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의 모든 책들을 읽어보자고 시작한 것이 그만 재미로 빠져 버렸다. 스타일리쉬한 문체에 빠져 내용 자체보다는 문단문단을 구성하는 묘사와 아포리즘에 감탄을 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그동안 읽어왔던 사랑이란 이름하에서 치뤄지는 불륜이란 소재에 식상할 즈음, 왜 그녀는 그토록 사랑이란 주제에 천착할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생은 생각보다 기나긴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생의 모든 주체가 육체와 정신의 추구를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문란하지 않으면서, 형식에 얽매어 단념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진정한 내용이 스스로 형식이 될 때까지...그러므로 성은 방황을 멈추고 그 자체인 사랑으로 돌아가기까지 당분간 더 방황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토록 집요하게 여성의 성을 소재를 글쓰기를 했구나 생각하니 한 주제에 대한 그녀의 열정에 감탄하고 말았다.
"세상엔 사랑을 희롱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사랑을 멸시하고 매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근본적인 애정 결핍과 배반과 상처와 환멸, 의심과 피폐한 기다림과 소외와 생활고, 싸구려 불량품같이 넘치는 유사 사랑들, 지쳐버린 마음과 학대...그러나 갖가지 신발을 시시각각 바꾸어 신는 그런 다족류 같은 사람들조차 긴 복도를 걸을 때나, 잠들기 위해 반듯하게 등을 펴고 누울 때 언뜻 자신이 지고한 단 하나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치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내내 절룩거리며 더러운 발로 누추하게 장바닥을 헤맨 사람처럼..."
그녀의 말처럼 우린 모두 자신의 지고한 단 하나의 사랑을 기다리며 그 사랑을 위해 배반과 결핍과 상처와 환멸과 의심을 경험하며 사는 것을 아닐까? 불량품처럼 넘쳐나는 유사 사랑을 통해 한 줄기 찬란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빛을 찾아내기 위해 치뤄내는 그 숱한 방황에 연민마저 드는 이 시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 속에 묻혀 있는 빛을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두려움 없이 이 부조리한 삶 속에 드러내는 행위죠.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향해 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궁극에 이르는 길이에요. 나는 이 사랑을 등을 뚫고 나갈 긴 칼처럼 내 몸 깊숙이 받아들여요. 사랑이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 운명적 요구를 향해 나 자신의 전부를 줄 거예요. 생명을 주고 생명을 되찾을 거예요. 지금 이 시간, 어디엔가 한 여자가 데도록 뜨거운 것을 머리 위에 이고 집 안을 서성이며 울고 있어요. 나무들조차 줄기에 가지를 삽입하고, 아무도 모를 땅 밑에서 서로의 혀를 당기고 수액을 섞으며 관능의 황홀에 빠져 있는 이 무심한 시간에..."
육체와 정신이 합일되는 사랑이란 상대를 향해 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궁극에 이르는 길이며 이 길을 걷는 내내 자신속에 묻혀 있었던 빛을 찾아 부조리한 현실에 드러내 놓은 행위, 그 행위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줄 수 있는 용기, 하여 결국엔 자신의 진정한 생명을 발견하는 일이 우리 모두를 위한 축복이었으면...
작가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직시하고 적나라하게 발설한다. 현대 한국 여성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3 명의 인물을 내새워 그들의 성생활을 공개한 것. 육체에 대한 감각적이며 섬세한 직관과 통찰, 전경린 특유의 매혹적인 문체가 특징이다. 성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인물, 또 너무 냉소적인 인물을 통해 작가는 현대 여성의 성적 자의식 또는 남성 편력기를 들여다보았다.
작가는 스스로가 여자임을 또렷이 인식하며 여자됨을 기껍게 여기고 즐기자고 부추긴다. 거리의 매대 위에서 지폐로 환산되는 성, 생식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성, 오르가슴으로 표현되는 기쁨 없는 성이 아니라 사랑으로서의 성, 생의 에너지를 얻는 성, 정신과 분리되지 않는 성, 뒤틀리지 않고 반듯한 성을 추구하자는 생각이다.
"성은 더 이상 상품도 아니고 상처도 아니어야 하며 터무니없는 순결 의식으로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더군다나 윤리적 담보에 매여서도 안 되고 습관의 질곡에서 굳어져서도 안 되며 함부로 포기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성이 스스로와 상대에 대한 생명력을 다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는 말은 이를 뒷받침 한다.(알라딘,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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