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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소설화

밀월 5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12. 21.

   소설의 승패는 어떻게 플롯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갈라진다. 내 경우엔 생각나는 에피들을 모아 그때그때 적어 두었다가 초고 단계에서 그 에피들을  짜집기를 하는 형식으로 플롯을 구성해가며 소설을 완성해 가는 편이다.

 이 이야기는 태풍의 이야기 속 화자인 '나'의 이야기이다.




“은실누나!”

가만히 불러만 보아도 슬금슬금 저 가슴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는 온기. 그녀의 이름을 낮게 읊조리기만 하여도 뒤죽박죽 내 인생도 가지런히 정리될 수 있으며 뭔가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 난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그나마 목숨이나마 부지하며 살았을까? 셀 수조차 없을 만큼? 아니 너무 불러 이제는 대답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닳았을.

"은실누나!"

기쁠 때나 슬플 때 아프거나 배고플 때도 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 때문에 살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녀의 이름에 기대여 살 것이다. 세상 그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류의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나는 너무 명백히 앞으로의 내 삶도 은실누나를 부르다 죽을 것임을 이제는 알겠다.

그녀를 처음으로 마주친 날을 확연히 기억할 수 있다. 가을 햇빛이 찬란했던 그날 그녀는 나풀나풀 커다란 꽃문양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양 갈래로 가지런히 땋은 머리가 보스스 솜털이 일어서고 있는 목덜미까지 내려와 찰랑거렸다. 그녀는 눈이 부신 듯 한쪽 손으로 햇빛을 가리면서도 내 쪽을 보며 살짝 웃어주었는데 그 순간 난 분명히 그녀의 등장이 내 인생을 바꿔놓을 것 같은 강렬한 예감에 압도당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심심하고 우중충하던 덩그마니 큰 기와집, 그 기와집에서 유일한 아이였던 나,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할머니의 꺼칠한 손이 아픈 배를 쓰다듬어 줄때 왠지 모를 서러움이 목이 메여 괜히 더 아파진 배, 그 배를 깔고 엎드려 숨죽여 눈물을 감추었던 시절, 난 남자니깐 울면 안 돼. 그렇게 수없이 자신을 다독거렸던 나.

그렇다. 그럴 즈음 은실누나는 새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와 둥지를 틀었다. 나는 은실누나에 대한 내 모든 기억을 이제 끄집어 내려한다. 내 인생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작은 욕심과 그녀에 대한 내 마지막 예의, 아니 그녀의 나를 향한 끊임없이 따뜻했던 마음에 대한 보답을 이렇게나마 풀어보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날 그녀가 처음 온 날 나에게 보내주었던 그 미소가 내 마지막 날까지 계속 되어져 왔다는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인가, 불행인가? 가끔씩 난 헛갈릴 때도 있었지만 이제 이 만큼의 인생을 산 시선으로 기억하는 그녀의 그 미소는 그나마 내 뒤죽박죽인 인생에 유일한 희망이었었나 보다.

그날 똥개 복실이와 나는 딱지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집안은 수런수런 인절미 떡치는 소리와 고소한 부치개 지짐 냄새, 당숙네 가족들의 방문, 동네 아줌마들의 수런거림, 그리고 할머니의 우렁차고 퍼진 목소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아마도 분명 우리 기와집에 경사가 났나보다.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나에게 어머니가 생겼다고. 어머니라는 말엔 어쩐지 아린 느낌이었다. 난 일부러 모르는 채, 다른 세상에서 놀고 있는 아이처럼 그렇게 복실이를 앞에 두고 복실이 몫의 딱지를 때려가며 내 몫의 수북한 딱지에 위안 같은 것을 얻고 있었던 날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가기 전 햇빛이 유난히 눈부셨던 날 새어머니와 함께 은실누나가

우리가족이 된 날부터 덩그마니 큰집에 할머니, 아버지, 일하시는 복순 엄마 그리고 나,

울음소리한번 제대로 내지 못했을 것 같은 적막함에 날마다 심심했던 나는 은실누나의 꽁무니를 졸졸졸. 내 뒤엔 똥개 복실이가 졸졸졸. 우리 셋은 그렇게 한 팀이 되어 그동안 나서지 못했던 들로, 산으로 쏘다니기 시작했다.

