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6.
“어쩜 그곳에 오래 머물지도 몰라요.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이제 끝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진정한 작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직 남아있었다.
“다시 돌아온다면 언제든 환영해요.”
P는 거실로 들어오는 햇볕을 등지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표정은 그늘 때문인지 더 어두워보였다. 아마 아침부터 내내, 내가 짐을 꾸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표정으로. P가 한마디만 해준다면 떠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가 붙잡아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는지도 모른다. 가족처럼, 친구처럼, 어쩌면 애인처럼. 하지만 그는 끝내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이미 내 입에서 떠난다는 말을 내 뱉은 후라 나는 내 말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또 가야했다.
“미워. 다신 오지 마.”
늘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막내 동생 역할을 서슴지 않았던 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3일 내내 나를 설득하기 위해 진심을 다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그의 말속엔 원망만 가득했다.
“아니. 다시 돌아 올 거야. 틀림없이.”
P는 자신의 말에 힘을 주며 나를 주시했다. 나는 그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아니면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이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올 수도 있을지 모르니깐.
“일단 떠나보면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되겠지.”
섭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말에 확신을 구하듯 P에게 눈길을 보냈다.
“누군가는 내 역할을 하는 사람이 들어오겠지.”
섭에게 미안한 마음쯤은 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뱉은 말이었지만 P도 섭도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3년이면 충분히 고마웠던 시간이었어. 안 그래?”
P는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그래 어느 덧 3년이었다. 그동안 몇몇이 같은 공간을 나누었지만 그들은 자주 떠났고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결국 P와 섭과 나, 셋은 터줏대감처럼 3년의 세월을 나누었다.
처음 이 쉐어 하우스의 벨을 눌렀던 순간이 스쳐갔다. 그때 나는 집을 구하는데 지쳐있었으며 이 벨을 누르는 것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이틀 후의 출장을 앞 둔 지점이라 어떻게 해서든지 다음 날까지는 내 짐을 옮겨야할 필요가 있었다. 짐이라야 책 몇권과 옷가지, 잡동사니 몇 상자에 불과했지만.
집 주인처럼 P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달은 얼굴의 수염을 밀지 않은 듯 온통 털투성이 남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미소 띤 얼굴은 어딘지 어리숭해 보였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광고에 명시했듯 여자분 두 분이 더 있습니다. 이 시간엔 모두 직장에 있는 관계로.”
내 망설임을 눈치 챈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일단은 들어오셔서 집 구경을 하시죠?”
내키지 않았지만 또 돌아서는 것도 미안했던지라 나는 쭈뼛거리며 그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만 남겨두고 온 마당은 잡풀로 빼곡 들어차 있었다. 전혀 손질되지 않은 마당을 보니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 놈들이 인사하죠?”
뜬금없는 그의 말은 대문을 향해 뒤돌아서려는 나를 붙잡았다.
“거룩한 생명들이잖아요. 꽃이 아닌 풀은 없죠. 우주 삼라만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참 멋지네요.”
집 앞쪽으로 시선을 두며 태연한 척 대꾸를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 맛에 이 집에 산지 어연 5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새 그가 내 옆에 나란히 서 내 시선을 따르고 있었다.
“특히나 밤이 더 좋죠.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게 화답을 하듯 하나둘 불빛이 켜지면 세상은 더 이상 외롭다거나, 비루하다거나, 쌍스럽지 않죠. 뭐랄까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보이는 세상은 시적으로 변하고 우리에게 낮 동안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를 소화할 수 있는 완충지대를 선물하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범상치 않아 내 호기심을 당겼다. 뭔가 모를 이상한 끌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확신할 수 없는 그 무엇에 이끌려 그날 이후의 시간과 공간과 어쩌면 감정까지도 공유했을 것이다.
"그는 창가에 서서 건너편 건물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소설은 바로 이 이미지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듯 우리가 함게했던 지난 3년의 세월은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외롭다거나, 비루하다거나, 쌍스럽지 않다는 단어 몇 개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3년이란 세월의 시작을 예고했던 메타포였음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