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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5. 12. 13.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내 심장 밑에서 푸른 파도가 불쑥 솟구치고,

햇빛이 쏟아지는 돗자리 위에 반라의 몸으로 무릎을 꿇은 내 리비에라의 연인이 무

릎을 축으로 빙글 돌아앉으면서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65쪽)

 

 

                           

 

 

  이제 세장 속에 갇힌 찌르레기처럼 불쌍한 짐승 험버트는

꿈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지닌  님펫 롤리타를 향한 사랑의 광기 속으로 걸어간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17쪽)

 

  이 사랑의 광기는 결국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455쪽)

 

 

                             

 

 

 롤리타를 짓밟고 뺏어간 퀼티를 죽임으로

(퀼티Quilty는 죄의식Guilty, 즉 퀼티를 험버트의 영혼의 죄의식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그 대가를 치르며 그의 마지막 고백을 만든다.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더 생생한 롤리타였다.

그녀와 겹쳐지고 그녀를 에워싸면서 그녀와 나 사이에 두둥실 떠 있는 롤리타,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 아예 생명도 없는 - 롤리타였다."(103쪽)

 

  

 

                                           

 

  소아성애자로서의 주인공의 변을 들어보고자하는 호기심으로 ,

아니  내가 선호하는 작가들의 추천으로 고른 책 "롤리타"

검정과 분홍색의 도발적인 조화가 시선을 끄는  책표지, 

한 번 쯤 만져보고 싶을만큼의 충동을 자극하는 드러난 소녀의 다리를 반년 가까이 눈으로만 감상하다

드디어 읽기 시작,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를

 실감케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서사 위주로 소설을 읽는 편이었다면 롤리타는 서사보다는 문체,

언어를 통해 예술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게 해 준 작품.

 

"예술과 언어에 대한 소설로, 그것의 완벽함을보여준다."- 리디아 키슬링

 

  다음 다음 장을 넘기면서도 전 장의 표현들을 혀끝으로 음미케 하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험버트의 표현대로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롤리타는

눈에서 혀끝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무한확장되는 가능성을 마음껏 즐기게 했다.

 

  평론가 신형철의 언급처럼

인간 내면의 짐승을 이해하고 결국에 공감하며 연민을 이끌어 낸다고나 할까... <아래 문헌참조>

 

또한 롤리타와 험버트, 퀼트라는  세 욕망이 빚어내는 열기와, 폭발, 파멸에 이르는 과정이

시적 언어와 은유로 다음 장의 설렘을 유발하며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의 장엄함에 맞물려

원초적인 욕망의 심연에 까지 이르도록하는 흡인력은 입때껏 읽은 소설들의 또 다른 영역의 확장이었다.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그런 책은 흔치 않다."(506쪽)

 

라고 작가 나보코프는 세간의 비평적인 시선을 일축한다.

 

  8월의 강렬함을 잃은 햇빛은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햇빛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교모를 푹 눌러쓴  남자 아이가

녹슨 자전거를 끌고 황톳길을 터덜터덜 걸어왔다.

뿌연 먼지와 함께 그의 어깨와 목 위로 자잘한 햇빛 알갱이들이

옥구슬처럼 아롱지며 한 알 두 알 사방으로 튕겨져 흩어졌다.  

나무 그늘에 숨어 그를 바라다 보고있던 여자 아이는  

자신의 봉긋 솟은 양가슴 사이에 가만 손을 얹으며 걸어오는 남자아이를  향해 눈을 가늘게 오므렸다.

남자 아이의 자전거에 힘겹게 매달린 책가방위로

분홍과 자줏빛 코스모스가 한아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조용히, 느리게 깊은 숨을 토해내더니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절이는지 한 쪽 발을 쑥 뻗었다.

검은 운동화에 흰 양말을 신은 미끈한 다리의 작은 솜털들이 햇빛을 받자마자 은빛 물결처럼 빛났다.

도레미 파파파, 심술궂은 바람 한줄기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좁혀지는 거리를 쏜살같이 달렸다.

순간 남자 아이의 교모가 벚겨지고  놀란 아이는 자전거의 핸들을  꺽으며 비틀거렸다.

이를 숨어보던 여자아이가 폴싹 일어나며 뛰어나가려는 순간 그만 무엇에 걸린 듯 멈칫거렸다.

 비틀거리던 남자아이가 버거운 핸들을 부치며 몸을 가눴다.

