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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달달동 1차 모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7. 4. 30.

달달동 첫 모임(2017, 4월 30일 오전 11:30)

참석자: 이준호 작가

       반작용, 미나, 은주, 현경, 미숙, 나은, 은, 송원


2017년 신춘 동화를 읽고/

다음 모임에선 2016년 신춘 동화를 읽고 자신의 창작 계획서를 나눈다.


오늘 수업에서:

주제란 인류 보편적인 시선이 응축된 것

소재란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매개체

소재의 선택이 동화나 소설의 관건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여 인류 보편적인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작품을 읽을 때도 분석을 하는 태도를 가져라.

동화는 아이들의 언어를 차용해서 써라.

2017 조선 일보[동화 당선작/동화 당선소감/동화 부분 심사평]

박혜원

"고자질쟁이하고는 안 놀아!"

지영이가 쌩하고 돌아섰다.

"고자질쟁이." "상희는 진짜 이상해."

2학년 이후 상희를 따라다니는 말들이다. 고자질쟁이, 이상한 상희. 지영이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절교 선언을 하고 돌아서는 지영이에게 뭐라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왜들 그래? 오늘도 이상희야?"

교실로 막 들어온 반장 석규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여자애들이 교실에서 피구 하다가 화분 깨뜨린 거, 이상희가 어제 샘한테 말했대. 어떻게 같은 여자애들끼리도 배신하냐."

"원래 그런 앤데 뭘. 새롭지도 않네."

짝꿍 주성이가 열심히 떠들자 석규는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석규만큼은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상희는 냉정하게 말하는 석규가 미웠다.

집으로 돌아온 상희는 울상이 되어 책상에 엎드렸다.

"우리 상희, 무슨 일 있었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상희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상희는 아무 말 없이 책상에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상희야, 이제… 위험하지 않은 일은 조금만 참아 보면 어떨까?"

상희가 말하지 않았는데 엄마는 상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모르겠어, 엄마. 어떤 게 위험하지 않은 건지. 내가 얘기 안 해서 화분이 또 깨지고, 다음엔 다른 친구들이 다치고, 그러면 어떻게 해?"

엄마는 상희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상희는 느지막이 일어나 가방을 둘러멨다. 지영이가 옆에 없다고 생각하니 학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커겅 컹, 왕왕."

문이 잠겨 있는 음식점 안에서 갑자기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아 움츠러들었다. 상희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학교에 도착하니 1층 계단 앞에서 주성이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그래?"

상희의 물음에 주성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 어제 농구 하다가 이렇게…. 근데 엘리베이터가 안 되네."

주성이는 불편한지 반깁스한 한쪽 다리를 살짝 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열쇠 있어야 하잖아. 교실 가서 담임선생님한테 따로 신청해."

새치름하게 말을 한 후, 상희는 주성이의 한쪽 팔을 자기 어깨에 올렸다.

"기대. 같이 올라가 줄게. 가방까진 못 들어줘."

"아, 아니야. 혼자서 올라갈 수 있는데…."

"이제 수업 시작할 텐데 빨리 올라가는 게 낫지 않아?"

주성이는 상희 어깨에 의지해 찔뚝찔뚝 계단을 올랐다.

"넌 진짜 이상해. 세상에서 제일 못된 것 같다가도 이렇게 도와주는 거 보면 또 아닌 것도 같고."

"잔소리 말고 이따가 열쇠나 받아 와. 귀찮아도 깁스한 동안은 편하게 다녀야지."

"쳇, 꼭 선생님 같은 말투야. 그러니 애들이 널 싫어하지."

상희가 툭 멈춰 섰다.

"엄마가 잘못된 건 꼭 얘기하랬어.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상한 걸 얘기하는 것뿐이야. 애들이 싫어하든 말든 난 신경 안 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희도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상희만 오면 친구들은 금세 뿔뿔이 흩어진다. 혹시라도 자기 이야기가 선생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빈정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교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성이는 혼자 온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져서 찔뚝거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상희가 자리에 앉자 바로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상희는 손을 번쩍 들었다.

"상희야, 왜? 또 무슨 일 있니?"

선생님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물었다.

"오늘 주성이가 발에 깁스했는데요, 열쇠가 없어서 엘리베이터를 못 타고 있어서… 제가 부축해서 같이 올라왔어요."

"어? 김주성, 너 다쳤어. 어디 봐봐."

"어휴, 이상희 또 시작이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주성이는 짜증나는 듯 '에이 씨' 하며 씩씩거렸다.

"선생님, 엘리베이터 열쇠 없이 쓰게 해 주면 안 돼요? 갑자기 아픈 애들이 쓰기 힘들어요."

"상희가 친구 배려하는 마음이 참 크구나. 그런데 어쩌니? 그건 학교 방침이라…. 열쇠 발급해 줄 테니까 조금 불편해도 그냥 쓰자."

"선생님이 학교에 건의해 주시면 안 돼요?"

"음… 그건 에너지 절약 차원도 있고, 말짱한 애들이 장난삼아 너무 많이 타고 다녀서 말이야. 흐흠."

선생님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수업할 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늘 이런 식이다. '그래, 상희가 배려심이 많구나' '잘못된 걸 얘기하는 건 참 좋은 거야' 이렇게 말하지만 선생님은 상희 얘기를 끝까지 들으려고도 해결해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야, 이상희. 너 진짜 드럽게 공치사할 거냐? 그럴 거면 뭐하러 도와줬는데? 아욱 이걸 진짜."

수업이 끝나자 주성이가 다가와 목소리를 높이며 겁을 주었다.

"이상희한테 한두 번 당하냐? 속은 네가 잘못이지. 가면서 불떡볶이나 같이 먹자."

반장 석규가 주성이를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상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뒤에서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수군대며 상희와 거리를 두고 걸었다. 아이들의 대화 속에 상희의 이름이 몇 번씩 흘러나왔다.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잘한 거야. 잘한 거라고. 친구 없으면 어때. 어차피 친구는 귀찮아.'

상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내달렸다. 땅만 보고 달려서인지, 눈물이 고여서인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철컹 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상희 앞으로 달려들었다. 상희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커겅, 컹컹."

아침의 그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상희 앞에서 짖어대고 있었다. 누런색 큰 개였는데 순댓국집 마당에 긴 목줄로 묶여 있었다. 개는 상희의 뜀박질 소리에 흥분했던지 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희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인도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뎌가며 개를 피했다. 이렇게 큰 개를 거의 풀어놓다시피 하다니…. 상희는 당장에라도 학교로 돌아가 선생님께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얘기했다가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겁이 났다.

'그래, 조금만 참아 보는 거야. 할 수 있어.'

말을 삼키듯 침을 크게 삼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상희의 마음은 내내 찜찜했다.

학교는 학예회 준비로 한창 바빴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임원들은 교실을 꾸미느라 남아야 했다. 임원인 친구에게 붙들려 같이 남은 아이들은 입으론 투덜거렸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상희는 혼자서 교실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순댓국집 앞에 다다르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 앞에서 남자아이 둘이 개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 마, 위험해!"

"쟨 또 뭐냐? 나 6학년이거든? 신경 끄고 집에나 가지?"

아이들은 문구점에서 파는 불량식품 쥐포를 가지고 개에게 줄 듯 말 듯하며 놀리고 있었다.

"야, 이 똥개야. 너 왜 만날 나만 보면 짖냐? 응?"

그중 한 명이 신주머니로 개의 주둥아리를 툭 쳤다. 개는 성질이 난 듯 크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오며 쥐포와 신주머니로 개를 약 올렸다. 그 모양새가 깨금발로 줄다리기하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개는 큰 소리로 짖다가 급기야 한 아이의 신주머니를 물었다. 그리고 힘으로 끌

어당겼다. 아이까지 주춤주춤 딸려갔다. 상희는 급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다.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가게 문을 세게 두드려도 봤지만 문 닫힌 가게 안에서는 작

게 사람 소리가 들릴 뿐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다. 초초해진 상희는 학교로 다시 뛰

어갔다.

3층을 단숨에 뛰어오른 것 같았다. 상희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었다.

“어? 상희 왜 또 왔니? 혹시 뭐 할 말이라도….”

선생님은 머뭇거리며 상희에게 물었다. 학예회 준비로 교실에 남아 있던 몇몇 아

이들도 상희를 바라봤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헉헉. 순댓국집 개가요, 헉헉.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끈을

너무 길게 묶어 놔서….”

“아휴, 난 또 무슨 일이라고. 상희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상가는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선생님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애들이 그 개한테….”

“휴. 그래, 그래. 그럼 선생님이 알아볼게.”

선생님은 상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부직포를 들어 가위를 가져다 댔다. 그

러면서 작게 혼잣말을 했다.

“아휴, 쟤는 아무 때나 저렇게 큰일 난 것처럼 말하니 원.”

상희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단숨에 뛰어와서도 아니고 흘린 땀 때문에 추워서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한결같은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 제 말 좀 들어주시라고요. 우리… 우리 아빠가 그렇게 돌아가셨다고요. 아무도 아빠 말을 안 들어줘서…. 공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계속 말했는데, 어지럽다고 계속 말했는데… 그랬는데 아무도 안 들어줬단 말이에요!”

상희는 그동안 참았던 설움을 한 번에 쏟아내듯 울부짖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놀

란 얼굴로 상희를 바라봤다. 석규는 갑자기 얼어버린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석규 너도 알잖아. 너희 아빠도 같은 회사 다녔잖아. 너희 아빠도 아프다며? 병원

다닌다며? 넌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상희는 자기를, 그리고 자기 아빠 일을 모른 척했던 석규에게 울면서 쏘아붙였다. 상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울지 말라고, 울지 말고 말해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할수록 마음속에서는 더 큰 울음이 토해져 나왔다. 도화지처럼 하얘진 얼굴을 한 선생님과 아이들은 그저 상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희의 울음소리와 함께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동화 부문 심사평]

아이 호흡으로 담아낸 잘못된 것투성이 세상

올해 응모자 수는 무려 333명이었다. 이 많은 원고를 읽으면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물음 하나가 또렷이 떠올랐다. 왜 동화를 쓰는가? ‘글’이 아니라 ‘동화’ 말이다. 거의 모든 응모자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좋은 말을 어떻게 재미있게 전달할 것인가에 눈이 어두워 보였다.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다. 사소한 자극에도 상처받기 쉬운 여린 영혼 앞에 놓인 세상이란 얼마나 거친가! 인생의 이런저런 이정표를 제시하기보다는 안전했던 엄마 품을 떠나 혼자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야만 하는 아이의 외로운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바로 아동문학이 할 일이다.

최종적으로 세 편을 놓고 고심했다. 류재민의 ‘쉿! 이건 비밀인데’, 박혜원의 ‘이상한 이상희’ 그리고 명은숙의 ‘형이 되는 법’. 세 편 모두 안정적인 문체로 또렷한 주제를 담은 이야기를 아이들 호흡으로 하고 있었다. 잘못된 걸 고쳐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불안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상희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나는 ‘이상한 이상희’는 잘못된 것투성이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만든다. 나직한 목소리로 조용조용 읊조리는 ‘짝짝이’ 화음 같은 이야기인 ‘쉿! 이건 비밀인데’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편견을 부드럽고 유쾌하게 깨뜨려주는 힘이 있었다. 동생을 본 아이가 느끼는 분노와 불안과 두려움을 비유적인 표현과 내면 독백 속에 담아낸 ‘형이 되는 법’은 흔한 소재를 색다르게 소화해낸 작품이었다. 각각 다르지만 비슷한 수준의 성취를 보이는 세 편 중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쉽게 다가갈 만한 ‘이상한 이상희’를 당선작으로 민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나머지 두 응모자에게는 격려를 전한다.

최윤정(아동문학평론가·출판사 ‘바람의아이들’ 대표)

문화일보 동화 당선작 (그런 하루)

학교가 끝나고 축구를 한 판 했다. 동전을 긁어모아서 음료수 한 병을 샀다. 넷이서 나눠 먹으니 한 모금씩밖에 못 먹었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애들은 학원에 가야 한다며 나랑 민규만 남기고 갔다. 민규와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규도 나처럼 아버지와 둘이만 산다. 우리는 서로 눈치 없이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래서 민규와 둘이 있는 게 편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둘 다 할 말을 잃은 채 있을 때도 많았다.

“연재한테 가 볼까?”

“거기 가서 뭐하냐?”

“있으면 같이 노는 거지 뭐.”

민규도 나처럼 배가 고픈 거 같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민규를 따라 걸었다. 연재네 빵집은 시장 입구에 있다. 우리는 건너편에서 까치발을 든 채 안을 들여다봤다.

“있어?”

“없어.”

빵집 안에는 연재뿐 아니라 손님도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지금 들어가기 좀 그렇지?”

“그지, 연재도 없는데 가서 뭐해.”

나와 민규는 다시 갈 곳을 잃은 채 하늘만 보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얘들아.”

