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戀書시리즈 - 독후감

戀書 - 75 - 만남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8. 1.

 

 

 

 

오늘 아침 베란다의 초록이들을 살펴보다 어제 아침과 다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제 아침엔  스킨답서스의 이파리에 마치 이슬처럼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었는데 오늘 아침엔 그 물방울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 이애들에게 수분이 부족한갑다 그런 생각이 들어 한 대야 가득 물을 채워 초록이들에게 선물했습니다. 너희들과의 인연도 억겁의 연  일텐데 더 이상 내 반경에 들어온 아이들에게 예전의 무심함을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그런 작은 결심을 했습니다. 까다로운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제때에 물만 준다면 저희들 본성 데로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이렇게 작은 식물들과의 만남에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여유로와진 내가 되어서 살짝 기분 좋은 아침을 지냈습니다.

 

베란다의 식물들과의 만남의 연조차 귀히 여기게 되는 내 사유의 확장은 아마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의 산문집 만남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던 기억으로 세계의 문호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요즈음에 읽기 시작한  소설작가로서 김연수를 들 수 있는데 김연수를 읽고 나면 윤대녕을 읽고 김훈을 읽고 내 식으로 발견하는 우리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세계문학속에 인지된 소설 작가들의 작품과도 심도있게 만나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한 때 개미를 읽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Bernard Werber)에 심취되어 그의 작품들을 섭렵한 적도 있고 순례자를 읽고 파울로 코엘료 (Paulo Coelho)를 섭렵했고 무라카미 하루끼에 몰두했던 적도 있었지요. 아마도 채울 수 없는 문학을 향한 내 갈증에 단비를 만난 듯 그들의 세계 속에 진입해 있을 땐 마치 그들의 지성과 사유가 몽땅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리고 그 착각 속에 헤메일 땐 얼마간 나의 행복이 유지될 수 있음은 아마 중독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날까 합니다. 다행이도 민음사에서 밀란 쿤데라 전집을 세상에 내놓았군요. , 이런 인연이란ㅋㅋㅋ

 

나는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교류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며, 동맹조차도 아니다만남, 다시 말해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이다.”P130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만남'이란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임을 수많은 만남을 통해 우리는 경험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만남 뿐아니라, 책이나 음악, 그림, 영화같은 것들과 만남, 우주의 모든 것들과의 만남은 일종의 우연이고 섬광입니다. 단지 그 우연과 섬광을 인지할 수 있느냐 하지 못하느냐는 다분히 개인의 용량에 따른 선택의 문제 일 것입니다. 오늘 밀란 쿤데라의 '만남'을 통해 많은 그의 세계의 지성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와, 내가 가야할 길은 사방팔방 수없는 갈래길이 펼쳐져 있군요... 과연 그 수없는 갈래길 중에서 나는 어느 길을 택하며 쉬임없이 걷고 있을까? 내 자신에게마저 호기심이 생깁니다. 지금으로 부터 나는 내 모든 촉수를 켜고 내가 경험하는 모든 만남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만남이라고 표현했다.
교류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며, 동맹조차도 아니다
.
만남, 다시 말해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이다.

-
작품 속에서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1986), 『배반의 약속』(1993), 『커튼』(2005)에 이어 네 번째 에세이를 펴냈다. 바로 『만남』이다. 전작들이 쿤데라 소설의 정체성, 중부 유럽 소설의 현재 위치, 나아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의 의미를 말하고자 했다면 『만남』은 쿤데라 인생에 잊지 못할 방점을 찍어 준 예술가, 혹은 예술 작품들과의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인 만남들, 작품 발문을 인용하자면 그의 “성찰과의, 추억과의, 오랜 주제와의, 오랜 사랑과의 만남”들을 소개한다.
쿤데라가 경탄한 작가 베케트, 브로흐, 이오네스코, 말라파르트, 쿤데라와 교류했던 동시대를 움직였던 작가 르네 데페스트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루이 아라공, 뿐만 아니라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작곡가 야나체크 등, 쿤데라와 여러 거장들과의 만남은 21세기의 독자이자 청중인 우리들에게 또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

