하도록 만든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는 법과 정치, 언어와 시간의 질서가 중지되면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작동-비작동의 역설적 공간이다. 이 상태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현실의 한 형태이며, 문학은 바로 그 현실을 감각 가능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소년이 온다는 예외 상태가 단지 제도적 조치로서의 계엄령이나 통행 금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침투하고 내면화된 시간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서사화한다. 국가 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생명을 배제하고, 그 배제는 죽음을 넘어 유령의 시선과 침묵의 방식으로 남겨진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애도되지 못한 존재들은 모두 예외 상태의 잔여로서 소설 속에 머문다. 문학은 이를 단지 고발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 서사의 감각을 펼쳐놓는다. 죽은 자의 목소리, 단절된 회상,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삶의 비정상성을 말해주고, 그 파열의 틈에서 독자는 삶의 다른 층위와 마주하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무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언어, 정지된 시간 구조를 통해 예외 상태의 미학을 형상화한다. 고도가 도래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반복되는 하루는 법적 시간, 역사적 시간, 서사적 시간의 경계를 무력화시키며, 인물들은 그 안에서 무위의 존재로 머문다. 이 기다림은 단지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체계의 작동 자체를 중지시키는 존재 방식의 제안이며, 주체성의 해체와 언어의 무능력 속에서 새로운 윤리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말은 더 이상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능을 정지함으로써 체제 바깥의 말하기를 시도하게 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서사 구조와 미학을 통해 예외 상태를 드러내지만, 공통적으로 삶의 질서가 붕괴된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있는가, 응답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아감벤의 철학이 예외 상태를 권력의 작동 원리로 분석하고, 그 틈에서 무위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면, 문학은 그 틈을 실감나게 구성함으로써 독자가 그것을 살아보도록 만드는 장을 제공한다. 문학은 이론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사유 형식이며, 그 고유한 형식을 통해 예외 상태의 내면을, 체제의 균열을,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생명의 자리를 드러낸다.

2. 서사를 통한 생명 정치 비판의 가능성

생명 정치의 문제는 단지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를 넘어, 어떤 삶이 보호받고 어떤 삶이 배제되는가, 즉 생명이 정치적으로 선별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이러한 통치의 구조를 설명했으며, 예외 상태가 현대 정치의 본질적 구조임을 밝혔다. 문학은 이 같은 구조를 단순히 설명하거나 재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안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새로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서사적 공간을 구축한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의 학살이라는 극단적 생명 정치의 상황을 서사화하면서, 국가가 어떤 생명을 보호하지 않는지, 그 생명은 어떻게 말해질 수 없는 자로 남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은 피해자들을 단지 희생으로 정형화하거나 영웅으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말하지 못하고, 죽은 이후에도 남겨진 감각과 시선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폭력이 남긴 자취와 그 후의 삶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서사는 고통을 재현하기보다, 그 고통에 응답하려는 자들의 감정과 침묵, 망설임을 따라가며 생명 정치가 파괴한 삶의 잔여를 비추어낸다. 이를 통해 문학은 단지 고발의 수단이 아니라, 체제에 의해 배제된 생명이 언어와 감각을 통해 다시 공동체의 윤리적 사유 속으로 호출되는 공간이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더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생명 정치의 구조를 비판한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며, 미래도 과거도 없이 단지 반복되는 현재 속에 머무른다. 고도가 도래하지 않는 상황에서 삶은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도달하지 못한 채 유예된다. 이 유예는 생명을 적극적으로 통치하거나 선별하는 체계와는 무관한, 즉 정치적 목적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형식이다. 인물들은 체제의 중심으로 복귀하지 않으며, 주체성도 복원되지 않는다. 이처럼 체제의 작동에 협력하지 않는 존재 상태는, 오히려 생명 정치를 작동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체제의 경계를 드러낸다.

