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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The Quintet(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Bud Powell, Charles Mingus, Max Roach) 의 라이브 앨범 Jazz at Massey Hall (1953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7. 7. 26.

 


 


 


 


 


 

제 개인적 취향 때문인지, 전 그동안 찰리 파커나, 디지 길레스피의 곡을 포스팅한 적이 없습니다. 넘치는 음들의 향연을 제가 잘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즈사, 특히 비밥의 마스터들이며 혁신가들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50년대, 60년대 앨범을 다루려니, 은근 파커와 길레스피에 대한 미안함이, 어쩌면 제가 예의를 다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해서 오늘의 앨범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어찌했든 위대한 재즈 앨범이며, 재즈 매니아라면 필청 해야 할 앨범이라는 문구를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기도 했겠죠.

이 앨범은 타이틀 그대로 50년대 비밥 재즈의 최정상에 있던 5명의 마스터들이 각자의 기량을 유감없이 펼친 라이브 앨범입니다. 라이브 연주를 녹음했기에 현장감,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은근 웃게 되는 차알스 밍거스라고 추측되는 이의 외침, 또 관객들의 반응, 생의 활력, 음악에 대한 열정과 당시 연주에 대한 흥분감들이 고스란히 느껴지곤 합니다. 이 앨범 이후 두 번 다시 이들의 라인업으로 이루어진 앨범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아마 더 귀중한 앨범이지 싶습니다. 재 발행되어 추가되었던 트랙이 있어 더 좋았다고 하면 웃으실까요?

요긴, 하늘이 좀 삐졌습니다만, 매미가 저렇듯 간절히 우는 것을 보니, 곧 해가 돋을 것입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요,
밴친님들이 계셔서
제 하루가 또 견딜만합니다.
고맙습니다.


The Quintet(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Bud Powell, Charles Mingus, Max Roach) 의 라이브 앨범 Jazz at Massey Hall (1953년)


레이블: Debut/OJC/미국

녹음일: 1953년 5월 15일

발매년: 1953년

길이: 46:54

스타일: Bop

프로듀서: Charles Mingus


Allmusic 5/5 stars

Robert Christgau A

The Rolling Stone Jazz Record Guide 5/5 stars

Jazz at Massey Hall은 1953년 5월 15일 캐나다 토론토의 Massey Hall에서의 "The Quintet"공연을 선보이는 라이브 재즈 앨범입니다. Dizzy Gillespie, Charlie Parker, Bud Powell, Charles Mingus 및 Max Roach의 5 인조 그 당시의 '모던한' 연주가들로 구성된 세션입니다. 5 명의 남자들이 하나의 단위로 함께 녹음한 유일한 녹음이었고, 그것은 Parker와 Gillespie의 마지막 녹음 모음이었습니다.

배경

주최자가 생각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는 레니 트리스타노 (Lennie Tristano )였지만, 그는 파월이 다른 뮤지션들과 보다 더 어울릴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Oscar Pettiford는 Mingus에 대안으로 고려되었기도 합니다

콘서트

Parker는 이 날짜에 Grafton 색소폰을 연주했습니다. 계약상의 이유로 원래 앨범 표지에 올라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 탐정과 파커의 아내 찬에 대한 암시인 "Charlie Chan"으로 청구되었습니다.

독창적인 계획은 토론토 뉴 재즈 학회Toronto New Jazz Society 와 음악가가 녹음의 이익을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Rocky Marciano 와 Jersey Joe Walcott사이이 동시에 진행하는 복싱 상금 때문에 청중은 너무 작아서 학회는 뮤지션의 비용을 지불 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가는 모두 NSF 수표를 받았고 Parker만 실제로 현금화 할 수 있었습니다. 길레스피는 "수년간"수수료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했습니다.

앨범 발표

녹음은 토론토 뉴 재즈 학회 (Dick Wattam, Alan Scharf, Roger Feather, Boyd Raeburn 및 Arthur Granatstein 가 만든 녹음을 가지고 Mingus의 레이블인 Debut에서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Mingus는 녹음을 뉴욕으로 가져가서 그와 Max Roach가 베이스 라인에서 녹음을 더빙했는데, 이 베이스 라인은 대부분의 음악에서 과소 녹음되어 "Mingus"의 솔로이징을 "All the Things You Are"으로 바꿨습니다.

2004 년 재발행, Complete Jazz at Massey Hall은 오버 더빙 없이 전체 콘서트를 포함합니다. 앨범 Jazz at Massey Hall은 1995년 Grammy Hall of Fame에 영입 되었습니다. National Public Radio 의 "Basic Jazz Library"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서트는 "가장 위대한 재즈 콘서트"라는 태그 아래 일부 영역에서 발표되었습니다.



Track listing

(Originally issued as two 10" LPs:)

Vol. 1 (Debut DLP-2)

1."Perdido" (Juan Tizol)

2."Salt Peanuts" (Dizzy Gillespie, Kenny Clarke)

3."All the Things You Are" (Jerome Kern)

4."52nd Street Theme" (Thelonious Monk)

Vol. 3 (Debut DLP-4)

1."Wee (Allen's Alley)" (Denzil Best)

2."Hot House" (Tadd Dameron)

3."A Night in Tunisia" (Gillespie, Frank Paparelli)

(2 집은 같은 날짜의 Powell, Mingus, Roach의 트리오 녹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I've Got You Under My Skin" 외에는 모두 Billy Taylor가 나중에 Mingus와 Roach와 함께 한 곡.)

(12 "LP로 발행 됨

:)

(Debut DEB-124)

1."Perdido" (Juan Tizol)

2."Salt Peanuts" (Dizzy Gillespie, Kenny Clarke)

3."All the Things You Are" (Jerome Kern)

4."52nd Street Theme" (Thelonious Monk)

5."Wee (Allen's Alley)" (Denzil Best)

6."Hot House" (Tadd Dameron)

7."A Night in Tunisia" (Gillespie, Frank Paparelli)

(2004년 재 이슈에는 14개의 트랙이 들어있다. 트랙 5에서 11까지는Parker 와 Gillespie가 연주하지 않았다.)

