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태양/기병대/이사크 바벨/지식을만드는지식
나는 어제 옐리자 부인의 하인 방에 다시 앉아 있었다. 그곳엔 초록빛 전나무 가지로 만든 정다운 화관이 걸려 있었다. 나는 툴툴거리며 활기차게 타오르는 따뜻한 난로 옆에 앉아 있다가 늦은 밤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절벽 아래 흐르는 즈브루치 강은 검은 유리 같은 물거품의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불에 탄 도시, 토막 난 기둥들과 심술궂은 노파의 꼬부라진 새끼손가락처럼 움푹 파인 대지는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꿈처럼 아늑하고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달의 적나라한 광채가 도시로 집요하게 내리꽂혔다. 폐허에 축축하게 핀 곰팡이는 대리석으로 만든 오페라용 의자를 상기 시켰다. 그리고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구름 뒤에서, 얇은 비단옷을 입고 사랑을 노래하는 로미오의 출현을. 이때 무대 뒤에서는 슬픈 전기기사가 달을 켜는 스위치를 누르고 있으리라.
마치 여러 젖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젖 줄기처럼 푸른 길이 내 옆을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시도로프와의 만남이 두려웠다. 내 이웃인 그는 밤마다 슬픔이 돋아난 털복숭이 앞발을 내게 내밀어댔다. 다행스럽게도, 우윳빛 달빛이 내리비추던 그날 밤 시도로프는 한마디도 내뱉질않았다. 그는 책들에 둘러싸여 글을 쓰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구부러진 초 한 자루가 몽상가의 우울한 모닥불처럼 그을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다는 쪽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고양이처럼 변덕스레 갑자기 장면이 바뀌는 개꿈을 꾸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시도로프를 사령부로 부르러 온 전령이 나를 깨웠다. 그들은 함께 나갔다. 그러자 나는 시도로프가 글을 쓰던 책상으로 달려가 책들을 들추어보았다. 그것은 이탈리아어 자습교재였는데, 포로 노마노와 로마시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는 십자가와 점 표시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글자로 가득 채워진 종이에 몸을 숙이고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다른 사람의 편지를 읽어 나갔다. 비통에 빠진 살인자 시도로프는 장밋빛으로 가득찬 내 공상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자신의 광기로 채워진 사색의 통로로 나를 끌고 갔다. 편지는 두 번째 장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부분을 찾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폐 한쪽이 관통당했고 정신이 조금 이상해졌어. 세르게이 말처럼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지. 미쳐버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원래 바보 같은 정신이 제자리를 찾은 것일지도. 하지만 사족은 그만두겠네. 농담도 그만두고. 내 친구 빅토리야,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나는 3개월 동안 마흐노 잔당 토벌을 수행했지. 그것은 진저리나는 기만행위 그 이상은 아니었어. 볼린은 아직도 거기에 있지. 볼린은 사도의 사제복을 차려입고 레닌에서 무정부주의로 기어가고 있지. 끔찍한 일이야. 그런데 마흐노는 그 녀석 말을 듣는 도중 먼지투성이의 제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썩어빠진 이 사이로 촌뜨기 같은 웃음을 흘려보내고만 있지. 이 모든 것에 순수한 무정부주의가 있는 건지 지금 나는 잘 모르겠어. 바로 제멋대로 수도라고 이름 붙인 하리코프에서 만든 자칭 중앙위원회의 자칭 중앙위원이라는 사람들의 진실을 우리가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솔직 담백한 자네 친구들은 자기들의 사상이 무정부주의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이제 생각도 하기 싫어하면서, 국가 차원의 판단이라는 미명 아래 그것을 비웃기만 하고 있지. 빌어먹을 놈들.
