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등성이를 감싼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안개 넘어 우뚝 선 나무들의 우듬지가 하늘에 맞닿기라도 할 듯 높아보였다. 창문을 열고 이른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시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음미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어찌 이리 좋을까? 분명 고향이건만, 30여년 만에 돌아와 둥지를 튼 지금, 낯설고 새롭기만 한 것은 지난 삶의 여정이 지난했기 때문일까,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헤아려본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남은 평생 곁에 있어 조곤조곤 세상일을 나누며 웃기도, 울기도 때론 화를 내기도, 미안하다 먼저 사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을 사람.”
풋, 웃음부터 나왔다. 갓 흙에서 뽑은 파뿌리 냄새와 같은 웃음, 어찌 달기도 하지만 쓰기도 했다.
“좋아한다고 해. 여행도 같이 하자고.”
말해 놓고도 실없는 내 조언이 더 우스웠다. 연애 고수에게 나 같은 숙맥이.
“아니야. 기다릴 거야. 먼저 말하길.”
역시 고수는 고수였다.
“먼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줄 거야.”
나이는 괜히 먹는 것은 아닌가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느낌의 공동체/42쪽>”
신형철의 글이 기억났다.
“피, 피피피……”
속으로만 웃었다. 혹시 질투라 여길까봐.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분명 질투였다. 지혜에 대한 질투. 내가 가지지 못한 신중함과 상대에 대한 깊은 배려. 내 눈가가 젖어들었다. 지난 했던 내 삶은 바로 이 신중함과 상대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새 마을을 감쌌던 안개가 걷히고, 짙은 초록을 인 숲들이 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늘은 그리운 사람을 실컷 그리워하자, 그쪽으로 부는 바람에게 안부를 전하자, 슬픔을 아는 그대가 있어, 그리워 할 그대가 있어, 참 좋은 하루라며 톡톡 자판이라도 두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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