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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검은 피부, 하얀 가면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4. 24.

독후노트


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


1> 나의 감상


파농씨에게


   이제 제가 있는 이곳은 벚꽃이 피다 졌고 분홍 복사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보여주는 황홀함을 견딜 수 없어 종내는 지랄을 떨 수밖에 없는 즈음에 당신을 만나야만 했던 한 달이 저에겐 솔직히 부담이었고 고역이기조차 했습니다.

   비록 당신이 보여주는 세계의 문을 열었지만 발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프로이트, 아들러, 융, 급기야 라캉의 정신분석이론까지 끌어들여 나를 당황시키더니 이름도 낯설기만 한 마노니, 안나 프로이트, 게르멘 게, 헬레네 도이치, 피에르 자네 등등까지 등장시키며 당신이 제시한 수많은 명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해찰을 해야만 했습니다만 당신의 이야기가 당신의 의도대로 얼마만큼 나 자신에게 전달되었는가 하는 것은 당신의 책을 덮은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한편 당신이 주장하려는 어떤 것들을 펼치기 위해 제시한 이 수많은 일례들이 꼭 필요했을까, 그냥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에 더 집중하면 어땠을까, 너무 양념이 많은 것은 아닌가, 잠시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를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탄할만한 점은 당신은 불과 27살에 이 책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27살에 이루어진 지적용량의 넘침, 아니 그것보다 더 감동적인 사실은 당신이 27살 이전에 보여주는 신념들의 굳건함이고 그 신념에 따라 당신의 미래를 서슴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기의 미래를 거침없이 진진했을 당신을 상상하며 저는 잠시 저의 27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부끄러움이 앞섭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56살에 접어든 이 순간까지도 과연 내 인생에 신념이라고 일컬을 만한 어떤 나부랭이라도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참담하기조차 합니다.


파농씨,


“세상 여기저기서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일원 중의 하나가 ‘나’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창조한다.”

나는 나를 끊임없이 창조할 권리가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오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나도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 질문에 대한 혼란을 통해 나 자신이 성숙하고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성과가 글쓰기라는 형식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파농씨,

 

이 순간, 눈에 들어오는 풍경과 햇살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소 감동적이며 당신으로 인해 나는 또 얼마간 무언가를 질문하고, 찾고, 창조하는 나의 내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까지 설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2> 본문 요약


검은 피부, 하얀 가면/프란츠 파농


서문

1. 이 책을 왜 쓰는가?

- 어떤 새로운 인본주의를 향해

-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

- 우리의 유색인 형제들 위해

- 나는 인간 너를 믿기 위해

- 인종 편견을 없애기 위해

-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2. 사람은 무엇을 바라는가?

- 사람은 반복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이 초월의 행위임은 사실이 지만 우리는 또한 이 초월이 사랑과 이해의 문제에 시달리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우주의 조화에 전율하는 하나의 긍정이다. 뿌리째 뽑히고 낱낱이 흩어져 당황스러운 인간. 공들인 진실들이 하나씩 해체되는 것을 보도록 파문된 인간은 자기 안에 공존하는 이율배반을 이 세상에 투사하기를 그쳐야 한다.

-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열광은 무력한 자들의 무기다.

- 타인의 저항으로 세운 도약대를 떠나, 자기 의미를 찾아 자기 살 속에 웅크린 인 간을 보아야 한다.

- 개인이 인간 조건에 내재하는 보편주의를 떠맡아야 한다.

- 진정한 탈소외는 가장 물질적 의미에서 사물이 제자리를 되찾을 때에만 일어난 다.

이상적인 것은 언제나 현재가 미래의 건설에 쓸모 있는 것이다.<미래 지향성>

1. 흑인과 언어

앙티유인에게 ‘프랑스어’가 갖는 위상을 다룬다. 그들에겐 정확한 프랑스어가 곧 ‘하얀 가면’이다. 어눌한 프랑스어는 검둥이의 징표다.

- 언어 현상의 연구는 유색인이 갖는 타자를 위한 차원을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원 리가 될 것이다.

- 흑인은 두 개의 차원에 살고 있다. 자신의 동류를 대하는 것과 백인을 대하는 것. 이것은 식민주의적 운명이 만들어 낸 자기 분열의 증식이다.

- 세상을 아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다.

- 말한다는 것은 일정한 구문을 사용하고 이 언어, 저 언어의 음성학을 숙지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어떤 문화를 떠맡고, 어떤 문명의 무게를 받치는 것이다.