키가 크고 깡마른 누나가 말을 걸었다. 검고 숱 많은 머리가 어깨에 닿아 있었다. 새하얀 피부는 새까만 머리와 대조돼 더욱 하얘 보였다. 왼쪽 팔로는 짙은 갈색의 강아지를 안고, 오른쪽 팔 아래에는 만화책을 한 권 끼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누나는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뭔데요?”

참지 못한 듯 민규가 물었다.

“잠깐 얘 좀 맡아 줄래? 빵을 사야 하는데, 안에 개는 못 데리고 들어가서. 잠깐이면 돼.”

우리 쪽을 보고 있는 듯했지만 앞머리에 가려 확실하지 않았다.

“얌전하니까 힘들지는 않을 거야. 짖지도 않아. 늙어서 귀도 잘 안 들려.”

“늙어요? 몇 살인데요?”

“열세 살.”

개는 사람이랑 달라서 나이를 몇 배나 빨리 먹는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래도 나랑 동갑인데늙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가 데리고 있을게요.”

나는 누나에게서 개를 받아 안았다. 손 밑에서 팔딱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민규는 내 품에 안긴 개를 자꾸만 쓰다듬었다. 개는 귀찮은 듯 민규를 쳐다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얘 이름은 참깨야.”

누나가 민규를 보며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누나가 우리를 두고 빵집으로 가려고 하자 참깨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이 자기를 두고 가려는 줄 알았는지 낑낑 소리를 냈다. 누나는 몇 번 뒤를 돌아보고 빵집으로 들어갔다.

“귀엽다.”

민규는 쉬지 않고 참깨의 등을 어루만졌다.

“네가 안을래?”

생각보다 무게가 있어서 팔이 아팠다. 민규는 대번에 받아 안았다.

유리문 안을 통해 보니 누나는 빵집을 천천히 돌며 신중하게 빵을 고르고 있었다.

“얘 봐.”

민규는 오른손으로 참깨의 턱밑을 살살 긁었다. 참깨는 턱을 앞으로 쭉 내민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목욕탕에서 할아버지 등을 밀어드렸을 때, 할아버지가 ‘아이고, 시원하다.’ 하는 표정이었다. 나와 민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애기 같은데 할아버지라니 이상하다, 그지?”

“할아버지야? 할머니 아니고?”

나와 민규는 서로 마주 봤다.

“확인해 보자.”

민규는 참깨의 몸통을 들어 올려 내 쪽으로 배를 보였다. 내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은 고추가 아랫배 쪽에 달려 있었다.

“남자다, 남자. 고추 있어.”

갑자기 참깨가 앞발로 얼굴을 긁었다. 두 눈을 가린 모습이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와 민규는 또 한참을 웃었다.

나는 참깨를 보니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졌다. 조금 귀찮을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치킨 집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늘 새벽이 돼야 집에 돌아왔다.

“근데 이 누나 왜 이렇게 안 와?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민규가 오줌이 마려운지 다리를 배배 꼬았다. 빵집 안을 들여다보니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서 물어볼게.”

민규가 참깨를 맡기고 허둥지둥 빵집으로 들어갔다. 연재네 아줌마와 잠깐 얘기를 하더니 민규가 빵집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잠시 보이지 않던 민규가 다시 나타나 아줌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뭐래?”

“화장실 쓰래.”

“아니, 그 누나. 어디 있냐고.”

나는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화장실 간다더니 그 뒤로 안 돌아왔대.”

“뭐?”

“화장실이 빵집 뒷문으로 나가야 있더라. 그리로 나가버렸나 봐.”

“뭔 소리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민규가 침착하게 말하는 데도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버리고 간 거라고. 참깨를.”

민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살짝 한숨을 쉬었다.

참깨를 안은 팔이 저려왔다. 갑자기 참깨가 두 배, 세 배는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참깨를 내려다봤다. 우리가 하는 얘기를 알아들을까?

“어떻게 하지?”

좁은 골목길 안을 샅샅이 뒤졌다. 전봇대랑 휴지통 뒤에도 살펴봤다. 어디선가 누나가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뭔가가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누나 말이야. 만화책 들고 있지 않았냐?”

민규는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냥꾼 빅맨 7권. 그걸 누나가 들고 있었어!”

“그거 새로 나와서 갈 때마다 없다고 못 본 거잖아!”

민규가 알은체를 했다.

‘사냥꾼 빅맨’은 우리 학교 남자애들 사이에서 제일 인기 많은 만화책이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인데 여자인 누나가 그 책을 들고 있어서 기억 속에 남았나 보다.

“가자!”

민규가 먼저 뛰었다. 나는 얼른 민규 뒤를 따라 뛰었다. 빵집이 멀어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 품에 안긴 참깨의 심장도 아까보다 더욱 세차게 뛰었다.

“사냥꾼 빅맨 7권? 방금 들어왔는데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냐.”

알바생 형이 시익 웃으며 책을 꺼냈다. 나랑 민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당장 책을 빌려서 그 자리에서 읽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깨 주인을 찾아야 했다. 어차피 돈도 없었다.

“방금 이 책 반납한 사람, 여자였죠?”

형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는 사람이야?”

우리는 빵집 앞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형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열심히 우리 얘기를 들었다. 우리보다 나이 많은 형이 귀 기울여 들어주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민규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손짓 발짓까지 하며 열심히 얘기했다.

“그 여자가 기르던 개구나.”

형이 쥐포를 꺼내 참깨에게 내밀었다. 참깨는 냄새를 킁킁 맡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찾아서 돌려줘야죠.”

“내 말은 어떻게 찾을 거냐고. 너희 오기 훨씬 전에 나갔어.”

“여기 손님 전화번호 저장해 두잖아요. 처음 가입할 때 나도 썼던 거 같은데.”

나는 핸드폰이 없어서 아버지 핸드폰 번호로 가입했다. 그랬다가 만화책이 연체됐다고 문자가 오는 바람에 약간 꾸지람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번호 아니야.”

형이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그 번호로 전화해 봤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라고.”

“근데 왜 안 고쳐놨어요?”

민규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한 번도 연체한 적이 없어서 딱히 새 번호를 달라는 말을 못했어.”

나는 왜 연체도 하지 않은 누나에게 전화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얼핏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그 옆에 참깨를 내려놨다. 참깨는 잠시 소파 위를 네 발로 자근자근 밟더니 내 옆에 얌전히 엎드렸다. 민규가 종이컵에 생수를 담아서 참깨에게 내밀었다. 참깨가 부지런히 물을 마셨다.

나와 민규도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선풍기 바람이 땀을 식혔다. 그냥 형에게 부탁해서 사냥꾼 빅맨이나 볼까? 컵라면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다시 배가 고팠다. 민규는 기분이 안 좋은지 아까부터 말없이 애꿎은 소파 가죽만 손톱으로 뜯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

“형이 기를래요?”

“미쳤냐?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럼서 뭘 물어요.”

나는 입술을 부루퉁 앞으로 내밀었다.

“그 여자 말이야.”

형이 은밀한 비밀이라도 말해 주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우리 옆에 앉았다.

“곧 이사 간다고 하더라. 나한테 괜찮은 부동산 물어보고 갔어.”

“거기가 어디예요?”

나는 벌떡 일어나 물었다.

“어디로 가냐고? 그냥 이 근처에서 집만 옮기는 거 같던데.”

“아니, 형이 추천한 부동산 말이에요. 어디 알려줬냐고요.”

“아, 정 씨 아저씨네 부동산.”

‘정 씨 아저씨’라는 말을 듣자 기운이 빠졌다. 그 아저씨 앞에만 가면 주눅이 들었다.

“얼른 가 보자.”

민규가 참깨를 안고 일어섰을 때 만화방 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형과 누나들이 들어왔다. 형은 아무 반응이 없는 참깨를 보더니 혀를 찼다.

“애가 누굴 봐도 짖을 줄도 모르고, 반길 줄도 모르고. 나라도 버리겠다.”

민규는 카운터로 돌아가는 형의 뒷모습을 한참 째려봤다.

정 씨 아저씨네 부동산이라면 ‘정직한 부동산’을 말하는 거다.

부동산 안을 들여다보니 연재네 빵집이랑 다를 게 없이 손님이 하나도 없다. 아저씨는 우리 동네가 그려진 지도 앞에 앉아 배달 음식을 먹고 있었다.

“벌써 저녁 먹을 때인가 보다.”

민규가 중얼거렸다. 부동산 안 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저녁을 먹고 있었을 것이다. 배는 고팠지만 지금 시각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떡하지? 들어가 볼까?”

정 씨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가 일하는 치킨 집 ‘큰 사장’이다. 우리 아버지는 ‘작은 사장’이라고 불렸다. 똑같은 사장인데 정 씨 아저씨는 하루에 한 번, 혹은 이틀에 한 번만 치킨 집에 들렀고,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하러 나갔다. 닭을 손질하는 것부터 양념을 만들고 전화 주문을 받고, 가끔은 배달까지 직접 하는 것이 작은 사장이 할 일이었다.

“그냥 가자.”

나는 민규의 팔을 잡아끌었다. 개는 그냥 경찰서에 갖다 주면 될 것이다. 어쩌면 냄새를 맡아서 집에 찾아갈지도 모른다. 귀가 안 들린다고 했지 코가 나쁘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어쩌면 개를 키우고 싶어 하는 아이가 키워줄 수도 있겠지. 참깨가 늙었다고 했지만 겉으로 보면 알 수 없으니 누구라도 금방 주워갈 것이다. 나는 민규한테 내 생각을 말했다.

탁.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규가 내 어깨를 쳤다.

“사과해.”

“뭐?”

“참깨한테 사과하라고.”

“사과하라고? 내가? 내가 왜?”

“너 최선을 다한 거 맞아?”

민규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날렸다. 학교 선생님이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이렇게 포기하는 거야?”

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민규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도 몰랐다. ‘최선을 다한다’라는 건 어른들이 나 같은 애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아.’,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최선을 다했냐가 중요해.’ 따위의 말. 고스란히 어른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 ‘최선을 다해서 저를 길러줘서 고마워요.’, ‘최선을 다했으니 엄마와 아빠가 헤어져도 어쩔 수 없죠.’와 같이 얼마든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빙그르 돌아 민규를 등지고 걸었다.

“진짜 멍청해!”

한참을 걷다가 눈에 띈 바닥의 돌을 힘껏 찼다. 전봇대에 부딪힌 돌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최선’이란 무엇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지금 저 둘을 두고 떠나도 내 마음이 괜찮을까? 답을 생각하면 ‘아니’였다. 나는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참깨를 주인에게 돌려주든 아니든, 셋이 있고 싶었다. 이 바람대로 하는 게 나한테는 ‘최선’이었다.

다시 몸을 돌려 민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걷다가 조금 빠르게 걷다가 더 빠르게 걷다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자 민규가 보였다. 여전히 참깨를 안은 채였다. 나는 민규의 등을 두들겼다. 민규가 돌아봤다. 참깨가 나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저기 말이야.”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해.”

그제야 민규의 굳은 얼굴이 풀어졌다.

“참깨한테도.”

참깨가 컹! 하고 소리를 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가래가 낀 듯한 소리였지만 제법 우렁찼다.

“괜찮다는 거 같은데?”

민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함께 웃었다. 웃음소리를 실은 바람이 시원했다.

“그럼 들어가 볼까?”

내가 먼저 앞장서 걸었다.

우리는 부동산 안으로 들어갔다.

“어이구, 이게 누구냐. 아버지 잘 계시지?”

아버지의 안부는 나보다 아저씨가 더 잘 알지도 모른다.

“무슨 일로 왔어?”

민규와 나는 참깨와 빵집 앞에서 누나를 만났을 때부터 만화방에서의 이야기까지 차근차근 했다.

“혹시 머리가 어깨까지 오고 새하얀 아가씨 말하는 거냐?”

“맞아요!”

나와 민규는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지금 사는 데보다 훨씬 작은 데로 이사해야 한다고 하더라. 아마 그런 집에서 개는 못 키울 거다.”

아저씨가 흘끔 참깨를 곁눈질했다.

“근데 어째. 그 아가씨라면 아까 갔는데.”

“알아요. 그래도 아저씨라면 연락처는 아시잖아요.”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알려주면 신고당할 수도 있어.”

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참깨는 어떡해요? 얘는 사람 나이로 치면 할아버지나 마찬가지라고요. 앞으로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데 이제 와서 다른 주인을 찾아주란 말이에요?”

민규가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아저씨도 놀란 듯 입을 벌린 채 민규를 보고 있었다.

“이런 늙은 개를 누가 데려가겠냐.”

아저씨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집 보러 오기로 했어. 그때 너희도 오면 만날 수 있겠다.”

토요일이라면 이틀 뒤다. 안심이 됐다. 그때까지는 나나 민규가 돌봐주면 된다. 막혔던 변기가 뻥 뚫리듯 내 마음도 시원해졌다.

“감사합니다.”

