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난 후에 느리게 도착하는 어수선하고 기꺼이 미완성인 편지들...
1968년 태어난 프랑스 알베르빌 태생의 막상스 페르민 (Maxence Fermine)은 1999년 “눈”의 큰 성공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고, 같은 해 “검은 바이올린”을 출간했으며 이듬해 발간한 “꿀벌 키우는 사람”으로 2001년 델 두카상과 뮈라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삼부작이라고 알려진, 눈, 검은 바이올린, 꿀벌 키우는 사람을 함께 구입. 나는 “눈”보다도 “검은 바이올린”에 더 끌려 먼저 읽었다.
소설의 형식을 허물고 자신만의 장르를 새로이 만들어가는 작가 막상스 페르민의 컬러 3부작 중 “눈”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 “눈”에서 백색의 설국을 그려냈다면 “검은 바이올린”에서 페르민은 첫사랑의 목소리를 담은 흑단 바이올린의 이야기를 특유의 몽환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줄거리)
사람들에게 음악가로 알려진, 음악가 이상으로 거의 신적인 천재, 남몰래 지극히 숭고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하늘에 자신을 보여주고 하느님께 말을 걸고 싶어하는 주인공 요하네스 카렐스키, 그의 영혼은 광기에 가까워지곤 하는 이상한 성향이 있었고 그 성향으로 인해 그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을 갖게 됐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인 영혼을 음악으로 옮기는, 미완성 악보인 자신의 영혼을 매일 조금씩 더 천재적으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8쪽)
요하네스에게는 두 가지 능력이 있었다. 자신의 소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떨릴 때 들을 수 있었다. 새벽부터 일몰 때까지 날마다 그는 예술에 전념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자신의 감정들에 귀 기울이며 하루 내내 눈 감고 지낼 때도 있었다. 자기 자신과 음악에 빠져 있었지만 요하네스는 누구보다 세상을 잘 볼 수 있었다. 마음의 빛을 향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10 –11쪽)
다섯 살 때 요하네스 카렐스키는 우연히 한 집시 바이올린 연주자를 만난다. 그는 발로 박자를 맞추며 아주 신나는 곡을 연주했는데 어린 요하네스는 입을 벌린 채 유령을 보듯 떠돌이 음악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처음 듣는 음악에 취해 한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집시가 대단한 바이올린 연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영혼의 힘을 갖고 있어서 악기로부터 뿌리째 뽑아낸 음들이 심장에서 뽑아낸 것 같았다. 악기의 비명에 연주자의 음성이 들어있었고 그 음성 속에는 세상 모든 집시들의 뿌리 뽑히는 고통들이, 행복과 기쁨의 외침들이 들어있었다. 요하네스는 그 음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집시도 바이올린 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자기와 같은 과라는 걸 알아보았다. 요하네스도 음악가들의 영혼들의 나라의 일원이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서정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폴로네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곡은 소수의 전문가만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요하네스는 그 음악이 자신의 언어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구사할 수 있던 유일한 언어였다. 그 언어만이 그와 세계를 영원히 연결해줄 것이었다. 주의깊게 들으며 그는 전언을 읽었다. 집시는 연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있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몽상 속으로 들어갔다. 보헤미아 지역의 길들이 보였다. 눈 쌓인 전나무들과 불가에 불침번들이 보였다. 여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마을을 떠도는 것, 고통이라는 것, 궁핍과 배고픔, 추위와 외로움, 모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열리는 문이 주는 위안, 집안의 따뜻함, 주고받는 미소, 마을 사람들의 인정, 마음에 다시 온기를 주는 음악, 웃음들, 가끔 생겨나는 사랑에 대해서도 느끼게 되었다. 요하네스는 그 모든 것을 보았다. 그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연주를 마친 집시는 동냥을 했다. 쇠그릇이 몇 번 은빛 소리를 냈다. 집시는 아이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꼬마야, 너의 열중하던 눈빛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주었단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왔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날 이후 요하네스는 자신에게 음악이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두 해가 지나고 요하네스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13 – 15쪽)
요하네스의 나이 서른 한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3월에 소집 통지서를 받고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하는데 꿈결처럼 검은 망토를 입은 기마병 차림의 여인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이 어둠 속에서 금빛 불꽃처럼 보였고 종말 같은 배경 속에서, 불안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노래가 너무 순수하고 매혹적이어서 요하네스는 아픔을 잊었다. 그녀는 오직 그를 위해 오래 노래했다. 밤새. 노래가 끝나고 그녀가 그에게 입맞춤을 했고 입술들이 맞닿았을 때 요하네스는 꿈들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35쪽)
프랑스 군대를 따라 요하네스는 베네치아에 도착해 에라스무스의 집에 기거하는데, “지극히 숭고한 오페라를 작곡하여 하늘에 자신을 보여주고 하느님께 말을 걸고 싶어”한 요하네스와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만들어 하느님과 소통하기”를 꿈꾸었던 에라스무스, 닮은꼴의 두 영혼의 만남은 운명이었고 요하네스는 에라스무스로부터 그의 인생과 그가 소유한 검은 바이올린, 결코 연주해서는 안 될 바이올린, 한번 연주하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검은 바이올린과 그 안에 담긴 여인의 목소리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된다.
“그 바이올린은 단 한 줄도 스치지 말게.”
“왜요? 연주하기에는 형편없나요?”
“정반대일세! 내가 아는 최고의 악기네. 단 하나의 숨결에도 반응하지. 다만 악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너무 묘한 것이 연주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네. 행복이 그러하듯. 한번 행복을 맛보면 행복의 낙인이 찍히지. 검은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일세. (61 – 62쪽)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바이올린으로 만들어 소유하려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이 “그녀를 영원히 잃고, 나 자신도 파괴”하게 된 에라스무스. “아무리 작곡을 해도 현실에는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오페라를 계속해서 써내려 가는 요하네스, 결국 31년에 오페라의 마지막 박자에 손질을 한 날, 그는 자신의 모든 작업이 헛된 일이었음, 누구도 에라스무스가 언급했으며 요하네스의 꿈속에 나타났던 여인, 카를라 페렌치처럼 노래할 수 없을 것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광기에 아주 가까워지곤 하는 이상한 성향으로 인해 요하네스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음표들을 적어온 노트를 벽난로에 던진다. 그리고 자신의 일생의 작품이 불길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다.
“됐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이야기과 결별했다.” 그는 침대에 누웠다. 몸은 지쳤으나 영혼은 차분했다. 영혼이 차분해진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천재나 광인에게만 더해지는 영혼을, 자신의 오페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날 밤, 요하네스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깊은 잠 속에서, 꿈의 온기 곁에서. 그리고 영원히 아무도 몰랐다. 그가 천재에게만 더해지는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159 – 160쪽)
사랑도 예술도 소유했을 때 행복할 것이라는 우리 시대의 착각, 소유할 수 없는, 다만 존재하는 사랑과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몽환적인 문체로 사유하는 막상스 페르민의 다음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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