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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18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4. 10.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18
 

 
 
 
  독서 모임 필담의 회원으로서 첫 책은 창비에서 출간된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이었다. 2023년 첫 모임 날이 4월 3일이었던 고로 꽤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젊은 시절 현기영의 몇몇 작품들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었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독서 모임 덕분에 다시 읽어보며 깜짝 놀랐던 것은 작가의 혜안이었다.
  물론 순이 삼촌이라는 작품이 제주도 4.3사건을 소재로 택해 사건을 이슈화했던 첫 출발이었던 점은 층분히 알고 있었고 작품의 문학적 성취 또한 긍정하지만 이번 계기로 새롭게 다가왔던 작품은 <소드방놀이>와 <해룡 이야기>였다.

  소드방놀이는
  “큰 흉년이던 계축년 3월, 정의 고을에 진휼이 실시되어 기민에게 죽사발을 돌리던 날, 같은 시 같은 곳에서 기민창 색리 윤관영이 부형을 받았다.” 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색리라는 관직은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의 향리층 아전으로 요새 같으면 9급 공무원에 해당할까?
  색리 윤관영은 사또의 사창미(社倉米)를 축낸 벌을 대신 받게 되는데 소드방놀이라는 가벼운 벌만 받으면 된다는 사또의 약속을 믿지만 끝내 백성들의 돌팔매질에 의해 애꿎은 목숨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어리섞은 윤관영,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또의 대속물로 점찍혀버린 지금 밤도망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사또의 청을 거절했다간 달리 무슨 죄로 또 옭아맬지 모를 일, 결국 사또의 처분만 바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30쪽)
  윤관영의 죽음은 바로 그의 의식의 문제였다. 그의 죄가 그저 콩고물을 얻어먹었을 뿐이라는 그의 변명은 물론이고 사또에 대항하지 않고 사또의 처분만 바랄 수밖에 없었던 그야말로 노예근성이 그의 죽음을 초래한 것인데 왜 나는 이즈음 우리나라의 정치적 국면들과 오버랩 되는지 모르겠다.
주가 조작 사건이라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50억을 받고도 무협의 처분이 내려진 누군가를 비롯한 우리의 정치인들, 서민들이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대한 액수를 횡령하고도 재벌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는 재벌들, 참으로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탁월한 상상력과 상징성, 시대를 꿰뚫는 작가의 혜안에 박수를 아니 보낼 수 없었다.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나의 용량으로는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혼란의 시기에 내가 취해야 할 현실의 태도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이 책 속에 다른 단편 <해룡 이야기>
  주인공 증호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
  그건 찌든 가난과 불행의 대명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슨 흉년은 그렇게 잦던지 한해 걸러 한번씩 하늘에서 큰 가뭄이 내리덮쳤다. 보리철이면 보리 여물기 전에 누렇게 황이 들기 일쑤요, 조갈이 들 때는 뼘 크기도 못 자란 어린 조들이 뻘겋게 타들어 죽곤 했다. 그러다가 큰 난리가 들이닥쳐 많은 사람들이 한탈한시에 떼죽음을 당하고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 마을이 나중에 재건되었다지만 한번도 찾아가본 적이 없는 증호의 상상 속에서 여전히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되었던 폐허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꺼먼 먹칠로 지워진,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 총소리와 불에 미쳐버린 동네 개들만이 아직도 죽은 가축들 사체나 소개 내리지 않고 몰래 남아 있다가 총 맞아 죽은 사람 송장들을 뜯어 먹으며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책 149쪽)
  증호는 그런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며 촌스러운 고향 사투리마저 훌훌 떨쳐버리고 남다른 정열로 열심히 서울말을 하고 눈칫밥 먹으며 서울말로 비굴하게 아첨하는 법까지 터득해 남편의 본적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고 본적까지 바꾸는 서울 사람이 되었다.
  증호의 어머니는 난리 시절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을 살리기 위해 서북 토벌군의 첩이 되었다 남은 평생 자격지심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반감이 실은 마땅히 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 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깨닫게 된다,
  천재지변과 같이 막강한 가해자들, 그들에게 분노나 증오를 품는 것은 마치 천둥벼락에 적개심을 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허망한 노릇이었다. 고향 섬 해변을 수시로 침범하여 섬 여자를 약탈, 겁간, 살인을 자행하던 왜구들이 전설 속에서 해룡(海龍)으로 묘사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인 해룡, 해룡에게 먹히는 사람들은 다 팔자소관일 뿐, 해룡에 대한 적개심은 털끝만큼도 없다, 오직 덜덜 떨리게 두려울 따름이다. 피 묻은 흰 저고리와 시푸른 군복이 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것은, 그러니가 분노도 증오도 아닌 바로 겁이었다.(책 163쪽)