나와 민규는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가 고마웠다. 진심이었다.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여간 사람이나 동물이나 능력 없으면 함부로 키우는 게 아니야.”

부동산 문이 닫히고 우리는 다시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와 민규는 집 쪽으로 걸었다.

“오늘은 내가 데려갈게.”

민규가 참깨를 안아 들었다. 참깨는 지쳤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다리가 아팠다. 어디든 앉아서 시원한 선풍기 바람을 쐬며 쉬고 싶었다. 하지만 집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걷다 보니 다시 연재네 빵집 앞이었다.

빵집 안에는 아까보다는 손님이 조금 있었다. 연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연재네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머쓱해져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빵집 문이 열리더니 아줌마가 우릴 향해 달려왔다.

나는 아줌마를 뒤따라오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나였다.

“참깨야!”

누나는 아줌마를 밀치듯 달려와 민규에게서 참깨를 뺏으려 했다. 민규는 얼른 몸을 돌려 누나를 피했다. 누나를 본 참깨가 마구 꼬리를 흔들었다.

“너희 어디 갔었니? 이 아가씨가 얼마나 찾았다고. 화장실 갔다 왔더니 너희가 강아지를 데리고 없어졌다고 난리였어.”

나는 기가 막혔다. 민규의 얼굴을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아줌마, 여기 화장실 남녀공용이죠?”

민규가 천천히 물었다.

“그렇지.”

“아까 제가 화장실 썼죠?”

“그랬던가?”

“제가 화장실 갔을 때 이 누나 없었어요.”

누나가 고개를 숙이며 우리 눈을 피했다.

“우린 여기서 한참을 기다렸다고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개 주인이 나타났잖아. 그러니 돌려주면 되지.”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아줌마 최선이에요?”

“뭐?”

아줌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민규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능력 없으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함부로 키우면 안 되는 거 모르세요?”

나는 누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누나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빴으면 했다. 그래야 우리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것만 같았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던 누나가 새하얀 팔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토요일에 부동산에 누나를 찾으러 갈 생각까지 했으면서 이상하게 지금은 누나에게 참깨를 돌려주기 싫었다.

“가자, 민규야!”

누나 손을 뿌리치고 민규 팔을 잡았다. 민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참깨는 나와 민규가 키우면 된다. 사실 누가 키워도 크게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먹이를 주고 잘 곳을 주고 화장실을 만들어 주면 된다. 그럼 참깨는 먹고 자고 똥을 싸면서 나이를 먹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게 없다.

그때였다. 참깨가 심하게 몸을 뒤틀었다. 민규가 팔을 안으로 오므렸는데도 참깨가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해서 땅에 내려놓았다. 참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를 떠나 누나한테로 달려갔다.

“참깨야!”

누나가 참깨를 안아 들었다. 참깨는 아기처럼 누나 품에 마구 파고들었다.

누나는 참깨의 등에 코를 박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와 민규가 있는 쪽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참깨가 혀를 날름거리며 누나의 팔을 핥았다.

연재네 아줌마는 빵집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는 우릴 향해 고개를 슬쩍 숙이고 반대편으로 갔다. 나와 민규는 누나와 참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좋은 누나는 아니야, 그지?”

“맞아.”

“그래도 참깨가 좋아해.”

“그런 것 같아.”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졌다. 빵집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누군가의 저녁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들이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저 오토바이 중에 아버지도 있을까.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인호야.”

민규가 불렀다.

“응?”

“우리 집에 가서 밥 먹고 가.”

집에 가서 혼자 밥을 먹는 것보다는 민규와 함께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남의 집에 가는 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내일은 민규를 데려가 우리 집에서 먹으면 될 거다. 그럼 어느새 민규도 나도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는 게 편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마치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같았다. <끝>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누구 없어요? - 임민영

은유나 상징성이 많아야 좋은 작품/문맥보다는 그 안의 것을 들여다보여야한다.

문의 상징성은? 관계

동화를 시라고 생각하라.

순대의 상징성

엄마의 대화부분은 지우는 게 어떨까?

작가는 독자 수용론을 수용해야한다. 쓰여 진 텍스트에는 쓰여지지 않은 독자의 몫이 있다.

적극적인 독자가 되라.

북코아: 중고서점

“뭐야, 왜 또 이래.”

아침에 엄마가 일러준 대로 손잡이를 휙휙 움직여 보았다. 달래듯이 살살 움직였다가, 짜증이 치솟아 세게 움직여 봐도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이마에는 진땀이 배었다. 손잡이를 당겼다가 밀었다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바람에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라도 여기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쾅. 쾅쾅쾅. 퍽.

“누구 없어요? 살려 주세요!”

혹시나 지나가던 사람이 듣고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파트 복도는 고요했다. 익숙했던 화장실이 너무나 좁고 답답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금방 나갈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리자. 우니까 코도 막히고 숨도 안 쉬어지잖아. 울면 안 돼.’

오후 6시 41분.

사은품으로 받아 온 동그란 시계가 수건걸이에서 달랑거렸다. 화장실에 갇힌 지 30분 즈음 지났나 보다.

‘엄마 오려면 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

다시 위아래로 손잡이를 움직여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환풍기도 망가졌는데 설마….’

무서운 생각의 자리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심장은 더욱 쿵쾅거렸다.

‘침착하자, 침착해. 차라리 잠을 자자. 한숨 자고 나면 아빠가 올 거야.’

바닥에 깔린 발판 위에 수건을 펴고 누웠다. 팔다리가 발판을 넘어가 불편했지만, 자리를 탓할 때가 아니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가빴던 숨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조용한 중에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

쏴아. 윗집인지 아랫집인지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

또각또각.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 철컥 쾅. 역시나 남의 집으로 들어갔지만.

평소에는 잠도 많은데, 어쩐지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침에 엄마 말 귀담아들을 걸….’

“박민서 빨리 나와! 학교 늦겠다!”

엄마의 성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8시 33분. 이제는 정말 변기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개운하게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오늘도 지각할 수는 없다. 급히 바지를 올리고 화장실 문을 열려는데 손잡이가 또 말썽이다. 지난주부터인가 손잡이를 잡고 몇 번을 움직여야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하필 바쁜 이 아침에 더 안 열리는 거다. 하는 수 없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엄마, 문 좀 열어 줘!”

“으이그. 위아래로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하면 열리던데.”

“밖에서 열면 잘 열리는데 왜 이러지?”

“그러니까 문은 왜 닫아 가지고. 꽉 닫지 마.”

“나도 6학년이라고요.”

괜히 짜증이 나서 인사도 안 하고 집을 나섰다. 마침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으려고 잽싸게 버튼을 눌렀다.

월월! 월! 월월!

“으악, 깜짝이야!”

“순대야, 가만 있어.”

또 윗집 순대 녀석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짖어 대는 통에 심장 떨어질 뻔했다. 순대는 날 보기만 하면 짖는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말이다.

“학교 가는구나. 아침은 먹었니?”

“아니요. 늦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어야 공부를 잘하지. 몸이 이렇게 비리비리해서. 쯧.”

순대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꼭 잔소리를 하신다. 남 일에 어찌나 관심이 많으신지, 공부는 잘하느냐, 형제 없이 혼자여서 쓸쓸하겠다는 둥, 오늘따라 더 듣기 싫었다.

‘무슨 상관이람?’

나는 대충 고개를 까닥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후 6시. 드디어 학원 수업도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아침에 개운하게 해결하지 못해서인지 계속 배 속에서 구르릉구르릉 소리가 났다.

‘집에 아빠가 있을까? 없으면 자유 시간인데.’

아파트 앞에 도착해 늘 하던 대로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먹을 거 뭐 있어요?]

학원 끝나고 집으로 잘 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아빠의 새 직장을 찾아 서울로 이사를 한 뒤 엄마는 마트에서 일을 시작했다. 9시가 넘어야 오기 때문에 저녁은 혼자 먹거나 아직 일자리를 찾고 있는 아빠와 둘이 먹는 날이 많다.

집과 가까워질수록 배에서 점점 더 큰 신호를 보내왔다. 현관문을 급히 닫고 들어가는데 아빠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누구 없어요? 예쓰!”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당기며 예쓰를 외쳤다. 아빠가 약속 있는 날인가 보다. 컴퓨터도 하고 자유 시간을 즐길 기회가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다.

“아오 배야, 화장실부터!”

나는 재빨리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끄응 휴. 큰 일 날 뻔했네.”

아뿔사.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는 거다.

‘문 열고 똥 눌걸…. 나도 모르게 닫아 버렸네. 이 바보!’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손잡이 몇 번 돌리면 문이 열릴 줄 알았다.

오후 7시 15분. 한 시간도 넘었다.

지잉- 지잉-.

현관문 앞에 벗어 놓은 가방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니면 아빠? 화장실에 갇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겠지. 숙제도 안 하고 컴퓨터 하는 줄 알고 잔소리하려고 전화했을 거야.’

띠리리링. 띠리리링.

잠시 후 집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긴 울림 후, 전화가 끊어지고 또다시 전화가 왔다. 받을 수 없는 전화벨 소리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 보였다. 내가 집 전화도 받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래, 조금만 더 버텨 보자.’

아무래도 아빠는 밤늦게 들어올 참인가 보다. 얼른 엄마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엄마, 나 화장실에 갇혔어. 얼른 와서 문 좀 열어줘.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저 좀 살려 주세요.’

오후 7시 40분.

딩동.

“택배 왔습니다.”

택배 아저씨가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 틈새에 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도와주세요! 화장실에 갇혔어요!”

쾅쾅. 쾅쾅쾅.

“택배입니다.”

“아저씨! 살려 주세요!”

“앞에 놓고 갑니다.”

나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아저씨는 상자를 내려놓고 그냥 가 버렸다. 아저씨가 내 목소리를 듣고 119에 신고를 해 주기를 바랐건만. 아저씨가 그렇게 가버리는 게 당연하다. 엄마는 혼자 있을 때 누가 오면 택배 아저씨더라도 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엄마와 둘이 있을 때도 엄마는 문을 열지 않았다. “놓고 가세요.”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을 뿐이다. 진정시켰던 가슴이 다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으흡 흐 흑.”

‘이게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좋겠다. 근데 왜 이렇게 생생한 거야.’

‘그동안 아빠가 늦게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벌받은 걸까?’

‘오늘 아침에도 짜증내서 엄마 기분 상하게 했는데…. 미안해, 엄마.’

탁 탁 탁 탁.

‘응?’

멀리서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커졌다. 그리고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딩동 딩동.

“뭔 일 있어요?”

순대 할머니였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화장실에 갇혔어요!”

쾅쾅 쾅 쾅쾅.

순대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화장실에 갇혔어요! 살려 주세요!”

문을 두드리던 할머니의 손이 멈추고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그냥 가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나는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더 크게 소리 질렀다.

“할머니! 할머니! 으헝 흐엉. 으흑.”

할머니가 자리를 떠나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저기요! 무슨 일 있어요?”

잠시 후 문밖에서 웬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갇혔어요. 살려 주세요!”

할머니가 경비 아저씨를 데리고 온 것 같았다.

“무슨 소리 들리죠? 살려 달라고?”

“그런 것 같네요. 119를 불러야겠는데…. 할머니 여기 계세요. 내가 전화하고 오지요.”

순대 할머니가 나를 살렸다.

“무슨 일이에요?”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문 앞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도 들린다.

삑삑삑삑. 철컥.

“민서야!”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엄마! 나 여기 있어!”

엄마가 밖에서 손잡이를 내리자마자 너무나도 쉽게 문이 열렸다.

“웬일이니, 괜찮아? 어디서 사고 난 줄 알았잖아.”

“화장실 문이 안 열렸어. 흐어엉. 학원에서 오자마자 갇혀 있어헝.”

“전화도 안 받고, 학원에서는 갔다고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일도 다 안 끝났는데 뛰어왔어.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현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순대 할머니가 보였다.

“아이고 저런, 어린 것이 놀랐겠구먼.”

“아유 고맙습니다. 어떻게 알고 와 주셨어요?”

“아니 순대가 화장실에 대고 자꾸 짖길래. 들어가 있어 보니까 뭐라고 소리 지르는 게 들리더라고.”

할머니 얼굴이 진짜 우리 할머니가 걱정하는 얼굴 같았다.

할머니와 경비 아저씨가 돌아가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거실에 대자로 누워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어디 갈 때 꼭 휴대폰 챙겨. 나처럼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게.”

“그래, 너도 엄마한테 연락 잘하고.”

“아빠는?”

“아빠 상갓집 가셨대.”

“아까 집에 왔을 때 아빠 없다고 좋아했는데, 화장실에 갇혀서는 아빠 발소리만 기다렸어.”

“아빠도 엄마 전화받고 놀라서 오고 계셔.”

“근데 엄마, 윗집 할머니는 나처럼 갇히면 누가 열어 줘? 순대가 열어 줄 수도 없고.”

“그러게, 할머니 혼자 사시는 것 같던데.”

“가끔 올라가 볼까?”