그 후 난 모스크바로 갔어. 어떻게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냐고? 녀석들이 어떤 사람을 징용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부당하게 대우했다네. 철부지인 내가 거기에 끼어들었고, 이 일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네. 상처는 별것 아니었지만, 아, 빅토리야, 모스크바로 보내졌지. 모스크바에서 나는 이런 불행을 털어놓을 힘도 없었지. 매일같이 병원 간호사들이 내게 곡물 죽을 가져왔다네. 존경심에 휩싸인 그들은 큰 쟁반에 그 죽을 담아 왔는데 나는 이 충격적인 죽과 무계획적인 보급과 계획적인 모스크바를 증오했어. 그 후 위원회에서 한 줌의 무정부주의자가 무리들고 마주쳤다네. 애송이들이거나 반쯤 정신이 나간 노인들이었어. 진짜 작업 계획을 가지고 그레믈에도 갔었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만 내가 완쾌하면 부관을 시켜주겠다더군. 나는 완쾌되지 않았지. 그다음 어떻게 되었냐고? 그다음은 전선이지. 기병대, 축축한 피와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점 냄새를 풍기는 군바리들. 날 구해줘. 빅토리야. 국가 차원 판단이란 것이 날 미치게 만들어. 따분해 죽겠어. 자네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아무 대책도 없이 숨 막혀 죽을 거야. 일꾼이 이렇게 제멋대로 죽는 걸 누가 원하겠어? 물론 자네들은 아니지. 빅토리야, 결코 아내가 되어주진 않을 약혼녀여. 이게 감상적이라면, 집어치우지.
이젠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군대에서 난 따분해. 부상 때문에 난 말을 탈 수가 없어. 즉 나는 싸울 수 없다는거지. 빅토래야, 당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줘. 난 이탈리아로 보내도록 말이야. 지금 말을 배우고 있는데 2개월 후에는 이탈리아어로 말할 수 있을 거야. 이탈리아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지. 거긴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어. 단지 총알 두어 발만 필요할 뿐이야. 그중 하나를 내가 소겠어. 거기 왈을 자기네 조상들한테 보내줄 필요가 있어.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유약한 아저씨인 그들의 왕은 잘 길들인 사회주의자들과 가정용 잡지를 위한 사진을 찍어대며 인기를 끌고 있지.
중앙위원회나 인민위원회분과 같은 곳에서는 왕을 쏘겠다는 말은 하지 말게. 자네 머리를 스다듬어주면서 ’낭만주의자‘라고 중얼거릴거야. 간단하게 말해줘. 그 남자는 병에 걸려 짜증만 내고 번민에 빠져 이탈리아의 태양과 바나나를 보고 싶어 할 뿐이라고. 알다시피 그 정도 자격은 있잖아. 그렇지 않을까? 요양만이라도 괜찮아! 만약 안 된다면 오데사 체카로 보내줘.
그쪽은 분별력이 있으니.
내 친구 빅토리야, 멍청하고 쓸모없는 것들만 내가 쓰고 있군, 미망처럼 이탈리아가 내 가슴속에 들어와 버렸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나라에 대한 생각은 여인의 이름처럼, 당신의 이름 빅토리야처럼 날 행복하게 만들지.“
편지를 다 읽고 나는 푹 파인 지저분한 내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벽 뒤에선 임신한 유대인 여자가 서럽게 울고 있었고, 깡마른 남편이 신음하듯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들은 모조리 약탈당한 물건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불행 때문에 서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후 새벽 무렵 사도로프가 돌아왔다. 책상 위에서 다 녹아버린 초가 꺼져가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시도로프는 군화에서 다른 양초 조각을 꺼내 심지에 덧붙였다. 우리의 방은 어둡고 침울했고, 밤의 축축한 악취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단지 달빛이 가득 찬 창문만이 구원처럼 빛나고 있었다.
번민에 싸인 내 동료 시도로프는 도착하자 바로 편지를 감추었다. 그는 웅크리고 책상에 앉아 로마의 화보집을 펼쳤다. 금박 장식의 화려한 책이 올리브색의 무표정한 그의 얼굴 앞에 세워졌다. 둥근 그의 등 위로 카피톨 언덕의 삐쭉삐쭉한 폐허와 석양이 비추는 원형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왕족들의 사진이 큰 광택지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달력에서 뜯어낸 종잇조각에는 허약하지만 상냥한 빅토르 엠마누엘 왕이 검은 머리의 왕비와 왕세자 움베르토, 그리고 여러 공주들과 함께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들리는 묵직한 종소리가 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습한 어둠에 잠긴 사각형 불빛 속에서 시도로프의 시체 같은 얼굴이, 초의 누런 불꽃들 위로 생기 없는 가면처럼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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