1."Perdido" (Juan Tizol)

2."Salt Peanuts" (Dizzy Gillespie, Kenny Clarke)

3."All the Things You Are" (Jerome Kern)

4."52nd Street Theme" (Thelonious Monk)

5."Drum Conversation" (Max Roach)

6."Cherokee" (Ray Noble)

7."Embraceable You" (George Gershwin)

8."Hallelujah (Jubilee)" (Vincent Youmans)

9."Sure Thing" (Bud Powell)

10."Lullaby of Birdland" (George Shearing)

11."I've Got You Under My Skin" (Cole Porter)

12."Wee (Allen's Alley)" (Denzil Best)

13."Hot House" (Tadd Dameron)

14."A Night in Tunisia" (Gillespie, Frank Paparelli)

Personnel

Dizzy Gillespie — trumpet

Charles Mingus — bass

Charlie Parker — alto sax

Bud Powell — piano

Max Roach — drums

콘서트에서 Powell, Mingus 및 Roach가 연주한 트리오 세트의 앨범도 발매 되었습니다. (위의 6 번에서 11 번 트랙).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Perdido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4rIazMebnAU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Salt Peanuts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MwkOmme3E8k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All The Things You Are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SHs_D6tYdH8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52nd Street Theme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G705iQ3yAUM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Wee (Allen's Alley)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JkfDU6VG3p8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Hot House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bOhS5nJU4UY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A Night In Tunisia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tJMuZN2Vn6g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I've Got You Under My Skin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G_q9AnlQktA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Hallelujah (Jubilee)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bUQq0UW0og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Cherokee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tC9D1Mu_56Q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Embraceable You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bBOlhMOK3lE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Sure Thing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1bpn2C4o97E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Drum Conversation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wT0m_0bZXF0








The Quintet Jazz At Massey Hall - Lullaby Of Birdland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KVa_JEjKWmw





풀버전



The Quintet' - The Complete Jazz at Massey Hall [FULL ALBUM] - YouTube
https://m.youtube.com/watch?v=H8fnoVgNSvc








AllMusic 리뷰

이 콘서트는 1953년 5월 15일 캐나다 토론토의 Massey Hall에서 열렸으며 베이시스트 Charles Mingus에 의해 녹음 되었습니다. 이 밴드는 몇 가지 추가 베이스 파트를 오버 더빙하여 Massey Hall 의 Quintet 's Jazz 로 데뷔했습니다. 플라스틱 알토에서 피아니스트인 버드 파웰 (Bud Powell)은 오프닝 벨 ( start bell)에서 취한 아이돌이었으며, 디지 길레스피 (Dizzy Gillespie )는 첫 록키 마르시아노 저지 (Rocky Marciano-Jersey)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무대에서 뛰어나갔습니다. 조 Walcott 헤비급 챔피언의 한판 승부. 그날 저녁의 후속 판은 The Greatest Jazz Concert 라는 별명을 가진 더블 라이브 앨범 ( Mingus 와 Roach로 설정된 Bud Powell 의 장엄한 피아노 트리오를 특징으로 함)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과장은 당연한 것으로, 이 콘서트 당시 Massey Hall 에서 재즈의 각 음악가는 비밥 운동의 주요 악기의 혁신가였습니다. 이 뮤지션들은 모두 Charlie Parker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집단적 교감은 마술적입니다. 결과적으로 업 템포 곡 ("Salt Peanuts" and "Wee")에서의 열렬한 솔로는 중단되지 않은 아이디어처럼 흐르게 됩니다.

"All the Things You Are" 는 버드의 심사숙고하듯 신중한 연주와 Bird와 Diz의 "Grand Canyon Suite"의 빈번한 에코를 가진 제롬 컨의 클래식 발라드를 다시 정의합니다. 그리고 Gillespie 의 고전 "Night in Tunisia"에서 Bird 의 오프닝 브레이크의 비길 데 없는 대담함은 Gillespie 의 무모한 비행의 감정적인 강렬함과 일치합니다. 이 앨범은 시대를 물을 수 없는 즉 언제 어떻게 발행되었는지에 관계없이 전설적인 세트입니다.




1.

풀네임은 차알스 밍거스 주니어(Charles Mingus Jr.1922.4.22~1979.1.5). 미국의 재즈 베이시스트. 2차대전 이후의 재즈 신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거물급 뮤지션이다.

1. 생애

애리조나 주 노갈레스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유년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밍거스도 어릴 적 찬송가를 비롯한 개신교 음악에 익숙했지만, 이내 집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재즈나 블루스에도 심취했다.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정규 음악 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학창 시절에도 트롬본과 첼로를 아마추어 수준으로나마 교습받는 등 계속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 레드 칼랜더에게 콘트라베이스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만 그 때까지도 첼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연습했다.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콘트라베이시스트였던 허먼 레인스하겐(Herman Reinshagen)에게 약 5년 동안 클래식 연주법을 비롯한 체계적인 베이스 연주법을 다시 배웠고, 로이드 리스로부터 작곡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반부터 바니 비가드와 루이 암스트롱 등의 밴드가 순회 공연을 할 때 비상근 베이시스트로 협연하면서 재즈계에 발을 들였고, 이후 비브라폰 연주자 라이어널 햄턴의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당시 비밥의 혁신가로 유명했던 찰리 파커와 잼 세션과 연주를 벌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파커 밴드의 드러머 맥스 로치와 함께 데뷰 레코드라는 음반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파커와 로치,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과 함께 퀸텟(5중주단)으로 팀을 이루어 잠시 공연했는데, 이 중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 실황이 재즈 팬들에게 'The Quintet'으로 회자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명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밍거스는 주로 비밥 베이시스트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같은 해 밍거스는 비밥 이후의 실험적인 음악을 위해 재즈 작곡가의 워크숍(Jazz Composer's Workshop)을 만들었고, 그 동안 코드(화음)에 기반한 즉흥 연주 위주였던 재즈 스타일에서 가능한한 악보화된 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 재즈 뮤지션이나 청중 모두에게 너무 분석적이고 되레 재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밍거스 자신도 악보로 기보하기에는 재즈의 세계가 너무 다양하다고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에는 연주자들에게 피아노나 베이스 연주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연주자들이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처럼 더 자유롭게 그 틀에서 즉흥 연주로 음악을 뽑아나가는 방식의 새로운 워크숍을 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56년에 애틀랜틱에서 나온 앨범이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틴어로 직립원인)였고, 밍거스가 사이드맨이 아닌 리더로 낸 앨범 중 최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비록 인류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밍거스가 어설프게 곡을 설명한게 까이기는 했지만, 듀크 엘링턴 이후 그와 다른 방식의 대규모 재즈 작품을 발표한 것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1년 뒤 발표한 '더 클라운(The Clown)'에서는 아이티 민중들의 독립 투쟁을 반영한 Haitian Fight Song을 삽입했고, 1959년에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에서 내놓은 '밍거스 아 음(Mingus Ah Um)'에서는 레스터 영과 듀크 엘링턴, 젤리 롤 모턴 등 선배 뮤지션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곡들과 함께 2년 전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과 등교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가 아이젠하워에게 데꿀멍했던 주 지사 오벌 포버스(Oval E. Faubus)에 대한 공개적인 디스곡인 Fables of Faubus를 같이 끼워넣는 등의 행보로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1960년 애틀랜틱에서 발매한 '블루스 앤드 루츠(Blues & Roots)'에서는 자신이 어릴 적 들었던 블루스와 흑인 영가의 추억을 바탕으로 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을 넣기도 했고, 1962년에 RCA에서 발매한 '티후아나 무즈(Tijuana Moods)'에서는 라틴 풍 재즈 음악을 선보여 상업적인 감각도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임펄스!에서 대규모 발레 스타일의 모음곡만으로 앨범 전체를 채운 '흑인 성인과 죄있는 여인(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으로 엘링턴 이상의 복잡하면서도 대규모의 모음곡 형식 작품에 더욱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과 그 직후 발매한 셀프 리메이크 앨범인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 밍거스(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 이후에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는데, 대니 리치먼드와 재키 바이어드, 에릭 돌피, 조니 콜즈, 클리프 조던과 함께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이 결성 몇 달 만에 콜즈의 지병과 돌피의 사망으로 와해되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공들여 집필한 자서전 'Beneath the Underdog'도 상당히 과격한 내용 때문에 출판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뉴욕에 있던 자택을 처분하고 잠시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망했어요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72년에 콜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을 발표하면서 다시 복귀했고, 1974년에는 카네기홀 무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흔히 루 게릭 병으로 부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리면서 베이스 연주가 힘들어지게 되었고, 1977년 이후 베이스 연주가 불가능해지자 작곡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이내 손발이 모두 마비되면서 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조니 미첼이 자신에게 헌정하는 앨범인 'Mingus'의 작업에 참가한 것을 끝으로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서 요양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인도의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2. 수상 경력

