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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금각사/미시마 유키오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4. 8. 11.

탐미적인 문체와 뛰어난 구성으로 문단에 데뷔했을 때부터 주목을 받았던 일본 탐미문학의 거장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작. '금각사'라는 건축물을 중심으로 인간 내면에 자리한 절대미에의 갈구와 파멸 충동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 미조구치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각에 유별난 관심과 애정, 일체감을 느끼지만 성장하면서 불가피하게 현실에 접근할 때마다 금각의 방해를 받게 되고 결국 금각을 불태우고 만다는 줄거리 속에 미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과 탐닉, 파멸을 향해 내닫는 젊음의 끝에서 고뇌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을 모색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을 아름답고 예리한 감수성으로 벼려냈다. 자신의 불완전한 점을 절대미에 대한 파괴로 보상받으려는 주인공의 심리를 시적 독백으로 처리하여 허무의 미를 완성시키고 있다.

[YES24 제공]

 

 

 

 

 

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내기 위해서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도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 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내가 애써서 간신히 외계에 도달하여 보아도, 언제나 그곳에는 순식간에 변색되어 어긋나 버린......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소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두 종류의 상반된 권력의지를 품게 된다. 나는 역사 중에서 폭군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말더듬이에다가 과묵한 폭군이라면, 신하들은 내 안색을 살피며 항상 주눅이 들어 지내게 되리라. 나는 명확하고 유창한 말투로 자신의 잔학성을 정당화시킬 필요조차 없다. 나의 무언만이 모든 잔학성을 정당화시키리라. 이런 식으로 평소에 나를 업신여기는 교사나 학우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는 공상을 즐기는 한편, 나는 또한 내면세계의 제왕이자 조용한 체념에 잠긴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공상도 즐겼다. 외모는 보잘것없었지만 나의 내계는 누구보다도, 이토록 풍요로웠다. 무언가 씻어 없앨 수 없는 열등감을 지닌 소년이, 자신을 은근히 선택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이 세상 어디엔가, 아직 내 자신도 모르는 사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9쪽>

 

 

이때 나에게 분명하게 하나의 자각이 생겼다. 어둠의 세계를 향하여 팔을 크게 벌린 채 기다리면 된다는 것. 머지않아 5월의 꽃들도, 제복을 입은 자들도, 짓궂은 급우들도, 내가 벌리고 있는 팔 안에 들어오리라는 것. 내가 세상을 바닥으로부터 쥐어짜서 움켜쥐고 있다는 자각을 지녀야 한다는 것..... 하지만 자각은 소년의 긍지가 되기에는 너무도 무거웠다.

긍지는 좀더 가볍고 밝고 눈에 잘 보이며, 찬란한 것이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누구나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내 긍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으련만. <11쪽>

 

 

아버지의 얼굴은 초여름의 꽃들에 묻혀 있었다. 꽃들은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꽃들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왜냐 하면, 죽은 사람의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표면으로부터 무한히 함몰되어, 우리들을 향하고 있던 탈의 테두리 같은 것만을 남기고, 두 번 다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질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멀리 존재하며, 그 존재 방법이 얼마나 우리들로부터 소원한가 하는 점을,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여실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었다. 정신이 죽음에 의하여 이토록 물질로 변모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그러한 국면에 접하게 되었으나, 지금 나에게 서서히, 5월의 꽃들이라든지, 태양, 책상, 학교 건물, 연필.... 그러한 물질들이 어째서 그토록 나에게 서먹서먹하고, 나로부터 먼 거리에 존재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36쪽>

 

 

나는 이러한 얼굴에 직면한다. 중요한 비밀을 고백할 때에도, 미에 대한 격렬한 감동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경우에도, 내가 직면하는 것은 이러한 얼굴이다. 인간은 평소에 인간을 향하여 이러한 얼굴을 보이면 안 된다. 그 그얼굴은 더 할 나위없이 충실히, 나의 우스꽝스러운 초조감을 그대로 흉내내어, 마치 나의 무시무시한 거울처럼 변하여 있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그럴 때에는, 나와 뚝같이 추한 얼굴로 변모한다. 그것을 본 순간, 내가 표현하려고 생각했던 중요한 것들은, 기왓장이나 다를 바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47쪽>

 

 

나를 태워 죽일 불이 금각을 태워 없애 버리리라는 생각은, 나를 거의 도취시켰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물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연약하고 보기 흉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금각은 단단하면서도 불타기 쉬운 탄소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도랑치는 도둑이 고귀한 보석을 삼켜서 숨기듯이, 내 육체의 속, 내 조직 속에 금각을 숨겨 갖고 도망칠 수도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51쪽>

 

 