문학은 서사의 구성 자체를 통해 생명 정치의 시선을 뒤흔든다. 권력의 언어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들, 말할 수 없는 감각들, 형상화되지 않은 고통들이 서사 안에서 제 위치를 갖기 시작할 때, 문학은 단순한 서술의 기술을 넘어서는 윤리적 실천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문학은 어떤 생명이 가치 있는가라는 정치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생명이 망각되지 않아야 하는가, 어떤 고통이 말해지지 않아도 응시되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로써 문학은 생명 정치의 구획을 따라 사유하지 않고, 그 구획의 바깥에서 삶의 또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틈을 연다.

문학이 말하는 생명은 법과 제도의 질서 안에 포함되지 않는 삶이며, 그 비가시성과 무명성이 오히려 새로운 윤리적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서사는 이러한 삶의 잔여를 다루며, 독자에게 그 잔여를 기억하고 응시할 책임을 요구한다. 생명 정치의 비판은 이처럼 문학 안에서 이론을 넘어서 감각과 응시의 방식으로, 존재와 관계의 윤리로 변형된다.

3. 문학의 윤리적 상상력과 실천적 잠재성

문학은 고통과 폭력, 침묵과 결여의 자리를 단지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리에 새로운 감각과 윤리를 부여하는 행위를 수행한다. 소년이 온다고도를 기다리며는 모두 체제에 의해 말해질 수 없는 존재들, 구조화되지 않는 감정과 시간, 반복과 침묵을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키며, 독자에게 응답의 책임을 돌려준다. 이때 문학은 단순히 감정 이입을 유도하는 매체가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타자의 고통을 쉽게 이해하거나 소비하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윤리적 상상력은 바로 이 저항의 공간에서 형성된다.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은 체제의 작동을 멈추는 방식으로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는 예외 상태에 빠진 세계에서 삶이 제도로부터 탈구될 때, 그 틈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이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무위(non-operativity)’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비작동의 상태, 기능하지 않음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가리킨다. 문학은 그 무위를 단지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형식 속에서 실천한다. 말이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때, 서사가 더 이상 목적지에 이르지 않을 때, 인물들이 더 이상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을 때, 문학은 오히려 그 멈춤을 통해 감각의 전환을 가능케 한다.

소년이 온다는 죽은 자의 목소리, 고통 이후에 남겨진 육체, 애도되지 못한 시선 등을 서사화하며, 침묵과 유예의 언어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 응시를 구성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반복되는 기다림, 말의 무력함, 주체의 부재를 통해 기존의 의미 생산 구조를 중단시키며, 그 정지 속에서 전통적인 시간성과 서사 구조를 비틀어낸다. 이들 작품은 모두 체제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공간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타자와 고통, 응답과 책임을 새롭게 구성하는 문학적 실험을 수행한다.

문학의 실천적 잠재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정치적 구호를 외치거나 현실을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체제가 미처 규정하지 못한 감정과 존재를 언어로 감싸안고, 그것이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아감벤이 말한 도래할 공동체’,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지금-여기의 작동을 멈추는 삶의 형식 안에서 이미 열리고 있는 공동체의 윤리적 비전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은 이 개념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실천 불가능한 낭만적 이상에 머무를 수 있다는 한계 역시 드러낸다. 서사 속에서 도래할 공동체는 언제나 부재하고, 현실 속에서 응답은 끝없이 유예되며, 응시 또한 완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러한 부재와 유예를 외면하지 않고, 그것과 함께 머무는 감각을 형성한다. 그것은 체제를 전복하는 힘이라기보다,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관계를 회복하고, 타자의 고통을 지워지지 않게 하려는 실천이다. 문학의 윤리적 상상력은 이처럼 무력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서 발생하며, 바로 그 무력함 안에서 가장 근본적인 책임과 응답의 가능성을 열어간다.