•구겐하임 펠로십 (1971. 작곡 부문)

•다운비트 재즈 명예의 전당 헌액 (1971)

•그래미상 평생 공로 부문 (1997)

3. 사생활

재즈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지만, 성격은 그야말로 개차반으로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인종차별에 시달린 것에 대한 분노를 계속 품고 있었고, 그 때문에 재즈계를 돈으로 좌지우지한다면서 백인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포버스 디스 건에서 보듯이 이러한 성향이 자신의 작품에도 일부 녹아나 있고, 어느 동료 뮤지션들보다 흑인 민권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의식도 상당히 강해서 연주자들과 입씨름을 벌이기도 다반사였고, 심지어 클럽 공연 중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떠드는 소리가 크다고 판단하면 연주를 멈추고 욕설을 퍼붓는 등 무대 매너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애칭인 찰리(Charlie)로 부르는 사람에게도 "찰리는 말한테나 붙이는 이름이다. 찰스라고 불러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이런 성깔이 한 번 크게 사단을 낸 적도 있었는데, 1962년 10월에 동료 트롬보니스트 지미 네퍼와 다투다가 네퍼의 입을 주먹으로 갈겨서 앞니를 부러뜨린 것이 유명하다. 관악기 주자, 특히 금관악기 주자에게 앞니는 마우스피스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네퍼는 이 사건 이후 당분간 연주 활동을 못하게 되었고, 밍거스에게 해고까지 당한다. 당연히 빡쳐서 밍거스를 폭력 행위로 경찰에 고발해 법정 싸움까지 가기도 했다. 아직 초짜였던 1950년대 중반에는 마일스 데이비스와도 서로 디스를 주고받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고, 자신의 멘토 격이었던 찰리 파커에 대해서도 음악 빼고는 본받을 가치도 없는 막장 인생이었다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거칠고 돌발적인 성격이기는 했어도 밴드 리더로 보여준 카리스마나 작곡에 대한 역량은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고, '진정한 흑인 음악'을 표방한 소울과 이후 대두되는 프리 재즈 뮤지션들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4. 사후

밍거스 사후 트리뷰트 밴드들인 밍거스 다이너스티(Mingus Dynasty)와 밍거스 빅 밴드(Mingus Big Band)가 밍거스 작품을 중심으로 한 리바이벌 콘서트와 음반 활동을 하고 있으며, 1989년에는 밍거스의 유작이자 재즈 역사상 가장 대규모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Epitaph가 처음으로 거의 완전한 형태로 재연되어 화제가 되었다.

군터 슐러가 조직하고 지휘한 더블 빅 밴드 공연으로 행해진 이 초연은 콜럼비아가 소니에 인수되기 직전이었던 1990년에 CD 두 장짜리 음반으로 나왔고, 2007년에는 앤드류 홈지와 밍거스의 미망인 수 밍거스에 의해 새로운 미발표 대목들이 발견되어 마찬가지로 슐러 지휘의 밴드에 의해 뉴욕과 클리블랜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서 완전판으로 재연되었다.[5] 물론 이러한 대작들 외에 소품들도 많은 수가 재즈 리얼북에 등재되어 후배들에 의해 계속 연주/녹음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티후아나 무즈 앨범 커버에서는 찰리 밍거스라고 이름이 크게 찍혀서 나갔다. 일설에 의하면 앨범 발매 직후 밍거스가 커버 디자이너를 죽여버리겠다며 음반사에 불같이 화를 냈다고도 한다.

하지만 네퍼는 폭행당했을 때 보복으로 방심하던 밍거스를 칼로 찌른 것 때문에 밍거스가 구속은 당하지 않았다. 밍거스는 하마터면 위가 손상될 수 있을 만큼 칼에 찔렸다. 네퍼는 이후 10년도 넘게 밍거스와 적대 관계로 지내다가, 밍거스가 사실상 불구가 되어 버린 1977년에야 뒤늦게 화해했다.

다만 파커의 경우 생활 방식과 성격이 워낙 상막장이었던 탓에, 밍거스 말고도 그와 협연한 거의 모든 음악인들이 한소리 했을 정도였다.