- 사람은 언어를 소유하게 되면 결국 그 언어가 표현하고 의미하는 세계를 소유한 다.

- 폴 발레리/헤매는 육신에 깃든 神(신)

- 식민화된 사람은 모두 문명화된 나라의 언어, 곧 식민 본국의 문화와 대면하게 된다.

- 언어의 한계선을 치울수록 세상의 문이 열린다고 믿는 심리현상이 있다.

- 우리가 편리하게 인간과학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는 사실은 드라마가 들어 있다.

오직 인간 실체의 유형 규정으로 심리적 작동 방식을 묘사하고 결점만 고려할 것 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구체적이고 새로운 인간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인가?

- 인간과학 연구의 지향점

* 인간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이 나르시시즘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즉 인간의 항복을 우선 시 해야 한다.

* 흑인이 식민지 상황에서 싹튼 콤플렉스의 창고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도록 돕는 것이다.

* 흑인들이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2.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 인간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자신의 동류를 향한 운동을 한다.

- 진실한 실제의 사랑에는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난 심적 계기들 이 동원되어야 한다.(실제의 사랑이란 자신에게 가정하는 것을 타인에게 원하고 인간적 현실의 영원한 가치들이 이 가정에 될 때 나타난다.)

- 흑인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지표일 수 있는 그 열등감, 그 아들러식의 과열, 그 과잉보상이 추방되지 않는 한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사이의 진정한 사랑은 불 가능하다.

- 흑인은 자신의 위축감을 극복할 수 있는지, 공포증의 태도나 거의 다를 것이 없 는 강박적 성격을 자기 삶에서 추방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 검둥이 여성은 스스로 열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백인 세계에서 인정받기를 열망 한다. 그 여성은 이를 시도하면서 정서적 과민이라고 부리는 현상을 도움을 받을 것이다.

-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개인의 삶이 도식적으로 그려지는 그 선은 방향선으로서 곡선이다. 진정 문제인 것은 언제나 개인의 방향선이기 때문이다. 그 선의 형태는 상당한 변화를 겪지만, 그 주된 내용, 에너지, 그 의미는 유년기 이랴도 거기에 심어져 그대로 남아 있다. 얼마간 그런 유년기 환경과의 연계성은 나중에 인간 사회에 내재한 훨씬 넓은 환경에서 떨어져나갈 테지만 말이다./인간에 대한 인식/ 아들러

3.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백인 선망, 즉 백색 신화에 물든 식민지인의 초상이다. 파농은 앙티유 출신의 여성 작가 마요트 카페시아의 『나는 마르티니크 여자』, 세네갈 작가 압둘라예 사지의 『니니, 세네갈의 물라토 여인』, 앙티유 출신으로 아프리카 식민지의 관료를 지낸 공쿠르상 수상 작가 르네 마랑의 『다른 이들과 똑같은 한 남자』 같은 작품들을 분석해 그 실상을 추적해나간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피부색에 기초한 인종의 드라마는 곧 식민지 현실의 거울이다. 유색인 여자는 백인 남성과 결혼하고 싶어 하고 흑인 남성은 어찌해서라도 배제한다. 또 유색인 남자는 흑인 여성은 멀리한 채 백인 여성과 결혼해 인정받길 갈망한다.

- 사랑받을 만한 대상으로서 자기가치에 대한 그런 부정은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그런 가치 부정은 그 사람 개인을 한편으로는 깊은 내면적 불안 상태에 있도록 하고, 그로 인해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금하거나 뒤틀리게 한다. 그는 연민이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의심한다. 이런 감정적인 자기가치 부 정은 어린 시절에 사랑과 이해의 결핍으로 고통 받았던 존재들에게서만 관찰된 다.

- 감정적인 자기가치 부정은 언제나 배제되었다는,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감정적으로 말하면 자신은 어디를 가나 잉여의 존재라는, 심히 고통스러운 감정 으로 이끈다.

- 유기증공포자는 누가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할 것인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 는 아주 어려서, 따라서 꾸밈없이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받고 싶어했을 때 버림 받는 잔인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어느 개인의 신경증 구조는 바로 갈등 고리의 자아 속에 전개되고 형성되고 개화 하는 것인데, 그 갈들은 한편으로는 환경,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이 그 영향력에 대해 반응하는 오직 개인적인 방식에서 유래한다.

