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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김중혁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4. 7. 16.

 

 

 

 

  “당신은 그토록 무미건조한 월요일에 나를 찾아왔군요.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사람이여,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우리의 사랑만이 덧없는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

 

 

  소설가 김중혁(43)의 장편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문학과지성사)은 지워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딜리터(deleter)’에 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비밀을 탐정에게 의뢰해 세상에서 지워지게 한다는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탐정의 이름은 구동치. 누군가의 과거가 담긴 하드디스크며 일기장,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것을 딜리팅 해주는 게 구동치의 업무이다. 그의 사무실엔 1920년대에 녹음된 이탈리아 테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 사무실에 고객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 그럼 일 얘기를 해볼까요?”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삭제해주신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들었다면 그런 거겠죠.” “저는…실은…딜리팅에 대해서 상의하려고 왔습니다.”

  딜리팅은 사람들의 불안을 먹으며 성장하는 신종 직업인 것이다. 구동치와 계약한 사람은 죽은 뒤에 기억되고 싶은 부분만 남기고 떠날 수 있다. 힘 있는 재력가와 그의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거래가 성립되고 그들로부터 비밀을 지워달라는 요청을 받은 구동치는 점점 깊게 그 검은 거래에 휘말린다. 급기야 타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구동치의 삶을 억누르고 그는 점점 자신의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에 먹이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51쪽)

 

  나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문장을 지웁니다.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또 지웁니다. 그걸 지워야 새로운 걸 또 쓸 수 있어요. 썼다가 또 지웁니다. 그걸 지워야 새로운 걸 또 쓸 수 있어요. 새로운 걸 쓰려면 계속 지워야 해요. 그렇게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누군가는 후배들과 후학들을 위해 모든 걸 지우고 지우다 마지막에 남는 것들, 그런 것들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누군가는 후배들과 후학들을 위해 모든 걸 지우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소설이란 건 말이죠. 길이 없는 겁니다. 길이 다 다른 겁니다. 제가 지운 글은, 그냥 제 길이고 제가 쳐낸 나뭇가지들일 뿐입니다. 그걸 보고 뭘 배울 수 있겠어요. 어설픈 길만 만들어줄 뿐입니다.....

  덤불에 길을 내려면 잔가지들을 계속 쳐내야죠. 잔가지들이 있으면 시야를 가립니다. (82쪽)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85쪽)

 

  결국은 자기 중심적인 치밀함이 돋보이는 그의 계획을 들으며 구동치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쪽)

 

  때로는 알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비밀도 필요한 법이다.(345쪽)

 

 

  소설은 인간의 불안을 미끼로 성장하는 이른바 불안산업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김중혁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삶의 자취는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생은 딜리팅에 의해 지워지거나 수정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