연주 시간이 두 시간에 이르는 초대형 모음곡. 1962년에 뉴욕 타운 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축약판 형식으로 이미 선보여진 적이 있었지만, 밍거스는 이 공연에서 크게 실망해 이후 공연과 녹음을 일체 하지 않고 방치했다.



2.

본명은 찰스 파커 주니어 (Charles Parker, Jr.). 1920.8.29~1955.3.12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별명은 야드버드(Yardbird) 또는 '버드(Bird)'였고, 비밥 시대에 활동한 재즈 아티스트들 중 본좌로 여겨지는 거물.

1. 생애

캔자스 주의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고, 열한 살 때부터 알토색소폰을 구해 독학으로 연주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 때였던 1935년에는 지역 음악인 연맹에 등록해 소규모 클럽 등지에서 객원 단원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아직 뉴비였지만 굉장히 독특하다 못해 괴팍한 연주 스타일을 보여주는 바람에 다른 음악인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캔자스시티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유명 빅 밴드였던 카운트 베이시의 밴드 연주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첫 프로 데뷰 무대와 녹음도 제이 맥샨이 이끌던 지역 빅 밴드의 단원 자격으로 치뤘다.

물론 여기서도 이미 모르핀이나 헤로인을 비롯한 마약에 쩔어 살던 생활 습관을 보여주며 멤버들과 리더의 신경을 꽤나 거슬렀다. 파커 자신도 빅 밴드의 획일화된 연주 방식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후에도 빅 밴드 협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뉴욕으로 옮겨가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맨해튼의 한 댄스홀(사보이 볼룸)에서 설거지 알바를 뛰어야 했다. 하지만 그 레스토랑에 정기 출연하던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의 속주 연주를 귀동냥으로 듣고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후 파커의 전매 특허가 되는 잦은 코드 변화와 미칠듯이 빠른 아르페지오 속주에도 테이텀의 영향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 초반에는 얼 하인스의 밴드에서 잠시 일하다가 밴드의 트럼펫 단원이었던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소규모 잼 세션을 벌이면서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신인 음악인들의 잼 세션은 정규 공연 시간이 끝난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에 운영하는 클럽(소위 애프터아워즈 클럽)들인 클라크 먼로 업타운 하우스나 민톤스 플레이 하우스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2차대전 후반기였던 1944년부터 소규모 세션에서 공식 그룹 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도 어필하기 시작했는데, 춤추기 좋은 규칙적인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 일색의 스윙/빅밴드 팬들에게는 거의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져 엄청난 논쟁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비밥(Bebop)'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곧 이들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던 수식하는 전문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1945년 11월에는 사보이 레코드사에 리더 자격으로 Ko-Ko와 Now's The Time, Billie's Bounce, Thriving on a Riff 네 곡을 취입했는데, 전자의 두 곡은 기존 유행가나 연주곡의 코드 진행이나 리프를 바탕으로 싹 갈아엎어 2차 창작한 것이었고 후자의 두 곡은 파커의 자작곡이었다. 이 녹음들은 지금도 비밥 초창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아주 적절히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파커와 길레스피의 공동 작업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는데, 하도 마약을 해대는 통에 시간 관념이 희박해져 지각이 잦다보니 공연 일정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예사였고 심지어 1946년 7월에 있었던 서부 순회 공연 때는 동부로 돌아가는 기차삯마저 마약 사는데 써버려 돌아가지도 못했다.

결국 호텔에서 만취 상태로 담배 피다가 침대 매트리스를 태워먹고 완전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니는 등의 진상짓을 저지르다 체포되었고, 캘리포니아의 카마릴로 주립 정신병원에 6개월 가량 수용되어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퇴원한 뒤에는 이때의 기억을 살려 Relaxin' at Camarillo라는 곡을 쓰기도 했고, 사보이와 다이얼에 여러 장의 음반을 취입하면서 한층 물오른 연주력을 과시했다.

1949년에는 현악 합주를 대동하고 발라드 넘버 위주의 음반을 몇 장 발매했는데,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되었다. 하지만 비밥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면모를 찬양하던 젊은 팬들은 '파커도 돈벌이 때문에 변절했다' 고 맹렬히 비난했고, 상업적인 성공은 충분히 거두었지만 지금도 평가 절하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커는 클래식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나 에드가 바레즈 같은 당대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의 음악에 열광했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 "버드"에서는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피신해있던 이들 클래식 음악가들을 만나러 가는 파커의 모습이 나오지만, 만나지도 못하고 캐무시 당하는 안습한 상황만 연출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파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 작업이었지만, 편곡의 밋밋함 등도 있어서 파커의 개성은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꽤 돈벌이로는 쏠쏠했는지, 이후 동료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해 내노라 하는 재즈 뮤지션들이 이 아이디어를 따라해 'with Strings' 음반을 계속 내놓았다. 비록 이것을 클래식의 힘을 빌어 떠보려는 꼼수 혹은 한철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평론가나 프로듀서들도 있었지만, 파커 이후로도 계속 현악 합주를 동반한 앨범은 계속 나오고 있다.[1]

1950년대 초반에는 비밥에 대한 세인들의 호불호를 떠나 음악계에서는 거의 신으로 추앙받는 거물이 되었는데, 수많은 색소포니스트들이 파커의 속주와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대부분 중도 포기하고 닥버로우했을 정도였다. 1953년 5월 15일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에서 디지 길레스피,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 드러머 맥스 로치,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와 함께 5중주단(퀸텟)을 꾸려 공연했다. 임시 편성한 그룹이라 이름은 없었지만 지금도 재즈 팬과 전문가들에게 'The Quintet'이라고 하면 단번에 이 그룹을 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하필이면 이 공연과 동시에 토론토에서 그 당시 본좌 복서였던 록키 마르시아노와 제시 조 월콧의 권투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열리는 바람에 공연장은 절반도 차지 않았지만, 공연 실황이 운 좋게 녹음되었고 훗날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지금도 닥치고 최고의 비밥 실황반이라는 평가. 재즈를 좋아한다면 정들어볼만하다. 사실 재즈를 좋아한다면 이미 들어봤을 음악.