■ 천재들을 내친 유럽, 예술-이후의 시대, 예술이 사라진 세상


1999
년 파리의 한 주간지가 ‘세기의 천재들’이라는 자료를 발간했다. 열여덟 명이 수상자 명부에 올랐다. 그런데 여기에는 소설가도 없고 시인도 없고 극작가도 없다. 철학자도 없다. 건축가는 단 한 명 있다. 화가는 단 한 명이지만 디자이너는 두 명 있다. 작곡가는 없지만 성악가는 한 명 있다. 영화인은 단 한 명 있다. 이 명부는 매우 분명하게 현실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유럽과 문학, 철학, 예술의 새로운 관계다. -작품 속에서


‘세기의 천재들’ 자료에 따르면 이 천재들이란 코코 샤넬, 마리아 칼라스, 프로이트, 마리 퀴리, 빌 게이츠, 피카소, 이브 생로랑, 록펠러, 큐브릭, 토머스 에디슨 등이다. 쿤데라는 이 명부가 “매우 분명하게 현실적인 변화를 예고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문화의 천재들을 조금의 후회도 없이 멀리 내친 것이다. “세기병과 도착증, 그리고 그 죄악과 함께 모두 명성이 더러워진 문화적 우두머리들”보다 “코코 샤넬과 그녀 드레스의 순수함”을 사람들이 선호한 것에서 쿤데라는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 쿤데라에 따르면 유럽은 검찰관들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유럽은 더 이상 사랑받지 않고 있다. 유럽은 더 이상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쿤데라는 그 대표적인 예로 영화 기술을 꼽는다.『만남』에서 쿤데라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었”다고 단언한다. 예술로서의 영화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중요성은 기술로서의 영화의 중요성보다도 훨씬 더 제한적이고, 그 역사가 모든 예술 역사 중에서 가장 짧다는 것이다
.

이러한 “활동사진”의 발견이 없었다면, 지금 세상은 현재 모습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우선, (스폿 광고,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저질 문학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보 만들기의 주요한 동인이 되었으며, 두 번째로 (불리한 상황에서 정적을 비밀리에 촬영하고, 테러 행위가 일어난 후 들것에 누워 있는, 옷이 반쯤 벗겨진 여자의 고통을 불멸화하는 카메라처럼) 전 지구적인 무례함의 동인이 되었다. -작품 속에서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화려한 3D 기술로서의 영화가 주목받고, 작고 간편한 휴대용 기기가 책, 편지, 오디오의 기능을 독점해 가는 현 시대, 사람들은 점점 더 순수 문학으로서의 소설과 시를 읽지 않고 있다. 쿤데라가 “예술-이후의 시대에 있다는 느낌, 예술의 필요성, 감수성, 예술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기 때문에 예술이 사라진 세상에 있다.”라고 말한 것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쿤데라는 이렇게 예술이 사라져 가는 세상, 예술-이후의 시대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뒤흔들고, 자신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긴 예술계의 거장, 혹은 그들 작품과의 만남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예술, 그 속에 숨은 인간 본연의 모습과 마주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

■ 소설가이자 극작가, 에세이스트이자 망명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쿤데라의 영혼을 뒤흔든 세기의 만남들


쿤데라는 자신의 첫사랑이 작곡가 야나체크라고 고백한다. 야나체크는 그의 첫사랑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고국을 그의 “미학적 유전자에 영속적으로 각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야나체크는 일생을 체코 브르노에서 보냈다. 젊은 피아니스트였던 쿤데라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야나체크의 초기 연구자들과 지지자들과 어울렸다. 쿤데라는 야나체크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후에 태어났고, 유년 시절부터 매일 아버지나 아버지의 제자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야나체크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1971, 침울했던 점령 시절,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 쿤데라는 일체의 담화를 금지했다고 한다. 단지 음악가 넷이 화장터에서 야나체크의 현악4중주곡을 연주하기만 한 것이다. 쿤데라에 따르면 야나체크는 인간()의 노쇠, 추함, 우스꽝스러운 면을 음악으로 훌륭하게 환원한 작곡가다.

『만남』에서 쿤데라가 주목한 화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쿤데라는 미셸 아르솅보의 제안으로 한 잡지에 베이컨에 대한 에세이를 썼고, 베이컨은 이를 읽고 “스스로를 발견한 드문 글 가운데 하나”라고 전해 왔다고 한다. 『만남』에는 바로 그때의 에세이와, 훗날 덧붙인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
쿤데라는 베이컨의 뮤즈였던 여인 헨리에터 모레스의 초상 삼부작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쿤데라는 베이컨의 초상화가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

