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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戀書 - 91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전경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3. 7. 13.

  슬슬 전경린에 대해 지겨워지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발되는 불륜 관계, 결국에 한 남자를 떠나 또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물릴 즈음 아직도 전경린의 문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를 만났다. 1997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의 타이틀을 꿰고 내 지나온 80년대를 걸었던 같은 세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쓰인 소설이라는 것에 우선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 소설은 80년대의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진 이후 고통스럽게 떠도는 태인과 그를 따르는 젊은 여공 출신의 정수, 지방도시의 잡지사 여기자로 태인 과의 사이에 어린아이를 가진 이나, 그녀를 사랑하는 잡지사의 부유한 부장 정소현, 이렇게 네 인물을 주축으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절망적으로 찾아 헤매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여주인공 이나의 방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 그림 한 폭이 걸려있다. "얼핏 보면 창밖의 풍경 같지만, 다시 보면, 창밖 풍경의 일부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산의 가름 선과 나무 한 그루와 황색 숲길이 창밖의 현실과 한 치 어긋남도 없이 일치되어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헛것을 잡는 듯도 하고, 너무 충만하여 전율이 이는 듯도 했다." 바로 이 그림이 표상하는 현실과 꿈의 괴리, 혹은 그 일치에 대한 열망이 이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여주인공 이나는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홀로서기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막연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운명이 나를 어느 곳에 데려다 놓아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려는 열망은 결국 삶과의 직접적인 접촉의 형태로 글쓰기를 택하게 된다.
  정소현 역시 사랑의 인식을 통해서 역설적 구원의 기미를 느낀다. "그는 사랑의 위해 무엇이든 하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 사랑이 영원한 것 그 자신의 진실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불가능성과 남루함, 그리고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수상소감 인터뷰에서 전경린은 말한다. "저는 아직 제 욕망으로 글을 씁니다. 어떤 방법이나 체계도 없이, 섬광같이 번쩍이는 느낌에 의지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소설의 성채를 끌고 온 것입니다. 그 어둠에 덮인 성채 속에서는 작가의 의지와 인물들의 욕망과 작품 자체가 내포한 필연성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며 바늘로 한땀 한땀 가죽을 기우듯 천천히, 혹은 벼락이 내리치듯 가파르게 진행되었습니다. 행운이 있었다면, 매일 변하는 날씨처럼 작품에도 그날그날 우연성의 힘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작품은 전경린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라는 사실과 그 인터뷰의 말들이 새삼 용기를 준다. 내가 쓰는 요즈음의 소설로 구성되고 있는 글들에 대한 내 느낌이 어찌 그리 그녀의 말들과 같은 색깔일까 놀랍기만 하다. 욕망에 의한 유희로까지 발전되고 있는 우연성의 힘으로 한땀 한땀 기워지고 있는 내 작품들에 대한 격려이기도 한 듯해서….
  나도 그녀처럼 내가 쓸 수 있는 작품과 쓰고 싶은 작품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며 균형을 잃지 않는 그런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오늘을 사는 내 삶의 열망의 한 축이 되었음이 기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