이 공연 뒤에도 계속 연주 활동을 벌였지만, 이미 마약 사용이 도를 훨씬 지나친데다가 과음과 과식 습관도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딸 프라이스의 사망 소식까지 접하게 되자 슬픔에 빠진 나머지 요오드를 마셔서 자살기도를 하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결국 1955년 초에 클럽 공연 중 연주자들을 내쫓고 무대와 클럽 내부를 완전히 개발살낸 뒤 쫓겨났고,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파노니카 드 쾨닉스와터가 마련해준 뉴욕의 한 호텔방에 틀어박혀 텔레비전 쇼를 보고 있다가 35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사인은 폐렴과 내장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었는데, 술과 마약, 무절제한 생활로 몸이 어찌나 망가져있던지 부검을 담당한 의사가 그의 나이를 50~60세로 판정했을 정도로 심한 노화가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유해는 고향인 캔자스시티의 링컨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음악 성향

생애 란에 썼듯이 빅밴드/스윙 등 당시 유행하던 사조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이었다. 남겨진 녹음들의 대다수도 4~6인조의 소규모 그룹 편성을 취하고 있고, 협연한 뮤지션들도 대부분 비밥의 선구자 혹은 그 뒤의 재즈 흐름을 이어나가는 대가로 성장했다.

연주 실력 외에도 꽤 많은 작품을 만든 작곡가로서 높이 평가받는데, 비밥 시대의 창작곡 성향에 관해서는 파커 작품만 공부해도 충분할 정도로 기틀까지 거의 다 짜놓았다. 물론 훗날의 프리 재즈처럼 막나간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곡들에서 열두 마디 구성의 블루스 양식을 지키는 등 전통에 대한 이해도 충분했다.

코드와 리듬에 대한 감각도 귀신같았는데, 행여 비밥 어법을 제대로 이해 못하거나 자신의 스피드를 따라오지 못해 버벅거리는 세션맨들이랑 같이 연주할 때도 오히려 자기 연주에 따라오게끔 만들어버리는 고렙이었다. 심지어 마약에 찌든 상태에도 연주만은 확실하게 해냈다고 할 정도.

다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 핸디캡으로 남았는데, 악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서 뭔가 괜찮은 가락이 떠오르면 아무 때고 악보 읽을 줄 아는 동료 집에 쳐들어가서 색소폰을 불면서 받아 적으라고 했다. 특히 디지 길레스피가 파커의 악보셔틀 역할을 충실히 해준 덕에 파커의 많은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파커의 연주는 기본적으로 유려한 프레이즈에 있기 때문에 모든 템포의 곡에서 강점을 보인다. 예를 들어 Now's the Time 같은 미들템포의 곡에서는 스윙감을 극단적으로 유지하면서도 곡 전체를 정확한 기승전결이 짜여 진 형태로 끌고 간다. Ornitology나 Flyin' high 같은 곡에서는 쉴 새 없이 빠른 프레이즈를 쏟아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기승전결이 잘 살아있다. 그야말로 천재.

다만 파커의 녹음 중에 음질이 좋은 것이 드물다는 것이 단점이다. 굳이 당시의 오리지널 세션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버드의 OST를 들어보는 것을 권한다. 파커의 색소폰 파트만 따와서 세션들의 연주와 합성했는데 음질도 좋을 뿐 아니라 파커의 뛰어난 연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3. 사생활

음악적인 업적에 완전 반비례하게 그야말로 캐막장이었는데, 심각한 마약중독자라서 재즈 역사상 가장 많은 마약을 소비한 아티스트의 최상위 권을 다툴 정도다. 파커에 비견될 정도의 약쟁이는 쳇 베이커 정도밖에 없다고 할 정도.

약만 징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번 먹었다 하면 하루 세 끼 분량의 음식을 한 자리에서 뚝딱 해치우는 대식가였고, 한번 마셨다 하면 위스키나 보드카 등의 독한 술을 몇 병이고 비워대는 폭음을 할 정도로 식습관도 개판이었다. 호색한이라서 틈만 나면 사창가로 찾아가 검열삭제도 시도 때도 없이 했고, 매너도 정말 개판이라 한 뒤에는 화대를 확 던지거나 침을 뱉아 주고 나오는 등 답이 없었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회고. 심지어 연주 직전에 백인 여성과 검열삭제를 해 대는것을 즐거워했다고도 전해진다. 게다가 벌어댄 돈도 가족들 생활비랑 마약 사거나 사창가에 가는 데 써버려서, 수중에는 늘 한 푼도 없었고 몇 주씩이나 샤워도 안 하고 같은 옷만 입는 통에 악취가 진동했다고 한다.

사생활은 이렇다 쳐도 마약에 취했던 나머지 공연 연습을 제멋대로 펑크 내버리는게 다반사라서 찰리가 속한 밴드의 멤버들을 보통 짜증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들어가는 밴드마다 해고당하기 일쑤였다. 파커의 천재성을 인정하던 동료나 후배 아티스트들도 결국 이런 모습에 질려 하나둘 결별했다. 특히 그의 친구 디지 길레스피조차 이런 찰리에게 짜증이 나서 결별해 버렸을 정도였다. 초짜 시절 그와 같이 작업했고 그를 존경하던 후배 마일스 데이비스도 이 점만은 대단히 비판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마일스도 성격이 개차반이라서 인간관계가 좋지 못했고 파커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헤로인 등 마약에 빠져 슬럼프를 겪은 게 몇 차례 되었으니 동족혐오였을지도? 물론 음악적인 평가로는 꽤 호의적이긴 하지만...

4. 사후의 평가

개막장인 사생활로 멸시를 받았지만 사후에는 그를 알던 지인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지금도 재즈계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극렬 재즈 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포레스트 휘태커 주연으로 전기 영화 '버드'를 찍었을 정도고, 파커의 창작곡들 중 절대 다수가 지금도 리얼북에 올라와 전 세계의 재즈 공연장들에서 시도 때도없이 연주되고 있다. 뉴욕에서는 매년 8월에 찰리 파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파커가 죽은 지 몇 십 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트리뷰트 공연이나 앨범 제작, 리믹스 등이 현재 진행형인 상황.

앨범 제작의 경우에는 주로 리믹스로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워낙 일찍 가시는 바람에 마일스 데이비스나 아트 블레이키 같이 킹왕짱 많은 음반을 남기기 힘들었다.

5. 에피소드

•파커가 캔자스시티에서 활동하던 초기에 하도 마약을 해대는 것에 이골이 난 제이 맥샨이 밴드 전체에 마약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파커도 이에 따르는 듯 보였지만, 이내 '대용품' 을 개발해 동료들에게 퍼뜨렸다. 많이 먹으면 환각을 일으키는 향신료인 육두구 가루를 콜라에 왕창 타먹으면 마약과 비슷한 효과가 난대나 어쩐대나.