월월! 월! 월월!

다음 날, 순대는 어김없이 나를 반겨 주었다.

“몸은 괜찮아? 화장실 문은 고쳤고?”

“네, 고맙습니다. 문은 오늘 아빠가 고치기로 했어요.”

오늘따라 할머니 목소리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강아지 털이 순대 색깔 같아서 순대라고 지으신 거예요?”

“그리 보니 또 그렇네? 우리 딸 이름이 순영이, 아들이 대호야. 첫 글자 따서 순대.”

할머니의 이름 짓는 센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끝)

[2017 매일 신춘문예/동화] 내 다래끼-성주희

어린이가 읽는 동화는 어린이 수준의 어휘 선택을 해야 한다.

내 다래끼

“엄마, 우리 이사 가요?”

일요일 아침부터 엄마는 커다란 종이 상자에 물건을 꾹꾹 눌러 담으며 부산을 떨었다.

“할머니가 꼭 고향에 계시겠다고 하니 별수 있니? 우리가 가야지. 다음 주 화요일이 이사 날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난데없는 이사 통보에 머리가 멍했다. 다음 주에 친구들하고 우현 콘서트 보러 가기로 했는데 내 스케줄은 완전히 꼬였다. 아니, 꼬이다 못해 완전히 망했다.

“엄마, 나도 이제 5학년이라고. 이사를 가면 간다고 미리 이야기 좀 해줘야 할 거 아녜요. 내 의견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급하게 결정된 거라 어쩔 수 없었어.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어서 너도 네 짐이나 싸.”

지난주부터 엄마 아빠가 전셋값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걸 듣기는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이사를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오빠가 방에서 나오면서 나를 눈짓으로 불러냈다.

“이게 다 할머니 때문인 거 몰라?”

오빠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할머니 치료비가 감당이 안 돼서 전셋값 못 낸대. 그래서 할머니 있는 곳으로 가야 된대.”

올해 초 할머니가 추운 날씨에 무리하게 밭일을 하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아빠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데 수술해도 3개월을 못 넘길 거라는 의사 말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계속 살아계신다. 게다가 할머니는 한 번씩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식구들 정신도 쏙 빼놓았다. 결국 할머니는 요양병원으로 가게 됐고 우리는 요양병원이 있는 할머니 동네로 가게 됐다.

이사를 한 후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고 24시간 편의점 일을 시작하게 됐다. 장사는 처음이라 아빠 엄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대신 오빠와 내가 번갈아 가며 병원에 가서 할머니를 돌봐 드리게 됐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꼬박꼬박 할머니를 찾아가봐야 한다니…. 무엇보다 힘든 건 우리 할머니는 보통 다른 할머니와는 다르다는 거다. 한 번씩 나한테 심한 욕을 한다. 할머니가 언제 욕을 할지 몰라서 가슴이 조마조마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은 목요일. 내가 요양병원에 가는 날이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깔끔 요양병원으로 발걸음을 털레털레 옮겼다. 801호 병실문을 열고 첫 번째 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 옆으로 슬슬 다가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니가 누꼬?”

할머니는 반쯤 감은 눈을 슬그머니 뜨고 내가 누군지 확인했다.

“할머니 손녀 김미연이요.”

“뭐? 김미역?”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키득키득 거렸다.

“아니요, ‘김미연’이라 했잖아요.”

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손녀 이름을 김이나 미역 같은 해산물로 둔갑시키고 얼른 딴청을 부렸다.

“오늘 날씨가 끝내준다. 이런 날은 선글라스 끼고 시원한 바람 쐬면서 커피나 한 잔 마시면 딱 좋겠다.”

선글라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얼굴에 선글라스는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다.

“그건 그렇고. 와 빈손이고? 할매가 쫄쫄 굶어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이거가?”

할머니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내 손을 힐끗 바라봤다.

“좀 전에 점심 드셨잖아요.”

“됐다, 마. 치아뿌라. 맛있는 거는 너거끼리 다 먹고 나는 배가 고파도 사과도 한 쪼가리 못 먹고. 아부지, 지 좀 얼른 데려 가이소. 자식 키워놓으면 뭐합니꺼. 아이고, 아이고.”

할머니는 손바닥으로 애꿎은 침대를 툭툭 치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혹시 할머니가 욕을 할까 봐 가슴이 벌렁거렸다.

“강 여사, 고만 하이소. 저번에 손녀가 사 온 음료수도 아직 냉장고에 있다 아입니꺼.”

옆 침대에 누워 있던 노말숙 할머니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쳇, 먹으면 오줌만 마려운 이깟 음료수 먹어가 어디 배가 차는교?”

그러면서 할머니는 음료수 한 통을 꼴깍 다 비웠다.

“이름이 미연이라 캤나? 미연아, 니가 쪼매만 이해해라. 너거 할매가 많이 외로워서 그칸다.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있다가 누가 오면 반가워서 투정부리는 거다.”

노말숙 할머니는 인상도 좋고 말씀도 어찌나 나긋나긋하게 하시는지 우리 할머니와는 딴판이다. 우리 할머니도 저렇게 우아한 분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옆 침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와? 니 혹시 노말숙 할매가 너거 할매였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하는 건 아니제?”

할머니가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아냈는지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고 마, 됐심더. 이제 손녀 얼굴도 봤고 하니 집으로 보내소. 야들도 숙제도 해야 하고 학원도 가야하고 엄청 바쁩니더.”

“아, 맞, 맞아요. 오늘 숙제 많아서 빨리 가봐야 해요. 안녕히 계세요.”

병실을 빠져나올 구실이 생기자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나왔다.

병원을 나서자 눈앞에 있던 갈매기 떼가 바람을 따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때 날린 모래알이 눈에 들어가서인지 눈 안쪽이 불편했다. 질끈 눈을 감으니 ‘지 좀 얼른 데려 가이소’ 하고 바락바락 울던 할머니 얼굴이 눈알을 왔다 갔다 했다.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서둘러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누웠지만 내일은 짝꿍을 바꾸는 날인데다 건우 생일잔치 하는 날이라 잠이 안 왔다. 이번 주 내 짝꿍은 ‘공건우’다. 여기로 이사 와서 처음 학교 가던 날, 내 눈에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온 아이가 있었다. 바로 ‘공건우’다. 전학 후 첫 체육 시간에 건우가 춤을 췄다. 근데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아이돌 우현보다 백배 천배 춤을 잘 췄다. 생일잔치에서 건우가 새로운 춤을 보여준다는데 벌써 가슴이 콩닥거리고 자꾸 웃음이 났다.

이튿날 아침 나는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빠, 엄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도둑이라도 들었어?”

“눈 좀 보세요.”

나는 퉁퉁 붓고 시뻘게진 눈을 가리켰다.

“다래끼잖아. 한 며칠 이러다 괜찮아져. 난 또 뭐라고. 오늘 하루 푹 쉬면 나을 거야. 선생님한테는 엄마가 전화할게.”

아빠, 엄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하품을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래끼? 어제 병원 나올 때 눈에 들어간 모래알 때문인가? 왜 하필 짝꿍을 바꾸는 날에 다래끼가 났는지 팔짝팔짝 뛰고 싶었다.

건우랑 짝꿍을 했으면 화살처럼 지나갔을 하루가 더디게 흘렀다.

부웅. 핸드폰 진동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심심하던 차에 얼른 핸드폰을 열었다. 우리 반에서 제일 먼저 친해진 나라였다.

나라: 뭔 일 있나? 와 학교 결석했는데?

미연: 다래끼가 심하게 났어.

나라: 우짜다가? 건우가 생일잔치에 니 오는지 물어본다.

미연: 건우가 진짜 그랬다고?? 알았어. 십 분 안에 준비해서 갈게.

시곗바늘이 벌써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엄마 화장대 서랍을 열고 까만 뿔테 선글라스를 썼다. 다래끼를 핑계로 선글라스를 끼니 오히려 더 폼이 나는 것 같았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연아, 어디야?”

“왜요, 엄마. 나 지금 나가봐야 하는데.”

“지금 할머니한테 좀 가봐. 오빠가 태권도 품새 시험 있어서 못 간대. 오늘따라 단팥빵이 드시고 싶다고 어찌나 난리를 치는지 간호사한테 전화까지 왔어. 너도 알지? 할머니 잡숫고 싶은 거 있으면 병원 전체가 난리 나는 거. 꼭 단팥빵 사가지고 가봐. 아버지랑 나는 창고 정리하느라 정신없어.”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엄마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툭 끊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얼굴이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평소에도 할머니가 싫었지만 오늘은 눈물이 날만큼 싫었다.

“아이고 아부지, 먹고 싶은 게 있어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는 진짜 세상 미련 없심니더. 아이고 아부지, 지 좀 데려 가이소.”

병실문을 열자마자 할머니 울음소리가 온 병실을 휘감았다. 나는 단팥빵 하나를 꺼내 할머니 눈앞에 들이밀었다. 할머니는 빵을 홱 낚아채고는 허겁지겁 입에 넣었다.

“근데 니는 왜 벌건 대낮에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있노?”

할머니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확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선글라스 다리가 톡 부러졌다. 나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니 눈은 또 와이리 퉁퉁 부었노? 김미역에 다래끼가 났네.”

게다가 할머니는 나를 또 해산물로 만들었다. 그것도 눈병 난 해산물을…. 다래끼가 나서 건우랑 짝꿍을 못한 거 하며 생일잔치에 못 가게 된 것도 다 할머니 때문인데 자꾸 속을 뒤집어 놓는 할머니가 미웠다. 나는 결심했다. 할머니에게 다래끼를 옮기기로. 다래끼 난 눈을 손으로 비빈 다음 상대방 손을 잡으면 다래끼가 전염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다래끼 난 눈을 있는 힘껏 비볐다. 안 그래도 빨간 눈이 더 빨개졌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할머니, 단팥빵 드시니까 이제 기분 좀 좋아졌어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애교를 떨며 할머니 손을 슬쩍 잡았다. 할머니 손가락은 코끼리 코처럼 쭈글쭈글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따뜻했다.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갑자기 가슴이 쿵쿵거렸다. 나는 얼른 손을 떼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둥지둥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끙끙 앓았다. 마음속에 쭈글쭈글한 할머니 손이 가득 차 가슴이 콱 막혀 버렸다.

“좀 괜찮아?”

아침이 되자마자 웬일로 오빠가 나를 걱정해주었다. 아빠 엄마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자, 핸드폰. 아까부터 울리더라.”

오빠가 핸드폰을 건넸다. 뜻밖에도 건우였다.

“미연아, 눈은 좀 어때?”

“점점 좋아지고 있어.”

“다행이다. 생일잔치에 안 와서 많이 아픈 줄 알았어. 오늘 별일 없으면 나랑 같이 어디 좀 갈래?”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다. 건우한테 데이트 신청을 받다니. 나는 아픈 것도 잊은 채 건우가 만나자고 한 바닷가로 달려갔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

“어? 어. 괜찮아. 근데 무슨 볼일이 있는데?”

“가보면 알아.”

건우가 길을 안내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바로 그 길로.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건우는 깔끔 요양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801호로 들어갔다.

“할머니!”

“이게 누꼬, 건우 아니가? 내 새끼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네.”

건우는 노말숙 할머니에게 뛰어가 푹 안겼다.

“그래, 내가 여자친구, 너거 말대로 하면 여친이제? 여친 데리고 오라 캤는데 데리고 왔나?”

“네, 할머니.”

건우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슬쩍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고, 세상에. 강 여사 손녀 아니가? 세상 좁데이. 근데 어카노? 너거 할매 아파서 치료받으러 갔다.”

치료? 그제야 할머니가 없는 빈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기쁨도 잠시,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저희 할머니, 많이 아파요?”

“말도 마라. 너거 할매 니 왔다 가고 밤새도록 ‘니 다래끼 다 내 끼다, 니 다래끼 다 내 끼다.’ 중얼거리드만, 고마 오늘 아침에 눈이 퉁퉁 부어 가꼬 안과에 갔다 아이가. 그카고 이 달력이 뭐시 그리 중요한 기라고 잘 때 꼭 껴안고 자는데 어제는 잠도 안 자고 껴안고 있더라.”

노말숙 할머니는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는 달력을 가리켰다. 달력을 자세히 살펴보니 날짜에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삐뚤빼뚤한 할머니 글씨와 함께.

누네 너어도 안 아픈 내 새끼 온 날

나는 그만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병실에 주저앉아 울었다.

“누가 이리 시끄럽게 울어 쌓노?”

드르륵. 병실문이 열리고 까만 뿔테 선글라스를 낀 할머니가 나타났다. 선글라스 다리 한쪽은 테이프로 칭칭 감은 채.

“김미연이, 오늘도 빈손이가?”

할머니는 생각보다 선글라스가 참 잘 어울렸다. (*)

◆당선 소감/성주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재운 뒤 글을 씁니다.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지만 동화를 만나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글자도 쓰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당선소감을 쓸 자격이 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본 뒤에야 겨우 떠듬떠듬 써내려갑니다.

