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의 소설들을 거꾸로 읽는 셈이 되었다.
'파씨의 입문'을 시작으로 해서, 百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 그리고 첫 단편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순으로...
황정은이라는 작가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단편집 ' 파씨의 입문' 들 속에 있는 작품들 이었고. 제 5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상류엔 맹금류'라는 단편이었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는 작가의 첫 단편소설집 그대로 작가의 순진성이 드러낸 작품인 것 같아 읽는 내내 풋풋한 그녀의 웃음이 떠올랐다. 이 작품을 필두로 작가 황정은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왔는지 실감했다. 그녀가 가는 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가 황정은이 제 15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이효석 문학재단의 발표에 내 일인양 기쁘다는 사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황정은
<문학 평론가 서영채의 해설>
황정은의 단편 ‘모자’의 첫 문장은 이렇다.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모자가 된다고? 그럴 수 있다. 소설이니까. 사람이 벌레가 되는 소설도 있었는데 모자가 못될 이유는 없다. 비유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겠다. 카프카의 예가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런 첫 문장과 맞닥뜨리고 나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 가보자는 심정으로 작가가 닦아놓은 이야기의 길을 쫓아가는 수밖에. 대체 어떤 사연으로 아버지는 모자가 되는 것일까.
작가 황정은은 그러나 독자들이 이런 반응 같은 것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심드렁한 태도로 혹은 천연덕스럽게, 그저 자신의 발걸음을 사뿐사뿐 옮길 뿐이다. 이런 식이다. 아버지는 그 전부터 가끔씩 모자가 되곤 했는데 갈수록 그 도가 심해져 이제는 아무 데서나 모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식구들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이웃의 항의도 있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모자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이웃의 태도가 합당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주 이사를 다닌다. 모자가 되어 버리곤 하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소문 때문에. 좀 불편한 일이지만 그래도 다른 도리가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들 산다. 아버지가 혹시 못에 걸려서 모자가 되어버리면 곤란할 것 같아 새 집에 들어서면 벽에 박힌 못들을 빼내기도 하고, 또 차라리 못에 걸려 모자가 되는 것이 냉장고 앞에서 모자가 되어 자식들 발에 밟히는 것보다는 낫다고들 말하기도 하면서.
이런 양상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면 아버지가 모자가 된다는 것은 소설 속에서 어느 덧 별스러울 것 없는 자명한 전제가 된다. 그때쯤 작가는 아버지가 언제부터 모자가 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식구들의 입을 통해 알려주기 시작한다. 먼저 세 남매가 입을 연다. 사연들은 각각이되 아버지가 더없이 초라해졌던 순간이라는 점에서는 이구동성이다. 첫째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지나가다가 허름한 옷차림으로 전봇대 옆에 서 있는 아버지를 모르는 척했던 순간이었다고 했고, 둘째는 라디오 하나 고쳐주지도 새로 사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향해 격렬하게 항의했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는 학부모 참관일 날 학교에 온 아버지가 갑자기 모자가 되어 사물함 위에 얹혀 있었다고 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내의 기억을 통해 모자가 되었던 젊은 날과 어린 날의 아버지의 모습이 술회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자가 되곤 하는 아버지의 전모가 드러난다. 자기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세계의 완강함, 그 앞에서 알몸으로 드러나는 무참함과 초라함을 감내하지 못한 한 허름한 사내의 모습이.
이 지점에 이르면 왜 우리는 황정은이 아버지를 모자로 만들어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자나 슈퍼맨이 아닌 것은 물론이되 하다못해 장롱이나 냉장고나 나무도 아니고 모자인 것에 대해. 이삿짐 위에 조용히 놓여있는. 혹은 못에 걸려있는 낡은 모자라면 어떨까. 동네 산책길에서 훈련을 받던 예비군들에게 희롱당한 딸 때문에 노기등등하여 파출소로 달려갔던 , 그러나 달려가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아버지라면. 낡고 허름한 모자 이외에 다른 무엇으로 변신할 수 있을까. 고흐의 신발을 그 옆에 놓을 수도 있겠지만 모자가 된 중년 사내는 삶 전체를 관조하는 그런 기품조차도 각조 있지 못하다. 낡은 실크해트나 중절모 정도로 추정되는 이 모자 - 아버지는 그저 어이없는 세상 속에서 말문을 잃고, 귀도 코도 키도 잃어버리고 스스로 마술을 걸어 자신을 적은 공간속에 거두어버린, 앞뒤가 꽉 막힌 한 중년 가장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이제 첫 책을 내는 황정은이 세상을 미메시스하는 대표적인 형식일 것으로 보인다. 변신이나 환상적인 모티프가 소설의 전면에 부각되어 우리들의 삶의 표정들을 이끌어낸다. ‘모자’나 ‘오뚝이와 지빠귀’처럼 한 겹 뒤에서 바로 현실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문’처럼 좀 더 깊이 감추어져 있거나 ‘곡도와 살고 있다’처럼 환상이 저 혼자 떠도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황정은의 환상은 가볍고 경쾌한 명랑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런 감각은 일상의 비애와 슬픔과 혹은 고통을 수채화풍의 가벼운 터치로 포착해낸다. 그래서 그의 환상은, 종종 환상 일반이 만들어내곤 하는 비장의 영역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그런 환상의 모습은 어떻게 손대볼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해져버린 세계의 질서를 역으로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물론 황정은이라는 한 개인의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로 하여금 이런 서사를 마련하게 한 좀더 큰 힘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그 힘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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