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삭임과 부재 중인 그대!
밤새 내린 눈은 무릎 높이까지 쌓였고, 어떤 곳은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아버지는 도저히 치울 수 없을 것같은 눈의 양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판자를 덧댄 넉가래를 들고 나와 겨우 사람 발자국이 지날 수 있는 길을 냈다. 눈을 쓰는 동안, 아버지는 가끔 허리를 펴며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고는 조용히 연기를 내뿜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부엌에서 장작불을 지피며 아랫목을 따뜻하게 덥혔다. 방 안에는 전날 저녁부터 불려 둔 팥이 푹 삶아지며 퍼지는 달큰한 냄새가 감돌았다. 불편하다거나 춥다거나 하기보단 동네 아이들은 동네 개들과 함께 눈밭을 굴렀고 나는 방안에 꼼짝없이 앉아 때론 봉창문에 눈을 바짝 대며 바깥을 훔쳐보았고 때론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몇몇 아이들의 함성은 지나칠 만큼 커서 메아리가 되어 동네를 휘돌았다. 골목길 끝에서 누군가 "눈사람 더 크게 만들어!" 하고 소리치면, 다른 쪽에서 "안돼! 눈썰매 먼저 타자!" 하고 고함을 질렀다. 개들은 그 소란스러움이 마냥 신이 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몸을 털어 하얀 가루를 흩뿌렸다.
나는 고요한 순간과 그 메아리들이 교차하는 지점들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간혹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뒷산의 나뭇가지가 뚝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간혹 산짐승이 대밭을 쏜살같이 휘젓던 까닭에 부스스 댓잎에서 떨어지던 눈더미가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마을 저편 너머에서 오래된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그 소리는 눈 덮인 풍경 속으로 스며들다 다시 사방으로 긴꼬리를 끌었다. 종소리가 끌리는 순간,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산짐승의 움직임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도 잠시 멈춘 듯했다. 그러나 어느 사이 마을을 배회하던 종소리가 꼬리를 감추자, 다시 동네는 작은 전쟁터처럼 들썩였다. 아이들의 함성은 더 높아졌고, 빨갛게 달은 볼에 언 손을 비비며 헤죽거리는 웃음소리 끝으로 다시 하얀 눈이 풀풀 흩날렸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감싸안을 듯, 빠르게도 때론 느리게도 휘돌았다. 그 순간이 좋았다. 마치 시간이 어딘 가에 숨어버린 것 같았던, 나는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오늘, 나는 문득 시간의 틈새로 미끄러져 어린 날의 겨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창밖으로 하얗게 내려앉는 눈송이는 조용한 속삭임처럼 나를 감쌌고, 세상은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고요히 멈춰 있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넉가래로 눈을 밀던 소리가 아련히 귓가를 스쳤고, 어머니가 정성스레 끓이던 팥죽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번져오며, 나는 어느새 마음의 봉창문을 살며시 열고 그 시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시간과 공간이 겹쳐지는 듯한 아득한 감각 속에서 그를 보았다. 말없이, 다만 곁에 있을 뿐인데도 모든 것이 충만해지는 순간.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우리는 함께였다. 그렇게 애써 믿고 싶었다. 따스한 기억처럼, 혹은 잊히지 않는 한 조각의 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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