 

. 결론

1. 연구 결과 요약 및 이론-텍스트 적용 평가

본 논문은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을 중심으로 문학의 예외 상태와 생명 정치, 그리고 언어의 윤리적 잠재성을 고찰해왔다. 아감벤은 근대 정치의 본질을 예외 상태벌거벗은 생명개념을 통해 조명하며, 법과 권력이 삶을 어떻게 선별하고 구성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또한 그는 언어와 시간, 존재의 구조가 이러한 정치적 질서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체제의 작동을 중지하는 비작동의 윤리, 혹은 무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사유는 단지 철학적 개념의 제안에 머물지 않고, 문학이 어떻게 세계를 감각하고 존재를 재현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유효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분석하였다. 소년이 온다는 국가 폭력에 의해 배제된 생명의 형상을 통해 예외 상태가 단지 제도적 조치를 넘어 삶의 구조와 감각의 질서 속에 스며드는 방식을 서사화한다. 죽은 자의 시점, 침묵과 유예의 언어, 재현되지 않는 고통은 생명 정치가 남긴 윤리적 질문을 독자에게 전가하며, 문학이 감당해야 할 증언의 윤리와 응시의 과제를 드러낸다. 반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림, 반복, 무능력한 언어, 탈주체화된 인물을 통해 체제의 시간과 주체 구성 방식에 균열을 가한다. 고도의 부재는 오지 않는 타자를 기다리는 존재의 상태를 보여주며, 이는 아감벤이 말한 메시아적 시간과 무위의 윤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사례로 읽힌다.

두 작품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아감벤의 철학 개념을 서사적·형식적으로 구현하고 있으며, 특히 체제 바깥의 삶, 법에 의해 포섭되지 않는 생명, 의미가 생산되지 않는 언어의 잠재력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은 예외 상태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서 나아가, 그 틈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이론과 문학이 만나는 유의미한 접점을 제공한다.

따라서 아감벤의 철학은 문학의 감각적 구성과 서사 구조를 해석하는 데 있어 유효한 이론적 언어가 되었으며, 동시에 문학 텍스트는 그의 철학이 제시한 개념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방식으로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철학의 추상성과 문학의 감각성이 교차할 수 있는 지점을 밝혀주며, 이론이 문학을 분석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학이 철학의 맹점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사유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아감벤 사유의 문학적 가치와 비판적 시사점

아감벤의 철학은 문학 분석에 있어 독특한 사유의 통로를 제공한다. 그는 삶과 정치, 존재와 언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그 경계의 불안정성과 예외성에 주목함으로써 기존 질서의 안정성에 균열을 가한다. 특히 생명 정치와 예외 상태, 무위의 개념은 문학이 재현하는 타자의 고통과 침묵, 말해지지 않는 시간과 기억을 사유하는 데 탁월한 이론적 도구가 되었다. 그가 보여주는 사유 방식은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 기능하는 것보다 작동하지 않는 것, 공동체보다 그 외부에 있는 존재를 향한 철학적 감응을 가능하게 한다.

문학은 이러한 사유를 정지된 추상에서 끌어내려 감각적이고 서사적인 장면으로 구체화한다. 소년이 온다고도를 기다리며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생명을 응시하고, 언어와 주체, 시간의 작동을 중단시킨다. 이와 같은 문학적 실험은 아감벤의 개념을 단지 인용하는 것을 넘어, 그 개념들이 살아 있는 생명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준다. 아감벤의 사유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문학의 윤리적 욕망과 접합하며, 재현의 불가능성 자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점에서 깊은 공명 가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의 사유는 그 자체로 완결된 해답이나 실천적 지침이 되기 어렵다. 비작동(dis-activation)의 윤리는 현존 체계의 작동을 중지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지만, 그것이 어떤 새로운 관계나 제도를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체제의 바깥으로 끌어내는 방식은 무위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바깥에서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고 공동체를 상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향이 제시되지 않는다. 특히 도래할 공동체라는 개념은 형식적 가능성으로는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 윤리나 정치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아감벤 사유의 빈틈을 드러낸다. 문학은 단지 작동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멈춘 자리에서 어떤 감정과 응답, 관계의 흔적을 구성할 것인지를 묻는다. 고통을 감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 응시만으로는 책임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학은 철학보다 더 복잡하고 미세한 윤리적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텍스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통 앞에서 말하기를 망설이고, 죽은 자들의 시선은 침묵 속에서 응답을 요구한다. 이처럼 문학은 사유와 감각, 응시와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복합적인 형식 안에서, 아감벤의 개념이 다 담지 못한 윤리의 현실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아감벤의 사유는 문학을 해석하는 데 강력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지만, 그 사유가 문학 텍스트 안에서 새롭게 흔들리고 확장된다는 점에서, 문학은 단지 이론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니라, 오히려 이론을 되묻고 수정하는 비평적 공간이 된다. 이 비평성은 문학이 철학과 만날 때 가장 강하게 드러나며, 철학이 놓친 구체성과 감각을 통해 이론이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도달하게 만든다.

