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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Lester Young의 편집 앨범 Lester Young with the Oscar Peterson Trio(1954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8. 1. 24.






Lester Young – tenor saxophone, vocals on Two To Tango
Oscar Peterson – piano
Barney Kessel – guitar
Ray Brown – double bass
                                                                                            J. C. Heard - drums




"Kansas City" 사운드라고 알려진 Lester Young(1909년 8월 27일 - 1959년 3월 15일)은 별명이 "Pres" 또는 "Prez"였던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포니스트이자 때때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음악가이며 카운트 베이시의 오케스트라의 멤버였던 영은 그의 악기로 가장 영향력있는 연주자 중의 하나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동료들이 딱딱한 연주로 몰아가는 것과 대조해 영은 좀 더 편안한 쿨 음색과 미묘한 하모니를 사용해서 "마치 춤추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낮고 펑키한 반복 악절을 쌓아 올리며 자유롭게 떠다니는 스타일, 마치 갈매기가 다이빙 하고 선회하는 것과 같은” 연주를 한다고 비평을 받기도 했다.

Young은 일반 사회 규범에 따르지 않는 불순응주의자이며 별명 프레스 Pres는 Billie Holiday가 그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그는 결정적인 술 때문에 결국 사망했지만 그가 사망한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 아직도 Pres는 영원한 테너 색소폰 거장 Coleman Hawkins, John Coltrane 등과 함께 시대의 음악가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오늘의 앨범 Lester Young with the Oscar Peterson Trio를 감상하겠는데 밴드가 트리오라고 잘못 진술한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오스카 피터슨 쿼텟을 동반한 1954년 레스터 영의 스튜디오 앨범이다.

이 앨범은 원래 3개의 앨범으로 나뉘어져 발매되었다.: Lester Young with the Oscar Peterson Trio #1 과 Lester Young with the Oscar Peterson Trio #2,(둘 다 1954년 6월에 발매되었고 MGN 5-6) 그리고 The President Plays with Oscar Peterson (1956년 4월 MGN 1054)이다. 이 앨범은 1997년 버브 레코드사에서 재 발매되었다.


링크할 곡은 레스터 영의 혼의 부드러움에 푹 빠지실 I Can't Get Started와 (I'm) Confessin' (That I Love You)와 유일하게 레스터 영이 보컬을 녹음했던 단 하나의 트랙 (It Takes) Two to Tango": Rehearsal, False Start and Chatter/ 아마도 잘못된 인트로 때문에 잡담을 하는 세션맨들의 리허설을 상상할 수 있으니 1952년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Lester Young의 편집 앨범 Lester Young with the Oscar Peterson Trio(1954년)

레이블: Norgran Records/ MGN 5/6/1054
Verve (reissue)
녹음일: 1952년 11월 28일
발매일: 1954년 6월 (MGN 5-6)
1956년 4월 (MGN 1054)
길이: 63:37
스타일: Cool/Mainstream Jazz
프로듀서: Norman Granz

Track listing
1."Ad Lib Blues" (Oscar Peterson, Lester Young) – 5:54
2."I Can't Get Started" (Vernon Duke, Ira Gershwin) – 3:41
3."Just You, Just Me" (Jesse Greer, Raymond Klages) – 7:40
4."Almost Like Being in Love" (Alan Jay Lerner, Frederick Loewe) – 3:34
5."Tea for Two" (Irving Caesar, Vincent Youmans) – 7:45
6."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 (Mack Gordon, Harry Warren) – 3:28
7."(Back Home Again In) Indiana" (James F. Hanley, Ballard MacDonald) – 7:04
8.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Dorothy Fields, Jimmy McHugh) – 3:27
9."Stardust" (Hoagy Carmichael, Mitchell Parish) – 3:35
10."(I'm) Confessin' (That I Love You)" – 3:41
(Doc Daugherty, Al J. Neiburg, Ellis Reynolds)
11."I Can't Give You Anything But Love" (Fields, McHugh) – 3:22
12."These Foolish Things" (Harry Link, Holt Marvell, Jack Strachey) – 3:27
13."(It Takes) Two to Tango": Rehearsal, False Start and Chatter – 6:06
(Al Hoffman, Dick Manning) Bonus track on CD reissue
14."I Can't Get Started" – 0:53 Bonus track on CD reissue