내동이쳐진 자전거 위로 가방 속에서 쏟아져 나온 코스모스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책을 덮었을 때

잃어버린, 이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내 유년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만 존재하는 하여 무채색의 도화지위에 마음껏 그림을 그렸던 시절,

다시 한 번 그런 사랑이 나를 선택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

 

주제①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

 

[출처] [신형철] 우리는 동물이면서 왜 짐승이 아닌가 |작성자 단비

문학’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성과만을 중시하는 요즘, 문학의 가치에 회의를 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 문학은 정말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견주어 무용하고 열등한 것일까?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인문교양특강’에서

‘우리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가치를 의심하는 지금,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를 찾고 싶었습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것이 할 수 있다면 제치고 넘기면서 오로지 문학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는 거죠.”

 

‘내면의 짐승’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문학이 폄하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신 평론가는 강의에 앞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 하나를 소개했다.

브룩스는 “노동시장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세상은 점점 터프해지기 때문에 인문학 따위를 공부할 여유가 없다”면서

“그럼에도 인문학이 필요한 네 가지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 읽고 쓰는 능력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공의 기본이기 때문이며,

둘째, 감정 언어에 능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평범한 MP3 플레이어가 아닌 감성적인 ‘아이팟’을 만든다고 보았다.

셋째, 아날로지(analogy) 곧 유사성을 찾는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현명한 정치가 솔론이나 자기애에 빠진 미소년 나르시스를 알아야 직장 상사를

솔론 혹은 나르시스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룩스는 인문학 역시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신 평론가는 이런 평가에 대해 아쉬워했다.

 

대신 인간 ‘내면의 짐승(inner beast)’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네 번째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인간 안의 짐승은 어떨 때는 우리를 고양시키다가도 다른 때는 추락시키기도 하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트럭에 깔렸을 때 어머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무거운 차를 들어올리기도 하며,

전쟁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봤을 때 이성적으로는 구하러 가서 안 될 상황임에도 감정에 이끌려 몸을 내던지기도 한다.

이렇듯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인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신 평론가는 “인간 내면의 짐승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에 잡아 먹힐 수 있다”며

“인문학은 그 짐승이 과연 무엇인지 개념화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인간 내면의 짐승은 본능, 충동, 욕망, 사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개념이지만 본능, 충동, 욕망, 사랑 순으로 늘어놓아 보면 왼쪽으로 갈수록 ‘동물적’이며

오른쪽으로 갈수록 ‘인간적’임을 알 수 있다.

신 평론가는 “네 마리 짐승을 이해하고, 구별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여자’ ‘나이든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

 

가장 동물적인 본능(instinct)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이 심리로 장착된 정념이다.

환경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우열한 것은 살아남고 열등한 것은 사라진다는 ’진화심리학‘의 기본 전제가 그대로 적용된다. 컴퓨터에 기본 프로그램이 깔려 나오듯 본능이란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갖게 되는 기질이다.   

 

신 평론가는 남자들이 어리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들은 나이 많고 경제력 있는 남자를 선호하는 이유를 예로 들며 본능을 설명했다.

원시 시대 남자들이 반드시 어린 여자를 좋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린 여자일수록 건강한 아이가 나온다는 것과 종적으로 우월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어린 여자가 좋다는 기질을 심리적으로 장착했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시시대 여자들은 굳이 나이 든 남자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이 많은 남자일수록 사회적으로 안정성 있고,

내가 낳은 아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 준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기질을 획득했다.

남녀 모두 지금은 왜 그렇게 됐는지 이유는 망각하고 단지 심리적 본능만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능과 비슷해 보이는 충동(drive)은 무엇일까.

본능과 충동은 각각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본능은 ‘남들이 다 하고 있어서 나도 그것을 하고 있다’인 반면,

충동은 ‘나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하고 있다’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본능은 인간이면 누구나 깔고 나오는 프로그램이지만 충동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가 충동이라는 짐승에 사로잡히는 순간 내가 아닌 충동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이죠.”

 

1차보다 2,3차가 더 즐거운 ‘술꾼들’의 충동

 

충동은 내면의 어떤 힘이 인간 주체를 어떤 상태로 몰고 가는 것(drive)을 의미하는 정념이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드는 충동을 ‘삶 충동(eros)’과 ‘죽음 충동(thanatos)’으로 구분했다.

신 평론가는 “프로이드가 생명을 지닌 유기체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연장하려는 충동과 함께

소멸과 죽음을 추구하는 내면의 힘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아낸 것은 위대한 발견”이라고 평했다.