복실이가 유일한 내 친구였던 아이였었는데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난 은실누나의 치맛자락을 놓칠세라 그렇게 열심히 열심히 졸졸졸 따라 다녔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새어머니와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운동장에 선 날, 저만큼서 나를 향해 하얀 손을 흔들던 양 갈래 머리위로 눈부신 햇살을 담뿍 받은 은실누나, 무섭게 미소 짖던 교장선생님의 환영사도 내 또래 찔찔이들의 토닥거림도 새어머니와 할머니의 염려의 눈길도 무시하고 난 누나에게 뛰어가다 그만 담임선생님께 낙아 채이고 말았던 시간, 어찌나 떼를 쓰고 울었던지.

낯설었던 교실에서의 지루함으로 몸이 뒤틀리곤 하던 어떤 시간, 창 너머 누나의 가르마가 보일까봐 수없이 눈길을 주었던 복도. 그렇게 그렇게 학교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난 열병을 크게 앓았다.

몇몇 기억의 쪼가리들을 연결시키면 난 펄펄 나는 열꽃을 피웠을 때조차도 은실누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다.

과연 무엇이 어린 나로 하여금 그토록 은실누나에게 매달리게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유일하게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믿음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어진다. 나에게는 엄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도통 없다. 한 번도 엄마의 얼굴을 본적이 없으므로. 할머니나, 복순 아지메, 혹은 동네엄마들이 혀를 끌끌 차며 오며가며 하나씩 내뱉던 쪼가리 말들을 종합해보면 아마 우리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한다. 내가 원인인지, 혹은 다른 것이 원인인지 한 번도 자세히 물어보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시절 어린 내가 유일하게 맘을 부치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은실누나였으리라.

물론 할머니도 계셨겠지만 할머니의 맘이 어쩐지 껄끄럽게 느껴진 것은 어렸을 적엔 잘 몰랐지만 지금 유추해보면 끝도 모를 죄의식 같은 것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아니 끝도 없을 것 같은 나에 대한 동정, 연민 그것으로 부터의 도망침, 자의식이 강했던 나에게 할머니의 그런 무조건 적인 연민은 혹시 어머니의 죽음이 나 때문인 것은 아닌가 하는 내 무의식 저편의 죄의식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바늘 침 같은 것이었으리라. 나도 모르게 인식되어지는 그 바늘 침으로부터 찔림, 그런 것으로부터의 나를 방어하고자하는 내 무의식적 자기방어기제가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올곧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리라고 짐작 되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어린 시절의 내 아버지는 단지 그냥 아버지라는 이름의 거대한 산이었다. 한 번도 감히 아버지의 산속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 산의 그늘이 너무 어두워, 그리고 너무 높아 감히 들어가고자 시도조차 못했던. 생각해 보면 아버지로부터의 따뜻한 시선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씁쓸한 기분이 지금도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참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숙제이기도 하다. 아버지도 분명 아버지식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 주셨을 것인데, 어찌 나는 그분의 따뜻함을 단 한 번도 따뜻함, 혹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까 사춘기 무렵부터 내가 묻고 또 물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황폐할 수밖에 없는 내가 사는 세상에 은실누나의 출현과 어울림은 따뜻함과 일상의 기쁨, 혼자가 아니라는 포만감 같은 것들을 가득 넘치게 했던 또 다른 내 세상을 선물했다고나 할까.

은실누나에 대한 나의 믿음에 확실한 쐐기를 박은 사건하나가 추억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누나는 6학년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진 어느 초여름의 일요일 아침, 누나가 소쿠리를 끼고 일찍 집을 나섰다. 나풀나풀 다구다 원피스를 입고 나서는 누나의 뒤를 놓칠세라 세수도 안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따라 나섰다. 늘 들로 산으로 함께 쏘다니긴 했지만 그 날은 무슨 까닭인지 미리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누나를 따라 나서지 못할 뻔했다.