Performance
Lester Young – tenor saxophone, vocals on Two To Tango
Oscar Peterson – piano
Barney Kessel – guitar
Ray Brown – double bass
J. C. Heard - drums





https://youtu.be/a0ADg0A9mcY?list=PLZrLQA2ZDrraeDQtXGqESYOUZB0ZaGAff

















1.

Lester Young/Lester Willis Young (1909년 8월 27일 - 1959년 3월 15일)은 별명이 "Pres" 또는 "Prez"였던 미국의 재즈 테너 색소포니스트이자 때때로 클라리넷을 연주했던 음악가이다. 카운트 베이시의 오케스트라의 멤버였던 영은 그의 악기로 가장 영향력있는 연주자 중의 하나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동료들이 딱딱한 연주로 몰아가는 것과 대조해 영은 좀 더 편안한 쿨 음색과 미묘한 하모니를 사용해서 "마치 춤추는 사람들과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낮고 펑키한 반복 악절을 쌓아 올리며 자유롭게 떠다니는 스타일, 마치 갈매기가 다이빙을 하고 선회하는 것과 같은”이라는 비평을 받기도 했다.

즉 Lester Young은 Coleman Hawkins의 강력한 연주법을 채택하기보다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연주하는 완전히 새로 운 구상을 안출해 낸 재즈 거인중의 한 사람이다. Young은 일반 사회 규범에 따르지 않는 불순응주의자이며 프레스 Pres는 Billie Holiday가 그에게 붙여준 예명이다. 1950년대에 수많은 젊은 테너 주자들이 그를 따라 흉내를 냈다. 그는 그의 어린 시절을 New Orleans 근처에서 보냈지만 그는 그의 가족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1920년까지 Minneapolis에서 살았다.

그는 violin, trumpet, drums 등을 배우고 나서 13살에 알토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의 가족 밴드가 남부로 순회공연 하는 것을 거절하고, 1927년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 대신에 Art Bronson`s Bostonians와 순회공연을 하면서 알토를 테너로 바꾸었다. 1929년에 그는 그의 가족 밴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 후 몇 년 동안 자유계약자로 나섰는데 1930년 Walter Page`s Blue Devils, 1931년 Eddie Barefield, 1932-1933년 다시 Blue Devils, 1933년 Bennie Moten와 King Oliver 등과 활동하였다.

그는 1934년 처음으로 Count Basie와 만났다. Coleman Hawkins가 교체되어 나가고 Fletcher Henderson이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영 이 Hawk와 우열을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그리고 그의 느긋한 연주가 사이드맨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오래 있지 못 하였다. Andy Kirk와 투어를 하고 난 다음 1936년 Lester Young은 Basie가 동부로 떠날 무렵 때맞추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Young는 Basie와 같이 있는 동안 그의 녹음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Billie Holiday와 테디 윌슨 Teddy Wilson 등과 더부러 일련의 소규모 그룹 녹음에 출연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를 만들어 냈다. 게 다가 Basie와 Kansas City Six 등과 좀처럼 보기 드문 클라리넷 연주를 녹음하면서 Young은 1950년대 알토 Paul Desmond와 거의 같은 음색으로 서부의 오리지날 Cool 사운드를 들여 주었다. 그가 1940년 Count의 밴드를 그 만 두고 나온 뒤, 재즈계에서 그의 명성을 이용할 데가 없어 앞날이 캄캄하였다. 그는 1943년 12월 Basie와 재결 합하기 전까지 그의 동생, 드럼어 Lee Young과 함께 Los Angeles에서 유명무실한 밴드를 공동으로 리더 하였 다. Young은 Basie 밴드에 돌아와서 9개월 동안 베이스 주자 Slam Stewart와 같이 잊지 못 할 4인조 밴드로 녹 음도 하고, 그가 군대에 징집되기 직전 `Jammin` the Blues` 단편 영화에 출연하는 등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가 군대에서 소름끼치는 인종차별 대우를 경험하고 나서 여생을 살아가면서 정신적 심리상태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제대 후 Lester Young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건강에도 불구하고 4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가 사실상 그의 전성기였다. `40-`50년대 그는 때때로 J.A.T.P. (Jazz at the Philharmonic)와 투어를 하였는데 Norman Granz가 대우를 잘 해 주었다. 그리고 Aladdin에서 일련 의 멋진 녹음을 하였다. Young은 1930년대에 이미 익혀놓은 `비밥`을 자기 스타일에 맞게 잘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받고 있었고,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그의 다양한 어휘를 조용히 개발하였다. 1950년대의 그의 작품은 초기보다 정서적으로 심오하여 더욱더 그 질이 높아졌다. 그렇지만 그를 흉내내는 백인들이 장본인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보고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래서 그는 엄청나 게 많은 술을 마시고 거의 밥을 먹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1956년 작 Jazz Giants와 Washington, D.C.에 서 그는 4인조 밴드와 1957년 Newport Jazz Festival에서 마지막으로 재결합한 Count Basie 밴드와 함께 최고의 콘디션을 보여 주었다.

