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3.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빈집>
강어귀의 삼각주 마냥 세 개의 비포장도로가 만들어 낸 삼각형 지점에 그 건물은 위치해 있었다. 그 건물을 중심으로 건조하게 익어가는 가을 벼들이 끝도 보이지않을만큼 넘실댔다 . 건물 앞으로 드문드문 뽀얀 먼지를 일으키는 트럭들이나 자가용들이 지나는 일 이외는 사람의 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어떻게 이런 위치에 편의점을 열 생각을 했을까, 도시 그녀의 심중을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4년 넘게 가게는 운영 중에 있었고 그 가게에서 그가 일했다. 그는 필시 가끔씩 찾아오는 트럭이나 자가용 운전수들에게 담배나 음료수 같은 것을 팔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하루 왼 종일 사람 새끼하나 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오늘 나는 그를 만나러왔다. 필시 오랫동안 견디고 견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에 발걸음이 저절로 그를 향했는지도 모른다. 해가 마른 중천에 떠있었지만 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터덜터덜 곳곳이 헤진 시멘트 마당 한켠엔 네 칸짜리 조립식 화장실의 문들이 온통 바깥을 향해 제켜져 있어 바람이 불때마다 덜컹거렸다. 보이는 변기며 세면대들은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한지 오래돼 보였다. 그 옆으로 듬성듬성 합판으로 칸을 막아 놓은 개집에서 굶주려 보이는 셰퍼트 한 마리가 찢어지는 소리로 마구 지저댔다. 셰퍼트 입에서 뿌연 침들이 수증기처럼 튕겨져 나왔다. 개의 필사적인 기세에 움찔했지만 단단히 묶인 듯 개집만 들썩거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데 여섯 개의 돌계단을 올라 먼지로 얼룩진 창문을 통해 편의점 안을 기웃거렸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삐걱대는 편의점 문을 몇 번 밀쳐도 보았지만 문 또한 열리지 않았다. 어쩔 것인가? 문을 등지고 망연히 눈앞에 시선을 두었다. 뿌연 안개가 눈 앞을 막아섰다. 정신은 멍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 없었다. 먼지가 앉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그저 그를 보지 못한 시간들, 그를 환각했던 시간들, 눈물로 얼룩진 그 시간들 속에 다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한 순간이 찾아들면 내 시간과 세상은 자동 정지되고 내부에선 그를 향한 몰입만이 느리게 느리게 유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