- 소외된 의식을 경유한 하얀 살의 추구라는 성적 신화가 더 이상 능동적 이해를 방해하게끔 놔두어서는 안 된다.

- 나의 피부색이 결점으로 느껴져서는 안 된다.

- 세상의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4. 이른바 식민지인의 종속 콤플렉스

파농은 식민지배의 심리학을 연구한 선구자인 정신분석학자 옥타브 마노니의 『식민화의 심리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마노니는 토착민과 식민지배자의 관계를 지배하는 심리 현상을, 식민지배자의 권위(지도자) 콤플렉스와 식민지인의 종속 콤플렉스로 풀어내는데, 파농은 이 자체가 백인 중심의 시각이라고 질타한다.

- 세상에는 린치당하는 불쌍한 자, 고문당하는 불쌍한 자가 없다. 내가 그곳에서 유린당하고 모육당하지 않는 한에는/그러자 개들은 입을 다물었다./에메 세제르

- 마노니씨의 식민화의 심리학

* 중심 개념은 문명인들과 원시인들의 대립이 특수한 상황인 식민지 상황을 창출 한다는 것, 그것은 심리학적 분석만이 위치를 잡아 규정할 수 있는 환상과 오 해 뭉텅이를 출현하게 했다.

* 백인과 흑인 사이의 경제적 장벽은 다른 요인들보다 경쟁에 대한 두려움에 기 인하고, 유럽인 인구의 절반을 이루는 백인 빈민 계층을 보호하여 그들이 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는 욕구에 기인한다.

* 식민지의 착취는 다른 형태의 착취와 혼동되지 않는다. 식민지의 인종주의는 다른 인종주의들과 다르다.

* 피부색과 결부된 열등 콤플렉스는 사실 다른 피부색의 환경 속에서 소수자로 사는 개인들에게서만 관찰된다.

* 식민화의 초기에 각 부족은 저마다 자신의 백인을 갖기를 원했다.

* 모든 민족이 식민화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럴 필요성을 느끼는 자들 만 그렇다.

* 프로스페로 콤플렉스

무의식적 신경증 기질의 집약체로 규정되는 그것은 식민지의 온정주의적 인물 과 딸이 열등한 자의 상상적 강간 시도의 대상이 되었던 인종주의자의 초상을 동시에 그려낸다.

* 식민지배자에게나 프로스페로에게나 다 같이 결여된 것, 그들이 놓친 것은 타 인들이 서로 존중하는 타자들의 세상이다. 식민지 유형은 그 세상에서 떠나 갔 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탓에 그 세상을 내쫓았다. 이 도피는 유아기에 시작되는 지배 욕구와 연결되고 그래서 사회 적응력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했다. 식민지배자가 오직 여행할 생각밖에 없었든, 아니면 요람의 공포나 과거의 참호에서 도망치고 싶었든, 또는 더 뭉뚱그려 말해서 좀 더 젊 은 삶을 바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사람 없는 세상을 바라는 유혹과 타협하는 것이 문제다.

- 착취의 형태는 모두 동일하다. 인간에게 행해지기 때문에.

- 착취 구조를 추상적으로 고려하려는 것은 중대하고 근본적인 문제, 인간을 제자 리에 돌려놓아야하는 문제를 은폐한다.

- 식민지 인종주의는 다른 인종주의들과 다르지 않다.

- 한 민족의 구성원은 누구나 그 민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모든 행위에 책임이 있다.(프랑시스 장송)

- 프랑스는 인종주의적인 나라이다. 나쁜 검둥이라는 신화가 집단무의식을 형성하 기 때문에.

- 식민지인의 열등감은 유럽인의 우월감과 상관관계가 있다. 열등성을 만들어 낸 것은 인종주의자이다.

- 유대인을 만든 것은 반유대주의이다./사르트르

-프란츠 파농의 마노니씨의 저작에 대한 비판

* 마다카스카르인을 그 자신의 관습에 가두어버린 다음, 그의 세계관을 일방적으 로 분석하여 폐쇄회로에 들어 있는 마다가스카르인을 그린 다음, 이 마다가 스카르인은 그의 조상들과 종속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극히 종족적인 특성 을 말한 다음, 저자는 모든 객관성을 무시하고 자기의 결론들을 쌍방의 이해 관계에 적용한다.

* 마노니씨는 마다가스카르인은 유럽인과 함께만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버렸다.

* 마다가스카르인의 종속 콤플렉스는 백인 식민지배자들이 섬에 도착하면서 생겨 났다.