오늘의 목표는 생개골 뒷산, 소나기를 함뿍 맞은 땅에서 쑥쑥 솟아나오는 오동통한 고사리 꺽기, 사실 나는 고사리에 별 흥미도 없었지만 단지 누나와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에 목숨을 건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곧잘 친구들과 함께 소쿠리 한 가득 꺽어 온 고사리를 할머니에게 넘겨주면서 받는 할머니로부터의 감탄과 칭찬에 이른 봄부터 초여름 내내 동네 온 산을 뒤지고 다녔다. 그 덕분에 나도 누나와 함께 온 산을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이곳저곳 고사리를 발견할 때마다 누나를 부르곤 했다. 나의 호들갑스런 부름에 쏜살같이 달려오던 누나의 눈부시게 활짝 핀 미소를 보는 재미, 그 재미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가끔씩 고사리 찾는 재미가 싱거워 질 무렵 그 때쯤 지천으로 피어있던 보라색, 하얀색, 노랑색 들꽃들에 마음이 가곤 했다.

그날도 고사리를 찾는 재미가 심드렁해질 무렵 누나와 한 참 떨어진 습지에 주황색 나리꽃 무리가 활짝 피어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아하, 누나에게 저 나리꽃을 선물해 줘야지 후다닥 나리꽃을 향해 돌진하고 있을 때 아뿔사 물컹 발밑에서 느껴지던 어떤 물체, 바로 독 오른 뱀에 물려버리고 말았다.

처음엔 너무 무서워 소리치지도 못했지만 곧 온 세상이 떠나갈 듯 누나를 부르고 내 소리에 내가 또 혼비백산하고 누나와 누나 친구들이 달려오고 누나가 다구다 원피스를 찢어 내 정강이를 묶고 뱀이 물었던 발목을 빨아내고... 그 뒤로 가물가물.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누나가 나를 들쳐 업고 얼마나 뛰었는지 집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내려놓고 누나마저 혼절하고 말았다 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누나의 산 마실에 동행할 수 없었다.

은실누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1년 뒤쯤 줄줄이 여동생 둘이 태어났고 내가 유일한 아들이었던 관계로 새어머니에게서도 할머니에게서도 나는 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온통 은실누나에게 향했고 은실 누나는 마치 내 친엄마, 친누나처럼 그렇게 나를 돌보았던 같았다.

이런 저런 가득한 추억을 안고 나는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고 은실누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인생의 커다란 획을 하나쯤 긋게 되는 사춘기, 나의 사춘기는 은실누나가 권해주는 책들과 음악들에게서 내 인생의 색깔을 결정하게 될 뿌리를 만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누나는 나름 문학 소녀였다. 하이네, 워즈워스, 예이츠, 릴케를 알게 했고 수없는 고전들을 읽게 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일기장 구석구석 그들의 시를 베껴 놓은 것이 남아 있고 그 시들 위에 삽화까지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그들 속에 몰입해 있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들뿐인가. 김소월, 유치진, 유치환, 박목월, 서정주, 특히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파랑새’란 시를 낭독하며 그렁그렁 눈물짓던 누나의 영상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누나! 정말 나도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마구마구 날아다니고 싶다.”

고 말했을 때 떨구 던 눈물위로 배시시 미소 짓던 누나의 모습, 그리고 정말 그 순간 한껏 파란하늘 위로 힘차게 날아다녔던 새들의 모습을 이 순간까지 잊지 못한다.

그 무렵의 누나의 감성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서 누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소월의 ‘초혼’이란 시는 나와 누나의 결정적 운명을 예시하는 듯 한 시이기도 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내 일기장속에 얼마나 많이 이 시를 읊고 베껴 놓았는지, 아마 나는 사춘기시절, 은실누나에 대한 연모의 정을 키우기 시작했나 보다. 특히 결정적 계기가 된 책은 앙드레지드의 "좁은문" 이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드무니라.”

가끔씩 은실누나와 나는 소설책이나 시집 등을 누나 친구들에게 빌려와 함께 읽곤 했다. 처음에는 누나가 좋아하는 것이니 그냥 나도 누나와 같은 부류가 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읽고 있었지만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소설책이나 시집을 읽는 것에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주로 정읍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고전을 위주로 읽었는데 테스나, 여자의 일생, 대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레미레자블, 데미안, 갈매기의 꿈, 유리알 유희, 천국의 열쇠 등등의 수많은 소설 들은 재미를 떠나 나에게 문학의 세계로의 진입을 꿈꾸게 하기도 했다.

