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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몽상 4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5. 3. 9.

몽상 4.

 

“나는 내 필요와 능력에 따라 끊임없이 그를 만들어 내고 또 만들어 낸다. 그 사람은 내가 기다리는 거기에서 내가 이미 만들어 낸 바로 거기에서 온다. 그리하여 만약 그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환각한다. 기다림은 정신 착란이다. 전화가 또 올린다. 나는 전화가 울릴 때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그 사람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수화기를 든다. 나는 그 삶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듯하고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나 이내 나를 정신착란에서 깨어나게 한 그 훼방꾼에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는다. 이렇듯 찻집에 들어서는 사람들도 그 윤곽이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처음엔 모두 그 사람으로 인지된다.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못 버린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던 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롤랑바르트/사랑의 단상 중에서>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도착한 교실엔 벌써 수강생들로 빼곡 들어차 있었다. 꼭 개학날 초등학교 교실 같았다. 이곳저곳에서 쉴 새 없이 주구장창  누군가는 웃어댔고 누군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교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빈자리를 찾지 못해 겨우 남아있는 연단 바로 앞자리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숨을 돌리려는 찰라 앞쪽 문이 열리고 남자가 하나 들어와 교단 앞에 섰다. 검게 그을렸지만 단아한 개량한복을 입은 모습이 당당해 보였다. 그의 한 손엔 바구니 하나가 들려져 있었고 야채들이 가득 차 있었다. 주로 잎채소였고 물기가 보이는 것으로 얼마나 신선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교실 좌우에 번갈아 시선을 두었다 거뒀다. 도떼기시장 같았던 교실은 일순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요해졌다.

  “자자,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몇몇은 키득거렸고 왜바람에 일렁이는 초여름 보릿대처럼 교실은 또 술렁거렸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 가는 교수님의 강연을 들어보면 되시구요.”

  남자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순전히 자신이 들고 온 야채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며 강의가 끝나는 대로 주문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몇몇은 야유와 비슷한 소리를 지어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제가 들고 온 야채들은 그 샘플이고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야채들을 시식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또 한 번 여유롭게 좌중을 훑어보았다. 남자에게 압도당한 교실은 순간 고요에 빠졌다가 순식간에 또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유기농이란 보장이 있나요?”

  나이에 걸맞지 않게 긴 생머리를 가슴까지 땋아 내린 여자하나가 쇳소리를 내뱉으며 남자를 쏘아봤다.

  “제가 언제 유기농 야채라고 했던가요?”

  여자의 도전에 남자가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되받아쳤다.

  “아니, 그게…….”

  뜻하지 않은 반응에 여자가 주춤거리는 사이 남자가 여자의 말을 낚아챘다.

  “백퍼센트 유기농은 존재할 수 없죠. 농사라는 게 나 혼자만 짓는 게 아니어서 말이죠.

  아무리 내가 농약을 치지 않는다하여도 바람에 묻어오는 농약까지 제 힘으로 막을 순 없지 않겠어요?“

  남자의 단호한 태도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직접 생산했다는 것이죠. 최대한 무농약 제품임에 제 인격에 걸겠습니다. 일단 드셔보시면 제 말에 확신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남자는 자신이 들고 온 바구니에서 야채를 꺼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야채를 나눠주었다. 엉겁결에 겨자채 비슷한 야채를 손에 쥐고 나는 향기를 맡았다. 상큼한 풀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한 입에 깨물어보니 비릿하고 매콤하고 한편으론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고개가 끄덕여질만했다.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먹느냐도 중요한 법이죠.”

  이제 한결 더 여유로워진 남자는 당장이라도 한 바탕 교수 대신 자신이 강의를 할 것처럼 서두를 늘어뜨렸다.

  “제가 공급하는 야채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냥 물에 한두 번만 씻어 이렇게 생으로 씹어 드십시오. 쌈장도 필요 없습니다. 본연의 야채의 맛을 즐기시면 됩니다.”

  그 뒤로 남자는 자신이 팔아야할 야채에 대한 장황을 설명을 했고 교실안의 여자들은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주문을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남자는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덩달아 나도 그 분위기에 적응했고 꼭 그 남자에게 주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란이 끝나기 전에 약속된 강사가 교실에 들어왔고 남자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로 자리를 떴다.

연단에 선 강사는 장황한 말로 앞으로 우리자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왜 먹어야하는지 영양학적인 측면으로 많은 수치를 예시하며 설명했다. 도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강연에 나는 피로감이 몰려 꾸벅꾸벅 졸지 않을 수 없었다. 강연에 몰두하려 애를 썼지만 강연인지 꿈인지 모를 소리들만 귓가를 맴돌다 사라졌다. 박수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2시간 가까운 강연은 끝이 났고 교실 안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다. 분위기에 쏠려 나도 힘찬 박수를 보탰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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