 

그리고선 학생들에게 ‘술을 좋아하는지’ 물으며 충동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대게 술이나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좋아한다.

흔히 ‘술꾼’들은 1차보다 2차, 2차보다 3차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술에 취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면 사람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이지만 거의 ‘개’나 ‘시체’ 수준에 가까워진다.

술을 포함해 어떤 것에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죽음 충동’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죽음 충동은 갑자기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로서 기계인 ‘나’를 돌리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에 이를 무의식적으로 정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충동’이라는 정념을 잘 형상화한 캐릭터가 뱀파이어나 늑대인간, 좀비 같은 ‘괴물’이다.

특히 뱀파이어를 보면, 이들이 사람의 피를 먹는 이유는 특별히 맛있어서가 아니다.

뱀파이어는 피를 먹고 싶지 않지만,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먹고는 괴로워하고 고뇌하는 존재다.

이러한 '충동의 캐릭터‘가 탄생해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신 평론가는

“일반 사람 내면에도 ’충동‘이 존재한다는 직관적 인식에서 비롯되며,

그것이 극단화한 캐릭터로 표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기’가 있을 때 더 불타오르는 사랑의 ‘욕망’

 

반면 좀 더 인간적인 쪽에 가까운 내면의 짐승인 ‘욕망(desire)'은 무엇일까?

욕망 역시 “나는 이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하고 싶다”로 요약할 수 있다.

욕망의 핵심은 ’금지‘에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는 것이다.

금지라는 단어가 너무 강하면 ’결핍‘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된다.

욕망이란 결핍되었을 때만 강하게 발동되는 인간의 기질로 충동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자주 느끼는 익숙한 정념이다.  

 

  “예컨대 어떤 책이 필요한데 이미 절판된 상태여서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책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그 책을 손에 쥐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장 그 책이 없으면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온 동네를 다니며 찾아 다닙니다.

우연히 한 헌책방에서 그 책을 발견해 기쁜 마음으로 사서 돌아오지만, 그저 책장에 꽂아 놓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순간 더 이상 나에게 금지나 결핍된 것이 아니며, 욕망 또한 사라지는 것입니다.”

 

신 평론가는 “욕망이라는 메커니즘에 필수적으로 ‘금지’가 포함돼 있음을 알면,

왜 ‘사랑 이야기’에는 그토록 삼각관계가 많은지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랑하는 주체와 대상 단 둘만 있으면 가열되는 것이 없지만 ‘금지’라는 제3항이 생겨 욕망이 들어오면서 사랑은 극렬해진다.

예를 들어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친한 친구로 지내는데,

한 남자가 어느 날부터 여자와 사귀려는 태세를 보이는 순간 다른 남자의 기분은 묘해진다.

한 번도 여자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친구에게 여자를 뺏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알지 못하는 순간 금기는 욕망이 되어 사랑을 뜨겁게 만든다.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문 간 원수이므로 사랑해선 안 된다고 금지하기에 두 주인공의 사랑은 더 뜨거워졌고,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과 로즈 사이에는 계급 격차뿐만 아니라 로즈의 약혼자라는 장애물이 있기에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최근 영화 <은교> 역시 노인에게 금기된 젊은 여인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이적요의 사랑이 싹트는 경우다.

한국의 대표적 단편 소설 김승옥의 <무진기행> 역시 대표적인 욕망의 서사로 손꼽힌다.

잘 나가는 제약회사 전무 윤희중이 고향 무진에 내려와 하인숙과 짧은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리는 것은

욕망의 원칙에 따른 지극히 합리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욕망의 서사’와 ‘충동의 서사’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욕망에서 시작해 충동으로 흐르는 서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신 평론가는 그 중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깽>과 소설을 영화화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예로 들며 풀이했다.

 

<테레즈 라깽>에는 여주인공 ‘테레즈’와 그녀의 남편 ‘까미유’가 있다.

카미유는 왜소하고 무기력한 남성인 반면 테레즈는 야생적이고 욕망으로 가득한 여인으로 부부의 관계는 지극히 권태롭다.

둘 사이에 카미유 친구 ‘로랑’이 나타나면서 ‘욕망의 서사’가 시작된다.

테레즈와 로랑에게 카미유라는 ‘금지’가 있기에 둘은 금방 불타오르지만,

금지를 불편하게 여긴 두 사람이 카미유를 죽이며 사랑은 차갑게 식는다.

금지가 사라지는 순간 ‘충동의 서사’로 넘어가며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 남게 되는 것이다.

