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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황제를 위한 애도 1.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5. 4. 3.

<황제를 위한 애도>

 

 

  가로등을 확인하며 도착한 주소지는 언덕의 제일 끝집이었다. 산기슭과 맞닿아 있었으며 마지막 집과의 거리가 꽤 멀었다. 벽돌로 쌓아올린 굴뚝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헐거운 대문 틈사이로 집 전체가 드러나 보였다. 아담하게 지어진 일본식 단층집이었다. 퇴색된 회벽과 낡은 목재의 조화가 기품을 자아냈다. 덧 댄 창문들이 벽을 장식했고 대문사이로 보이는 긴 마루를 따라 놓여 진 댓돌이 할머니와 살았던 옛 시골집을 연상시켰다. 넓다싶은 마당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만 남겨두고 키 높은 잡풀로 빼곡 들어차 있었다. 드문드문 민들레 꽃씨들이 사방에 날렸다.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돌 위에는 노란 송화 가루가 가득했다. 집의 외관에 비해 전혀 손질되지 않은 마당을 보니 ‘가족같이 지낼 분’이라는 낱말이 어쩐지 허세처럼 느껴졌다.

숨을 고르며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남자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법한 남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얀 셔츠에 어울리는 말끔한 얼굴위의 검은 뿔테, 훤칠한 키에 슬림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진바지를 입은 모습은 30초반을 가늠케 했다. 집과 남자, 절묘한 조화였다.

내 삶과 어울리지 않는 영역을 기웃거리는 것에 습관처럼 거부감이 일었다. 단지 햇빛이 잘 들고 정말 가족 같이 지낼 수 있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광고에 명시했듯 여자분 두 분이 더 있습니다. 이 시간엔 모두 직장에 있는 관계로.”

남자가 다소 사변적인 투로 빠르게 덧붙였다.

“조건에 부합되시는 분 맞으시죠?”

남자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허스키한 목소리가 친근했다. 하루에도 수 십 명의 목소리들과 씨름해 왔으므로 익숙한 그 누구일 것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또 거짓말은 아니었다.

"금요일 밤의 만찬은?"

남자는 확신이 필요한지 한 번 더 물었다.

"출장만 가지 않는 다면요."

사실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밤의 만찬을 함께 해야 한다는 재미있는 조건은 꽤 까다롭게도 들렸지만 호기심을 끌었다.

“다행입니다. 일단은 들어오셔서 집 구경을 하시죠?”

나는 쭈뼛거리며 남자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실 이곳까지 찾아든 것은 정보지에서 보았던 단 한 구절과 오백이라는 보증금 때문이었다. ‘가족같이 지낼 분.’ 상투적인 말이었지만 ‘가족’이라는 낱말이 나를 자극했다. 참 아득했다. 가출을 감행한 후 생각조차 하기 싫은 낱말이었는데. ‘가족 같이 지낼 분’ 이라는 문구가 얼마나 달콤한 유혹이었던지. 결국 가족이란 낱말을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때 비로소 실감했다. 며칠을 ‘가족 같이 지낼 분’이라는 광고 문구를 지우기 위해 부지런히 이집 저집을 드나들었지만 결국 ‘가족 같이 지낼 분’이라는 낱말이 머리에서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번 살아보지, 뭐. 가족같이.’라는 심정으로 이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을 때의 설렘이란.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면서도 무엇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이 빨라졌다.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놈들이 인사하죠?”

뜬금없는 남자의 말은 미적대는 나를 붙잡았다.

“거룩한 생명들이잖아요. 꽃이 아닌 풀은 없죠. 우주 삼라만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퍼뜩 ‘황제’라는 닉네임으로 추리소설을 낭독해 주는 팟캐스트의 운영자가 떠올랐다.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장면과 파격적인 섹스 묘사를 낭독하는 목소리는 내 욕망과 충동을 잠재우는 은밀한 진통제였다. 도저히 듣기를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운영자는 그가 낭독하는 어귀들을 순화시키는 의도로 곧잘 성경과 불교 경전 등을 인용했다. 팟캐스트의 목소리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라니…….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참 멋지네요.”

집 앞쪽으로 시선을 두며 태연한 척 대꾸를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맛에 이 집에 산지 어연 10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 남자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내 시선을 따랐다.