1957년 The Sound of Jazz TV 방송에서 그가 Billie Holiday에게 정서적인 불루스 솔 로 한 곡을 연주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Young은 거의 앉아서 연주하였다. 1959년 초 Paris에서 병이 나서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정적인 술 때문에 결국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까지 아직도 Pres는 영원한 테너 색소폰 거장 Coleman Hawkins, John Coltrane 등과 함께 이들 3인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2.

Oscar Emmanuel Peterson, CC, CQ, OOnt (August 15, 1925 – December 23, 2007) 은 캐나다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그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Duke Ellington에 으해 “키보드의 Maharaja”라고 불렸지만 그의 친구들은 단순히 “O.P.”라고 불렀다. 그는 200여개 이상의 녹음을 하였고 8전의 그래미상을 받았으며 수많은 다른 상과 영예를 안았다. 그는 가장 위대한 재즈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서 60년 이상 지속되는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콘서트와 공연활동을 했다.

피터슨은 현란한 독주 기법으로 매우 유명하며 캐나다의 팝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뒤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 흥행가 노먼 그란츠의 카네기 홀 연주회에 출연했다. 1950년대 내내 그는 레이 브라운(베이스), 어빙 애슈비(기타)와 3중주단을 이루어 그란츠의 재즈 팀과 순회 연주를 했는데 뒤에는 바니 케슬과 허브 엘리스가 브라운과 애슈비를 대신했다.

1950년대 후반 기타 연주자 엘리스가 3중주단을 떠난 후에도 그는 그 자리를 드럼 연주자인 에드 시그펜으로 대신하여 스윙과 비밥(초기에는 특히 아트 테이템과 얼 하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의 전통 속에서 꾸준히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루이스가 시그펜을, 샘 존스가 레이 브라운을 대신했다.

피터슨은 빌리 홀리데이, 로이 엘드리지, 디지 길레스피, 카운트 베시, 엘라 피츠제럴드 같은 재즈의 거장들과 함께 몇 차례에 걸쳐 장기간 유럽 연주여행을 하고 음반도 취입하면서 폭넓은 청중을 확보했다. 또한 단독으로 음반을 취입하거나 독주활동을 통해서도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그래미상을 3번(1974, 1975, 1977)이나 받았고, 캐나다 공로 훈장도 받았으며, 비평가들과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많은 여론조사에서 종종 최고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뽑혔다.

작품으로 〈재즈 연습곡과 소품 Jazz Exercises and Pieces〉(1965)·〈오스카 피터슨의 새로운 피아노 독주집 Oscar Peterson New Piano Solos〉(1965)이 있다.



3.