3. 향후 연구 방향과 철학-문학의 교차 가능성

이 글은 조르조 아감벤의 철학 개념을 문학 텍스트에 적용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그 분석 과정은 단순한 이론의 적용을 넘어, 문학이라는 감각의 공간에서 철학 자체가 다시 사유되는 장면으로 확장되었다. 문학은 개념을 입증하는 대상이 아니라, 개념이 흔들리는 자리이며, 사유의 언어가 감각의 층위에서 시험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인식은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단지 학제 간 통섭이나 해석의 도구로 환원하지 않고, 양자가 서로를 되묻고 구성하는 사유의 장으로 재구성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아감벤의 사유는 문학과의 접면에서 가장 깊이 있게 작동한다. 비작동과 무위, 예외 상태와 도래할 공동체, 언어의 중지와 삶의 탈정치화는 모두 문학의 언어와 형식, 정서 구조 속에서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층위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문학 안에서 흔들리는 순간, 철학 역시 그 개념의 한계와 가능성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철학은 문학의 감각을 빌려, 추상적 개념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윤리적 세부를 감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철학과 문학의 교차는 동서양 사유 전통의 접점에서 더욱 풍부한 가능성을 품는다. 본 논문 말미에서 에세이 형식으로 시도할 아감벤과 장자의 교차는 단지 철학 간 비교를 넘어, 현대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의 사유를 도가 사유 안에서 예감하게 한다. 장자는 무위, 좌망, 말하지 않음, 자아의 해체와 같은 개념을 통해 존재를 형이상학적 질서 바깥에서 사유했고, 이는 아감벤이 사유한 작동을 멈춘 존재, 말의 중단, 비결정적 공동체 개념과 구조적으로 접속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만남은 문학의 분석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문학은 그 사유들이 만나는 구체적인 장면이자 감각의 매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연구는 이러한 철학 간 대화, 감각과 개념 사이의 교차, 사유와 삶 사이의 긴장 상태를 보다 면밀히 추적할 필요가 있다. 특히 동양 철학의 존재론적 직관과 서양 철학의 개념적 분석이 문학을 매개로 만나는 구조는, 감정과 윤리, 언어와 침묵, 주체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문학은 그 과정에서 철학의 경계를 확장하고, 사유의 감각을 섬세하게 직조하는 예술로 기능할 수 있다.

철학이 더 이상 개념을 구축하는 작업이 아니라, 개념의 경계에서 감각하는 방식이 된다면, 문학은 그 사유를 감당하고 펼치는 가장 풍요로운 공간이 될 수 있다. 동서양 철학이 문학을 매개로 사유의 깊이를 교차시키는 작업은 아직 충분히 시도되지 않았으며, 그 잠재력은 여전히 열려 있다.

 

. 부록: 연구자의 소회

1. 아감벤 사유를 문학에 적용하며 겪은 내적 변화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문학 분석을 위한 개념적 틀로 아감벤의 철학을 끌어왔지만, 작업이 계속될수록 그 철학이 내 사유의 방향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론의 적용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문학 텍스트 속에서 작동을 멈춘 언어, 말해지지 않는 감각, 재현되지 않는 고통을 마주하며, 아감벤의 개념은 더 이상 설명의 틀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사유를 흔드는 질문으로 변해갔다.