30대에 접어든 어느 날, 열세 살 때 쓴 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일기장에는 '동화작가가 되겠다'는 다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잊고 있던 꿈이 되살아났고, 그날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넘어졌고 많이 아팠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나 걷고 또 걸었더니 드디어 꿈을 이루는 첫 단추를 끼웁니다.

컴퓨터 속 '동화습작' 폴더에 영원히 잠자고 있을 수도 있었던 작품을 세상으로 꺼내주신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동화의 손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주신 김재원 선생님, 왜 동화를 쓰냐는 물음을 던져주신 이수애 작가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동화세계를 여행하느라 바빴던 저를 지지해준 남편과 그런 엄마를 이해해준 아들, 딸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부모님께 당선 소식을 안겨 드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을 함께 기뻐해 주신 어린이 도서연구회 경산지회 회원들도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동화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약력

1980년 서울 출생

부산외고,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사단법인 어린이 도서연구회 회원

◆심사평

탄탄한 서사에 담긴 따스한 인간애

많은 응모작 가운데 끝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먼저 ‘젖은 담요’(김선정)는 감칠맛 나는 달착지근한 문장에 후한 점수를 줄만했다. 담담하게 펼쳐지는 일인칭서술과 자연스럽게 독자의 시선을 이동시키는 장면 묘사도 좋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좋은 동화가 요구하는 것은 역시 ‘이야기의 재미’일 텐데, 그 서사성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재수 좋은 날’(이화주)은 읽는 이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느슨한 상태에서 시작하여 점점 밀도를 높여가는 이야기 구조와 밀도 있는 심리 묘사도 좋았다. 그러나 상대역인 ‘할아버지’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틀에 박혀 있다는 점이 공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었다.

‘할머니의 스케치북’(강석경)은 치매 노인과 손녀 사이의 갈등을 아이 눈길로 무난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짜임새 있는 줄거리와 균형 잡힌 문장 등 여러 면에서 기초가 튼튼함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다만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의 심경 변화가 일어나는 대목이 다소 작위에 흐른 점이 아쉬웠다.

‘아기별꽃’(김연옥)은 끝까지 당선작과 그 무게를 겨룬 작품이다. 작고 약한 아이와 역시 그런 식물을 대비시킴으로써 소외된 존재가 이웃의 도움으로 힘을 얻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주인공인 아이와 그가 키우는 작은 풀꽃, 이 둘의 시선을 교차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 솜씨도 미더웠다. 다만 군데군데 드러나는 ‘감정 과잉’이 눈에 거슬렸다.

결국 결점이 가장 적은 성주희의 ‘내 다래끼’가 당선작에 올랐다. 이 작품은 세대 간 갈등과 화해 과정을 따스한 시선과 재치 있는 필치로 그린 수작이다. 자칫 식상해 보일 수도 있는 소재를 탄탄한 서사로 녹여낸 역량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상당히 공을 들었음 직한 치밀한 구성과 절제된 유머에 걸맞은 구수한 입담도 돋보였다. 문학의 사명이 ‘인간성 옹호’에 있다면, 그런 면에서도 이 글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인물 묘사에 과장으로 보이는 대목이 몇 군데 있지만, 그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흠집 내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당선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 무게 있는 소재도 거뜬히 소화해 내는 큰 작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서정오(동화작가)

한국일보 동화 당선작 | 최현진 '두근두근 두드러기'

왼쪽 손목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쌍기역 모양 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드러기가 난 부분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열라 징그럽네.” 잠깐 내려놨을 뿐인데, 그새 아군 한 명이 머리통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이래서 게임은 손에서 놓으면 안 되는 건데! 짜증이 났다. 왜 자꾸 가렵고 그런담. 나는 엄지손가락을 재빨리 긁고 적군의 머리통을 날렸다.

양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엄지손가락에 ㅇㄹ모양의 두드러기가 솟았다. 동그라미와 꼬불한 길 같이 생긴 이건, 리을 같았다. 뭐지? 두드러기는 원래 뭉게구름 모양 같이 나는데. 왼쪽 손목을 다시 들어 보았다. 쌍기역이 아까보다 커진 것 같았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왼쪽 손목을 마구 두들겼다. 두드러기가 사라지도록!

ㄲㄲㄲㄲㄲㄲㄲㄲㄲ

“에이씨 이게 뭐야!!”

나는 깜짝 놀라서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 했다. 쌍기역이, 그러니까 두드러기가 손목을 벗어나 천장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개나 되는 쌍기역이! 난 내려둔 핸드폰을 찾아 게임을 끄고 구글에 ‘날아다니는 두드러기’라고 검색해 봤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이어서 ‘글자모양 두드러기’, ‘움직이는 두드러기’ 등으로 검색해 봤지만 꽃가루, 황사 같은 연관 검색어만 뜰 뿐 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신종 바이러스에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희귀병? 나는 마음이 갑자기 시큰둥해졌다. 게임처럼 대테러요원이 돼서 도시에 쳐들어온 테러범들을 원샷원킬로 죽이고 온몸으로 자폭테러를 막다가 멋지게 뒤지는 거였는데.

ㅊㅊㅊㅊㅇㅋㅋㅋㄷㄷ

“아악!!!”

팔뚝과 팔목, 손등으로 치읓, 이응, 키읔, 디귿 모양의 두드러기가 났다. 글자들은 순식간에 퍼졌다. 크고 굵은 것에서부터 작은 글자까지. 온몸에 소름이 끼친 나는 양손으로 팔을 세게 때리며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팔뚝에 오돌오돌 했던 두드러기가 느껴지지 않자 머리 위가 오싹해졌다. 고개를 들어봤다. 거실 형광등에 치읓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티브이 위에 이응이 고개를 내밀고, 키읔과 디귿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

“뭐야,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카메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거실과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봤지만 사실이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이건, 어쩌면 귀신일지도 모른다. 글자 귀신!

*

나는 귀신이 득실거리는 집에서 나와 아파트 현관에서 부모님이 올 때까지 앉아있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글자 귀신이 밖에까지? 이상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맞은편 나무에 히읗이 열매처럼 걸려 있었다. 꼭 사과나 복숭아처럼 말이다.

“진짜 헐이다.”

그때였다. 나무에 걸린 히읗이 똥을 싸는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히읗 하나, 히읗 둘, 히읗 셋, 넷, 다섯...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는 히읗이 줄줄이 싸내는 히읗들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귀신에 홀린 게 분명했다. 밤에 케이블에서 해주는 프로그램처럼 나도 무당이 찾아와 ‘이 아이에게 글자 귀신이 붙었다! 굿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하필 우리 아이냐고 묻는 엄마 아빠에게 내가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할까. 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괴로웠다. 왜 내게!

“이덕후?”

다리 밑으로 운동화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 뿔테 안경을 쓴 김명랑이 서 있었다. 5학년 중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하지만 지필평가 점수가 그저그런, 발표도 그저 그런, 달리기도 그저그런, 머리 길이마저도 그저그런. 그저그런 게 많아서 그저그런 김명랑.

“왜 이러고 있어?”

“그저그, 아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집에 왜 못들어 가는데?”

김명랑이 ‘쎈논술아카데미’라고 적혀진 가방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어봤다. 글자 모양 두드러기가 났고, 두드러기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면 ‘게임만 하더니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할 것 같았다. 난 몇 초 생각하다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글자가 보여.”

“글자는 누구 눈에나 보여. 못.돼.아.파.트. 이건 쎈.논.술.”

김명랑이 내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게 아닌데, 마음이 답답했다.

“그건 모두에게 보이잖아 문제는, 너! 저거 보여? 저 나무에 매달린 거 보이냐고.”

나는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히읗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김명랑이 내 손끝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흠. 글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겠지. 하지만 난, 특별히 잘 들을 수 있어!”

김명랑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을 이어갔다.

“나, 사물들이 말하는 게 들려.”

김명랑은 며칠 전, 학원 벽에 달린 선풍기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쪽지 시험을 보는 중이었는데 회전 중이던 선풍기가 자기와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이상한 나라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거세진 선풍기 바람에 자기가 도로시처럼 날아갈 뻔한 이야기, 필통을 열었는데 형광팬과 수정팬이 ‘네 잘못이야!’

하면서 싸우고 있었단 이야기, 분홍뿔테안경이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자기에게 따졌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라는 게 좀 이상했지만 오늘은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이상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넌 사물 귀신, 난 글자 귀신에게 홀렸구나.”

난 기운 빠진 목소리로 김명랑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놨다. 김명랑은 신나는 일이라도 만난 듯 손뼉을 치며 재밌어했지만 난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나무에 매달려서 히읗히읗 웃고있는 글자들이 늘어나진 않을까,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판타지 책 보면 마법도 꼭 푸는 방법이 있어! 지금은 무슨 글자가 보이니?”

내가 시무룩해하자 김명랑이 명랑한 목소리로 ‘두드러기 글자 귀신’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며 자기가 읽고 있는 판타지 책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책의 제목은 「두근두근 요 리사」였다.

“두근두근 요리사가 불량 스프를 막 집어넣거든, 맛을 볼 때마다 혀가 조금씩 자라더니 나중에는 돌돌 말아서, 접어서, 어깨에 짊어져야 할 만큼 커진 거야!“

“웩. 징그럽다야.”

“근.데. 요리사가 착한 스프를 넣고 다시 맛을 봤더니, 혀가, 조금씩, 줄어드는 거야!”

김명랑의 눈이 작은 안경테를 비집고 나올 정도로 커져있었다. 듣고 있으니 너무 유치했다.

“그럼 난 뭐, 착한 말이라도 해야 저 글자들이 사라지냐?”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분명 느껴졌다. 무심코 한 말 이었는데, 김명랑과 나 이덕후, 그리고 나무에 달린 히읗들 사 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곤 바람에 살랑 나부끼고 있던 히읗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딕체’로 변신했다. 마치 ‘바로 그거야!’라고 하는 것처럼.

“야 김명랑. 히읗으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지? 헐, 이런 거 말고.”

김명랑에게 말을 하면서 내가 아까 ‘헐’이라고 말했을 때 히읗들이 더 많아진 것이 깨달았다.

멍청한 이덕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김명랑은 명탐정이라도 되는 듯 뿔테 안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슥 올리더니 가방에서 빨간색 노트를 꺼내 펼쳤다.

“하늬바람”

“하늬바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김명랑이 불러주는 단어를 그대로 따라 읽었다. 그 순간 이었다. 히읗 하나가 똥을 쌀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퐁!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같았다.

“훈풍”

“훈풍!”

나는 한번 더 외쳐봤다. 훈풍이라니, 이런 단어가 있기 라도 했었나? 이런 단어를 노트에 적어 다니는 김명랑이 근사해 보였다.

“사라지고 있어?”

김명랑 생각을 하는데 김명랑이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무를 바라보니 히읗 하나가 또 가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싸!

나는 명랑이가 불러주는 대로 히읗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하늘, 홍당무, 호수, 흰나비, 향수, 해질녘. 다 아는 단어들 이었지만 평소에 쓰지 않았던 단어들 이었다. 최강 게임 레벨을 자랑하는 이 이덕후에겐, ‘해질녘’ 같은 단어를 발음 하는 게 낯설고 오글 거리기도 했지만 명랑이의 목소리로는 좀, 괜찮은 것도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현관에 나란히 앉아 히읗들을 지워나갔다.

ㅎㅎ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나는 슈퍼에서 사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명랑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명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겼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는 까만 바닐라 씨앗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내가 한입에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어 반토막 내는 사이, 명랑이는 아이스크림을 녹이면서 먹고 있었다.

“야, 근데 훈풍은 무슨 뜻이냐?”

나는 괜히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말을 걸었다.

“첫여름에 부는 훈훈한 바람!”

“오 아는 건 많은 것 같은데.”

난 ‘그저그러냐?’고 구박을 주려다 말았다. 어쨌거나 그저그런, 도로시와 앨리스를 헷갈려 하는 책쟁이지만, 오늘은 ‘확실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명랑이는 내 말이 칭찬인 줄로 알고,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녹은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베어 물었다. 명랑이의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었다. 갑자기 입술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배도 아픈 것 같았다. 아마 차가운 걸 먹어 그렇겠지, 나는 입술을 긁었다.

ㅅㅅㅅ

이럴 수가, 입술이 두근두근 거려 핸드폰 화면에 비춰보니 아랫입술에 선명하게 ‘시옷’이라고 적힌 두드러기가 올록볼록 솟아오르고 있었다. 명랑이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흔들며 활짝 웃었다. 내가 삼킨 게 아이스크림인지, 드라이아이스인지 모르게 속이 뜨거웠다. 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했다. 명랑이가 불편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난 입을 뗐다.

“우리 집에 갈래?”

집에는 아직 글자 귀신이 있으니까, 나는 명랑이처럼 예쁘고 고운 글자를 모르니까, 혹시 이 마법은 명랑이가 불러주고, 내가 따라 읽어야만, 그러니까 같이 해야만 풀리는 걸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래!”