Barney Kessel (1923년 10월 17일 - 2004년 5월 6일)은 오클라호마 Muskogee에서 태어난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이다. 특히 그의 화음과 코드를 기초로 한 멜로디에 빼어난 지식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진 바니 케셀은 스튜디오 녹음, 영화 텔레비전 등에서 “처음으로 찾는” 뛰어난 재즈 그룹의 멤버였으며 the Wrecking Crew로서 알려진 비공식적인 음악가 세션 그룹의 회원이기도 했다. 모던 재즈 기타의 원형을 확립한 찰리 크리스찬(Charlie Christian) 이후 가장 대표적인 비밥 재즈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바니 케셀(Barney Kessel)은 1950년대 초반, 스윙을 기초로 한 비밥 재즈 기타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데뷔한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케셀의 연주를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기타 음에 대한 '명료함'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료함은 절제된 간결함과 리드미컬한 연주에서, 열정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그의 음악적 발자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23년 10월 17일 오클라호마(Oklahoma) 머스코지(Muskogee)에서 태어난 케셀은 십대시절부터 블루스와 재즈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14세 때, 전원이 흑인으로 구성된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했고, 같은 고향 출신의 찰리 크리스찬을 만나면서 그의 활동무대는 서서히 메인 필드로 옮겨가게 된다. 크리스찬은 케슬에게 항상 재즈 기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윙'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케셀의 연주에서 리드미컬한 멜로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이후 케셀은 '43년 치고 막스(Chico Marx), '44년 찰리 바넷(Charlie Barnet), '45년 아티 쇼우(Artie Shaw)가 각각 리드하는 빅 밴드들과 당시 최고 명성을 누리던 베니 굿맨(Benny Goodman)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46년에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요청으로 'Relaxin' at Camarillo'라는 곡을 녹음했으며, '50년대 들어서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앨범에 참여한 것은 그가 재즈 기타리스트로서 최고의 위치에 다다랐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52년에는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트리오의 일원으로서 당시 '머큐리(Mercury)' 레이블의 첫 번째 히트곡이자, 지금도 오스카 피터슨의 대표 곡으로 꼽히는 'Tenderly'를 녹음했다.

53년 케셀은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컨템프러리(Contemporary)' 레이블과 계약을 맺으면서 리더로서 자신의 앨범들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다운비트(Downbeat) 독자가 선정하는 기타리스트 부문에서 10년 간('63년 웨스 몽고메리(Wes Montgomery)에게 내놓기 전까지) 정상에 오르게된다. 이 시기(1953-61, 69년)가 바니 케셀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컨템프러리 레이블에서 내놓은 대부분의 앨범들, [Barney Kessel, Vol.1](1953), [Easy Like, Vol.2](1954), [Kessel Plays Standards](1954), [Music to Listen to Barney Kessel By](1956), [Let's Cook](1957), [Barney Kessel, Vol.3: To Swing or Not to Swing](1955), [The Poll Winners with Ray Brown and Shelly Mann](1957), [Some Like It Hot](1959), [The Poll Winners Ride Again](1959), [Poll Winners Three!](1959), [The Poll Winners / Exploring the Scene](1960), 그리고 바이브라폰 주자 바비 허처슨(Bobby Hutcherson), 드러머 엘빈 존스(Elvin Jones)와 함께 한 [Feeling Free](1969), 드러머 셀리 맨(Shelly Manne)과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과 함께 다시 트리오 형태로 발표한 [Straight Ahead](1975), 바비 허처슨, 피아니스트 케니 배론(Kenny Barron), 베이시스트 루퍼스 라이드(Rufus Reid), 드러머 벤 라일리(Ben Riley)의 5인조, 퀸텟 구성으로 블루스와 보사노바를 절묘히 혼합한 [Red Hot and Blues](1988) 앨범까지 모두가 손색없는 재즈 기타의 교과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스터 코니그(Lester Koenig)의 지금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정갈하면서 풍부한 음량을 담아낸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분명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다.