특히 그러한 책들을 읽고 난 후에 나누는 누나와의 대화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나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다., 내 또래 남자 아이들, 모였다 하면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 따먹기,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등의 놀이를 할 때 혹은 온 산을 휘 젖고 다니며 땔감을 구해오든 혹은 소여물을 위해 꼴을 베 오느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이렇게 누나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나누는 경험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은밀한, 그러나 가슴 벅찬 그런 시간이었다.

그때 쯤 어느 날 누나는 ‘좁은 문’이라는 소설책을 삐쭉 내밀었다. 지금도 이 책을 생각하면 그 시절 나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던 운명의 화살을 예감했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의 사춘기, 나의 앞으로 전개될 운명의 예시,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할까? 사촌이며 동시의 연상의 소녀 알릿사는 은실누나가 되었고 나는 제로옴이 되었다. 이런 외형적인 설정의 대비뿐만 아니라 제로움이 알릿사를 만나면서 겪게 도는 모든 심리적 움직임이 제로옴이 된 나의 심리적 움직임으로 대비되어왔다.

그러나 은실 누나는 나에게 내민 ‘좁은 문’에 대해선 일언반구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모든 책들을 공유하면서 읽고 난 후엔 언제나 누나 편에서 그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했는데 그 책에 대해선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너무 할 말이 많았지만 쑥스럽기도 하고 야릇한 기분을 들킬까 무서워, 읽고 난 후 가만히 누나 책상에 올려놓았다.

“누나, 재미있게 읽었어.”

라는 쪽지 한 장을 책갈피에 남겨 둔 채.

“동생 로베르를 도와준다는 구실로 알릿사는 나와 함께 나전어를 배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내 독서를 따라오기 위한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그녀가 따라 올 것 같지 않은 공부에는 나도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것이 때때로 내게 방해가 되었다 할지라도 남들이 생각하듯이 내 정신적인 비약을 저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녀는 어디서나 자유롭게 나보다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은 그녀를 따라 방향을 정하는 것이었으며 그 당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 우리가 ‘사색’이라고 부르던 것도 흔히는 좀 더 그럴 듯한 마음의 일치에 대한 하나의 구실, 감정의 가장, 사랑을 덮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 읽고 난 ‘좁은문’을 누나에게 돌려주고 다음 번 읍내에 가면 꼭 책방에 들러 ‘좁은문’을 한 권 사리라 작정했다. 구절구절 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숱한 말들, 내가 느끼고 나누고,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이 책속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나의 보물 일호, 바로 ‘좁은문’이란 책이었다. 그 책을 읽음으로 해서 내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던 애매모호한 누나를 향한 감정을 확인 할 수 있었고 그 책을 읽음으로 해서 내 마음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그래, 어느 날 누나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뿔사 누나 책상위에 숱하게 밑줄 친 또 한권의 좁은문을 발견했다. 마음이 쿵쿵 뛰어 얼른 펼쳤던 책을 덮고 후다닥 나와 뒤뜰로 뛰어가 폭발할 것 같은 이 심정을 주체할 수 없어 한참을 서성거렸다. 누나도 그랬을까? 누나도 나의 맘과 같았을까? 묻고 또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니 확인 할 수 있었다. 누나도 그랬을 거야. 누나도 내 맘과 똑 같았을 거야.