- 흑인은 더 이상 하얀색이 될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 하는 딜레마 앞에 놓여 있지 않아야 하고 존재의 가능성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진정한 갈등의 원천인 사회구조에 대해 취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 흑인의 실제 경험

자신이 흑인임을 자각하게 되는, 하얀 가면이 벗겨지는 체험을 통해 자신의 ‘흑인됨’과 대면하는 흑인을 다룬다. 이때 중요하게 등장하는 개념이 마르티니크 출신 시인 에메 세제르에게서 가져온 ‘네그리튀드N?gritude’이다. 흑인의 고유한 문화적 주체성을 표방하는 네그리튀드에 대해 파농은 그것이 흑인의 인식을 전환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거 회귀성과 아프리카 본질주의와는 분명한 거리를 둔다.

- 식민화된 민족의 세계관에는 모든 존재론적 설명을 막아버리는 어떤 불순, 어떤 결점이 있다.

- 나는 사람이기를, 다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를 원했다.

- 타자가 나를 인정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에 타자가 나를 인정하게 만들기로 했다.

- 유색인 편견/인종과 피부색에 관한 편견/Sir Alan Burns

유색인 편견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인종이 다른 인종에 대해 갖는 비이성 적 증오심일 뿐이다. 강하고 부유한 민족들이 자신들보다 낮다고 보는 민족들에 게 보내는 경멸이고 또 계속 종속되고 흔히는 모욕 받는 이들의 신랄한 원한이 다. 피부색이 인종의 가장 명백한 외적 표시이기 때문에 그 색깔은 사회적이거나 교육적인 성과에 상관없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밝은 피부색의 인 종들이 어두운 피부색의 인종들을 경멸하기에 이르고, 어두운 색 인종들은 그들 에게 부과되었다고 하는 흐릿한 상태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 내가 검둥이의 과거 없이, 검둥이의 미래 없이 내 흑인성을 살리기는 불가능했 다.

6. 검둥이와 정신병리학

흑인 심리에 대한 정신의학적 해부

- 모든 신경증의 기원에는 결정적인 체험이 있다.

- 억압된 사고는 의식 내에서 그것을 대신한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억압되었으니 벗어났다고 믿었던 그 모든 불만감이 거기에 들러붙게 된다.

(무의식 안에서의 체험)

- 모든 사회, 모든 집단에는 공격성의 형태로 비축된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는 수 로, 출구가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한다./ 집단 카타르시스 개념

- 가족 구조는 초자아 안에 내면화되어 있고 정치적 행동에 투여되어 있다./마르쿠 스

- 검둥이들의 우월 콤플렉스, 열등 콤플렉스, 또는 평등의 감정은 의식적인 것이다.

- 공포증: 어떤 대상 또는 더 확장해서 어떤 상황에 대한 불안한 두려움으로 특징 하는 신경증/에나르

- 모든 불안은 어머니의 부재와 연결된 일종의 주관적 불안정에서 기인한다.

두 살 때쯤/사를 오디에

- 사람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대인의 잠재적 소유욕 때문이다.

- 검둥이는 생물학적 위험을 대변한다. 유대인은 지적 위험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영혼처럼 내 신체가 관람객 같은 헛된 자세로 팔짱끼고 있 지 않도록 하시오. 왜냐하면 삶은 구경거리가 아니기에, 고통의 바다가 연극무대 가 아니기 때문에, 절규하는 사람이 춤추는 곰은 아니기에.

- 본능은 내재하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것이고 습관은 획득된 것이다.

- 융은 집단무의식이 물려받은 실제 두뇌 속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집단 무의식은

유전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그저 단순히 특정 집단의 편견, 신화, 집합적 태도

의 총체이다.

융은 본능과 승관을 혼동하고 있다. 실제로 융에 따르면 집단 무의식은 뇌의 구 조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고, 신화와 원형은 해당 종의 항구적인 기억흔적이다.

- 우리는 융의 주장하는 바와 다르게 집단 무의식은 사실, 문화적인 것, 즉 획득 된 것이다.

- 융의 고전 정신 분석을 바라보는 저자의 견해

내가 내 안에서 어떤 괴상한 것, 비난받아 마땅한 것을 발견하면 하나의 해결책 밖에 없다. 그 원인을 타자에게 돌리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그로써 나는 내 균형 을 위태롭게 할 뻔한 긴박한 순환을 끝낸다.