이제 증호는 주늑 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겁낼 게 아니라 불같이 노여워하고 무섭게 증오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주눅 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다. 해룡(海龍)의 탈을 벗기고 그 흉측한 정체를 알아봐야겠다. 막연히 육지 토벌군이니 서북군이니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인명과 사례를 알아보자. 오늘 당장 고향 녀석들 모이는 데, 이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해룡(海龍)에 대해서 얘기하고, 듣고, 되새기자. 다음부터는 모일 때마다 각자 사례를 한가지씩 취재해가지고 나오도록 하면 어떨까? 각자 가슴속에 묵혀둔 피해 의식을 떳떳한 증오로 바꾸기 위해서, 그러나 증오가 보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서” (책 163 – 164쪽)
  라며 책은 증호의 용기와 그 실천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일본의 만행에 대해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이건만, 현 국민을 대변하는 위정자의 태도가 참으로 한심하고도 비통하다. 다음 선거까지 남아있는 날들이 때론 걱정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용서하지만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순이 삼촌>
  깊은 우울증과 찌든 가난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고향을 8년 만에 방문한 나(화자)는 자신의 집에서 1년 동안 가정부 생활을 하던 순이 삼촌이 자살을 했고 2주 만에 발견되었는데 사체가 발견된 장소는 다름 아닌 삼십년 전 동네 사람들이 몰살 당했던 옴팡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순이 삼촌의 과거를 알게 되며 순이 삼촌의 죽음을 되짚어본다.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러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지를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아직도 출퇴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신이 딸네 모르게 서울 우리 집에 올라온 것도 당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옴팡받을 팽개쳐보려는 마지막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책 94쪽)
나는 순이 삼촌의 죽음이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고 삼십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삼십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고향을 등지고 살았던 화자가 순이 삼촌의 자살을 통해 어떤 깨달음을 얻었고 화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화자의 미래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열린 결말을 주며 이야기는 끝난다.
나는 순이 삼촌의 자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살아내야지, 견뎌 증언자가 되어 발설해야지라며 아쉬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하다.
  난 순이 삼촌을 읽으면서 피터 한트케의 <소망없는 불행>을 떠올렸다.
  피터 한트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자살 후 자신의 어머니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한 인간이 자아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인 여자의 삶은 오스트리아 역사와 뒤엉켜 그야말로 질곡이 많은 형태로 그려지지만 감정이 절제된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소망없는 불행을 읽으며 나는
  “외로움과, 욕망과 가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여자의 전투는 왜 이렇게 쓸쓸한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마지막 희망은 “여자의 자살”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살에 찬성하는 쪽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에 대한 욕망과 소망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했던, 그러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를 충족치 못했던 루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자살”이라는 형태가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한 위로의 유일한 방법이자 마지막 욕망의 실현이었음에 쓸쓸하지만 박수를 보내고 싶은“이라는 말로 독후감을 적은 적이 있었다.
  순이 삼촌의 죽음과 한트케 어머니의 죽음은 역사에 희생된 개인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한트케의 어머니는 보다 진취적인,사고의 흔적을 보인다.
  즉 “난 항상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으면서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좀 약해지고 싶었단다.”라는 고백을 이끌며 결국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란 결론에 이르러 자살을 하게 된다.
  그렇다, 자살이라는 결과물은 같지만 자살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는 달랐다. 괴로움에 매몰되어 이르는 순이 삼촌의 자살보다는, 어떤 자각에 이르러 선택했던 죽음이었기에 한트케의 소설 속 어머니의 죽음 쪽이 내 사유를 당겼다. 마지막까지 싸워야 할 운명 앞에 나는 과연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 더 깊고 넓게 생각해보자,
  독서 모임 필담의 회원이 되어 앞으로 함께 읽을 책들을 통해 나는 어떤 발견과 고민을 하며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꽃비가 내린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가만 세계를 응시한다. 너와 내가 만나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기꺼이 나아가보자,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