또한 케셀은 '60년대 팝 그룹 비치 보이스(Beach Boy) 앨범에서의 세션, '68년 조지 웨인의 뉴포트 올 스타스(George Wein's Newport All-Stars)와 함께 런던 순회공연을 다니며 폭넓은 활동을 펼쳤고, 이듬해인 '69년에는 바이올린 주자 스테판 그라펠리(Stephen Grappelli), 기타리스트 니니 로쏘(Nini Rosso)와 함께 [Limehouse Blues] 앨범을 내놓는 등 자신의 다양한 음악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70년대 들어서는 유럽에 근거지를 두면서 남서부 재즈 기타의 맥을 계속 이어갔으며, 그 중에서도 '74년 오스카 피터슨과 함께 해온 기타리스트 허브 엘리스(Herb Ellis)와 보사노바 재즈 열풍에 큰 일익을 담당했던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Charlie Byrd)와의 트리오 구성으로 협연한 실황을 담은 [Great Guitars] 앨범을 내놓기도 했다.

바니 케슬의 기타는 단순한 듯 하지만 들을수록 많은 언어가 내재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스윙과 블루스뿐만 아니라 펑키함과 강렬함 록적인 프레이즈, 그리고 한 음 한 음 녹아 내리는 인간적인 울림은 거대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소박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성향은 그에게 음악적인 면과 상업적인 면 모두에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무엇보다 연주에 있어서 인간적이라는 것은.. 글쎄요.. 분명한 것은 살아있는 존재의 본질이 음악보다 더 위대하다는 겁니다. 음악은 단지 그러한 본질의 표현방식 중 하나이니까요. (Barney Kessel)"



4.

Raymond Matthews " Ray " Brown (1926년 10월 13일 - 2002년 7월 2일)은 오스카 피터슨 (Oscar Peterson) 과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와의 광범위한 작업으로 유명한 미국의 재즈 더블 베이시스트 겸 첼리스트였다.

전기

이른 인생

Ray Brown은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으며 8세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피아니스트가 몇 명이나 출석했는지 알고 난 후 그는 트롬본을 연주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고등학교 재즈 오케스트라에 공석이 생겨서 그는 업라이트 베이스를 연주했다.

직업

브라운의 베이스 연주에 대한 초기 영향은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밴드의 베이시스트 지미 블랜튼 (Jimmy Blanton )이었다. 젊은 브라운은 피츠버그 재즈 장면에서 지미힝 클리 (Jimmy Hinsley) 육중주와 스누커 러셀 밴드 ( Snookum Russell band)와 함께 밴드에서 첫 경험을 하면서 점점 유명 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시 52 번가에서 급증한 재즈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뉴욕으로 가는 편도 티켓을 구입했다. 그는 20세에 뉴욕에 도착하여 이전에 일했던 행크 존스 와 만났고 베이스 연주자를 찾고 있는 Dizzy Gillespie에게 소개되었다. Gillespie는 그 자리에서 Brown을 고용했고 Art Tatum 과 Charlie Parker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했다. 1948년 Brown은 Dizzy의 밴드를 떠나 Hank Jones와 Charlie Smith와 함께 트리오를 시작했다.

1946 ~ 1951년 브라운은 길레스피 밴드에서 연주했다. 비브라폰 연주자 Milt Jackson, 드러머 Kenny Clarke, 피아니스트 John Lewis와 함께 Brown은 Gillespie 밴드의 리듬 섹션을 만들었다. Lewis, Clarke, Jackson은 결국 Modern Jazz Quartet을 결성했다. 브라운은 Gillespie밴드에 가입했을 때 가수 엘라 피츠제랄드와 친하게 지냈다. 1947년 미국 남부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 연주여행했다. 그 해 두 사람은 결혼하여 피츠제럴드의 이복 여동생 프란시스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했고 그들은 Ray Brown, Jr.라고 세례명을 주었다. 1953년 레이 브라운 (Ray Brown) 과 피츠제랄드 (Fitzgerald)는 당시에 둘 다 경력의 다양한 압박 때문에 이혼했으나 그들은 계속 함께 연주했다.

