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손재준 옮김/열린책들), 490쪽에 달하는 필사를 완성했다. 팔이 좀 아팠지만 이 뿌듯함이란!
왜 하필 릴케의 시선집이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난 꽤 문학적이었다, 릴케를 위시해 하이네, 예이츠, 워즈워스, 휘트먼과 같은 시인들의 시집을 자주 읽었고, 감상에 젖어 몇 편은 암송하고 필사를 했었다. 사대가 아닌 문과 계열을 택해 시인이 되고자 했던 꿈을 꾼 적도 물론 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시인이 되지 못한 나는 결국 ‘시’들과 멀어졌고……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도 난 자주 문학적이다. 그 즐거움은 내 일상의 반을 차지하고도 넘친다. 물론 소설 위주의 작품들을 더 자주 읽지만 때때로 비평서와 이론서, 혹은 철학서 같은 인문학 서적들을 병용하는 지혜를 가진 나이가 되었고 몇몇 작가들은 내 문학의 방향성을 맛보게 한다. 특히 평론가 신형철님의 수려한 문장에 설득력까지 갖춘 그의 글들과 마주할 때면 그 흉내라도 내고 싶은, 아직도 문학소녀이다.
두이노의 비가 역시 신형철님의 ‘인생의 역사(난다)’를 읽으면서 구입했는데, 좀 묵혀두었다 비로소 필사에 돌입하게 되었다.
‘두이노의 비가’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228권. 1899년부터 1922년까지 발표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여덟 권(<기도 시집>, <형상 시집>, <신 시집>, <후기 시집>, <진혼가>, <마리아의 생애>,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두이노의 비가>)에 수록된 시 중 170편에 이르는 작품을 선정한 시 선집이다.
책에 대한 신형철님의 글을 인용해 본다. (인생의 역사/난다)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최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손재준 선생이 옮긴 릴케의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다. 어느 번역들과는 달리 ‘성실한 실패작’이 아닌 이 책에서 릴케는 한국어로 시를 쓰고 있다. 수십 년 다듬어 왔을 번역을 여든이 넘어 세상에 내놓은 역자의 노고에 먼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이후의 시들 중 가장 위대한 것에 속한다는 ‘두이노의 비가’는 인간의 언어로 제기된 가장 심오한 질문이 있어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평전 ‘릴케’의 저자 볼프강 레프만은 그의 질문이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시대에 인간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요약했는데 ‘인간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백년 전 릴케의 목소리는 왜 이토록 간곡한 것인가, 또한 ”사랑의 절제‘를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을 소재로 하는 시들은 격정으로서의 사랑이 덧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안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역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문장들이다.
덕분에 내 서가에 있는 릴케의 오래된 책들, 삼성 출판사의 ‘말테의 수기’, 범우사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민예사의 ‘젊은 영혼이여 깨어 있어라’ 등, 옛 추억의 갈피들을 뒤적이며 내 젊은 시절의 열도를 되새김질도 해 보고, 그 오래된 책들의 냄새를 맡으며 희죽거려도 보고.
필사를 완성하고 나니, 비로소 백년 전의 릴케를 만나 가볍게 포옹을 하는 느낌이었다. 기도 시집에서 마리아의 생애까지는 좀 지루했는데,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와 두이노의 비가에 이르러서는 좀 재미가 나기도 했다. 내 몸이 기억하는 시들이었음 좋겠다는 희망이 봉긋 솟아오르는 아침의 태양만큼, 환했으면 좋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 – 1926)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는 보헤미아 출신답게 평생을 떠돌며 실존의 고뇌에 번민하는 삶을 살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 프라하의 독일계 가정에서 1875년에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불우한 삶이었다. 첫딸을 잃은 어머니는 릴케를 여자처럼 키웠으며, 군인 출신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5년간 군사학교를 다녀야 했다. 몸이 허약했던 릴케는 사관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으며, 프라하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학청년이었던 릴케는 뮌헨 대학교로 적을 옮긴 후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정신적 문학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루 살로메와의 두 차례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릴케는 독일 화가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하였다. 그곳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가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게 되고, 로댕의 제자였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하였다. 그 후 릴케는 파리로 가 로댕의 조수가 되었으며, 세잔의 작품에 탐닉해 그 구도적 작가정신을 닮으려 하였다. 파리 생활의 체험은 자전소설 《말테의 수기》에 담겼다. 러시아 여행의 성과는 《기도시집》, 보르프스베데 시대에 주로 쓴 시는 《형상시집》과 《신시집》으로 묶였다. 방랑의 삶을 계속한 릴케는 1922년 장편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하고, 51세가 되던 1926년에 스위스의 요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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