명랑이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현관 앞으로 훈풍이 불었다. 나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떠올려봤다. 사이다, 사다리, 사... 아, 이상한 시옷들이 마음속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끝)

불교신춘문예 2017/동화] 할아버지의 선물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 현대이발소를 지나 민들레고물상까지 갔다.

경태는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보일까봐 고개를 자라처럼 뺐다. 아니나 다를까 누런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가 모아온 고물을 내려놓고 있었다. 경태는 누가 볼까봐 얼른 돌아섰다. 학교 끝난 경태가 집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대문 앞에 뭔가 있었다. 그것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설마…!’

경태는 순식간에 집 앞으로 달려갔다. 사이클이었다.

“우와, 사이클. 진짜 사이클이잖아!”

진짜 사이클이었다. 준서와 호빈이는 다 있는 사이클. 경태만 없던 사이클이었다. 경태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네 시 삼십오 분.

이 시간이면 할아버지는 폐지를 모으고 있을 시간이었다.

경태는 가방을 던져놓고 사이클 안장 위에 앉았다. 날렵한 게 어쩌면 하늘도 날아오를 것 같았다. 그 동안 할아버지가 시치미 뗀 걸 생각하니 경태는 속상했던 마음이 다 날아갔다.

“그깟 생일! 늙으면 그런 거 모른다.”

그랬으면서 이렇게 멋진 사이클을 안겨 준 것이다.

경태에겐 사이클 안장이 아직 높았다. 하지만 경태는 선 자세로 페달을 밟고 탈 수도 있어서 상관없었다.

경태는 사이클을 끌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골목 입구 오복슈퍼를 지나 백호태권도 건물을 지나 황가네 감자탕을 지났다. 사이클은 보조바퀴 달린 네 발 자전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건 민들레고물상에서도 최고 고물이었으니까.

왕돈가스를 지나 토니미용실 건물도 지나고 영천시장을 지났다. 더운 유월 바람이 경태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경태 옆으로 마을 풍경이 쌩쌩 지나갔다.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 현대이발소를 지나 민들레고물상까지 갔다. 경태는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보일까봐 고개를 자라처럼 뺐다. 아니나 다를까 누런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가 모아온 고물을 내려놓고 있었다. 경태는 누가 볼까봐 얼른 돌아섰다.

날이 어두워져도 경태는 옆 동네 아파트 놀이터에서 계속 사이클을 탔다. 동네 사람들이 다 자기를 보았다고 생각될 때까지 사이클을 타다가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돌아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경태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팔을 흔들었다.

“완전 잘 나가. 저거 비싸지?”

“저게 뭔데. 나는 모른다.”

시치미 떼기는 할아버지 최고 특기다.

경태에게 사이클이 생겼다는 소문은 다음 날 금세 퍼졌다. 경태가 소문을 냈으니 당연했다.

준서와 호빈이도 같이 타자고 말을 걸어왔다. 삼학년이 네 발 탄다고 끼워주지도 않더니. 셋은 매일 다섯 시에 만나 사이클을 타기로 약속했다. 다섯 시는 녀석들 수학학원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경태는 수학학원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사이클을 더 많이 탈 수 있으니까.

며칠 후.

사이클을 끌고 나가는 경태를 할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오늘은 그거 타지 말고 나하고 어디 좀 가자.”

“어디? 나 친구랑 약속 있어.”

“갈 데가 있다니까 그러네.”

“할아버지 혼자 가면 안 돼?”

“바퀴 다 빼서 고물상에 확 넘겨버린다.”

“아, 귀찮게….”

경태는 그제야 오늘 할아버지가 폐지를 주우러 가지도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같이 가는 대신 이거 타고 갈게.”

경태가 사이클 손잡이를 잡았다.

“안 돼. 그냥 걷자.”

경태는 화가 났다. 도대체 어디를 간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니까 더 짜증이 났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어딜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었다.

“싫다고! 나 오늘 꼭 사이클 탈거라고!”

“마음대로 해, 이놈 시키!”

할아버지는 화를 내고 대문을 나가버렸다. 경태는 뒷짐을 진 할아버지 등이 오늘따라 더 구부정한 것 같아 보였다. 할 수없이 사이클을 잠가놓고 할아버지를 뒤따랐다.

무심한 듯 할아버지가 혼잣말을 했다.

“오늘까지라고 했어. 오늘까지 무료로 해 준다고 말이야.”

경태가 짐짓 짜증 섞은 소리를 했다.

“뭐가 오늘까진데!”

“따라가 보면 알아!”

할아버지도 화난 척 했다. 할아버지는 먼저 민들레고물상으로 갔다. 낡은 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경태는 들어가지 않고 고물상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장부를 뒤적이던 주인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돈을 건넸다. 그리고 경태를 향해 큰 소리로 알은체 했다.

“사이클 잘 나가니? 그거 할아버지가 세 달 넘게 폐지 주워 사신 거야.”

경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주인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손자가 많이 컸네요. 키우느라 고생하셨어요.”

“잘 컸지? 아무튼 그동안 고마웠네.”

“고맙긴요. 어서 회복해서 다시 오셔야죠. 몸조리 잘 하세요.”

고물상을 나서자 경태가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아파?”

“늙으면 다 아파.”

할아버지 대답은 항상 이랬다.

할아버지와 경태는 오복슈퍼에 들렀다. 슈퍼 아줌마는 손톱을 깎다가 할아버지를 보고 인사했다.

“오셨어요? 두부 드려요?”

“아니. 나 외상값 갚으려고. 좀 봐줘.”

슈퍼 아줌마는 장부를 뒤적였다.

“두부 한모, 라면 다섯 개, 빨래비누 두 장요.”

할아버지는 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슈퍼 아줌마는 경태를 보고 씩 웃었다.

“너 새 자전거 생겼지? 아주 잘 타던데?”

“사이클이에요.”

경태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오복슈퍼를 나온 경태는 또 짜증이 났다. 기껏 외상값 갚으려고 이렇게 끌고 다니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현대이발소로 들어갔다. 마침 손님이 없었다.

“나하고 우리 손자 머리 좀 잘라줘요.”

할아버지와 경태가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경태가 먼저 이발을 했다. 다음으로 할아버지도 이발을 했다. 경태의 검은 머리카락과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닥에서 뒤섞였다. 약한 선풍기 바람에 머리카락들이 살살 뭉쳐 다녔다.

할아버지는 흰머리를 단정하게 옆으로 빗어 넘기더니 스프레이를 뿌려달라고 했다. 부스스하던 앞머리가 옆으로 말끔히 넘겨졌다. 경태는 할아버지가 많이 달라보였다.

할아버지는 영천시장에도 들렀다.

“어째 오늘은 폐지 주우러 안 갔네요? 몸은 좀 어때요?”

생선가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보고 알은 체 했다.

“당분간 쉬려고. 얘가 내 손자야.”

“그래요? 손자가 아주 생기가 나네요. 그렇게 크고 좋은 생선만 찾아 해먹이더니.”

할머니는 얼굴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웃었다.

경태는 할아버지가 생선을 굽던 모습이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하얀 연기를 동네방네 피우며 고등어를 구워 경태의 밥상에 올려주곤 했다.

그런 날 저녁 경태가, “다 탔잖아!”하고 소리치면, 할아버지는 기침을 하면서도 “안탔어! 대가리는 손대지 마. 내 꺼니까!” 하고 더 크게 소리쳤다.

다음에 할아버지와 경태가 간 곳은 은행이었다. 청원경찰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입금하시게요. 제가 해드릴게요.”

“아니. 오늘은 내 손자가 해 줄 거네.”

경태는 오늘 할아버지가 정말 뜬금없어 보였다.

경태는 처음으로 통장을 들고 창구에서 입금을 했다. 할아버지가 건네준 육천 삼백 칠십 원이 통장에 찍혔다. 경태이름으로 된 통장이었다.

은행을 나왔다. 이제 할아버지가 진짜로 집에 갈 줄 안 경태 머릿속에는 사이클 탈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집으로 가려던 경태의 손을 잡았다.

경태는 화가 났다.

“나 사이클 타고 싶단 말이야!”

“화났냐? 딱 한군데 남았어.”

“왜 자꾸 끌고 다녀? 사이클 타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경태는 누가 듣든 말든 소리를 질렀다. 길 가던 사람이 힐끔 쳐다봤다.

“내일 타. 여기가 마지막이야.”

‘할아버지, 죽기 없기!’

사진을 다 찍은 할아버지가 경태에게 손짓했다.

“사진사 양반, 부탁인데 우리 둘이 한 장만 박아줘요.”

“예. 다정하게 한번 앉아보세요.”

할아버지 앞에 경태가 앉았다.

할아버지는 활짝 웃었지만, 경태는 웃는 듯 우는 듯 했다.

할아버지와 경태가 마지막에 들른 곳은 주민 센터 건물이었다. 주민 센터 이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은 작은 사진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큰 천을 벽에 두르고 가운데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벽에는 ‘주민 센터와 손잡고 영정사진을 무료로 촬영해드립니다.’ 라는 글씨가 작게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 영정사진이 뭐야?”

“죽을 때 올려놓을 사진.”

“할아버지 죽을 거야?”

“세상에 안 죽는 게 어딨어.”

경태는 갑자기 화난 마음이 싹 달아났다.

마침 한 할머니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할머니는 윗옷만 하얀 한복으로 입고 있었다. 할머니는 긴장한 얼굴로 사진기를 쳐다보았다.

“할머니, 입 꼬리 미소. 좋아요. 하나 둘 셋!”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이제 할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위에만 옥색 한복으로 갈아입은 할아버지가 거울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한참동안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쳐다보았다.

경태는 갑자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쭈글쭈글 시커먼 할아버지한테 저런 고운 한복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죽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다.

할아버지가 가운데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갸가 내 친손자요. 영정사진 찍으려니 무서워서 끌고 왔어요.”

할머니가 한복을 벗으며 부러 타박했다.

“영감님도 참, 사진 한 장 찍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나저나 손자가 참 날쌔게 생겼네요.”

“그렇죠? 자전거를 기가 막히게 탄다니까요. 선수에요, 선수!”

사진사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턱을 조금 당기시고. 고개를 왼쪽으로 조금 더, 조금만 더요.”

순간 할아버지와 경태의 눈이 마주쳤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플래시가 경태 마음에도 ‘펑’ 터졌다.

‘할아버지, 죽기 없기!’

사진을 다 찍은 할아버지가 경태에게 손짓했다.

“사진사 양반, 부탁인데 우리 둘이 한 장만 박아줘요.”

“예. 다정하게 한번 앉아보세요.”

할아버지 앞에 경태가 앉았다. 할아버지는 활짝 웃었지만, 경태는 웃는 듯 우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경태는 아무 말도 안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언덕배기에서 선 할아버지가 말했다.

“예전에 저 민들레고물상 자리에 내 논이 있었어.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그 땐 할머니랑 네 아빠, 고모랑 이 집에서 시끌벅적 살았지.”

경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경태가 할아버지를 올려다봤다.

“할아버지 아까 말이야…. 사진 찍지 말지.”

“영정사진이라 좀 그렇기 하지만…. 경태야, 나도 오늘 내 인생 처음으로 조명 한번 받았다. 누구나 한번은 그런 날이 와.”

경태는 할아버지 말이 알쏭달쏭 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배고프다. 집에 가자.”

경태는 할아버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집으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저녁밥을 차리기 시작했다. 경태는 대문 옆에 세워져 있던 사이클을 보았다. 천천히 사이클 앞으로 다가섰다.

‘세 달 넘게 폐지를 주워 산 사이클.’

경태는 발로 사이클을 툭 찼다. 다 사이클 때문인 것 같았다.

‘쿠당탕탕-!’

사이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빈 페달만 돌아갈 뿐이었다.

■ 동화 당선소감

전은숙

정진하는 이야기꾼 되겠다고 다짐

오늘, 겨울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참 스산하게도 내렸다. 늘 그렇듯 어두운 방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노려보다보면 가끔 자기 이야기 좀 써달라는 길 잃은 주인공을 만나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아들 게임할 때만 살아나는 전화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터넷가입 전화인 줄 알고 받았는데 당선전화였다. 당선될 줄 몰랐다. 당선되면 좋겠지만 안 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만 최선만 다하면 되고 이후 결과는 내 몫이 아니란걸 아는 나이가 된 거다.

