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무의식, 몽상의 세계는 저 예측 가능한 세계의 뿌리인 셈이다. 대체로 우리의 의식과 행동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 이해된 것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중심을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가는 힘은 잘 알지 못하는 것, 이해되지 않는 것, 불가해한 어떤 것이다. 삶에 대한 얼마나 많은 물음이 영구 미제의 물음들로 남으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주적 미아가 된 듯한 막막함에 감싸여 얼마나 자주 덧없이 미로 속을 헤매는가.” <장석주>
Daydream 1.
도착한 지점의 풍광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깊고 넓은 계곡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계곡의 넓이와 깊이만큼 높은 양 옆의 산은 벌써 짙은 녹색으로 우거져 있었다. 숲 중간쯤엔 도로를 건설 중인지 코끼리 몇 마리가 가뜩 짐을 싣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기계충에 훼손된 아이들의 머릿속을 연상시켰다. 숲 곳곳이 그 모양새로 흉측스러웠지만 산이 풍기는 위력에 비하면 작은 티끌이었다.
산이 내려앉은 발치에 계곡의 수변으로 초록빛 수풀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햇살을 머금은 계곡물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깍아지른 절벽위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들이 계곡을 따라 연이어져 있었다.
“정말 멋지지?”
펼쳐진 풍광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향해 동생이 물었다.
“꿈인가?”
“처음에는. 살다보니 익숙해져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무지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들어가자.”
동생은 수트케이스의 바퀴를 굴렸다.
“그래, 잠시만 신세를 질게.”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뭔 신세? 마음 편히 지내.”
빈말일지라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약속이 있어. 잠깐 먼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하기만 한 나는 훠이훠이 계곡을 따라 걸었다. 필시 걷기에는 먼 거리 일 텐데 서둘러 등을 보이는 나를 동생은 잡지 않았다. 아마도 내 성정을 아는 터라 그녀는 또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바라보며 생각을 되씹고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한번쯤 되돌아보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걸음을 빨리했다. 걷는 내내 동생을 향한 묘한 감정들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으면…….”
얼마를 걸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리고 땀에 젖은 얼굴이 달아 올랐다.
계곡을 끼고 숲처럼 펼쳐진 빌딩들이 보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세계가 공존해 있었다. 초현대식 빌딩들과 태고의 신비를 머금은 계곡. 분명 꿈인 것이다. 자꾸 멈칫거리는 마음과 몸을 추스르며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삐쭉 문을 밀고 주춤거리며 안을 엿보았다. 강당에는 데 여섯 명의 단원들이 검은 무용복 차림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막대로 박자를 세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막대로 박자를 맞춘 남자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엉거주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남자는 은빛 안경테를 고쳐 쓰며 살짝 웃어 보였다.
“오늘은 그만해도 되겠어. 인영인 몸조심해야겠다. 프로라면 공연 전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단원 중 하나를 지목하는 단장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힘이 있었다. 연습하던 단원들이 물러나며 낯선 손님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필시 내가 누구라는 것쯤 이미 들어 알고 있단 눈치였다.
“어서 오세요. 송선생.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단장의 목소리엔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쭈뼛거리던 내 마음도 어느 새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고 있었다.
“반가워요. 우리 모두 송선생을 기다렸고만.”
단장은 눈을 흘겼다.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듯.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터졌다.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중요 인물이 되었다고…….”
나는 계면쩍은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송선생은 우리 새끼들의 엄마 같은 분이죠.”
“밥해주는 엄마요?”
나는 단장을 향해 투정 섞인 콧소리를 냈다. 내가 뱉어놓은 비음에 나도 놀라 움찔거렸다. 여의 호탕한 단장의 웃음이 강당에 메아리쳤다. 그의 웃음이 둘 사이의 남아있던 경계를 무너뜨렸을까?
“저어?”
단장은 웃음 끝을 추스렸다. 안경 너머로 그의 따뜻한 시선이 전해졌다.
“머물 곳도 필요해요. 언제까지 동생네 집에 얹혀 있을 수도 없어서.”
나에게 그런 용기도 있었을까? 뱉어놓은 말들을 다시 주어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송선생을 기다렸고만.”
오는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일시에 걷혔다.
“4층 부엌 오른 쪽으로 송선생이 머물 곳도 미리 준비해 두었어요. 뭐 소소하지만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을 것이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곳에 오고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시간들이 스쳤다.
“고맙지요?”
장난기서린 그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내 시선은 엉거주춤 그의 슬리퍼 발가락에 끌렸다. 엄지발가락이 삐져나올 만큼 그의 슬리퍼는 닿아 있었다. 당장이라도 헤진 곳에 가죽을 덧대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니까, 송선생. 일전에 말한 것처럼 송선생의 재능을 더 이상 썩히면 안 되겠죠. 아마 시간이 해결해 줄거예요. 하루 세 시간씩만 연습합시다. 단원들 식사 챙기고 나머지는 송선생 마음대로 쓰세요.”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요. 우선은 약속한대로 밥순이로 출발하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내 마음의 고동소리를 놓칠 수 없었다. 아니 희열로 가득 차오르는 가슴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그래요. 당장은 송선생이 이곳에 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단장의 시선을 맞받으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조금 만 저 사람에게 의지하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커튼 사이로 저녁을 향해 곧추 달리던 햇살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뿌연 먼지 알갱이들이 함께 아른댔다.
“다시 시작해보자. 더 이상 망가질 순 없어.”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단장의 시선이 따라온다는 것을 느낄만큼 나는 어느 새 편안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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