- 흑인에게 투사되는 집단 무의식에 대한 저자의 견해

*앙티유인이 검둥이 공포증인 것은 정상이다. 집단무의식에 의해 앙티유인은 유 럽의 모든 원형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앙티유 검둥이의 아니마는 거의 언제나 백인 여성이다. 마찬가지로 앙티유인의 아니무스는 언제나 백인 남성이다.

*검둥이는 놀랄 만큼 신경증적인 양가감정을 갖는다. 스무 살 즈음에, 집단 무의 식이 어느 정도 사라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의식의 수준으로 귀환하기가 어려워 지는 순간에, 앙티유인은 자신이 오류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앙태유인 이 자신이 검둥이임을 알게 되지만, 일종의 윤리적 변화로 인해, 그것이 사악하 고 무기력하고 불량하고 본능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검둥이라는 집단무의식을 깨 닫는다.

- 모든 개인은 자신의 열등의 계기들, 충동들을 자신이 속한 문화의 산물일 악의 화신에게 전가한다.

-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둘러친 부조리한 드라마를 뛰어넘고, 이도 저도 받아들 일 수 없는 두항을 다 배제하며, 어느 특정한 인간을 가로질러 보편을 지향해야 한다.

- 흑인 문제는 백인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흑인들의 문제로는 풀리지 않는다. 자본 주의 사회, 식민주의 사회, 우연찮게 맞닥뜨린 백인 사회에 의해 수탈당하고 노예 화되고 경멸당하는 흑인의 문제이다.

7. 검둥이와 인정

스스로에게서 배제되고 소외된 주체가 소외를 극복하고 자기 존재를 실현할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다.

A. 검둥이와 아들러

나는 타인의 눈 속에서 감탄을 읽어내고자 하며, 불행히도 타인이 나에게 불쾌

한 반응을 보이면 기 거울을 폄하한다: 정말 멍청하군. 나는 대상 앞에서 벌거벗

으려 하지 않는다. 대상의 개인성과 자유라는 면은 부인된다. 대상은 하나의 도

구이다. 내 주관적 안전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만 한다. 나는 스스로 충만

한 듯한 자세를 취하므로 분열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가 무대에 등장하

는 것은 다만 장식용이다. 주인공은 바로 나다. 환호하든 비난하든, 상관없다. 내

가 중심이다. 타인이 자기 가치를 높이려는 욕망에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려하면,

나는 단칼에 그를 추방하낟.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그자 이야기

는 하지 말라. 나는 대상의 충격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대상과의 접촉은 갈등을

유발한다. 나는 나르시스이며, 타인의 눈에서 나를 만족시켜주는 나의 이미지를

읽고 싶다. 또한 마르티니크에서, 어떤 특정모임에는 윗대가리와 그 윗대가리의

측근들, 그리고 중립적인 자들과 굴복한 자들이 있다. 이 마지막 사람들은 무자

비하게 학살당한다. 이 정글의 온도가 얼마인지 감지할 수 있다. 거기서 빠져 나 갈 방법은 없다.

나, 오직 나뿐이다.

- 마르티니크인들은 안전을 갈망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구를 인정하게 만들고자 한다. 남자답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그들은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그래 보이 기를 원한다. 그들은 저마다 잘 구획된 거리에서 고립되고 메마르고 날이 선 원

자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존재한다. 그들은 저마다 존재하기를 원한다. 그래 보이 기를 원한다.

- 앙티유인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타자를 경유한다. 아들러가 말하는 인류 공동체 의 관정메 따라, 타자가 그의 행위의 최종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자기 가치 부여의 욕구 속에서 이를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타자이기 때문이다.

B. 검둥이와 헤겔

- 인간은 타인이 자기를 인정하게끔 만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타인이 받아 들이 기를 원하는 한에서 인간적일 뿐이다. 그가 타자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한, 그 타자는 여전히 그의 행동의 주제로 남게 된다. 그의 인간적 가치와 인간적 실 재는 이 타자에, 이 타자에 의한 인정에 달려있다. 그의 생의 의미가 농축되는 것 은 이 타자 안에서다.

- 상호적으로 서로를 인정함에 따라 자기를 인정한다.