•파커의 애칭인 '야드버드/버드'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휘황찬란한 속주가 새의 비행을 연상시킬 정도라는 것과 치킨을 몇 마리고 해치워대는 먹성을 빗댄 것이라는 등의 의견이 있다. 심지어 차를 몰고 가다가 실수로 닭을 치었는데, 파커가 그 죽은 닭을 들고 주방장에게 당장 요리를 해달래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암튼간에 치킨 엄청 좋아했던 것만큼은 사실인 듯...흑형이잖아

•어느 날 클럽에서 공연 직전 파커의 색소폰에 달린 키 하나가 부러져 버렸다. 색소폰 주자는 파커 한 사람 뿐이었고 다른 악기도 찾을 수 없던 상황이었는데, 파커가 클럽 주방에서 숟가락 하나를 갖고 와 구부린 뒤 질겅질겅 씹고 있던 껌으로 테이핑해 간단히 수리 완료.

•서부에서 공연하고 있었을 때 어떤 햇병아리 백인 트럼페터가 그와 협연할 기회를 얻었는데, 공연 평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파커가 '그 놈 앞으로 크게 될 거야' 라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고 한다. 그 트럼페터가 바로 쳇 베이커.

•파커 사후 추모 공연이 카네기홀에서 열렸는데, 이 때 어떻게 들어왔는지 공연 직전에 비둘기들이 홀 내부를 날아다녔다고 한다. 비주얼이 '버드' 의 환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적이었던 모양.

•1937년 캔자스 시티의 리노 클럽에서 벌어진 사건은 2014년작 영화 위플래쉬에서 주요 모티브로 여러번 반복 언급된다. 잼을 망친 파커의 연주에 화가 난, 당시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의 드러머 조 존스가 심벌을 집어던져 파커의 목이 잘릴뻔 했다는 것. 파커는 이 해프닝을 통해 영화에서의 언급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했고 이후 완벽히 차원이 다른 연주자로 거듭날 수 있었는데 이 에피소드는, 만일 조 존스가 그 자리에서 '괜찮아 그만하면 잘했어'라며 잼을 망쳐 낙심한 파커를 위로했다면 '버드'는 없었을 것이라는 부연 해설을 통해 영화의 핵심 주제로 사용된다. 다만 사실과 한 가지 다른 점은 있다. 실제 조 존스는 파커의 목을 노리고 심벌을 날리진 않았다고. 다만 꺼지라는 말 대신 파커의 발밑에 심벌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



3.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1917년 10월 21일~1993년 1월 6일)는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이다. 알토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와 함께 모던 재즈의 원형이 되는 비밥 스타일을 정착시킨 공로자로서 재즈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라틴 재즈를 발전시킨 아티스트로도 유명하다.

연주할 때면 마치 맹꽁이처럼 양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우스꽝스러운 모습 때문에 디지(Dizzy-현기증나는)라는 별명을 얻었던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더불어 비밥(Be-Bop)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며 당시 재즈계를 주도했던 전설적인 트럼펫 주자였다.

존 벅스 길레스피(John Birks Gillespie)란 본명으로 9남매 중 막내아들로 출생한 그는 아마추어 뮤지션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하게 된다. 처음엔 피아노와 트럼본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는 12살이 되던 해 트럼펫으로 전향했다. 이후 정식 음악교육을 받고자 로린 버그학교(Laurinburg Institute)에 입학하였던 그는 가난 때문에 곧 학업을 포기하고 만다. 35년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였던 디지 길레스피는 프랭키 패어팩스(Frankie Fairfax)라는 밴드에 가담하여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트럼펫의 대가였던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를 모델로 꾸준히 연습했던 디지 길레스피는 37년 로이 엘드리지가 빠져 공석이 생겨버린 테디 힐(Teddy Hill) 밴드에 가담하는 행운을 얻었으며 그의 첫 녹음작인 [King Porter Stomp]앨범에서 뛰어난 실력을 펼침으로서 팬들의 주목을 받는다. 이후 캡 캘로웨이(Cab Calloway)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여 잠시 활동하지만 41년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려 악단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이후 디지 길레스피는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베니 카터(Benny Carter) 등 많은 뮤지션과 활동을 벌이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1942년 얼 하인스의 빅 밴드에 가담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후일 그의 단짝 파트너로 자리 잡을 찰리 파커와의 역사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이시기가 아마 최초의 비밥 재즈가 연주되었으리라 예상되지만 아쉽게도 녹음된 자료가 없었다. 이후 그는 빌리 엑스타인 밴드에 가담하여 계속하여 버드와 함께 활약하며 [Opus X], [Blowing the blues away]와 같은 좋은 작품을 남겼다.

1945년부터 디지 길레스피는 자신의 이름으로 레코딩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도 항상 찰리 파커가 함께 해 주었다. [Salt Peanuts], [Shaw Nuff], [Groovin' High], [Hot House]와 같은 그의 초기작들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비밥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그는 파커와 함께 활동무대를 L.A.로 옮겨 음악 활동을 벌이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결국 다시 뉴욕으로 복귀한다.

이후 디지 길레스피는 후일 모던 재즈 쿼텟의 멤버들인 밀트 잭슨(Milt Jackson), 존 루이스(John Lewis), 레이 브라운(Ray Brown) 그리고 제임스 무디(James Moody), J.J 존슨(J.J. Johnson),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아프리카와 쿠바, 브라질의 토속음악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아프로 쿠반(Afro-Cuban)재즈에 심취하게 된다. [The Champ]나 [School Days]와 같은 앨범이 이 시기의 앨범들로서 중남미와 아프리카 특유의 토속리듬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아프로 쿠반(Afro-Cuban)재즈에 많은 열정을 쏟으며 많은 좋은 작품들을 남겼다.

40년대 말부터 주로 오케스트라를 결성하여 많은 활동을 벌였던 디지 길레스피는 5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종종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함께 클럽에서 공연을 가지며 돈을 모으기도 했다. 1953년 발매된 역사적인 명반 [The Quintet/Jazz At Massey Hall]앨범의 탄생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54년에는 그가 평소 동경하며 음악적인 모델로 삼았던 로이 엘드리지(Roy Eldridge)와 함께 [Dizzy Gillespie with Roy Eldridge]를 발표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 앨범은 피아니스트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과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Ray Brown)이 참여하여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가운데 두 거장의 불을 뿜는 트럼펫 배틀이 잘 담겨진 명반이었다.

