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동중서(董仲舒) -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35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5. 17.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35

 

 

 

 

 

 

 

  동중서(董仲舒 출생, 사망 미상)는 한 무제 시대의 유학자로서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는 데 이바지했고, 특히 유교 철학과 음양 사상을 통합한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다. 주요 저서로는 동자문집, 춘추번로등이 있다.

동중서는 한나라 초기 제자백가들로 사상계가 혼란스럽고 도가 사상이 유행할 때 유교의 터전을 굳건히 한 대표적인 유학자다. 한나라 무제 때 그의 의견이 수렴되어 유교 사상이 국학으로 채택되면서 교육과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이후 중국의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는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 오늘날의 허베이 성) 출신으로 출생연도가 불분명하지만 대략 무제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무제보다는 이른 시기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유교 경전 중 한 가지를 공부하던 풍조에 따라 동중서는 춘추(春秋)를 전공했다. 그러나 그 밖에도 다수의 유교 경전을 연구하여 학문의 깨달음이 매우 깊었다. 그의 행동은 도덕군자와 흡사했으며, 배움과 행동이 일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동중서는 한나라 경제 때 박사가 되어 활동했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장막을 치고 그 안에서 강의한 후 장막 안에서 그에게 강의를 들은 제자가 다음 제자에게 그 내용을 다시 강의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스승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제자도 있었다고 한다. 사기에는 그가 3년 동안 장막 안에 머물며 자신의 정원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강의에 열의를 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중서는 사람들에게 한 대의 공자라고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경제 시절에는 크게 중용되지 못했다. 이는 문제와 경제 시대에 유교가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국된 이래 문제와 경제 시대까지 약 60여 년간 한나라를 지배했던 사상은 황로 사상(黃老思想)이었다. 이는 황제와 노자의 준말로, 특히 정치나 군사에 노자의 사상이 적용된 것을 일컫는다. 한나라는 진나라 이후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을 겪으며 민생이 피폐해진데다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위(無爲)’를 내세웠다. 조정이 백성을 되도록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41년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형들을 제치고 황위에 오른 무제에게는 기존의 지배 이념인 황로 사상이 적합하지 않았다.

  무제가 즉위했을 때는 문경의치라는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경제가 회복되고 국력도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북방의 흉노족과 지방의 제후 세력 등이 여전히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다. 무제는 국가를 하나로 통치할 만한 새로운 지배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각지에 인재들을 추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때 추천된 인재가 100여 명에 달했는데, 무제는 직접 그들을 시험하여 10명을 선발했다. 무제는 그들에게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할 대책을 올리도록 했고, 동중서와 공손홍(公孫弘)이 주목을 받으면서 결국 유가 사상이 채택되었다.

  승상 공손홍은 인재 등용에 있어서 법가나 종횡술을 연구한 사람은 모두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동중서는 춘추에는 고금의 일과 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 먼저 유가 사상을 춘추로 통일하고, 유가 사상 이외의 모든 학설은 폐지해야 사회가 통합되고 민생도 안정을 찾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무제는 동중서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자백가 사상을 축출하고 오로지 유가 사상만을 숭상한다.”라고 명하고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았다. 춘추번로(春秋繁露)에는 동중서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유가, 법가, 음양가(陰陽家) 사상을 적절히 버무려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다.

  먼저 동중서는 하늘이 자연과 인간을 주관하며, 개인이나 나라의 길흉화복은 모두 하늘에 의해 결정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 하늘과 인간이 교감한다)과 음양오행설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유가 사상을 종교화했다. 특히 개인이 교화될 때는 공자와 맹자에게 용기를 얻고, 그들을 도덕적 완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황제는 백성들 위에 있으며 황제의 권력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모든 백성은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는 한편 황제의 권한에도 제약을 두었다. 황제는 현명하고 유능해야 하며 백성을 사랑과 은혜로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하늘의 뜻을 지키는 것으로 만약 황제가 이런 천명을 저버린다면 왕권은 상실되고 백성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자의 군왕은 군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주장을 임금은 신하의 근본,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라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변경했다.

  동중서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유교의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동중서는 계속되는 전쟁과 노역 그리고 지배 계층의 사치와 낭비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동중서는 귀족들이 사유 경작지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행위를 억제하고, 소금이나 철 등에 대한 권한을 백성들에게 주며, 세금과 노역을 줄여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관리들이 백성들을 함부로 착취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제재하고, 관리는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민생 안정을 위한 동중서의 의견 대부분은 현실성이 떨어져 정책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동중서는 중앙 관리로서는 크게 중용되지 못했는데, 이는 그와 함께 발탁되어 승상이 된 공손홍과 반목했기 때문이다. 공손홍은 학문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하자 그를 시기했으며, 동중서 역시 공손홍이 아첨하는 자라고 여겼다. 공손홍은 무제를 설득하여 동중서를 교서국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당시 교서국의 왕은 무제의 형 유단(劉端)이었는데, 그는 성격이 포악하고 방탕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유단은 동중서의 군자다운 모습과 학식에 반해 그를 존중했다.

  동중서가 교서국에 있던 어느 날 요동(遼東)의 고제묘(高帝廟)와 장릉(長陵)의 고제원(高帝圓), 즉 한 고조 유방의 사당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자 인간의 악하고 선한 행동이 자연재해를 일으킨다는 재이(災異)’에 대해 논하기를 즐겼던 동중서는 이 이론을 토대로 화재 원인을 밝히는 글을 썼다. 동중서는 이 글을 올리지 않았지만 그를 미워하던 주부언(主父偃)이 글을 무제에게 올렸다. 무제는 글쓴이가 동중서임을 밝히지 않고 유생들에게 글을 평가하도록 했다. 이때 동중서의 제자 여보서(呂步舒)가 스승의 글인지도 모르고 글이 근거 없고 저속하다며 비방했다. 이에 동중서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사형되기 전 무제는 그를 사면했고, 그 후 동중서는 재이 사상과 관련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 동중서는 병을 핑계로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저술과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그러나 조정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무제는 정위 장탕(張湯)을 동중서의 집에 보내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무제는 동중서의 유교 사상을 수렴하여 유교를 숭상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무제는 유교 경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교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나라의 강력한 법치주의를 함께 구사했다. 무제는 유교를 표방한 철권 통치, 전쟁 준비를 위한 소금과 철기 국영화 등의 경제 정책과 유교 경향의 문화·교육 사업 등을 함께 추진했다. 무제의 시대는 동중서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정책화함으로써 유교가 중국의 국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유교는 2천 년 동안 국교의 지위를 굳건히 지켰다. (출처: 다음 백과 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