때로는 쓰루카와가, 납에서 황금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사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사진의 음화, 그는 양화였다. 한 번 그의 마음으로 여과되면, 나의 혼탁하고 어두운 감정이 하나도 남김없이 투명한 빛을 발하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을, 나는 몇 번의 놀라움에서 바라보았던가! 내가 말을 더듬으며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쓰루카와의 손이 내 감정을 뒤집어서 외부로 전하여 준다. 이러한 놀라움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지 감정에 머물러 있는 한에는, 이 세상의 최악의 감정도 최선의 감정도 차이가 없다는 것. 그 효과는 마찬가지라는 것, 살의도 자비도 겉보기는 다를 바 없는 것 등이었다. <63쪽>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는, 금각은 초연하였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러한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금,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는 표정을 되찾게 하였음에 틀림없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더욱 기묘한 것은, 금각이 이따금 보여 주는 미 가운데서도, 이날만큼 아름답게 보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내 심상으로부터, 아니, 현실 세계로부터도 초탈하여, 변하기 쉬운 모든 것들과는 무관하게, 금각이 이토록 견고한 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69쪽>

 

 

육체적인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불구자도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먼저 보는 쪽이 이긴다.<98쪽>

 

 

사지가 멀쩡한 사내와 내가, 같은 자격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어. 그건 나에게 있어서 엄청난 자기 모독으로 여겨졌거든. 내가 안짱다리라는 조건이 간과되고 무시된다면 나의 존재는 사라지고 만다는, 네가 지금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에 나도 사로잡혀 있었던 거야. (중략)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이건 우리들이건 어느 쪽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해.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하지.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에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 거야......<102쪽>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 하지만 안짱다리가 곧바로 나를 저지하러 오지. 이것만은 절대로 투명해지는 일이 없다구. 그건 다리라기보다는 하나의 완고한 정신이었거든. 그건 육체보다도 훨씬 확고한 '물체'로서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지.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105쪽>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살인이 대상의 일회성을 멸망시키기 위한 행위라면, 살인이란 영원한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금각과 인간 존재와는 더욱더 명확한 대비를 보여, 한편으로는 인간의 멸망하기 쉬운 모습에서 오히려 영생의 환상이 떠오르고, 금각의 불괴의 아름다움에서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마든 미의 전체의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205쪽>

 

 

종종걸음으로 가는 꾀죄죄한 허리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유달리 추악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생각했다. 어머미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이멍ㅄ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210쪽>

 

 

노사에 대한 증오심조차 나는 잊었다! 어머니에게서도, 친구들에게서도,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날의 안락함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성취된 세계의 변모라고 착각할 정도로, 그토록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어떠한 것이든,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을 부여하는 결단이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자유의 근거였다.<211쪽>

 

 

"나는 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구. 이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인식이라고, 알겠냐, 다른 것들은 무어 하나 세계를 바꾸지 못해. 인식만이, 세계를 불변인 채로, 그대로의 상태에서 변모시키지. 인식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영구히 불변이고, 또한 영구히 변모한다고.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너는 말하겠지. 하지만 이 삶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은 인식을 무기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동물에게는 그런 건 필요없어. 동물들에게는 삶을 견딘다는 의식 따위는 없으니가. 인식은 견디기 힘든 삶이 그대로 인간의 무기가 된 거지만, 그러면서도 견디기 힘든 것이 조금은 경감되지 않아. 그것 뿐이야."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나머지는 광기나 죽음이지."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절대로 인식이 아니야.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행위야. 그것밖에 없어."<227쪽>

 

"남들에게 보이는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걸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 하지만 유별난 짓을 저지르면, 또 남들은 그렇게 봐 주지. 세상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어느 쪽이 오래 지속될까요?"

"어느 쪽이건 곧 멈추지. 무리하게 결심하고 지속시켜도, 언젠가는 멈추게 되지. 기차가 달리는 동안, 승객은 멈추고 있지. 기차가 멈추면, 승객들은 거기서부터 걸어가야만 돼. 달리는 것도 멈추고, 숨도 멈추지. 죽음은 최후의 휴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거든."

"저를 꿰뚫어봐 주십시오"라고 결국 나는 말했다. "저는,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제 본심을 꿰뚫어봐 주십시오."

스님은 술을 입에 부어 넣고는, 나를 잠자코 보았다. 비에 젖은 녹원사의 크고 검은 기와지붕처럼 침묵의 무게가 내 위에 있었다. 나는 전율하였다. 갑자기 스님이, 더없이 맑고 쾌활한 웃음소리를 발하였다.

"꿰뚫어볼 필요는 없어. 전부 네 얼굴에 나타나 있거든."<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