이 동화는 무더웠던 지난 여름에 썼다. 출발주제는 ‘죽음’이었다. 도서관 세 곳을 돌아다니며 ‘죽음’에 관한 동화책들을 찾아 읽다가 그것도 답답해 화장터와 납골당을 찾아갔다. 자식을 잃은 늙은 어머니의 통곡을 들으며 기둥 뒤에서 울기만 하다 돌아왔다. 조심해서 천천히 쓰자고 다짐하면서 이 동화를 완성했다. 노래하고 상상하는 것 말고는 도무지 할 게 없었던 무료한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책이 없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멋지게 말하고 싶지만 거짓말을 못한다. 벽에 다리를 올리고 누워 하루 종일 노래만하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동화를 쓰는 내내 “괜찮다. 괜찮아”하며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때로 현실의 어떤 면은 괜찮지 않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충분한 위로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계속 동화를 쓸 것이다. 뽑아주신 불교신문과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오늘 마음 잊지 않고 정진하는 이야기꾼이 될 것이다. 김은중 선생님, 김기정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응원해준 마음 늘 제게 와 닿는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족들, 글벗 ‘꽃등’과 ‘한겨레’ 동기들도 떠올랐다. 언제나 내 글의 첫 독자가 되어주는 남편 대근 씨와 멋진 아들 시원이, 고맙고 또 사랑한다.

■ 동화부문 심사평

방민호 / 서울대 교수

죽음이라는 인간의 삶 통찰 담아

주제의식 있는 동화를 선택했다. 불교신문 신춘문예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응모작 가운데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동화가 많았다. 선입견을 배제하려 했으므로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든 그렇지 않든 동화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면 어떤 작품이라도 선택할 작정이었으나, 무엇보다 문체와 어휘 선택, 그리고 문장 면에서 동화적 간결성을 갖추고 있는가를 일차적 기준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많은 응모작 가운데 우선 세 편의 작품을 선정했다. ‘민들레와 흰 나비’, ‘끼끼의 발자국’, ‘할아버지의 선물’ 등이 그것이다. 동화는 대상 연령이 비교적 넓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연령대를 염두에 두고 선정하지는 않았고 어느 연령을 겨냥했든 그에 어울리는 구성과 표현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서 유의하고자 했다.

‘민들레와 흰 나비’는 의인화된 자연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명의 가치와 그 순환을 그린 것이다. 좋은 작품이다. ‘끼끼의 발자국’ 역시 의인화의 요소를 포함하여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그렸다. 스토리의 재미가 느껴지는 수작이다.

심사위원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당선작은 ‘할아버지의 선물’이다. 이 작품은 할아버지와 손자로 이루어진 가족의 이야기로서 우리의 현실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선물과 영정사진 찍기를 통하여 죽음이라는 인간 삶의 섭리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고 문체 역시 간결하여 의미를 담은 동화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당선작의 작가에게 축하를 드리며 아쉽게 최종적으로 선택되지 않은 작가들께는 더욱 힘내주실 것을 당부 드린다.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

[2017경상일보신춘문예-동화]라오스의 달콤한 눈 - 이서림

너를 만난 건 평범한 어느 날이었어. 그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탁발 수행이 있었지.

 “릭, 아직 멀었니?”

 “아니에요. 이제 준비 다 했어요.”

 “아홉 살이나 된 스님이 옷도 똑바로 못 입으면 어떡하누.”

 큰 스님은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장삼을 바로 올려주며 근엄한 목소리로 물으셨어.

 “탁발이 스님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수행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큰 스님의 말씀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스님이 된지 일 년도 채 안 됐지만 그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거든.

 메콩강에 나룻배들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고요한 시간이었어. 새벽의 푸른빛이 가시기도 전이지만 사람들은 벌써 거리로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면 앞장선 큰 스님을 따라 나이순으로 주홍빛 장삼을 입은 스님들의 탁발행렬이 이어져. 스님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정성껏 준비해온 찰밥을 떼어내 스님들의 발우에다 시주를 해. 발우에는 밥뿐만 아니라 과자나 빵, 가끔은 돈도 들어있어. 음식을 얻어먹는다고 해서 우리를 거지로 오해하지는 말아줘. 스님들은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받는 거거든.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란다.”

 큰 스님이 그러셨어. 그런데 우리가 가진 발우는 조금 신기하단다. 시주를 아무리 많이 받아도 넘치는 일이 없거든. 그 비밀은 거리 곳곳에 놓여 진 빈 바구니에 있어. 우리는 받은 음식 일부를 이 바구니에 덜어 내야해. 덜어낸 음식으로 채워진 바구니는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야.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이지. 멋지지 않아? 그런데 바로 그날 너와의 만남으로 인해 나의 수행 인생 일대 최고의 고비를 맞이하게 돼 버렸어.

 너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어. 그날따라 내 발우는 금세 채워졌어. 그런데 무심코 발우를 들여다 보다 눈이 휘둥그레졌어. 발우 속에는 손바닥만 크기의 네가 짠! 하고 들어와 있는 거야. 넌 마치 푸시산에 떠오른 해처럼 반짝거렸어. 사실 널 본 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어. 몇 달 전 우리 사원에 온 여행객들이 너를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풍기는 냄새가 보통의 초콜릿 냄새가 아니었어. 초콜릿만큼이나 달콤하지만 그보다 더 진한 냄새였어. 라오스에서는 절대 맡아볼 수 없는 특별한 달콤함이었다고나 할까.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 뻔 했어. 군침을 삼키는 나를 보았는지 착해 보이는 아저씨가 너를 나에게 건네려는데 바로 그 때,

 “릭! 마당은 다 쓸었니, 여기서 여태 뭐하고 있는 거니?”

 큰 스님이 부르시는 거야. 마음 같아선 너를 냉큼 받았겠지만 큰스님이 나무라시는데 널 받아 챙길 수는 없잖아. 잡은 고기를 놓쳤을 때 어떤 기분인 줄 아니? 그렇게 눈앞에서 놓쳐버려 내내 아쉬웠지만 어딜 가 봐도 널 찾아볼 수가 없는 거야. 그런 네가 저절로 나의 발우 속으로 들어왔으니 이런 기적이 또 어디 있겠니. 원칙대로라면 길 위에 있는 바구니에 너를 던져 버려야 했어. 내 발우는 이미 가득 찼었거든. 그런데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난 너를 바구니에 덜어내지 못했어. 그 때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더니 그곳에는 바구니를 든 소녀가 있었어.

 ‘스님 난 다 봤어요.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니 스님 맞아요?’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뭔가 이상한거야. 소녀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어. 왜 있잖아, 앞 못 보는 사람들이 쓰는 지팡이.

 ‘뭐 어때. 부처님도 한 번쯤은 이해해 주실 거야.’

너를 가진 순간부터 그날 오전 내내 내가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이글거리는 태양이 씨엥통 사원의 황금 지붕을 녹여버릴 듯이 뜨거운 오후가 되어서야 쉬는 시간이 주어졌어. 무더운 낮에는 스님들도 자유시간이야. 난 뒤뜰로 나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을 하고 조심스레 널 품에서 꺼냈어. 몇 달 전에 봤던 그 때의 그 모습과 똑같았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만 소리를 지를 뻔 했어. 빨간색 봉지에 앙증맞게 그려진 네 모습은 어느새 내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고 말았지. 너를 어떻게 꺼내 볼까. 가위로 자를까, 아니면 과감하게 손으로 뜯을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끝부분을 잡고 단번에 봉지를 열었지. 달콤한 냄새가 먼저 내 코를 사로잡았지. 갈색 바탕에 윤기가 흐르는 동그란 네 얼굴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매력적이었어. 한입 너를 베어 무는 순간 난 너에게 반해버리고 말았지. 네 몸속에 숨어 있던 하얀 크림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어. 폭신하면서도 부드럽고 사르르 녹는 게, 눈의 맛이 이럴까. 라오스는 여름뿐이라 눈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책에서 본 적이 있어. 초콜릿색처럼 동그란 항아리 뚜껑 위에 소복이 덮여있던 눈. 눈은 쉽게 녹아버린다고 했거든. 새하얀 크림이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는 너는 꼭 눈 같았어. 눈 깜짝할 사이에 너는 사라지고 말았어. 하지만 슬프진 않았어. 다행히 너는 하나 더 있었거든.

그때부터 난 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 이름 옆에 적힌 ‘情’이라는 한자 때문에 처음에는 네가 중국에서 온 줄 알았어. 하지만 끈질긴 추적 끝에 네가 한국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왜 강남스타일 춤으로 유명한 그 나라 말야. 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너를 보물 상자에 담아 뒤뜰에 있는 보리수나무 밑에 숨겨 두었어. 그리고선 매일 꺼내 보았지.

그날도 네가 잘 있나 확인해보려 보물 상자를 열어보던 참이었어.

 “릭, 그게 뭐야?”

 깜짝 놀라 돌아보니 키산이었어. 키산은 나처럼 집이 가난해 스님이 된 아이야.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스님이 된 거지. 난 너를 얼른 등 뒤에 숨겼지만 키산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물었지.

 “네가 매일 들여다보는 그게 뭐냐고?”

 명색이 스님인데 거짓말을 할 순 없잖아. 난 솔직히 말했어.

 “한국에서 만든 초코빵인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라오스에 이보다 달콤한 건 없을 걸.”

 “얼마나 맛있길래?”

 “너 눈 알지? 추운 나라에 내리는 새하얀 눈. 눈처럼 달콤한 맛이야.”

 “거짓말 마. 본 적도 없는 눈을 네가 어떻게 알아?”

 “꼭 봐야만 아니, 안 봐도 맛으로도 느낄 수 있는 거야.”

 “어디서 났어?”

 “그건 비밀이야.”

 키산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어. 그러고선 한참 뜸을 들이더니 내게 말했어.

 “릭, 그 거 나한테 주면 안 돼?”

 “말이 돼? 이 초코빵은 내가 정말 아끼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는 욕심 부리면 안 되잖아. 넌 지금 부처님의 법을 어기고 있어. 네가 안 주면 큰 스님에게 모두 일러바칠 거야.”

 “비겁해!”

 “욕심 많은 네가 더 비겁해!”

 “내 꺼라고!”

 “세상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니. 공평하게 승부를 해서 이긴 사람이 갖도록 하자. 대신 내가 지면 못 본 걸로 해줄게. 내일 이 시간, 꽝시 폭포에서 만나기로 하자.”

 너를 둘러싼 우리의 승부는 그렇게 시작됐어. 사슴이 뿔로 들이받은 곳에 물이 쏟아져 폭포를 이뤘다는 전설처럼 꽝시 폭포의 물은 엄청나. 물살이 너무 세서 숨을 오래 참기는커녕 그냥 서 있기도 힘들 정도지.

 “오래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난 참는 거라면 자신이 있거든.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참을 수 있고 수업 시간에 잠 오는 것도 참을 수 있지만 너를 빼앗기는 건 참을 수가 없었어.

 “하나, 둘, 셋 하면 들어가는 거다. 하나 둘, 셋!”

 난 마음속으로 너를 갖고 싶은 만큼 세었어. 초코빵 하나, 초코빵 둘, 초코빵 셋, 초코빵열, 초코빵 백. 헉헉. 이쯤이면 되겠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물 밖으로 나오니까 키산의 얼굴은 여전히 물속에 있는 거야. 얼른 다시 물속으로 얼굴을 넣으려는데, 바로 그때 푸우! 하고 키산이 물 밖으로 나왔어.

 “내가 이겼지?”

 “무슨 소리야. 사람이라면 그렇게 오래 숨을 참을 수가 없어.”

 “뭐라고? 내가 속이기라도 했단 말야?”

 “안 봤으니 알 수가 없지.”

 “그래. 좋아. 그럼 이번에는 헤엄쳐서 저기까지 먼저 도착하는 걸로 붙자.”

 키산은 폭포 끝을 가리켰어.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

 “준비, 시작!”

 물살을 가르며 목적지까지 최선을 다해 헤엄쳤어.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차가운 물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너를 맛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네가 어떤 맛인지도 모르고 너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키산은 무엇 때문에 너를 그렇게 갖고 싶었던 걸까. 두 번째 대결도 무승부로 끝이 났어.

 “이번에는 무조건 승부를 내는 거다.”

 마지막 승부는 다이빙이었어. 더 높은 나무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내 키의 세배쯤 되는 나무에 올라가 나는 멋진 폼으로 뛰어내렸지. 그런데 키산은 내가 올랐던 나무보다 훨씬 높은 나무를 찾은 거야. 키산이 나무를 오를 때 나는 생각했지.

 ‘하나 남은 초코빵 못 먹게 되어도 좋아. 키산에게만은 절대 뺏길 수 없어!’

 나는 키산이 나무에서 미끄러지길 속으로 빌었어. 그런데 아뿔사. 정말 그렇게 돼 버린 거야. 키산은 나무에 오르자마자 휘청거리더니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고 말았어.

물살을 가르며 목적지까지 최선을 다해 헤엄쳤어.

너를 지킬 수만 있다면 차가운 물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너를 맛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야.

키산은 누워 지내야 했어. 당연히 아침 탁발 수행에도 나갈 수가 없었지. 나는 너를 갖고 있었지만 네가 먹고 싶다거나 예전처럼 좋지는 않았어. 너를 품에 안고 키산이 누워 있는 방을 서성이기만 했지.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메콩강 위의 달이 네 모습처럼 동그랗게 부풀던 날 밤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키산을 찾아갔어. 그런데 빼꼼 열린 문 틈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어. 키산 곁에는 탁발 때 보았던 낯익은 얼굴이 있었거든. 왜 있잖아. 우리가 준 음식 바구니를 가져가던 그 지팡이 소녀.