무위’, ‘비작동’, ‘예외 상태’, ‘말의 중지와 같은 개념들은 분석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론적 실험처럼 다가왔다. 문학이 말하지 않는 순간, 철학 역시 말할 수 없음의 구조에 맞닥뜨리며 경계를 드러냈고, 그 경계 위에서 나의 사고는 더 이상 개념의 내적 논리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문학은 고통의 장면을 단지 설명하도록 만들지 않고, 그것 앞에 멈춰 서게만들었고, 그 멈춤은 아감벤이 말한 무위의 윤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이러한 사유의 흔들림은 내게 철학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은 체계적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미세한 결을 감각하고 윤리적으로 응시하는 일일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겼다. ‘삶의 정치가 아니라 삶의 감각을 사유의 중심으로 옮기려는 아감벤의 시도는, 철학이 감각의 층위로 내려가는 과정을 동반한다. 나 또한 그 흐름을 따라가며, 더 이상 이론이 세계를 통제하는 언어라고 믿지 않게 되었다. 이론은 오히려 세계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언어를 감각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철학이 될 수 있다.

아감벤의 사유를 통해 나는 철학을 적용하는 자가 아니라, 철학 앞에서 묵묵히 머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감각을 배웠다. 텍스트는 분석을 요구하지 않고, 응시와 함께 머물기를 요청한다. 이 요청은 문학적 윤리일 뿐 아니라, 철학의 윤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감각은 나의 사유가 앞으로 어떤 철학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예감하게 한다.

2. 문학이 갖는 철학적 잠재성에 대한 재인식

문학은 오랫동안 철학의 대상이거나 해석의 자료로 간주되어 왔다. 나 역시 처음에는 문학 텍스트를 이론의 개념을 적용하고 검증하는 장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가며 문학을 읽는 동안, 나는 문학이 결코 이론의 수동적 대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문학은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의 층위, 윤리의 사각, 존재의 잉여를 섬세하게 조직하는 하나의 사유 형식이었다.

아감벤은 철학이 체제의 작동을 멈추는 지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 가장 먼저 도달해 있는 것이 문학이었다. 문학은 말해지지 않는 것을 굳이 말하려 하지 않으며, 침묵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 함께 머무르고, 그 감각을 독자에게 전가한다. 이런 문학의 태도는 윤리적 실천에 가까우며, 철학이 요구하는 사유의 책임과 다르지 않다.

문학은 의미의 전달보다 의미의 유예, 재현보다 침묵, 구성보다 붕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고통을 설명하지 않고, 고통 앞에 선 존재의 망설임을 반복하고, 그 반복 속에서 독자가 응시하고 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문학은 철학이 담아내지 못하는 삶의 윤리적 표면을 구성하는 장이다. 그리고 그 표면은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감정, 감각, 시간,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문학의 윤리적 작동을 체험하면서, 나는 철학이 문학을 통해 자신을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문학은 철학의 반대편이 아니라, 철학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타자의 사유 공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과 유예의 장소에서, 철학은 더 이상 지배적인 언어가 아니라 감각의 언어, 응시의 언어, 혹은 머무름의 언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문학은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세계와 함께 숨을 쉰다. 그 숨결에 귀 기울일 때, 철학 역시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의 실천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문학이 철학을 넘어서거나 철학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를 흐리며 나아가는 사유의 공존적 형식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재인식은 내 철학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고, 앞으로도 나의 사유 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나는 철학도로서 문학을 읽고 공부하며, 점점 더 문학이 나의 사유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철학은 질문을 던지고, 개념을 세우며, 언어의 형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만, 문학은 그 모든 시도 바깥에서, 고통과 침묵, 존재의 균열을 감각하게 만든다. 철학이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면, 문학은 그 세계와 함께 호흡하며 견디고 응시한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소설을 쓴다. 그것은 두 학문 사이를 넘나드는 시도가 아니라, 사유를 감각으로 밀어붙이려는 내 내면의 필요이자 감정의 언어를 되찾으려는 실천이다. 개념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 말로 고정할 수 없는 존재의 떨림을 이야기라는 형식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만져보고 싶다. 철학은 나를 멈추게 했고, 문학은 그 멈춤의 자리에서 다시 쓰게 했다.

