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현관문을 열자마자 휑한 실내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문이란 문은 모두 열려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방마다 어지럽게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김수아, 미안해. 김수아, 미안해.
싱크대 옆쪽에서 화장실로 가는 벽 위로 하얀 도화지의 빨간 글귀들이 눈에 띠었다. 싱크대 옆에 있어야할 냉장고도 거실에 있어야할 텔레비전도 사라졌다. 그것들이 있었던 자리마다 오래 된 먼지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내 방의 오디오 세트였다. 없었다. 아끼던 엘피와 시디들마저 몽땅.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열려진 창문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감나무가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았다.
“털렸네.”
꼭 남의 일처럼 우두커니 서있던 동생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좀 일찍 오자니깐.”
짜증도 아닌 것이 그저 허탈한 그것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주인집은 뭐했을까?”
멍하니 앉아만 있는 내게 동생이 물었다.
“한 번 올라갔다 올게.”
동생은 집주인이 사는 2층으로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허탈감에 압도되어 멍한 시선으로 방금 열고 들어온 대문 쪽을 바라다보았다.
“대문을 이렇게 열어놓으면 어떡하나? 처녀들이 사는 곳인데.”
동네 이장인 허씨 아주머니가 대문을 들어서며 문을 세게 닫았다. 짧은 반바지 아래 튼실한 다리가 시허연 중학생 이장 딸은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어머니를 뒤따랐다. 이장은 거침없이 열려진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뭔 일여!”
이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고해야 하는데. 신고해야 하는데.”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번호를 누르려했으나 손이 덜덜 떨려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이리 줘 봐. 내가 하께.”
이장은 내 전화기를 가져가더니 곧장 경찰서로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추석날 그런 것여?”
이장은 주저앉은 채 대답도 못하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엥엥”
경찰차의 사이렌소리가 들렸다.
*
꿈이었어. 내 몸이 옴짝달싹 못했지. 온 몸에 쥐가 난 듯 잠시 꼼짝 할 수가 없었어. 꿈속에서 신고해야할 번호가 100번 이었다니. 100번이 무슨 전화번호인지 검색부터 했어. KT고객 센터. 피식 웃음이 났어. 정말 개꿈이구나.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4시. 오랜 만에 기억할 수 있는 꿈이란 것이 이렇게 불길한 것이라니. 이건 예지몽일까. 아니면 내 안의 어떤 불안 요소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감나무는 고목이었지만 가지가 흐드러질 정도로 무성했어. 무성한 잎이 가지를 뻗어 창문을 가릴 정도였으니. 그런데 가을인데도 빨간 감들은 보이지 않았어. 지푸라기를 넣어 만든 흙벽돌위에 기와를 얹은 담벼락으로 좁은 진입로가 보였어. 진입로가 끝나는 지점으로 긴 하천이 우거진 풀숲에 쌓여 흐르는 듯했고. 진입로 한 쪽은 기와지붕을 얹은 고택의 담장이었고 한 쪽 옆으로는 고추밭이라고 생각되는 밭도 보였지.
생생해. 그 모든 풍경들이. 그 순간 압도당해 망연하게 주저앉아 있는 나도. 김수아는 누굴까, 그리고 물건들의 주인이 김수아라는 것을 도둑은 어떻게 알았을까. 참 귀여운 도둑이네. 물건들을 가져가면서, 미안하다는 말은 왜 했을까? 꿈속에서 조차 내 마지막 재산이 오디오라는 것을, 기껏해야 기십 만원도 되지 않는 그것에, 나는 왜 목매달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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