“특히나 밤이 더 좋죠.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게 화답을 하듯 하나둘 불빛이 켜지면 세상은 더 이상 외롭다거나, 비루하다거나, 쌍스럽지 않죠. 뭐랄까,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보이는 세상은 시적으로 변하고 우리에게 낮 동안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를 소화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선물하죠.”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평범치 않았다. 바람결에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에 감겼다. 어느새 나는 그 목소리의 반향을 즐기고 있었다. 이상한 끌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남자와 집을 공유하기로 한 결심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외롭다거나, 비루하다거나, 쌍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낱말에서 풍기는 애매한 메타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외롭다거나 비루하다거나 쌍스럽지 않은 내 내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것 없이는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내 인생에 대한 방어기제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형태로 내 안에서 무한 확장되고 있었다.

“바흐를 좋아하세요?”

뜬금없는 남자의 물음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의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가 편안치 않았다.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은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쫒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콧날이 무척 날카로워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묻고 싶은 충동이 부끄러워 나는 서둘러 남자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수작 걸지 마시죠.’라고 가볍게 넘겼을 것이다. 오랜만에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자, 이제 결정했지요?”

갑자기 호탕하게 웃으며 남자가 물었다.

“고단수군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입니다. 내 낚싯밥이 시원치 않아서 내심 걱정되었는데.”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는 듯 남자가 앞장섰다.

“제가 아직은 좀 순진해서.”

가볍게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며 나는 남자의 뒤를 따랐다. 하얀 양말에 지나칠 만큼 깨끗한 고무신을 신은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었다.

“전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야 돌아오죠. 주말엔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 한 달에 보름정도 출장을 가게 되니깐. 이 집에선 제 존재감은 거의 없는 셈이죠.”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내 뱉었다.

“아, 네.”

나는 무엇인가 대꾸를 해야 했다. 할 말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이 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초조감이 몰려왔다.

“조건은 광고 문구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목표를 완성했다는 확신이 묻어난 말투가 거슬렸지만, 이미 이 집으로 짐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짐이라야 옷가지와 책 몇 권이 전부였지만.

남자를 따라 댓돌에 올라 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거실의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감탄사를 내지를 뻔했다. 양 벽 높은 천장까지 이어진 사선모양의 책꽂이 위에 수 천 권의 책들이 빼곡 들어차 있었다. 한 쪽 벽면에는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가 위엄을 갖췄고 반대 방향으로는 잡지에서 봤을 법한 대형 스피커가 시선을 압도했다. 스피커 옆으로 족히 몇 천 장은 됨직한 엘피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아, 집주인겁니다.”

놀란 나를 눈치 챈 것인지, 지레 짐작한 것인지, 남자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내 뱉었다.

“아, 네.”

남자가 긴 복도로 나를 안내했다. 밖에서 보기보단 안의 규모가 꽤 컸다. 복도의 길이로 보아 족히 7개나 8개의 방이 배치되어 있음직했다.

남자는 내가 기거할 방이라며 복도의 끝에 배치된 방문을 열었다. 동향 탓인지 방안은 꽤 어두웠다. 앞쪽으로 녹음 짙은 산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지하 옹색한 원룸을 벗어나 맘껏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이 방이 맘에 쏙 들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천장에서 새어드는 햇빛이었다. 하늘을 유감없이 바라볼 수 있는 천창이 있다니. 내 온 몸의 근육이 서서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차차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주인은 아닙니다. 친구 부부가 유학가면서 물려주고 간 덕분에. 집 관리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내 뱉으며 남자가 함께 지켜야할 간단한 몇 가지 규칙을 더 나열했다.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중으로 짐을 가져와도 될까요?”

한 키 높아진 내 목소리엔 설렘이 요동쳤다.

“사실은 내일 오후엔 출장을 가야해서…….”

“아, 여행사에 다니신다고 하셨죠?”

남자는 재빠르게 알은 체를 했다.

“제가 무얼 도와드려야 될까요?”

“아니에요. 짐이 적어서.”

사실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 집에 살면 알게 되겠지만.

그 즈음의 나는 최악이었다. 하루하루를 그저 인내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내 한계를 느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갈 곳이 없었다. 가출 후의 참혹했던 시절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시절, 밤낮으로 알바를 하며 겨우 마련했던 지하 원룸의 전셋돈. 그 전셋돈마저 대출금 상환에 써버리고 내 수중에 남아 있던 오백이 이사할 집의 보증금과 딱 맞아 떨어졌다. 거기에 앞으로 8년을 내 월급의 3분지 1을 나머지 대출금 상환에 소비해야한다니.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다고, ‘내일이 희망이다.’라고 나 자신을 달래고는 있었지만, 탈출구 없는 내일이 두려웠다. 이러다 자살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우울증을 동반했다. 이제 겨우 30인데. 세상은 나와 별개로 잘도 굴러가는데. 무엇인가를 깨트려 파괴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때론 무섭기조차 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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