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13쪽)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69쪽)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93쪽)
법이란 지켜야 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114쪽)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여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174쪽)
로자 아줌마의 몰골이 너무나 끔찍해서 어느 한 곳 종교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였으니까.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는 유태인도 더는 유태인이 아니며, 그때부터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잘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틀림없이 더 구역질나는 무엇일 테니까.(196쪽)
음식을 먹으면서, 왈룸바 씨는 자기네 나라에서는 노인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일이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보다 훨씬 수월하다고 했다. 대도시에는 도로도 많고 층계나 구멍도 많고 노인을 잃어버리기 딱 좋은 장소들이 많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노인을 찾아 달라고 군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었다. 군대란 젊은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노인을 돌보는 데 시간을 쓴다면 그것은 프랑스 군대가 아닐 거라고 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도시와 시골에 노인 보호시설이 수만 곳이나 되지만, 아무도 그곳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잊혀지게 마련이라고. 프랑스와 같이 크고 아름다운 나라에서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기 때문에 노인들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노인들은 더 이상 일도 할 수 없고 남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으므로, 그저 방치해둔다는 것이다.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종족 단위로 모여 사는데 노인들이 인기가 많다고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인들이 죽어서도 종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개인주의 때문에 종족이 없다. 왈룸바 씨는 프랑스에서는 종족이 완전히 해체되었고ㅗ, 그 대신 떼강도들이나 모여 일을 모의하고 저지른다고 했다. 왈룸바 씨는 젊은이들에게 특히 종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종족이 없으면 그들은 바다 속의 물 한 방울과 같아지고 결국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월룸바 씨는 또 이젠 모든 것이 규모가 너무 커져서 천 이하는 셀 필요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무기를 각조 모여 살 수 없는 노인들은 주소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보잘것없는 소굴에 모여 살게 되는데, 그들이 거기, 엘리베이터도 없는 보잘것없는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그들이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소리쳐봤자 너무 힘이 없어서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했다.(198쪽)
“카이렘.”
카이렘, 유태어로 ‘당신에게 맹세한다.’라는 뜻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203쪽)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 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228쪽)
내 오랜 경험에 비춰보건대 사람이 무얼 하기에 너무 어린 경우는 절대 없어요.(267쪽)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로맹 가리의 유서)
"살아가기 위해선 이유가 필요해."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7층.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시달리는 로자 아줌마와 맹랑한 아랍인 꼬마 모모가 함께 사는 곳이다. 늙고 병들어 치매까지 있는 로자 아줌마는 창녀의 자식들을 키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모모는 그 아이들 중 하나이다.
부모의 그늘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모모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위악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슬퍼도 눈물 흘리지 않는다. 소년은 거짓말쟁이다. 천연덕스럽게 어른들을 속여 넘기고 가끔씩 도둑질도 한다. 주변 사람들 말에 따르면 꽤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영리한 아이인데, 그래서인지 시니컬한 대사도 종종 지껄인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열 몇 살짜리 꼬마가 이런 말을 내뱉다니, 정말 슬프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 제아무리 강한 척 해도, 어둠이 무섭고 로자 아줌마 없이 혼자 살 생각을 하면 두렵기만 한 게 모모의 진심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소년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세상은 지극히 남루한 현실을 통해 삶의 비밀을 알려준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누군가 나를 보아주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삶은 의미를 갖는다는 대답.
모모와 로자 아줌마 사이에 오가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단순한 명제를 가슴에 사무치게 하는 책이다. 인생은 영화필름처럼 뒤로 되감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앞에 남은 생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 어린 모모가 계속 '살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메시지이다. - 박하영(200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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