56년 디지 길레스피는 다시 빅 밴드를 결성한다. 리 모건(Lee Morgan), 베니 골슨(Benny Golson), 퀸시 존스(Quincy Johns) 등이 참여하였던 그의 빅 밴드는 성공적인 투어를 단행하게 되는데 특히 57년 발매된 [At Newport] 앨범은 그 때의 뜨거운 열기가 잘 담아냄으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디지 길레스피는 그의 빅 밴드를 이끌고 주로 중동과 남미 등을 순회하며 많은 공연을 펼쳤다. 70년대 접어들어 그는 Giants of Jazz와 함께 투어를 나서기도 했지만 80년대에는 다소 미진한 활약을 보이며 주로 후배 양성에만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90년대 초반 그는 United Nation Orchestra를 결성하여 여러 곳을 순회공연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92년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40년대 비밥의 태동 이후 한 평생을 재즈와 함께 했던 디지 길레스피는 90년대 초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치며 살아있는 재즈계의 전설로 남았으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임으로서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의 재즈트럼펫 연주자 ·지휘자. 모던재즈의 기반이 된 비밥의 유형을 세워 파커와 함께 모던재즈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명랑하고 경쾌한 음색의 연주가 특징이며 금세기 최고 트럼펫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4.

버드 파웰버드 파웰(Bud Powell, 1924년 - 1966년)은 미국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이다.

비밥 피아노 연주의 선구자이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트리오' 형식을 정착시켰다.

비밥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새로운 패턴을 확립한 인물이다. 20-30년대까지 재즈 피아노 연주의 주류를 이루던 스트라이드 주법(랙타임에서 유래)은 그로 인해 왼손의 역할은 줄어들고 오른손이 연출하는 고난이의 연주 기교가 더욱 중시된다.

왼손으로 ‘움파-움파’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 주던 초기재즈-스윙 시대의 피아노 연주는 그의 새로운 시도로 인해 왼손은 코드의 변화만을 집어주고 대신 오른손으로 현란한 즉흥성을 강화시킨다. 비밥의 혁명을 주도했던 젊은 흑인 뮤지션들은 연주 전체를 누가 리드하느냐의 상관없이 밴드 내 연주자 개개인이 동등하게 주목받길 원했고, 이를 위해선 악기 각자가 보다 강화된 솔로 연주를 필요로 했다.

버드 파웰은 스윙시대까지 색소폰과 트럼펫이 주 선율을 담당하고 리듬과 선율을 동시에 책임지던 피아노의 위상을 좀 더 ‘선율’에 비중을 두면서 피아노 연주는 색소폰과 트럼펫처럼 우렁차게 부각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재즈 피아노 연주 주법을 한껏 풍성하게 해준 인물이다.

또한 그는 피아노 트리오의 전형을 제시했다. 막스 로치(또는 로이 헤인즈)의 드럼, 토미 포터(토는 컬리 러셀)의 베이스로 구성된 그의 초기 트리오는 이후 등장할 재즈 트리오 연주 대중화의 시조 격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없었다면 빌 에반스, 오스카 피터슨의 트리오 연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인 호응을 얻었던 80-90년대 칙 코리아와 키스 자렛의 트리오 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전성기는 그러나 비밥의 출현이 있던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로 다소 짧았다. 비밥 시대의 재즈 피아노 연주의 혁신자이자 동료였던 셀로니어스 몽크보다 초기엔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상습적인 마약 복용과 정신병까지 겹쳐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40대 초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1924년 뉴욕 태생인 파웰은 이미 10살 때 팻츠 월러와 아트 테이텀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신동이었다. 열 여덟 살이 되던 해 선배였던 몽크의 주선으로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에서 찰리 파커, 찰리 크리스찬과 함께 연주 하게된다. 또한 당시 몽크가 몸담고 있었던 쿠티 윌리엄스 오케스트라에서도 참여하고,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 콤비와 함께 1945-1947년까지 한솥밥을 먹는다.

당시 그의 독창적인 피아노 주법은 수많은 비밥 아티스트들이 ‘같이 연주하고 싶은 피아니스트 1순위’로 그를 격상시켰고, 일약 그는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가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나 파웰은 당시 마약 중독자였고, 술과 마약으로 인해 온갖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경찰서를 자기 집 드나들듯이 했다. 여기에 정신병까지 도져 그는 이후에도 황금 같은 젊은 시절은 마약-정신병원으로 허비한다.

정신병원 퇴원 후인 1949년 그의 실질적인 첫 솔로 앨범 <The Amazing Bud Powell Vol.1.2>와 이듬해 <The Genious Bud powell>을 각각 블루 노트사와 버브사에서 발표한다. 이 두 앨범은 그의 초기 연주 스타일을 잘 집약한 대표작들로서, 몽크와 ’Misty’의 주인공 에롤 가너(Eroll Garner)를 제외한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비껴갈 수 없는 ‘재즈 피아노 연주의 고전’으로 자리 매김 한다. ‘Bouncing with bud’, ’Hallucination’, 몽크의 역작이기도 한 ’52nd street theme’, ‘Un poco loco’와 같은 곡만 들어봐도 그가 왜 비밥 피아노 연주의 대표격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전성기는 1953년에 정점에 다다르다가, 이후 잦은 마약 복용과 정신병원 신세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되면서 하향세로 급락했다. 1966년 세상을 뜰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쳤지만 비밥 초기의 예리함은 점점 무뎌만 져갔고, 사람들 뇌리 속에서도 잊혀져만 갔다.

프리 재즈 피아니스트 세실 테일러(Cecil Taylor)가 등장하기 전까지 파웰의 연주는 독보적이었다. 오른손의 자유자제로 연주를 통해 그는 재즈 피아노 선율의 흥취를 배가시키며 재즈 피아노 연주의 위상을 한층 높여 놓는다. 버드 파웰의 피아노 연주는 비밥 피아노 연주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5.

맥스웰 리뮤얼 로치 (Maxwell Lemuel Roach, 1924년 1월 10일 ~ 2007년 8월 16일)는 미국의 재즈 음악가이다. 타악기 연주자로 유명하며 작곡도 하였다.

아트 블래키(Art Blakey)와 더불어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러머로 평가받고 있는 맥스 로치(Max Roach)는 누구보다도 곡의 리듬을 잘 살려내는 연주자로서 전설적인 트럼페터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의 활동으로 큰 명성을 얻었던 아티스트이다.

