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가을밤, 늙은 은행가는 15년 전 가을에 자신이 주최했던 파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날의 손님들 중에는 유식한 사람들이 많아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갔었다. 그중에 사형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대부분 사형제도가 낡고 무익하며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그 중 몇 사람은 사형 제도를 종신형으로 대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티의 주최자인 은행가도 한마디 했는데 그는 종신형은 천천히 죽이기 때문에 차라리 단번에 죽이는 사형이 더 인간적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사람들 중 한 젊은 변호사는 둘 다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자신이라면 살아있는 쪽인 종신형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은행가는 젊은 변호사에게 그럼 만약 당신이 독방에서 5년을 지낸다면 200만 루블을 주겠다고 했고 가난했던 젊은 변호사는 그런 돈을 준다면 5년이 아니라 15년이라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날의 내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있는 바깥 채 중의 한 방에 감금이 되었고 15년 동안 다른 사람들은 만날 수 없고 그곳에서만 지내야 했다. 단, 악기를 소지하거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 술과 담배 등은 허용되었다.
변호사는 감금되고 처음 몇 해는 울부짖기도 하고 고통을 잊으려 흥미위주의 다양한 책들을 주문해 읽기도 했다. 그러다 차츰 조용해졌고 6년쯤 되었을 때는 언어와 철학, 역사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은행가가 밖에서 책을 대 주기가 벅찰 정도였다. 10년쯤 되었을 때에는 1년동안 꼼짝 않고 앉아 복음서만을 읽었다. 그 후에는 종교사와 신학관련 책들을 읽고 나머지 2년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면 변호사가 갇힌 지 15년째 되는 날이다. 그 내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은행가는 돈이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큰 부자였는데 지금은 그동안 주식투기 등에서 실패하여 많은 빚을 지고 내일 변호사에게 200만 루블을 주게 된다면 자신은 파산이나 다름없다. 젊은 변호사에게 지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시작한 내기였는데 이렇게 변호사가 15년을 버틸 줄은 몰랐다.
늦은 밤, 은행가는 자신의 서재에서 나와 정원 변호사가 갇힌 곳으로 갔다. 마침 문지기는 없었고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변호사는 늙고 흉측한 몰골로 작은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옆에는 그가 써놓은 편지가 있었다.
내일 열두 시에 나는 자유를 얻고 비로소 사람들과 교류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방을 떠나 태양을 보기에 앞서 나는 그대들에게 몇 마디 해 줄 필요를 느낀다. 순수한 양심에 따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코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그대들에게 단언하는 바다.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의 삶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내가 땅도 사람들도 못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책 속에서 향기로운 술을 마셨으며, 노래도 불렀고, 사슴이며 멧돼지를 좇아 숲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으며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다... 천재 시인들의 마법으로 창조된, 구름처럼 하늘거리는 미녀들이 밤마다 나를 찾아와서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속삭여 주었고 나의 머릿속은 그 이야기들로 흠뻑 취하곤 했다.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엘브루스와 몽블랑의 정상에 올랐으며 거기서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이면 그 태양이 하늘과 대양과 산맥의 정상을 발그레한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내 머리 위로 구름을 가르며 번뜩이는 번개를 보았다. 나는 초록빛 숲과 초원을, 강과 호수와 도시들을 보았으며, 세이렌의 노래와 목동들의 피리 소리를 들었고, 나에게로 날아온 아름다운 악마들과 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날개를 만져보기도 했다.....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바닥 모를 심연에 몸을 던지기도 했으며, 기적을 창조하고, 살인을 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고, 완전한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은 내게 지혜를 가져다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내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그대들의 책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허망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지하실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자손과 역사, 천재들의 불후의 명성 역시 꽁꽁 얼어붙어 버리거나 지구와 함께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분별력을 잃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그대들은 거짓을 진실로, 추악한 것을 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에 사과나무나 오렌지나무에 무슨 일이 생겨 열매 대신에 개구리나 도마뱀이 열리게 된다면, 혹은 장미꽃이 말의 땀 냄새를 풍기게 된다면, 그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을 땅으로 바꾸어 버린 그대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제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200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이 글을 읽고 은행가는 자괴감과 극심한 자기혐오를 느꼈다. 변호사는 15년 동안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었지만 자신은 200만 루블 때문에 살인까지 하려는 사람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예상대로 변호사는 200만 루블을 포기한 채 계약을 어기고 사라졌고 은행가는 변호사가 써 놓은 편지를 살며시 가져다 자신의 금고 속에 넣어둔다.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의 테라스/파스칼 키냐르 (0) | 2014.08.10 |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0) | 2014.08.01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0) | 2014.07.21 |
불필요한 문장들과 다시 서사하기 /박인성 (0) | 2014.07.17 |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은희경 (0) | 2014.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