그런 시간이 지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나도 나도 계속 책을 읽고 나누는 그야말로 심도 있는 대화의 시간은 마치 알릿사와 제로옴의 독서와 사색에 버금가는 길고 깊은 영혼의 성숙, 아니 둘만의 암묵적인 마음의 교류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나의 중학시절을 마치고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누나는 취직이 되어 서울로 떠났다. 누나의 떠남은 또 하나의 나의 해방과 동시에 상실감을 주었다. 한편으로 은실누나란 존재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은실누나가 서울로 떠나고 이제 나도 내 진로를 결정해야만 할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은실 누나의 떠난 빈자리에 덜렁 남은 나는 한 동안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마음만 허전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단도리를 했다. 그런 내 마음의 흐름을 아는지 누나도 가끔씩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외하고는 일절 나에게 아무런 표시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나의 책읽기는 계속되었고 고등학교 문예반에 가서 활동을 하면서 나의 귀한 친구 기철을 만났다. 한 기철, 그의 등장이 내 인생을 뒤흔들게 될 줄이야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지 같은 문예반 중에서 특히나 말도 통하고 무척 정의롭고 외향적인 그와의 사귐은 나의 단조로운 삶에 다양한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를 통해 퀸, 비틀즈, 롤링 스톤즈, 밥 딜런, 스모키등 수많은 팝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불온서적들도 탐독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문화적 충격이 나름 내 인생의 안목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정이라는 이름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연대의식을 그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와 우리들 몇몇의 문예반 똘만이들은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 꽤 공부께나 하면서도 의리있는 놈들로 은근히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학교에서 행여 문제라도 일으킬까봐 노심초사하는 눈의 가시들로 감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왜냐면 기철, 그는 친구들을 대신해 교장에게 거침없이 항의를 하거나 훈육주임의 터무니없는 뭇매에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설파하며 강하게 맞서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 똘만이들을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들은 그들 모두 학교를 대표할 만큼 공부도 월등했고 이 마을 유지들, 혹은 기관장들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그룹이었기에 함부로 학교에서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 똘만이들 중 나는 가장 조용하고 묵묵히 내가 해야 할 도리만을 해 내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나의 최고의 관심은 세상에 있는 모든 고전들을 다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쓰는 것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그리고 버리고.

나의 최종 목표는 누나가 있는 서울의 일류 대학의 국문과였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목표한 서울의 대학에 들어가려면 얼마나 머리를 싸매야 하는지. 그래도 열심히 나의 목표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더불어 기철, 그 또한 나와 같은 대학의 정치학과를 목표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둘은 똘만이들 사이에서도 끼여 들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의 성적에 대한 경쟁도 만만치 않아 시험 때 마다 함께 공부하면서 벌이는 묘한 경쟁 심리는 그야말로 불꽃같은 열기를 서로에게 내뿜게 되었고 그런 서로를 의식하는 모습은 우리의 목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부추겼다. 그런 것이 우리들의 연대의식을 더 강하게 만들었고 우정이라는 이름의 꽃이 피리라는 기대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더하게 만들었다. 친구이며 동시에 경쟁상대 이며 어쩜 서로에 대한 존경심마저 우리의 우정 안에 깃들고 있었다.

우리의 우정과 경쟁은 서로에게 절실한 목표에 대한 인식을 더욱더 확고히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미래의 설계마저 서로를 의식하며 공유하는 즐거움을 주었다. 나의 모든 미래를 기철과 나누고 기철의 모든 미래를 나와 나누었다. 다만 내 안 저 깊이 도사린 은실누나에 대한 마음만은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인생의 여물기의 꿈과 실천을 그와 나눌 수 있게 됨이 은실누나가 없는 그 빈자리의 공허감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나눌 수 없었던 내 장래의 그림마저도 그와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친구이자 동시에 어쩜 기철, 그는 내 멘토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학교에서 인정받는 기대주였기에 가끔씩 우리 아버님은 교장선생님의 호출을 받으시고 학교를 방문하시곤 했다. 물론 나중에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담임선생님과 동석한 자리에서 우리 아버님은 내가 법학과에 진학할 수 있기를 희망하셨다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법학과라니. 한 번도 아버님은 나에게 내가 어느 대학 무슨 과를 선택해야하는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고 나 또한 한 번도 아버님과 나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우린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에게 무심했건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의 진로 문제에 대한 아버님의 언급은 나에게 부담감이 되었다. 나는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지망하고자 일찍부터 맘먹고 있었고 나의 희망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학과를 진학해 판, 검사가 소원이신 우리 아버님의 뜻이라니. 어느 날 부터인가 나는 슬슬 아버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묵묵한 응시가 자꾸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아니오.”라고 말했던 적도 없었고 심지어 다정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나에게 무거운 부담으로 내려 안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나는 기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기철은 나에게 아버지와의 대화를 하라고 충고했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산과 같은 무게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감이 나로 하여금 대화의 시도를 주춤케 했다. 한 번은 꼭 집고 넘어가야할 강이었다. 꼭 한번은 나의 생각을 아버지께 전달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얼마나 나에게 큰 숙제가 되었는지.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군청에 다니셨다. 날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정한 양복차림에 자전거를 타시고 20리길을 출퇴근 하셨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와 식사를 하거나 대면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가끔씩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신 날 행여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놈, 그놈!!!’ 그렇게 혼자 말씀을 하시고 등을 보이셨다.