192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너주에서 태어난 맥스 로치는 가스펠 싱어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10살 때부터 드럼을 치기 시작하여 타고난 감각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는 18살 때부터 클럽에서 정기적인 공연을 펼치며 전문연주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의 짧은 연주활동 기간 중 그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던 맥스 로치는 43년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의 앨범에 참여하여 안정된 연주를 펼침으로서 재즈계의 관심을 얻어냈다.

이후 베니 카터(Benny Carter),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듀크 엘링턴(Duke Elington) 등 거장들의 앨범에 초빙되어 사이드맨으로서의 충분한 역할을 담당했던 그는 49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명반 [Birth Of The Cool]에 참여함으로서 재즈 팬들로부터 가장 주목받는 드러머로 자리 매김 했다.

맥스 로치는 54년부터 트럼페터 클리포드 브라운과 활동하며 더욱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Max Roach and Clifford Brown, Vol. 1,2]를 비롯하여 [Clifford Brown & Max Roach], [A Study in Brown], [Jam Session] 등 클리포드 브라운의 대표작들로 꼽히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도 모두가 드러머 맥스 로치의 탄탄한 연주가 뒤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6년 클리포드 브라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나서야 했던 맥스 로치는 이후 케니 도햄(Kenny Dorham),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등과 손을 맞추며 [Max Roach Plus Four]와 같은 좋은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50년대 후반부터 실험적인 재즈에 관심을 보였던맥스 로치는 많은 프리재즈의 음반에 참여하여 보다 진취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61년에는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Percussion Bitter Sweet]를 발표하였는데 이 앨범은 에릭 돌피(Eric Dolphy), 부커 리틀(Booker Little), 애비 링컨(Abbey Lincoln)등의 실험적 뮤지션이 참여한 가운데 맥스 로치의 정확하고 감각있는 드러밍이 곁들여진 훌륭한 작품이었다.

62년에는 재즈 보컬리스트 애비 링컨과의 결혼으로 재즈계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이후 맥스 로치는 소니 클락(Sonny Clark) 트리오와 활동하며 여러 레코딩을 선보였지만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슬럼프에 빠져 한동안 별다른 활동 없이 조용한 시기를 보냈다. 70년에는 애비 링컨과도 이혼을 하고 말았다.

70년대 후반 좀더 아방가르드적인 재즈에 심취하게 된 맥스 로치는 아치 쉡(Archie Shepp), 세실 테일러(Cecil Tayler), 안토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하며 여러 앨범들에 참여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80년대 접어들어 그는 그의 딸 맥신 로치(Maxine Roach), 테너 색소포니스트 오딘 포프(Odean Pope), 세실 브리지워터(Cecil Bridgewater) 등과 활동하며 [Scott Free], [Bright Moments], [To the Max]과 같은 후기 명작들을 발표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하였다.

90년대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작곡과 공연에 몰두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드럼연주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항상 탐구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시도를 보였던 그의 학구적인 자세는 오늘날 젊은 연주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맥스 로치와 케니 클락은 재즈 드럼의 발전을 촉발시킨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중 맥스 로치의 경우 그간의 베이스 드럼의 울림에 의한 강력한 액센트 대신 라이드 심벌을 이용한 방식으로 비트를 강조했는 데,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선 보기 힘든 것이었다. 이런 시도로 인해 드러머들은 보다 다양한 리듬 만들기가 가능해졌고 연주 접근방식 역시 응용이 다채롭게 될 수 있었다.

맥스 로치는 1924년 1월 10일 노쓰 캐롤라이나주 뉴랜드에서 맥스웰 레뮤엘 로치(Maxwell Lemuel Roach)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맥스 로치의 어머니는 가스펠 싱어였는데, 이 때문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드럼을 치기 시작한 건 10살때부터다. 이때부터 그는 맨해턴 음악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으며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18살 무렵엔 찰리 파커(Charlie Parker)나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등과 함께 Minton's Playhouse나 Monroe's Uptown House 잼에 참여해 일찍부터 네임밸류를 쌓기에 이른다.

맥스 로치는 1943년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 등과 함께 레코딩을 하는 데 이것은 그로선 첫 데뷔앨범이 되는 것이었다. 1945년에는 찰리 파커가 이끄는 그룹에 가입해 일련의 앨범들을 공개했다. 그러는 한편 적지않은 수의 재즈 뮤지션 음반에도 참가해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는데, 그 중 마일스 데이비스의 Birth of the Cool은 대표적인 앨범 중 하나이다.

맥스 로치는 찰스 밍거스와 함께 1952년 데뷔(Debut)라는 레이블을 설립해 Massey Hall 공연 등 재즈사에 길이 빛나는 일련의 앨범들을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곤 1954년 하워드 럼지(Howard Rumsey)의 라이트하우스 올 스타스(Lighthouse-All Stars)와 레코딩을 하고 이어서 LA로 가 퀸텟을 조직했다. 그가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 조직한 브라운/로치 퀸텟은 에마시(EmArcy) 레이블에서 50년대 하드밥을 대표할 수 있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공개하며 재즈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56년 클리포드 브라운이 사고로 죽자 깊은 슬픔에 빠져 잠시 음악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케니 도햄(Kenny Dorham),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등과 팀을 이루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즈계에 등장했다.

이즈음 맥스 로치는 싱어 애비 링컨(Abbey Lincoln)과 알게 되어 그녀의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도록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둘은 1962년 결혼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1970년에 헤어지고 맥스 로치는 또다른 류의 드럼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데 그것이 바로 M'Boom이다. 이 팀은 기타나 베이스, 또는 관악기 등 일반적인 멜로디 악기는 철저히 배제한 채 오로지 10개의 퍼커션으로 이루어진 타악기 앙상블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퍼커션들로만 모인 이 프로젝트는 각각 멜로디와 리듬 등을 맡아 타악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데에서 음악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

70년대로 들어서며 맥스 로치는 앤서니 브랙스턴(Anthony Braxton), 아치 솁(Archie Shepp), 세실 테일러(Cecil Taylor) 등과 교류하며 아방가르드적인 사운드도 연주했다. 80년대엔 오데인 포프(Odean Pope), 세실 브릿지워터(Cecil Bridgewater), 타이론 브라운(Tyrone Brown) 등과 쿼텟을 조직해 예전과는 또 다른 형태의 연주를 추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