이 무렵 브라운은 Norman Granz가 주최한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재즈를 연주했다. 브라운은 1949년 필하모닉 콘서트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과 Brown은 1951년부터 1966년까지 함께 작업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브라운은 Verve 레코드사의 Bloom Dearie의 첫 번째 5개의 녹음에 참여했다. 트리오를 떠난 후 그는 연주자 뿐만 아니라 메니저이자 프로모터가 되었다. 1966년 로스 앤젤레스에 정착하여 다양한 TV 쇼 오케스트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또한 Tony Bennett, Billy Eckstine, Frank Sinatra, Sarah Vaughan 및 Nancy Wilson을 비롯한 그날의 주요 예술가 중 일부와 동행했다. 그는 또한 전 음악 파트너인 Modern Jazz Quartet과 젊은 Quincy Jones를 관리했으며 Hollywood Bowl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재즈베이스 교본을 썼으며 재즈 첼로를 개발했다. 또한 로스 앤젤레스에서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나중에 경력

1974년부터 1982년까지 브라운은 기타리스트 Laurindo Almeida, 색소폰과 플루트 연주자 Bud Shank 및 드러머 Shelly Manne (1977년 이후 Jeff Hamilton으로 대체 됨)과 함께 The LA Four 라는 이름으로 일련의 앨범을 녹음했다. 그는 또한 밀트 잭슨과 함께 앨범 Jackson, Johnson, Brown & Company (1983)를 트럼본에 J. J. Johnson, 피아노에 Tom Ranier, 기타리스트에 John Collins, 드러머에 Roy McCurdy과 함께 연주했다.

브라운은 1973년에 Steely Dan의 두 번째 앨범인 Countdown to Ecstasy의 두 번째 트랙인 " Razor Boy "에서베이스 연주자로 참석했다.

브라운은 사운드 트랙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찰리 파커 ( Bird) (1988)에 대해 광고한 4 트랙에 출연했다. 모든 색소폰 파트가 Bird의 원래 연주이지만, 반주는 Brown을 비롯하여 드럼에 John Guerin이 참가하여 사운드를 강화하기 위해 다시 녹음했다. 1980년대와 1990 년대에 브라운은 자신의 트리오를 이끌었고 베이스 스타일을 계속 수정했다. 나중에 그는 피아니스트 진 해리스 (Gene Harris)와 함께 녹음하고 투어를 했다. 브라운은 1980년대 초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나나이모 (Nanaimo)에 있는 식당에서 다이아나 크롤 (Diana Krall) 을 만났다. Jeff Hamilton에 따르면, Rio DVD의 Diana Krall Live에 실린 인터뷰 에서 Krall이 워크숍에서 처음 연주한 것을 듣고 피아노 스킬에 감탄했으며 (아직 노래를 부르지 않았음) 베이시스트 John Clayton에게 소개했다. Hamilton과 Clayton은 모두 Krall이 Brown과 다른 사람들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로스 앤젤레스로 이주하도록 장려했다. 1990년에 그는 Enriquez의 앨범인 The Wildman Returns의 피아니스트 Bobby Enriquez 와 드러머 Al Foster 와 팀을 이뤘다. 1990-93년 동안 피터슨, 허브 엘리스 , 브라운과 바비 더럼 (Bobby Durham) 또는 제프 해밀턴 (Jeff Hamilton)이 드럼에 합류하면서 "전설의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 (Legendary Oscar Peterson Trio)"가 다시 만났다. 이 그룹의 앨범은 4 개의 그래미상을 받았다. 1993년 5월 피터슨이 심한 뇌졸중을 앓았을때 이 그룹은 해산했다.

