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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아주 오래된 유죄』 김수정님, 한겨레출판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4. 6. 23.

 
 
 
 
 
이런 일이 있었다.
 
복수전공 과목인
국문학개론 수업 중
교수님은
설화라는 항목을
신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구분하면서
“나뭇꾼과 선녀”를 거론하는 순간,
 
“교수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현시대적으로는 성폭행이고요.”
 
나도 모르게
입이 방정을 떨었다.
 
당황하신 교수님의 얼굴에서
순간 앗차,
내가 더 당황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신이 당황하신 이유와
나의 발언에 대한
목적에 대해 물으셨다.
 
아, 제가 요즈음
페미니즘 공부를 좀 하는데
옛 전래동화의 내용들이
현시대로 해석될 때에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지,
 
지금까지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성인지 교육적인 면에서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 등등
나의 변명이 자꾸만 길어졌다.
 
물론 교수님은
옛날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지만
그러한 각도로도 볼 수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셨지만
영 기분이
뭐랄까,
나의 입방정과 섣부른 행동에 대해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나는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의 익명 글에서
난무하는 여성 혐오와
성별 편 가르기의 글들에
무심할 수가 없다.
 
이유는 젊은이들의
논리도 없는
감정적인 글들이
안타깝기도 해서
가끔 댓글을 다는데
비밀 메시지로
공격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몇 번 그들과
논박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주로 포기하는 편이지만
뭔가 해야만 한다라는
생각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한 확신은 없지만
여하튼 공부해 보기로 한다.
 
내가 젖는 배가
산 위로 오를지
혹은 바다 한가운데서
태풍을 만날지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 책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정님이 한겨레출판에서 펴낸
『아주 오래된 유죄』
 
김수정님에 대한 작가 소개는
책의 속표지에서 따왔다.
 
법무법인 지향 구성원 변호사.
두 딸의 모자란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월급쟁이.
호주제 및 낙태죄 위헌 소송의 대리인,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으로
20여 년간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앞으로도 되고 싶은 열혈 변호사.
지은 책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공저)가 있다.
 
오늘의 책
『아주 오래된 유죄』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여성 잔혹사들,
 
여성을 향한 폭력을
이 사회는
어떻게 외면하고 있는가에 대한 글이었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은
작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책의 후기에 작가는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책의 후기로
이 말 외에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고
고백하며
“여성을 위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마지막 말을
“약자를 위한 변론은 계속되어야 한다.”라고
바꾸고 싶다.
내 개인적 신념으로.
 
 
 

 
(책에서 밑줄 친 내용들)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사람은 그놈의 누나였다. 그놈은 누나가 건사하던 자였는데, 누나는 같은 여자로서 용서를 빌기조차 미안하다면서도 자기 동생을 한 번만 살려달라면서 울며불며 매달렸다. 성범죄 사건을 맡을 때마다, 가해자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비는 사람은 꼭 그들의 어머니이거나 누이였다. 막상 일이 터지면 뒷수습을 하는 것은 그 남자의 혈육인 여자들(부친이 나서거나, 형이 나서는 경우는 또 별로 보지 못했다)이거나 애인이나 아내 들이다.… 여자의 도움 없이 살지도 못하면서, 남자만의 이어도에서 살 수도 없으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여자를 몰래 지켜보고, 돌려 보고, 소비한다. (24~25쪽)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유발한 남성의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이는 종종 피해자의 행실 책임론으로 귀결되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형을 감면받거나, 심지어 무죄를 받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야한 옷을 입어서’ ‘평소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서’ ‘남성과 데이트를 즐기며 성관계를 허락한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등 여성이 남성의 성적 충동을 유발해 성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재판에서 종종 나이가 많은 여성이나 ‘예쁘지 않은’ 여성에게는 남성의 성적 충동이 생길 리가 없다면서 그 사실이 앞의 판결에서처럼 혐의를 부정하는 논거로 인용된다. (33쪽)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문학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해시태그 미투 운동을 보면서 나는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 그리고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겪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44~45쪽)
 
능욕당한 여성들을 변호하며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학생, 공무원, 남편, 아빠 들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평범성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가질 가능성이 보이거나, 자녀가 있으면 더욱 좋다. 장래가 촉망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인정되며, 남자라면 누구나 성적으로 일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린 경우는 성장기의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라는 이유로 공감까지 얻는다. 능욕당한 여성들은 오히려 꽃뱀으로, 행실에 책임이 있는 여성으로, 유난히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로 더욱 추락하고 피해 여성의 추락은 나아가 가해 남성의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여성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미성년자라 하더라도 꽃뱀이라는 의심에서, 행실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해자가 위자료를 받겠다고 나서면 꽃뱀이 된다. 고소를 하면 무고로, 돈을 뜯어내려는 음모로, 성공하지 못한 애정에 대한 복수심으로 의심받고 매도된다. (71쪽)
 
n번방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주홍글씨’라는 자경단까지 만들어 운영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성착취 영상 관련 범죄자를 신고하는 자경단인 것처럼 운영하면서 침묵의 카르텔에서 빠져나간 배신자에게 주홍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주홍글씨는 그런 자들에게 새길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주빈들, 조주빈에게 동조한 자들, 단 한 번이라도 성착취 영상을 관전한 자들, 남자라면 한 번쯤은 보는 것이 음란영상이라고 변명해주는 자들의 이마에 가슴에 결코 지워지지 않게 깊이 새겨야 한다. 여기에서, 제대로 된 처벌에서 시작하자. 처벌의 공백이 있다면 법을 만들자. 가장 초보 단계인 응보와 위하로부터 시작하자.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78~79쪽)
 