결국 내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을 쓰는 이유는, 나의 사유가 언제나 언어의 경계에 있으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진리는 설명보다 이야기, 논증보다 고백, 해석보다 감각에 더 가까이 있다는 직관 때문이다. 나는 창작자로서의 자리에 서고 싶다. 그것은 철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미처 닿지 못한 자리에 언어를 놓고 싶다는 열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나의 철학이고, 철학은 내가 쓰고자 하는 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드는 원심력이다.

3. 이론과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비평적 여정에 대하여

이 글은 철학 개념을 문학 텍스트에 적용하는 작업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그 적용의 틀이 불안정해지는 순간들을 통과하며, 철학과 문학이라는 두 사유의 방식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접점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 문학을 해석하고, 문학을 통해 철학 개념을 정련하는 작업을 해나갔지만, 그 과정을 거듭할수록 나는 개념이 감각에 의해 흔들리고, 텍스트가 이론을 초과하는 지점에서 멈춰 서게 되었다.

비평은 단지 텍스트를 해석하거나 개념을 적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개념이 언어의 층위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감각하고, 그 흔들림을 통해 자신의 사유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응시하는 실천이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철학이 텍스트를 통해 확장될 수 있으며, 문학이 철학을 되묻는 형식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 체험은 내게 지적인 자극을 넘어, 사유 방식 자체의 전환을 요구하는 내적 요청이 되었다.

아감벤의 개념은 처음엔 견고해 보였지만, 문학 속 고통의 감각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유예되고, 말하지 않는 존재의 시선 앞에서는 재정의되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윤리적 공간이었고, 나는 독해가 아니라 머무름의 감각으로 텍스트에 다가가야 했다. 이 과정은 결국 내가 사유하고 읽고 쓰는 방식의 전환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단지 철학에서 문학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철학과 문학을 가로지르는 사유의 리듬을 찾는 여정이었다.

나는 이제 철학 개념을 적용하기보다는, 그 개념이 어떤 감각과 감정을 통해 세계에 도달하는지를 묻고 싶다. 문학은 그 물음을 반복하게 만들고, 철학은 그 반복 속에서 더 섬세해진다. 이론과 텍스트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고정된 위치에서의 해석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유예되는 사유의 운동이며, 그 속에서만 비평은 살아 있는 언어가 된다.

이 글의 여정은 끝났지만, 사유는 여전히 유예된 채로 남아 있다. 나는 여전히 묻고 있으며, 이 글 역시 그 질문의 일부일 뿐이다. 철학과 문학을 오가며, 그 경계를 걸으며, 말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멈춰 서는 이 감각의 윤리를, 나는 계속해서 써 내려가고 싶다.

 

. 에필로그: 사유의 경계를 다시 묻다

이 글은 처음부터 철학 개념을 문학 텍스트에 적용해 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를 따라 문학의 언어를 분석하던 어느 시점에서, 나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삶이 제도 안에서 보호되지 않으며, 말이 고통을 재현할 수 없을 때 철학은 말의 경계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 흔들림은 나에게 사유의 방향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문학이라는 감각적 형식이 철학 자체를 다시 쓰게 만든다는 내적인 요청으로 이어졌다.

말하지 않음작동하지 않음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아감벤의 철학은 내가 문학에서 감지한 고통, 침묵, 유예의 시간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철학 개념을 문학에 적용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문학이 나의 철학을 다시 조정하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철학과 문학이라는 두 사유의 방식이 단순히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감각하고 재구성하는 하나의 사유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내가 철학자로서 문학을 읽는 방식뿐 아니라, 사유 그 자체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켰다.

