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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나는 왜 햄릿이라는 캐릭터에 그토록 짜증이 났을까?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5. 3.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33
 
 
때맞춰 내리는 비, 처럼 이 나이에 다시 캠퍼스로 돌아온 나에게 아주 많은 것들이 예사일이 아닌 것처럼, 내 심장을 관통해 무엇인가 다른 색깔들로 나를 물들이는 것만 같다. 예전과 상당히 다르게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이 활짝 열린 듯도 하고, 이러한 기쁨을 뭐라 설명할까? 하늘은 흐리지만 창밖 소나무 끝에 매달렸던 작은 새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것처럼, 내가 이 모든 깨달음에 의해 가볍게 가볍게 우주를 활공할 수 있을  같다. 어쩌란 말일까, 이 낯설고, 그러나 축복이 분명한 이 기쁨을!!!
 
 

 
 
 
 
나는 왜 햄릿이라는 캐릭터에 그토록 짜증이 났을까?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최고의 문학 평론가로 평가되는 해럴드 블룸(Harold Bloom1930년 7월 1일 - 2019년 10월 14일/ 89세)은 “내면의 빛에 비추어” 읽어볼 만한 장·단편 소설, 시, 희곡을 제시하며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휘트먼, 프루스트를 거쳐 윌리엄 포크너, 코맥 매카시까지를 거론하는데 그중에서도 셰익스피어를 역사상 최고의 작가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작가라며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서양 문학 정전의 중심이라고 평하는데요. 심지어 문학적 위력이라는 측면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성경에 유일하게 맞먹는다고 단언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세속적인 차원의 성서로 간주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문학적 위력이라는 면에서 그는 성경에 맞먹는 유일한 인물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일평생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셰익스피어를 옹호하며 살았다고 해요. 또한 블룸은 햄릿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괴테를 말할 수 없이 괴롭혔는데 멋진 '파우스트' 2부는 셰익스피어, 특히 '햄릿'을 자주 패러디했다고 말하며 셰익스피어만큼 인간을 창조할 수 없었던, 파우스트를 포함한 인간의 표상을 무엇엔가 빗대어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괴테의 파우스트를 햄릿과 나란히 놓고 보면 좀비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괴테의 작품 속에는 셰익스피어가 숨어 있는, 그야말로 파우스트는 햄릿의 패러디라고 일갈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젊은 시절 하도 유명한 작품이니까, 셰익스피어 정도는 읽어야지, 라는 의무감으로 읽었던 햄릿과 맥베스를 영화와 정신분석이라는 수업을 통해 다시 읽게 되었고, 이제 비로소 블룸이 왜 그렇게 셰익스피어를 추앙했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특히 부끄럽게도 햄릿의 캐릭터에 대한 저의 편견이 저의 무식의 발로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좀 부끄럽기도 해요.
  햄릿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저의 편견, 괴테가 햄릿의 캐릭터를 해석할 때 햄릿은 사고(사유)를 너무 많이 해서 클로디어스에 대한 복수를 쉽게 하지 못했다고 했고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햄릿의 캐릭터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였음을 깨달았어요. 즉 지나친 생각에 휩싸여 결정하지 못하는, 햄릿 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결정 장애를 겪고 있는 햄릿이란 캐릭터에 한편으론 짜증까지 났다면 이건 순전히 괴테나 뚜르게네프의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인 저의 무식함에 기인했던 거죠.
  담당 교수님은 프로이트의 햄릿에 대한 캐릭터 분석을 제시하셨는데요. 프로이트는 햄릿이 행동할 수 있는 캐릭터였으며 그 증거로 자신의 연인 오필리아의 아버지 플로니어스가 자신을 염탐하는 것을 알고 그를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옛 학교 친구들인 로젠크란츠와 길덴슈테른이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죽이려 하는 비밀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 후에 그들을 자기 대신 죽게 하는 행동하는 인간이었다는 주장을 하죠.
  더불어 프로이트에 의하면 햄릿이 국왕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기를 망설이거나 두려워했던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한 클로디어스의 행동은 마치 자기 자신이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은 자신의 내면에 억압되어있는 무의식과 같은 행동을 한 클로디어스를 벌하지 못하는 또 다른 자아의 자기 비난, 양심의 가책 때문이라는 해석을 한답니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러한 햄릿이라는 캐릭터,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걸린 햄릿이라는 캐릭터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의 신화의 비극이 우리 인간들의 전형적 유형을 살피는데 아주 유용하다는 인식을 설파하는데요.
이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접하면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제 개인적으로는 천지개벽이 될 만큼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제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평생을 억압해왔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보였던 거죠.
  어느 날 제 여동생이 무심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언니에게서 가끔 아빠가 보여.” 저는 여동생이 지나가듯 했던 이 말이 꽤 기분 좋았어요. 아버지는 제 우상이었거든요. 1989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지 34년이 지났는데 저는 아직도 아버지를 못 보냈는데, 즉 아직 애도다운 애도를 못했는데, 제가 현재까지도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라는 성이 무너지면 제가 기댈 곳이 없다는 느낌이었어요. 마지막까지 저를 지켜주어야 할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아버지여야 했죠. 이 느낌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 이면, 더 깊은 곳엔 바로 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는 것을 바로 영화와 정신분석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이순을 넘은 저는 아직도 어머니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어요. 가끔 남편에게, 혹은 친구들에게 떠는 애교마저 어머니에게는 인색하기만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 심리적 병을 앓고 있는데요. 이러한 제 성격에 대해 죄의식까지 동반되어 부끄럽기도 했고, 양심의 가책이 때론 저를 비난하게 되고 급기야 제 성격의 문제성에 꽤 많은 고민도 했는데요. 왜 다른 사람들처럼, 혹은 제 동생들처럼 어머니를 살갑게 대하지 못할까, 단지 어린 시절 저를 방치한, 외할아버지의 손에 저를 맡긴 어머니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일 거라고, 그 트라우마가 아직까지도 저를 지배하고 있구나, 라는 지점까지는 알고 있었고, 조금은 저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이번 프로이트를 공부하면서, 제가 아버지를 향한 오이디푸스적 내면이 어머니와의 사이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닫는 계기가 된 셈이죠. 아버지를 향한 제 마음이 어머니를 향한 질투를 넘어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원망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구나, 이런 분석까지 이르게 되네요.
  이렇듯 내면에 억압되었던 저의 성향들이 햄릿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햄릿의 캐릭터에 짜증나고 답답했던 원인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도달했고 이것은 바로 심리학 용어로 햄릿에게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저를 “투사”했던 셈이었는데,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 저는 또 어떤 단계를 거쳐 제 마음속에 찌꺼기로 남아 있는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정신과 상담을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뭔가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인데, 오이디푸스 왕처럼 자기 자신을 벌할 수도 없고, 누가 알려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