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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나의 첫 이별식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6. 4. 5.

<나의 첫 이별식 >


   60년대 중, 후반쯤이었을까? 까닭 모르게 성숙했던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사는 마을이 아닌 그 어딘 가 신세계를 꿈꾸었던 것 같다. 아마 그 당시는 20여리 밖에 되지 않았던 군산이라는 도시가 내 꿈의 세계였을지도. 고작 하루 두, 세 차례였지만 상평역에 기차가 도착할 때쯤엔 난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통학 기차였으니까 꽤 이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 언니들과 교복을 입은 오빠들은 차가 도착하기 전, 일찌감치 역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피웠다. 나문안, 서퍼멀, 옥정리, 개그멀, 생계골, 한절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오봉이나 월하산. 신평에서 새벽부터 수선을 피우며 달려왔을 학생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어디 학생들뿐인가? 마늘, 양파, 상추, 미나리 같은 푸성귀를 팔러가는 동네 아주머니들은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든 보따리를 가지고 헐레벌떡 차 시간에 맞춰 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달려왔다. 지금 기억으로는 여객차량 2칸 정도에 화물칸이 하나 더 있었다.

   주로 군산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은  여객칸에 탔지만 우리 엄마처럼 보따리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들은 화물칸의 승객이 되었다. 짐작컨대 여객칸과 화물칸의 요금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제일 크고 무거운 보따리는 머리에 이고, 양 손에는 작은 푸성귀 보따리를 든 동네 아주머니들은 기술적으로 화물칸에 올랐다. 먼저 머리에 인 보따리를 화물칸으로 던져 놓는다. 화물칸에 던져진 보따리는 누군가에 의해 안으로 끌려가고 아주머니들은 양 손에 있던 보따리를 하나씩 화물칸으로 밀어 넣는다. 그 다음 차례는 보따리의 주인들이 올라 탈 차례이다. 순서에 맞춰 화물칸에서 또 누군가 손을 내민다. 아주머니들은 서슴없이 내민 손을 덥석 잡고 발판을 의지해 힘겹게 화물칸 안으로 진입한다. 때론 몸집이 큰 아주머니는 꼭 누군가에 의해 엉덩이가 받쳐지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걸쭉한 농이 오가며 한바탕 화물칸 주변으로 웃음꽃이 피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아주머니들이 다 올라탄 후 그 다음이 내 차례였지만 내 손은 화물차의 입구에 닿지 않았고 화물차에 탄 엄마는 타려고 버둥거리는 나를 사정없이 떼어 놓으며 나무랐을 것이다. 이제 상평역 승강장엔 역무원 아저씨와  나만 남게 된다.

   승강장을 확인한 역무원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불고 손에 든 깃발을 올렸다 내리면 기차는 서서히 발동을 걸며 출발한다. 떠나가는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일곱 살밖에 안되었던 나는 징징 눈물을 짠다. 소매 끝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보면 기차가 내 눈동자 속에 아른대다  뒤 꽁무니를 보이며 곧 멀리로 사라진다. 꼭 그 순간에 화물차 칸에서 얼굴을 삐죽 내민 엄마가 어서가라는 손짓을 하며 뭔가 큰 소리로 외쳐댄다.

  엄마와의 그 이별식은 그렇게 내 무의식 속에 일종의 트라우마로써 머물게 되는 순간이 되었다.






옥구선

옥구선은 UN(미군)의 군산비행장에 항공유등 보급품 수송 목적의 군사적 철도로 미군차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1952년 5월 20일 공사가 시작된 옥구선은 군산과 옥구를 잇는 11.8km의 노선으로 1953년 2월 25일 완공되었다. 이후 옥구읍 어은리에 옥구역(1953년 11월1일)이 상평리 부근에는 상평역(1955년 8월 1일)이 신설되고 여객열차가 운영된다. 1970년 6월 11일 여객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군산 비행장 군 화물 소송 철도로만 사용되다가2006년 11월 15일 이후로 열차 운행이 중단되면서 폐선에 가까운 상태로 방치된다. 그후 2011년 4월 1일 미군에 군납화물을 담당하는 (주)하이만에 의해 부정기적으로나마 열차운행이 재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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