문학은 개념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그 경계를 드러내고,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감각의 밀도와 윤리의 결을 직조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철학을 멈추게 하고, 멈춘 철학은 말보다 느리고, 그러나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는 감각의 언어로 전환된다. 아감벤은 체제와 법, 언어와 주체성의 틈에서 작동을 멈춘 삶의 가능성을 사유하며, 예외 상태와 벌거벗은 생명, 도래할 공동체 같은 개념을 통해 제도 바깥의 존재 방식을 탐색해 왔다. 그런데 그 사유는 장자의 철학, 즉 무위의 삶, 언어 이전의 감각, 자아의 해체라는 사유와 깊이 연결되며, 마치 서로 다른 전통 속에서 같은 경계에 도달한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두 철학은 서로 다른 개념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체계의 작동을 중지하고, 존재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사유 방식이라는 점에서 공명한다. 무위와 비작동은 단지 행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행위 이전의 삶의 리듬에 귀 기울이는 방식이다. 나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 두 철학이 만나는 장면을 경험했으며, 그것은 단지 개념의 접목이 아니라 사유의 시간과 언어, 감정과 윤리를 새롭게 감각하게 하는 하나의 철학적 실험이었다.

나는 원래 문학에서 시작했다. 문장의 숨결과 감정의 떨림 속에서 처음으로 사유라는 낯선 이름을 만났고, 그것이 철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시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금 나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개념을 익히고, 사유를 구성하며, 질문과 문장을 천천히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여전히 내 안에서 철학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개념의 축적이 아니라 감각의 여백에서, 논리의 선형성이 아니라 문장의 숨결에서, 나는 사유가 움직이는 새로운 리듬을 느낀다. 문학은 나에게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장소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 자리에 머물며 생각하고자 한다.

철학은 문학을 설명할 수 없다. 문학은 철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이며, 때로는 침묵을 통해만 서로에게 닿는다. 나는 이제 설명보다 응시, 논증보다 감각, 체계보다 망설임에 가까운 철학을 쓰고자 한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 앞에서 멈추는 문장,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개념에 대한 애도, 의미가 결여된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언어의 윤리. 그것이 내가 문학을 통해 배운 철학이다.

장자와 아감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그러나 놀랍도록 유사한 감각의 윤리를 제안한다. 전자가 도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유의 경계를 벗어났다면, 후자는 법의 중지속에서 작동을 멈춘 삶의 가능성을 끌어올린다. 하나는 나비의 꿈을 꾸고, 하나는 주권의 경계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바라본다. 장자는 ()는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말해지는 순간 도가 아니다라 했고, 말을 다하면 끝내 말이 없어진다(言有窮而終無言)”고 했다. 아감벤 역시 말하지 않음 속에서 말보다 깊은 침묵의 윤리를 탐색한다. 이 두 사유는 내가 쓰고 싶은 문학의 깊이, 내가 사유하고 싶은 철학의 무게를 함께 구성한다. 나는 이 둘의 언어가 어긋나는 틈에서 문장을 짓고, 그 틈에 깃든 침묵을 따라 사유를 적는다.

앞으로 내가 쓰고 싶은 문학은, 설명을 거부하는 철학과 침묵을 품은 언어가 만나 이루는 또 하나의 감각이 될 것이다. 장자의 무위는 문학을 자유롭게 만들고, 아감벤의 비작동은 그 문학을 윤리적으로 무겁게 만든다. 나는 이 두 철학을 따라 문학을 쓰되, 그 문학이 다시 철학의 감각이 되기를 바란다. 감히 말하자면, 이 두 사유는 나에게 언어 이전의 어떤 진실, 말해지지 않음의 진실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 진실에 귀를 기울이며,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문학은 나의 철학이고, 철학은 내가 다시 쓰고자 하는 문장이다. 이 사유가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끝과 시작이 흐릿하게 얽힌 지점에서 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에는, 장자와 아감벤이 있으며, 말없이 흐르는 나의 사유가 있다. ()

 

 

참고문헌

1. 장자, 장자, 안병주 역주, 현암사, 2004.

2. 베케트, 사무엘.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3. 아감벤, 조르조. 벌거벗은 생명, 서창현 옮김, 새물결, 2008.

4.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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