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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독후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11. 26.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독후감

 

 

 

“알 깠다. 센타 수비 멋져부러.”

모처럼 만에 찾아온 교정의 평화에 고즈넉한 가을 하늘이 높았다. 취루탄 냄새를 껴안은 소운동장 한쪽으로 반 대항 여학생 족구대회가 한창이었고 나는 마침 센타 수비를 맡고 있었다. 그럭저럭 내 임무에 열중했는데 그만 상대편의 공이 내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 2루 수비를 거쳐 멀리멀리 굴러갔고 나는 망연히 그것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 순간, 내 시선을 붙잡는 진 초록빛 점퍼에 청바지를 입은 2루 심판 남학생의 티 없는 읏음이 맑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경이롭게 휘돌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고요한 멜로디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었고,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잠시 멈춘 듯했다. 가을바람이 살랑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고, 그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후 나는 하얀 달밤에 막 피기 시작한 박꽃 같은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4년 내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서정주를 읊조렸고, 철학서를 읽었으며, 테니스 라켓을 끼고 그와 닮기 위해 내 젊음을 소비하며 80학번을 살았다.

그리고 일말의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적 지식인의 허영이었을까? 나는 때때로 취루탄이 난무한 교정의 시위대 맨 끝 대열에 앉아 우왕좌왕 목소리만 높였고 실제로는 무서워 떨었다. 너무 무식해서 순진했던 80학번의 비애! 나는 내 젊음이 언제부턴가 부끄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변명했다.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나는 몰랐다고. 그 몰랐다는 사실이 더 부끄럽기 시작한 것은 덧없이 늙어간다는 사실과 함께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나의 무지를, 나는 정말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때의 무지함과 두려움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나는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사건을 보았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놓인 시간의 간극이 무색해졌다.

80년대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와 현재의 비극적 사건들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진정한 용기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는 것임을. 과거의 부끄러움은 이제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나를 만들어 가기를, 그것은 아주 소소해 부끄러울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고, 그 길목에서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감히 읽었다.

 

『소년이 온다』 는 한강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주인공 동호는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신 수습을 돕다가 결국 도청에 남아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은 동호와 관련된 인물들이 고문과 트라우마를 겪는 이야기들로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장의 화자는 동호가 친구 정대를 찾는 이야기, 두 번째 장은 동호가 찾던 친구 정대가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혼으로 바라보는 이야기, 세 번째 장은 동호와 함께 병원에 간 출판사 직원인 은숙의 시점으로 네 번째 장은 동호와 함께 고문받던 인물들인 진수와 대학생의 이야기, 다섯 번째는 동호와 함께 병원에 남아있던 인물인 선주의 시점, 마지막 장은 동호의 어머니가 동호를 잃은 후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자주 책장을 덮었다.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잠자코 앉아 시선을 창밖에 두고 생각마저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는 생각이란 것을 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룸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책 134쪽)

작가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싶었으나,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나의 무지, 그리고 그 질문이 던지는 무게에 압도되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의문은 나를 깊은 사색으로 이끌었고, 나는 그 속에서 길을 잃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질문을 회피할 수 없었다. 인간의 잔인함과 존엄성 사이의 모순은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역사의 수많은 비극 속에서 인간의 본질은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때로는 잔인하지만, 동시에 사랑과 연민, 희생과 용기를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책 117쪽)

그렇다. 인용문에서처럼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엄군을 향해 그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울었다.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믿고 싶었으리라.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책 114쪽)

그리고 그들은 양심을 믿고 양심에 따른 연대를 믿고,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순간의 광휘에 쓰러져갔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저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책 116쪽)

이제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겨내야만 하는 트라우마, 내적 갈등을 짊어지고 영원히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어떤 이는 자살을 어떤 이는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와 내가 가까웠다 한들 얼마나 가까웠겠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지만, 동시에 언제나 서로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어했습니다. 지우고 싶어했습니다. 영원히 밀어내고 싶어했습니다.” (책 132쪽)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책장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작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나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임을 믿으며.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한강의 글은 마치 오래된 상처를 다시 열어 보는 듯한 아픔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 아픔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간극을 조금씩 메워가고 있었다. 80년대의 혼란과 현재의 비극 사이에서,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방관자가 아닌, 역사의 증인이자 미래를 향한 변화의 주체로 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글쓰기가 될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페이지들은 나에게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마주하는 용기,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부끄러움에 갇혀있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진정한 변화는 거대한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한 권의 책을 읽고, 그로 인해 변화된 내 안의 작은 생각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언젠가는 큰 물결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 과거의 부끄러움과 현재의 아픔을 안고,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나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쓰고,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작고 소소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할 일임을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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