2018년 발표한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여성 상대 강력범죄(성폭력, 살인 등)는 2017년 3만 270건으로 강남역 살인 사건이 있던 2016년 2만 7,431건에 비해 오히려 10퍼센트가량 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자친구가 변심했다고 의심하여 때리고 밀쳐 중태에 빠뜨렸다는 기사, 헤어진 여자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로 길 가던 여고생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기사,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로 생면부지의 여성의 머리를 돌로 수차례 내리쳤다는 기사, 길 가던 여고생에게 성추행 시도 뒤 흉기로 살해 시도를 했다는 기사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여성들을 잠식하고 있다. 한 명이 당하면 우연한 사건이지만 다수가 당하면 사회현상이다. 국가는 이런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밤길 귀가도우미, 이런 것 말고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92~93쪽)
 
가난한 나라 여성이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주로 성매매를 통해 태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쓰고, 현지에서 버젓이 살림을 차리고 심지어 결혼식까지 올리고서 남편으로 행세하다가 한국으로 잠적하거나, 연인 관계로 지내다 여자가 임신하자 도망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 이들은 부자나라 한국에 대한 동경을 품은 가난한 나라의 어린 여성을 오직 성욕 해소의 상대로 착취하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113쪽 – 코피노 아빠찾기)
 
큰돈을 주고 데려온 어린 아내가 자기가 기대한 판타지의 구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내가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한국말을 배우지 못하게 집안에 가둬두고, 본전 생각에 과도한 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내가 변론한 사건에서는 남편이 돈을 벌어오라고 이주 여성 아내를 성매매업소에 팔아넘긴 사건도 있었다. 집안 남자들(시아버지, 시동생)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이 여성은 여성단체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위자료 청구 소송만을 변호사들에게 맡기고 자국으로 돌아갔다. 견디다 못한 아내가 도망가는 일들이 발생하자 급기야 결혼 알선업체들은 “우리가 소개하는 여성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를 한 적도 있다. 낳은 아이를 시가에서 빼앗아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한국의 혈통은 한국 사람이 키워야 한다는 이유로. (126~127쪽)
 
낙태를 하는 여성도, 낙태에 찬성하는 여성도, 그 누구도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 속의 태아일 때든 태어난 뒤든, 아이를 감당해야 할 ‘이미 태어난 사람’인 여성이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온갖 어려움은 오롯이 여성에게 짊어지게 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고귀함만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다. (139쪽)
 
‘과거의 낙태 처벌 범위와 비교해보면 낙태 허용사유가 많이 확대되었으므로 뭐가 문제냐’ ‘태아의 생명권이 더 중요하다’ 등의 이야기들이 오르내린다. 여전히 여성의 결정은 생명을 경시하는 이기적이고 못 믿을 결정으로 취급되며, 처벌하겠다고 위협하면서 태아의 생명보호의무와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고 있다. 임신 후기 낙태의 형사처벌은 보호와 지원이 가장 필요한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 지적 장애인 등 취약한 여성들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조여 온다. ( 145~146쪽)
 
“위안부는 더러운 이름이다” “위안부가 세계 여성에게 해를 끼친다면 미안하다” “위안부 누명을 벗고 싶다”며 이용수 할머니의 입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저 깊은 단전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 튀어나온 말들, 그 말들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보다 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 하시면서도 피해자로서 겪은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아프게 느낀다. 할머니의 이런 말들은 진정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인가,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는 일본국인가.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대한민국 위정자들인가. 할며니들을 보며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 죄로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린다. 할머니들은 전시 여성 성폭력의 잔학상을 증언하고, 세계의 전시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여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고 평화를 가르쳤다. 그것이 불이었다. 그 대가로 영원히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라도 할머니들을 구하는 헤라클레스가 되고 싶다. 할머니들 스스로 외에 누가 할머니들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이제라도 내가, 우리가 할머니들의 헤라클래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198~199쪽)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들은 전쟁이 있는 곳, 군대가 있는 곳에서 전쟁 승리와 군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기지촌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과거사의 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이용하고 버린 국가를 용서하고 싶어한다. 박 언니의 외침처럼 국가는 책임을 지라!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라! 그것이 국가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211쪽)
 
직장 내 성희롱, 고용 차별, 여성 노동의 비정규직화, 남녀 임금 격차를 드러내는 각종 통계치들은 노동에서의 젠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남녀평등고용법, 여성발전기본법, 그리고 각종 노동법제의 제도화는 노동 영역에서 젠더 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착시라도 얻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싸워왔던가. 코로나 위기는 여성 노동의 젠더 불평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더 이상 법과 제도가 주는 착시로 세상이 나아졌다고, 살 만해졌다고 퉁칠 수 없게 된 것이다. (231~232쪽, 코로나 시기의 여성들)
 
과거 많은 여성이 집안 남자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야 했다. 종종 그들의 헌신은 행실과 품행의 문제로 손가락질받는 삶으로 이어졌고 잊히고 버려졌다. 시종 일관 찬사로 이어지는 남성의 헌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취급되었다. 여성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이 되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헌신을 했든, 투쟁을 했든,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든 ‘여성’이라는 자체, 그것이 문제다.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