 

영화 <박쥐>는 소설의 서사를 몸통으로 삼고 전•후반부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덧댄 모양이다.

태주(테레즈)가 ‘유부녀’라는 금기에 상현(로랑)이 여자를 취해선 안 되는 ‘신부’이자 피를 필요로 하는

충동의 상징 ‘뱀파이어’라는 두 가지 금기가 추가돼 있다.

출간된 지 140년이 넘은 작품 <테레즈 라깽>을 지금 읽어도 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신 평론가는 “당시(1867년) 풍속보다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 내면의 감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우리는 모두 내면에 충동과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닌 수용할 만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정의해도 틀릴 수밖에 없는 개념 ‘사랑’

 

마지막으로 가장 ‘인간적’인 정념인 ‘사랑(love)'은 어떻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신 평론가는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어떻게 정의해도 오답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사랑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실 본능이나 충동, 욕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도 했다.

 

“예수님의 희생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선행 역시 본받을 만한 사랑이죠.

쿠바 해방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 체 게바라의 헌신 역시 인류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행동이 혹시 ‘충동’이라는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아니었는지,

사실상 ‘인간적’인 것과 가장 먼 상태인 것은 아닌지와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거죠.”

 

‘문학’이라는 것은 이렇듯 본능, 충동, 욕망, 사랑 등과 같은 인간의 정념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대체 이런 것들을 탐구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인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을 꼽으라는 작가 대상 설문조사에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1위로 꼽혔다.

5위 안에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 <마담 보바리>는 유부녀가 바람피우다 자살하는 내용이며, \

<롤리타>는 10대 소녀를 사랑한 중년 남성 이야기다. 이런 소설들이 세계 문학사에서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본능, 충동, 욕망, 사랑이라는 감정을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를 이해하려면 1천 쪽이 필요

 

세계에는 사법적 판단, 실용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판단기준이 존재한다.

몇 가지 기준만 가지고 인간을 손쉽게 판단하고 넘어간다면 그 이해는 피상적일 수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닐 수도 있다.

신 평론가는 “만일 사법적, 도덕적 판단기준을 <안나 카레니나> <롤리타> 등 인물에 들이댄다면

그들은 ‘불법이나 악’으로 분류될 것”이라면서 “인간 내면의 진실은 그런 기준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문학은 이상적 인간을 그리거나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당위적으로 무엇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주는 거죠.

그 어떤 불완전한 기준으로 난도질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문학이 필요합니다.

세간의 숱한 판단들이 무력해지는 지점에서 문학은 비로소 ‘문학적 판단’을 시작합니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3권짜리 두꺼운 소설을 단지 ‘유부녀가 바람피우다 죽은 이야기’라고 짧게 규정지은 뒤

‘불륜은 나쁜 것’이라는 교훈을 얻고 끝낸다면 이는 다분히 ‘비문학적 태도’다.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불륜’을 나쁘다고 못 박을 뿐, 모든 불륜에는 그 안에 나름대로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학적 태도’다.

신 평론가는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물리학자가 지구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며

“그것을 아는 사람이 인문학적으로 겸허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000쪽이 넘는 분량이 필요하며,

그것을 다 읽었을 때만 그 여인의 내면을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다르게 해부하는 작업, ‘문학’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다.

그것을 읽지 않는다면 인간은 일반적, 보편적인 것만을 믿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은 존재다.

신 평론가는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는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하고 이해되는 선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가 전날 짜놓은 양탄자를 밤을 새워 풀어헤치는 것”이라고 정의했듯,

문학은 일반론이나 보편적 명제를 만들어 낼 때마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고 해부하는 작업인 것이다.

 

“인간 내면의 충동, 욕망 같은 것을 과학적 데이터로 환원해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런 학문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봤자 완벽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예외와 변칙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과학 같은 학문에서는 보편적인 주장을 뒤집을 수 없을 경우 예외는 그냥 무시됩니다.

하지만 인문학에서는 모든 예외와 변칙을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100명 중 90명이 오른쪽으로 가는데 10명이 왼쪽에 갈 때,

당신들은 왜 왼쪽에 가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죠.

10명에게도 공통 규칙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10명 각각이 왼쪽으로 가려는 이유를 밝혀내려는 것이 ‘문학’입니다.

 문학은 철저히 ‘단독적’이며 ‘개인적’인 것이죠.”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문학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문학 작품을 읽고 스스로 가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문학에 대한 의문의 정답은 역설적이게도 문학 ‘안’에 있다.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