이 시기에 Brown은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André Previn과 함께 7 개의 앨범을 만들었다. 1989 년부터 2002 년까지 Previn은 재즈로 돌아와 1989 년부터 2002 년까지 녹음을 했다.: After Hours (1989 년 기타리스트 Joe Pass ), Uptown 1990, 기타리스트 Mundell Lowe와 함께), Old Friends (기타리스트 Mundell Lowe와 함께 1992년 생방송), Kiri Sidetracks. 재즈 앨범 (1992, 가수 Kiri Te Kanawa 및 기타리스트 Mundell Lowe), What Headphones? (1992 년 Mundell Lowe, 트럼본의 Jim Pugh , Corren의 Warren Vache , Horn의 Richard Todd , 드럼의 Grady Tate , Antioch Baptist Choir), Andre Previn과 Friends Play Show Boat (1995, Mundell Lowe와 Grady Tate ), Musikverein에서의 재즈 (1997, Mundell Lowe와의 라이브 녹음). Brown과 Previn은 1960 년대에 4 To Go 에 함께 녹음했다 ! (기타리스트 인 Herb Ellis 와 Drummer Shelly Manne 와 함께한 1963 년), Rain as the Rain (1967 년, Leontyne Price 와의 가수). 1 시간 분량의 영화, Together on Broadway. Sidetracks Making은 앨범 Kiri Sidetracks 의 The Jazz Album 을 녹음했다 .

Brown은 Monty Alexander, Milt Jackson, Mickey Roker와 함께 "Quartet"에서 한동안 연주했다. 그 후에 Benny Green, Geoffrey Keezer, Larry Fuller와 같은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자신의 트리오로 다시 여행했다. Ray Brown Trio의 마지막 판에는 피아니스트 Larry Fuller와 드러머 Karriem Riggins가 포함되었다. 그 트리오로, 브라운은 2002 년에 그의 죽음까지 계속 연주했다.

사생활

레이 브라운 (Ray Brown)은 1947년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와 결혼했다. 이 부부는 아들 레이 주니어 (Ray Jr.)를 입양했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레이와 엘라는 1953년 이혼했지만 친구들과 가끔 함께 일했다.

브라운은 인디애나폴리스 Indianapolis에서 쇼를 보기 전에 골프를 한 후 수면 중에 사망했다.



5.

J.C. Heard/제임스 찰스 허드 (1917 년 8 월 10 일 데이턴, 오하이오 - 1988년 9월 27 , 미시건 주 로얄 오크 )는 JC 허드 (JC Heard )로 잘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스윙, 밥, 블루스 드러머였다.

허드는 스윙, 밥, 블루스 설정에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는 다재다능한 드러머였다. 그는 1939년 테디 윌슨 (Teddy Wilson) 과 함께 처음으로 중요한 직업을 얻었으며 1980년대까지도 계속 공연했다. 그는 Lena Horne, Coleman Hawkins, Dexter Gordon, Benny Carter, Cab Calloway, Erroll Garner, 필 하모닉에서의 재즈, Pete Johnson, Charlie Parker, Sir Charles Thompson , Dizzy Gillespie 및 Roy Eldridge 와 함께 연주 했다.

1946-47년 그는 Cafe Society에서 자신의 밴드를 지휘한 최고 밥 뮤지션과 함께 녹음했으며 Erroll Garner의 트리오 멤버였으며 하모닉 재즈와 함께 여행했다. 1953년부터 1957 년까지 그는 유키무라 이즈미 , 조지 카와 구치, 프랭키 사카이와 같은 젊은 일본 가수와 뮤지션을 멘토로하여 가수 / 연예인으로 일본에서 지냈다. 1957 ~ 66년 그는 뉴욕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Coleman Hawkins-Roy Eldridge Quintet와 함께 연주했으며 1961년 Teddy Wilson의 트리오와 함께 연주했다. 1966년 JC Heard는 디트로이트로 이주하여 1980년대 중반까지 젊은 음악가를 위한 밴드 리더 및 멘토로 일했다. 1983년에 그는 다시 색소폰 연주자 George Benson, 피아니스트 Claude Black 및 베이스에 Dave Young 과 함께 리더 앨범을 녹음했다. 1981년에, JC는 Dizzy Gillespie 및 다른 동료를 특색 짓는 국가 및 각종 축제의 주위에 한 13 조각 큰 악대를 시작했다. 이 그룹은 1986년에 녹음했으며 JC가 사망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공연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