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7.
긴 침묵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를 무리들과 몇 발자국 떨어져 나는 K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윽고 무리의 선두는 삼거리 상회를 지나 철로와 나란히 걷더니 동골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나와 K 또한 무리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그들을 뒤따랐다.
동골 입구로 가는 쪽엔 비록 지금은 남의 것이 되었지만 오래전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던 300평쯤 되는 밭이 하나 있었다. 밭 중간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었는데 부모님은 샘을 메우지 않고 졸졸 흐르도록 고랑을 만들어 두었다. 간혹 심한 가뭄이 있을 때마다 그 샘은 주변의 마른 논과 밭에 물을 제공하며 요긴하게 쓰였다.
샘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와 집 한 채가 조립되고 있었다. 마치 레고 조각을 맞추듯 기중기에 실린 조각품들이 하나 둘 제 자리를 찾으며 그럴 듯한 위용을 드러냈다. 나는 K의 팔을 잡으며 잠시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꿈으로 간직해왔던 것이 와해되는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햇빛이 잘 드는 남향인데다가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앞쪽으로는 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시세보다 비싼 땅이다.”
시세보다 비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를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그 땅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좋은 집터로서 손색이 없구나.”
그 순간에 나는 언젠가 그곳에 부모님을 위한 집 한 채를 지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더 이상 부모님의 땅도 내 땅도 아닌 곳에 내가 꿈꾸던 집 한 채가 들어서다니. 잠재되어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싸해왔다.
K가 내 팔을 끌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기에 K의 팔을 뿌리치지 않았다. 무리들은 한 참 앞서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잡기위해 나와 K는 지름길로 논두렁을 택했다. 막 경칩을 지난 시점이라 논두렁 곳곳은 질펀했다.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 신발을 털어대며 K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논두렁을 걷는다는 것이 무리라며 K는 다시 무리가 지나간 길 쪽으로 방향을 틀며 투덜댔다.
이제 앞서가는 무리의 뒤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감쪽같이 사라진 그들에 대한 관심도 보이지 않고 K가 물었다.
“우리 선산 옆쪽 새터목에 그럴싸한 전원주택이 들어선다는 데 한 번 가볼까?”
“그러게.”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을 했지만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는 사라진 무리들이 궁금했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고 또 우리는 왜 그들을 뒤따라가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그녀를 따라 이번엔 강둑을 걸었다. 진흙이 들러붙은 운동화가 무거웠다.
K의 선산 옆으로 이제 막 아름드리 기둥이 세워지고 있는 현장이 보였다. 2층 가옥을 지으려 하는지 기둥위로 단을 쌓고 있었다. K는 걸음을 빨리해 훨씬 앞서갔다. 나는 K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난 좀 쉬어야겠어. 이따 봐.”
대답도 듣지 않고 나는 K의 선산 언덕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라진 무리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했다. 한편으론 극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따뜻한 햇볕이 온 몸을 감싸는 기운에 몰려 나는 잔디에 몸을 눕혔다. 멀리서 K가 나를 향해 무엇인가 말하는 소리가 가물가물 들렸다. 졸음에 겨워 귓속으로 윙윙대는 소리를 물리치며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