 “스님, 왜 그동안 탁발하러 나오지 않았어요?

 “짠, 아무도 없을 땐 스님이라고 안 불러도 돼.”

 “오빠가 나오질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짠, 오빠가 네 선물을 구하기 위해 잠시 어디 좀 다녀왔어.”

 “어떤 선물인데?”

 “짠, 너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눈 맛 빵이 있대. 얼마나 달콤한지 입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고 만대.”

 “눈은 달콤한 맛이야?”

 “아마도 그런가 봐.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공부 열심히 해서 눈 맛 빵 꼭 구해줄게.”

 키산은 소녀의 손을 가져가 볼에 비볐어.

 소녀는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으며 마당으로 걸어 나왔어. 잠시 망설이다가 소녀의 지팡이를 붙잡았어. 소녀가 흠칫 놀랐어.

 “네가 혹시 키산 동생 짠이니?”

 “네. 그런데요. 누구세요?”

 난 대답대신 너를 꺼내들었지. 하도 만지작거려 뭉개지긴 했지만 하얀 크림은 그대로였어.

 “이거 먹어봐. 키산이 겨울 나라에서 구해온 눈이야.”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문 소녀는 음미하듯 너를 머금고 있기만 했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채였지만 소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어.

 “와아, 눈은 달콤하구나.”

 그제야 무거운 내 마음이 사르르 녹더라. 그 때 나는 진짜 눈 맛을 보았어. 너처럼 동그랗게 생긴 보름달이 소녀와 나를 비추는 밤이었어. <끝>

당선소감-이서림 / 동심으로 세상 밝히기 위해 더욱 정진

▲ 이서림

“세상은 생각대로 되진 않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빨강머리 앤의 대사입니다. 제게는 신춘문예가 그랬습니다.

한 해 동안 지은 글 농사 검사 받듯 꼬박꼬박 응모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설렘보다는 조바심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맞이한 계절. 이번 겨울은 또 어떻게 마음을 추슬러야 할까 지레 겁먹고 있을 때 기적 같은 일이 저에게 일어났습니다. 당선 통보 전화를 받고 맘껏 울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웃다 보니 정신이 번뜩 들더군요.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데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외로운 싸움에 지치지 않도록 응원해준 나의 사람들인 든든한 스승님 박덕규, 노경수 교수님, 홍종의 선생님, 영원한 글벗 은정이와 현정언니, 초록목도리 식구들, 나의 가족들과 보석들,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 정말 고맙고 사랑합니다.

모두 그들 덕분입니다. 믿어주신 만큼 깊을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동심으로 세상을 밝히는 그 멋진 일을 위해 쉬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약력

●1982년 부산 출생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수료

●현재 울산 mbc 구성작가

심사평-김구연 / 새로운 이야기와 명확한 표현력에 집중

▲ 김구연

본심에 오른 작품 모두를 읽은 소감은 한 사람이 썼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야기도, 표현도 엇비슷했다는 것이다. 그 만큼 수준이 고만고만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동화는 말 그대로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러니 무엇보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유익해야 하고 표현이 새롭고 명확하기를 심사위원은 바라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손톱 긴 손자, 꼬리긴 할머니’ ‘라오스의 달콤한 눈’ ‘안녕 해바라기야’ 3편이었는데 나는 ‘라오스의 달콤한 눈’을 선택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응모자에게 한마디 한다면 사투리 사용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이다. 나라 안의 모든 어린이가 독자이기 때문인데 현상 투고 작품에서는 더욱 그렇다.

약력

●1942년 서울 출생

●197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동화집 <자라는 싹들> <마르지 않는 샘물> <가을 눈동자> 등 발표

●새싹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소천아동 문학상 등 수상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할머니의 라디오 사연

최고나

2017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할머니의 라디오 사연

“예은아! 어떻게! 할매가 된 것 같다!”

흥분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면을 끓이다 말고 할머니에게 뛰어갔다. 할머니 얼굴은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엔 진짜야?”

“진짜야. 들어봐라. 김복임. 분명이 전주 사는 김복임이라 했다.”

할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디제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양쪽 귀를 쫑긋 세웠다.

“네. 사연 잘 들었고요. 전주에 사는 ‘김꽃님’ 씨에게는 선물로 침구 세트 드릴게요.”

“에이, 뭐야. ‘김복임’이 아니라 ‘김꽃님’이잖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네. 아까는 분명히 김복임이라꼬 했는디. 전주 주소까지도 맞았는디…….”

할머니는 머쓱한지 괜히 귀 후비는 시늉을 했다.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에이, 뭐야. 좋다 말았네. 할머니 때문에 라면만 불게 생겼잖아.”

나는 툴툴거리면서 부엌으로 향했다. 등 뒤로 할머니의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도 덩달아 힘이 쭉 빠졌다.

언제부턴가 할머니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는 라디오 사연을 쓴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붙잡고 라디오 사연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저께는 내가 짐 들고 내려가다 쪼까 쉬고 있는데, 어떤 머시마가 도와주겠다고 하데. 그러면서 내 짐을 들고 다시 올라간 거 있지? 내가 내려가고 있던 것도 모르고 말이여. 하하하.”

사연을 말하는 할머니의 눈은 언제나 빛났다. 나는 할머니의 말에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할머니가 라디오 사연에 집착하는 걸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엉터리 맞춤법, 재미도 없는 이야기. 과연 이런 사연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열두 살인 내가 봐도 의문이 들었다.

“할머니, 이런 건 글 잘 쓰는 사람들이나 뽑히는 거야. 그리고 요즘 누가 그렇게 손으로 써. 인터넷에 접속하면 되는데. 보기 힘들어서 읽어주지도 않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사연 쓰기에 빠져들었다. 전단지 뒷면이든 스케치북이든 가리지 않았다. 돋보기안경을 끼고 뭔가를 열심히도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 있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아가, 할마이가 우산 가지고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

할머니의 문자였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현관 앞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예보에 없던 비 소식이라 마중 나온 엄마들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엄마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새삼스럽게 부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야, 차예은. 너 그러다가 운동화 다 젖는다.”

옆에서 나와 같이 엄마를 기다리던 보람이가 말했다. 그제야 나는 신발을 내려다봤다. 빗물이 조금 튀겼을 뿐인데 정말로 운동화의 파란 앞코가 축축이 젖어있었다.

“야, 너도 메이커 운동화 하나 사라니까. 그거 얼마나 한다고.”

보람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요즘 그렇게 티 나는 짝퉁 신발 신는 사람이 어디 있냐?”

민성이가 옆에서 보람이 말을 거들었다. 민성이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내 신발을 쳐다보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신발이었다. 나는 신발주머니로 얼른 신발을 가렸다.

“암튼 우린 먼저 간다.”

멀리 보람이의 엄마가 보였다. 나도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괜히 할머니에게 화가 났다. 우산도 없이 터벅터벅 정문을 나섰다. 그때였다.

“할매가 기다리라 안 했냐? 많이 기다렸나? 내 새끼 젖었네.”

구부정한 허리로 부랴부랴 걸어오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할머니는 비에 젖은 나를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내 머리며 어깨에 묻은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주었다. 나는 할머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또 라디오 들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로 될 것 같아서…….”

할머니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뭐? 정말 라디오 듣다가 늦은 거라고?”

황당해서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대답도 없이 내게 우산만 씌워주었다. 나는 우산을 뿌리쳤다. 할머니가 보란 듯이 비를 맞고 성큼성큼 걸었다.

“할매가 늦어서 화 많이 났냐?”

할머니는 집에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내 기분을 풀어주려 내가 좋아하는 감자전까지 만들어줬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콕콕 찔렀다.

“할매가 늦어서 참말로 미안하다. 이것 묵고 풀면 안 될까?”

책상에 지저분하게 쌓인 할머니의 사연들이 눈에 보였다. 괜히 다가가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런 것 좀 그만 쓰면 안 돼? 뽑히지도 않는 거 매일 쓰면 뭐해? 시간 아깝지도 않아? 이거 쓸 시간 있음 차라리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겠다!”

그냥 속상해서 한 말이었는데 말하다보니 너무 지나쳤다. 허리가 아파서 거동도 힘든 할머니보고 나가서 일을 하라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할머니의 눈치만 봤다.

그런데 무섭게 화낼 줄 알았던 할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 밑에 커다란 그늘이 생겼다. 침묵을 지키던 할머니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할매가 예은이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할머니는 상 위에 어질러진 종이들을 쓸어 모았다. 그러고는 내다 버리려는지 재활용 박스에 하나씩 담았다. 어? 이러려던 건 아닌데. 나는 당황해 할머니의 상자를 빼앗았다.

“그렇다고 누가 버리래? 할머니는 말을 꼭 받아들여도!”

나는 툴툴대며 상자를 갖고 내 방으로 향했다.

나도 한때는 부모님과 살던 때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아빠, 엄마 사랑도 받고 좋은 옷을 입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삼 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의 모든 게 달라져 버렸다. 아빠는 지방에 일하러 가시고 할머니와 단둘이 이곳에 살게 되었다.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사 먹을 수 없었고 내가 갖고 싶은 것도 가질 수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이커 운동화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지 않기로 엄마와 약속했는데,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두 눈을 부릅떴다가 감았다. 생각을 떨치려고 상자 안에 있는 할머니의 사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디오 세상 (10시) : 의류 상품권. 예은이 키가 부쩍 자라서 가지고 있던 옷이 다 작아짐. 얼른 당첨돼서 예은이가 좋아할 만한 메이커 옷으로 바꿔줘야겠음.

‘이게 뭐지?’

무심코 집어 읽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디오에서 받고 싶은 선물인가?’

나는 호기심에 계속 읽어 내렸다.

방글방글 쇼 (12시) : 간식 2종 세트. 당첨되면 반 아이들 모두에게 간식을 준다고 함. 이거 보내주면 예은이 친구들도 좋아하겠지? 햄버거, 피자, 떡볶이 중에 선택할 수 있음.

지금은 두시 (14시) : 5만 원 문화상품권. 예은이 읽고 싶은 책을 5권이나 살 수 있음. 매일 빌려 읽는 거 보면 안쓰러움. 이번에는 꼭 당첨되어야 함. 제발!

라디오 천국 (18시) : 베이비 아토피 세트. 예은이 목덜미에 아토피처럼 붉게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님. 아토피로 번지기 전에 얼른 치료해줘야 함.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할머니는 내게 선물을 주고 싶어 그렇게 열심히 라디오 사연을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기록한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할머니에게 투정만 부리다니.

새벽의 라디오 (새벽 1시) : 발열 매트. 이불이 얇아서 예은이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됨. 새벽 시간대라 경쟁이 치열하지 않음. 다른 곳보다 더 신경 써서 재밌고 길게 쓰도록!

며칠 전 깜깜한 새벽이었다. 볼륨을 잔뜩 줄인 채 라디오의 스피커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잠에서 깬 것이 화가 나 할머니에게 무작정 소리를 질렀다.

‘이런 바보같이 뭐하는거야!’

안녕하십니까. 디제이 선생님들. 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주 사랑스러운 손녀딸이 하나 있습니다. 늙고 못난 할미라 원하는 것을 다 해줄 수 없는 것이 늘 미안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착하고 애교 많은 손녀딸 예은이가 있어서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디제이 선상님의 좋은 목소리로 꼭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선물을 보내준다면 다른 건 필요 없고, 손녀딸이 신을 수 있는 ‘운동화 교환권’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손녀딸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신. 우리 예은이는 ‘엑스’라는 가수를 참 좋아합니다. 같이 듣게 꼭 틀어주십시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당장 달려가서 할머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할머니, 우리 라디오 듣자.”

며칠 후, 나는 라디오 앞으로 할머니를 끌었다.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냥 왠지 오늘은 할머니랑 같이 듣고 싶어서…….”

얼마 전 나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다. 할머니에게 느꼈던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 한 자 한 자 정성껏 써내려갔다. 단지 글만 쓰면 소개되지 않을 것 같아 할머니랑 찍은 사진도 붙이고 알록달록 종이접기도 함께 넣었다. 물론 선물은 할머니에게 꼭 필요한 ‘건강식품’으로 신청을 했다. 신청곡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그리고 오늘이 드디어 내가 보낸 사연을 방송하는 날이다.

“네가 웬일이냐? 먼저 라디오를 듣자고 하고.”

할머니는 의아한 듯이 내게 물었다.

“그냥 오늘따라 할머니랑 라디오가 듣고 싶네.”

나는 모른 척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신 나는 음악과 함께 디제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 주 사랑이 가득한 편지는 완산구에서 보내주신…….”

이번에는 과연 사연이 소개될까? 꼭 소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할머니와 나는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엔 정말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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