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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중국 漢 제국의 등장 -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36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5. 17.

 

 

 

 

 

 

 

 

중국 제국의 등장

진시황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이다. 그는 중국의 문자와 화폐, 도량형을 통일했고 각종 제도 및 도로를 정비했으며 군주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진나라를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들었지만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진왕조 30여 년 만에 법가가 중심이 되었던 진나라는 무너지고 중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특히 진나라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유학 등 여러 사상이 멸절하게 된다. 즉 순자의 제자였던 법가 사상가 이사(李斯)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들은 모두 불살라 버릴 것을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을 주장하니, 진시황이 수용하고 의약, 복서와 농사에 관한 서적만 남기고 불태웠다. 그러나 분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이 시황제를 비판하자 시황제는 이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보다 강경한 탄압정책을 펼치며 유생들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진 왕조의 멸망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등장한 왕조는 한()이다. 한의 통치권자들은 진의 멸망의 원인이 지나친 무력 통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문치(文治)를 통해 새로운 제국의 기틀을 도모했으며 한 고조 유방(劉邦)은 육가(陸賈 BC240 170?)가 제시한 역취순수(逆取順守)의 위대성을 인지했고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진나라는 힘으로 억누르고 형벌로 위협하는 정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천하를 굴복시켰으나 원한과 반발이 일어나 오래 보존하지 못했다. 우리 한나라는 예의와 도덕에 따라 백성을 어루만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며 유가적 이상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한 초에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이른바 휴양생식(休養生息)의 시기였으며 문치의 부흥에 여력이 없었지만 문제(文帝)를 거쳐 무제(武帝 BC156 87)에 이르러 백가를 내몰고 유가만을 높이는 시대가 개막되었다.

한 무제는 다음과 같은 조치(措置)를 내린다. (즉위 원년 BC140)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성품이 어질고 행동이 바르며 곧은 말을 하고 잘못을 비판할 줄 아는 선비를 천거하라고 지시한다. 현량(현량) 천거 지시는 진나라의 교훈을 살려 지식인을 중시하고 우대하는 정책의 일환이자 자신의 정치 방략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무제가 생각하는 한량은 고금의 왕의 일에 관련된 예에 밝은 사람들, 교화제도에 능통한 유자(유자)였지만 진 왕조에서 희생된 유자들 대신에 천거된 사람들은 대부분 법가나 종횡가에 속하는 인물들로 그의 현량 천거 지시는 어느 면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무제는 즉위 5(BC136)에 오경박사를 설치해 유가로써 백가를 완전히 대체한 조치를 내린다. 이는 경학(經學)을 통해 무제 자신의 통치 이념을 지지하는 사상의 통일을 꾀한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황로학이 강하고, 유학은 아직 훈고의 단계에 머물렀으며 하나의 통치 철학이 정립되기에는 시기상조였으나 즉위 7(BC134)에 둥중서(董仲舒)의 천인삼책(天人三策)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념을 얻게 되며 유학만을 높이 떠받들고 백가를 몰아내는 전환을 시도한다. 이는 휴양생식을 거치면서 천인삼책의 확실한 논리의 전개와 대일통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며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중앙 권력 강화를 이룩하게 된다.

천인삼책(天人三策)이란 첫 번째로 무제가 수명개제(受命改制) 즉 하늘에서 명을 받아 왕위에 올라 예악을 새롭게 고치는 일을 통해 새로운 왕의 등장이 지닌 천명(天命)적인 근거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으로 황제권의 강화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는 제왕의 무위지치(無爲之治)적인 이상과 구체적인 덕교(德敎)와 형벌의 시행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며 세 번째는 동중서의 말대로 실행했을 때 얻게 되는 결과에 대한 확인성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러한 대책은 그의 천인상감(天人相感)의 철학의 골간이며 무제의 치국의 큰 도리와 지극한 이론을 묻은 것에 대한 대답으로 철학적 논의는 배제한 셈이다.

- 동중서(董仲舒)의 천인상감(天人相感)

진한시대는 중국 역사의 대전환점으로 천하가 통일로 나가며 정치권력은 전제군주에 의해 독점되었고 사상가들은 이제 더 이상 춘추전국시대와 같이 주유열국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없었다. 중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통일을 사상적으로 뒷 받침하고 통치체제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사상계의 과 제가 되었으며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통일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통치체제 가 지속될 수 있도록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사상계의 가제였다.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각 학파의 이론을 종합하여 통일 제국의 통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 것이 바로 동중서의 사상으로 동중서는 한 왕조를 가장 부흥시킨 한무제(한무제)시기의 사상가로 한 무제는 동중서의 의견을 채택해 오결 박사 제도를 설치하고 유가사사을 한 대의 국가 이념으로 만들었으며 유학을 관학으로 성장시켜 한 대 유가들이 제가사상의 장 점을 흡수하고 이것을 토대로 전제군주정이라는 현실 정치에 대응하는 학문 체계를 수렵 했는데 이것은 순수한 유가라고 할 수는 없다.

동중서는 그의 천인감응론에 근거하여 하늘과 인간의 도를 상세히 서술하며 정치적, 사상 적 통일이 하늘의 한결같은 법도이며 표준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로써 중앙 집권적 전제 정치제도를 위해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유가 사상이 현실 정치에 안주하여 군주 권의 강화를 긍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그 억압의 수단을 준비했다.

(부정적으로 독재정권에 일조)

- 동중서의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인간과 자연은 그 기능이 일치하여 둘 사이에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상으로 경험 된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을 어떤 근원적인 물질로 환원하기보다는 이것들을 유기체적 세 계관 속에 포섭하고 분류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인간으로부터 전체 자연에 이르는 그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려고 했고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써 파악하려고 했다. 인간 사회를 둘러 싼 모든 현상들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구성하고 그 체게 안에서 해석하는 방식(천인 관 계에 대한 설명)은 당시의 사상가와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오랫동안 중국 인들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천인감응의 우주 질서 속에서 천과 인은 서로 교감과 영향을 받기 때문에 군주가 실정을 했을 경우 천이 재이(재이)를 내려 유덕하고 인자한 군주에게 권력을 승계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권력을 승계한 군주는 천도를 볻받아서 인정 을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천인 감응의 구조 속에서는 권력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천은 군주에게 최고의 권력을 허용하는 대신에 올바른 정치의 책임을 부과하여 한 대 군주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군주의 권력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통용되는 사 고 체계인 천인 감응론을 통해 유가 사상의 덕치주의와 전제 정치라는 현실과 결합을 시 도함으로써 유가 사상이 제국의 학문이 되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