아버지의 ‘그놈, 그놈!’이란 말 속에서 나는 아버지식의 나에 대한 사랑과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놈, 그놈!’이라는 말 속에서 풍겨 나오는 아버지식의 나에 대한 연민,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 든든한 지지대이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 몰래 나 자신에 대한 장래의 꿈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시고 계셨나보다. 그런 아버지의 꿈을 어떻게 내가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일본에서 공부를 하셨고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에서 최고의 학부까지 졸업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름 정치에 뜻을 두셨는데 하도 나라꼴이 시끄럽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할 상황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두문분출하다 그럭저럭 공무원이 되셨다 한다.

젊었을 때 꺾이고 만 자신의 야망을 아마 아버지는 자식 대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의 꿈을 비록 간접적인 경로였지만 짐작하고도 남는 내가 어떻게 감히 ‘아니요. 저는 글쟁이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었다. 그래 신문기자가 되는 거야. 신문기자면서 동시에 글쟁이로서의 나의 꿈을 펼쳐볼 수 있을 거야. 그런 방법의 하나로 국문과를 택하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큰맘을 먹고 아버지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화의 끝은 아버지의 승리였다. “그래, 네가 우리 가문의 큰 주춧돌이 되어야한다.” 그 한마디가 내 가슴에 못이 되었다. “그래, 나는 우리 가문의 주춧돌이 되어야한다고.”

내 학과는 그렇게 법대, 고시를 패스하여 판, 검사가 내 장래의, 우리 가문의 주춧돌이 될 것이리라. 아, 그 후에 나는 글쟁이로 살 것이다 라고 그렇게 다시 나의 장래를 수정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에 반해 기철은 아버지로 부터의 설득작전에 요지부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철이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 교수의 되기를 바라셨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좀 더 학문적인 깊이를 가지고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온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신 것 같았다.

그러나 기철은 사촌형의 학생운동을 보면서 기철 나름의 정치관과 현실관을 키우고 있었다.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기철 나름의 꿈과 이상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촌형과의 많은 대화 속에 그의 의식에 강렬한 색깔이 입혀지고 있었으리라. 우리들에게 가끔씩 정치현실과 대학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암암리의 학생운동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해주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찌 하면 나의 현재의 삶, 그리고 미래의 내 개인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그 저편에 은실누나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수도 없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잊었다. 아니 잊기 위해 노력했다. 단지 꿈속에서, 내 상상 속에서만 그녀와 나는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그녀로 부터는 일체 연락이 없었다. 간혹 가다 어머니에게 혹은 누이동생들에게 오는 안부편지 외에는. 그 편지 속에 물론 나의 안부를 묻곤 했지만 내 개인에 대한 관심도를 조금도 표명하지 않았으므로 내심 서운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야속하기도 했다. 내가 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도록 누나는 나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만 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격려편지라도 한통 날아 올수 있으리라 그렇게 기대했었건만.

누나는 누나의 이모님 댁에서 출퇴근을 하며 먼 친척이 운영하는 사무실의 경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누나도 대학에 보내자고 하셨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반대를 핑계로 누나는 대학을 포기 했었다. 아마도 부모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가 혹은 또 다른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을 거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언젠가 누나에게 누나는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가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누나는 분명히 대답했다. 대학은 내가 돈 벌어서 스스로 가겠다고. 지금까지 가르치고 키워주신 아버님께 더 이상 부담을 드리지 않겠다고. 학비를 벌면 누나는 국문과를 지망하여 또한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아마도 오랫동안 책을 읽었던 영향 이였겠고 가끔씩 고등학교 때의 문예반 활동으로 인한 꿈이었을 것이다.

나와 누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더 나의 꿈에 강하게 끌리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누나와 나, 작가가 되어 서로의 독자가 되기도 하고 비평가가 되기도 하고 함께 책을 낼 수도 있으리라. 세상에 같은 색깔의 꿈을 꾸는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로 가질 수 있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먼 훗날의 멋진 그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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