이 직접성 속에서 자기의식은 단순한 대자적 존재다. 자기 자신의 확실성을 획득 하려면 인정 개념이 통합되어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타자는 우리의 인정을 기다 린다. 보편적 자기의식 속에서 만개하기 위해서다. 자기의식은 저마다 절대성을 추구한다. 삶에 통합되지 않은 최우선 가치로서 인정받고자 한다. 주관적 확실성 에서 객관적 진리로 변모하는 것과 같다.

- 타자와의 대립에 당면하면서 자기의식은 욕망을 경험한다.

정신의 존엄으로 가는 길의 첫 단계다. 자기의식은 목숨을 내걸기를 각오하고 그 에 따라 타자의 물리적 존재를 위험한다. “오직 목숨을 내걸음으로써만, 자유를 지키게 되고, 자기의식의 본질이 존재가 아니라는 것, 거기서 자기의식이 먼저 출 현하는 직접적 양태가 아니라는 것, 또 삶의 확장 속으로 함몰되는 것도 아니라 는 것이 증명된다.

- 목숨을 걸지 않았던 개인은 인격체로는 인정받겠지만, 독립된 자기의식의 인정이 라는 진리에는 이르지 못했다.

- 삶에 대한 긍정, 사랑에 대한 긍정, 관대함에 대한 긍정

- 인간은 또한 하나의 부정이다.

인간 멸시에 대한 부정, 인간의 저열함에 대한 부정, 인간 착취에 대한 부정, 인 간 안에 있는 더욱 인간적인 것, 곧 자유에 대한 부정.

- 인간의 행위는 단순히 반동적이지 않다. 그리고 반동 속에는 언제나 원한이 있 다.

- 인간 세계를 형성하는 근본 가치들을 그 돌고 도는 흐름 속에서도 계속 존중하면 서 인간을 추동적 존재로 이끄는 것, 깊이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려는 자에게는 그것이 어느 무엇보다도 중대한 일이다.

결론에 즈음하여

- 착취. 비참. 굶주림에 맞선 투쟁 같은 것들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실존을 인식할 수 없다.

- 지적 소외는 부르주아 사회의 창조물이다.

- 흑인은 어떤 순간에는 자기 몸 안에 갇혀있다. 그런데 자기의식과 자기 몸에 대 한 의식을 획득한 존재,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에 도달한 존재에게, 몸은 더 이상 의식을 구축하는 원인이 아니라 의식의 대상이 된다.

- 내 타고난 소명을 유색인 민족들의 과거에서 도출해서는 안 된다.

- 나는 부당하게 무시당한 검둥이 문명을 소생시키는데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 는 어떤 과거라 할지라도 그 과거로 나를 만들지는 않겠다. 나는 내 현재와 내 미래를 대가로 치르고 내 과거를 노래하고 싶지 않다.

- 검둥이의 사명은 없다. 백인의 짐도 없다.

- 타자에게 사람다운 처신을 요구할 권리를 인정하자.

- 내 선택을 통해 내 자유를 버리지 않을 의무를 이행하자.

- 진정한 도약은 발명을 존재 안에 도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내가 나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나를 끊임없이 창조한다.

- 나는 내가 그것을 넘어서는 한에서 존재와 연대한다.

- 인간을 붙박아두려 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운명은 놓여나는 것이다.

- 역사의 밀도는 내 어떠한 행위도 결정해주지 않는다.

- 내가 나 자신의 토대다.

- 내가 내 자유의 순환을 시작하는 것은 내 역사적, 도구적 여건을 넘어설 때다.

- 결코 도구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기를. 인간이 인간을, 말하자면 자아가 타자를 노예화하는 일을 그만 두기를. 인간이 어대에 있든, 내가 그 인간을 찾고 원하도 록 허락되기를.

- 진정한 소통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각자의 선조들이 남긴 비인간적 목

소리에서 멀어져야한다. 긍정적인 목소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자유를 위한 탈 소외의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그 실존의 초입에서 언제나 얼굴이 붉어지고, 우 연 속에 잠기게 되어 있다. 인간의 불행은 어린아이였었다는 데 있다.

- 사람들이 인간 세상의 이상적 실존 조건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자기 회복과 허

물벗기의 노력을 통해서,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자유를 통해서이다.

- 오 나의 몸이여, 내가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를!

장송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초판 서문

- 혁명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혁명의 기회는 역사의 리듬 에 서슴없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자, 진퇴양난에 빠진 세계, 자신의 운명이 된 이 세계에서 할 일은 오직 다가오는 인류의 승리를 예비하는 것뿐임을 당당하게 받 아 들이는 자에게만 있다.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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