화가의 시선은 난폭한 손처럼 얼굴에 놓여 있었고, 얼굴의 정수를,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그 다이아몬드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물론 내면 깊은 곳이 정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난폭한 몸짓, 타인의 내면과 배후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타인의 얼굴을 마구 구기는 이런 손의 움직임이 있다
.
(
중략
)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한 개인은 여전히 그 자신으로 남아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왜곡될 때, 사랑하는 존재는 여전히 사랑하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 소중한 얼굴이 질병 때문에, 광기 때문에, 증오 때문에, 죽음 때문에 멀어질 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 ‘자아’가 더 이상 ‘자아’이기를 멈추는 경계는 어디인가? -작품 속에서


『만남』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강하게, 문학에 대한 쿤데라의 애정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통해 우스운 일이 전혀 없는데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역설적인 희극적 상황, 즉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유머 없는 웃음의 세계”를 포착해 낸다. 셀린을 통해서는 고문과 전쟁과 죽음을 겪어야 했던 세대의 운명을, 필립 로스의 작품에서는 “정체가 드러나고 환상이 깨져 버린 우리 자신의 벗은 몸”, 그 욕망과 마주한 “버림받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마주할 때 느끼는 기이한 고독”과 만난다. 한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두고는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라고 평한다.
뿐만 아니다. 『백조의 날개』를 쓴 아이슬란드 소설가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스페인 작가 후안 고이티솔로, 루마니아 출생 그리스 작곡가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등 어쩌면 국내 독자들에게 약간은 낯설지도 모를 예술계 거장들이 쿤데라의 눈과 귀와 손을 거쳐 우리를 매혹한다
.

▷ 발췌로 만나는 짧지만 강렬한 『만남』 속 ‘만남’들



흐라발
흐라발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카프카

카프카와 더불어 우리는 소설사의 또 다른 시대로 들어간다.

야나체크

무엇을 통해 내 고국이 내 미학적 유전자에 영속적으로 각인되었는지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야나체크의 음악을 통해서라고.

라블레

왜 라블레일까? 왜냐하면 그는 소설 예술에서 진지하지 않은 것의 개척자이고 설립자이며 화신이기 때문이야. 이 두 가지 준거에 의해 루슈디는 진지하지 않은 것의 원칙 자체를 강조해. 그리고 진지하지 않은 것은 바로, 역사 내내 무시되어 왔던 소설 예술의 가능성들 중 하나야.

필립 로스

필립 로스는 미국적 에로티시즘에 관한 위대한 역사가다. 아울러 그는 버림받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마주할 때 느끼는 이 기이한 고독을 노래한 시인이기도 하다.

밀라시우스

밀라시우스 시의 체코어 번역판은 내게 아주 깊은 흔적을, 어쩌면 당시 내가 탐독하던 아폴리네르나 랭보 또는 네르발이나 데스노스의 시보다도 더 깊은 흔적을 내게 남겼다.

「바르샤바의 생존자」

아널드 쇤베르크의 오라토리오인 「바르샤바의 생존자」는 음악이 홀로코스트에 바친 가장 위대한 기념물이다.

「훌륭한 솔라보」

샤무아조의 「훌륭한 솔라보」는 문화사에서 가장 큰 사건들 가운데 하나를 다룬다. 끝나 가는 구술 문학과 태어나는 기술 문학의 만남이다.

「오줌 누는 여인」과 「게르니카」

흥분, 공포, 혐오, 충격 같은 미학 너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예술은 늘 경계해야 한다. 나체로 오줌 누는 여자의 사진은 발기하게 만들 수 있지만, 피카소의 「오줌 누는 여인」에서 동일한 효과를 끄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이 그림이 훌륭하게 에로틱한데도 말이다. 영화에서 대학살 장면이 나오면 우리는 시선을 돌리지만 똑같은 공포를 보여 주는 「게르니카」 앞에서는 시선이 즐거워한다.

■ 쿤데라와 마그리트, 두 거장의 만남- 쿤데라 전집만의 아주 특별한 품격


쿤데라 전집의 모든 작품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Ren? Magritte, 1898~1967)의 작품이 쓰인다. 마그리트 재단은 도서 등에 대한 마그리트 작품의 2차 가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쿤데라 전집에 대한 사용을 특별히 허가해 주었다. 또한 쿤데라 역시 마그리트 작품이 사용된 자신의 전집 표지 시안을 보고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답다.(they are great, they have ever been. We saw everything and everything is more that wonderful.)”라고 격찬했다.

마그리트 작품의 신비한 분위기, 모던하면서도 세련된 색채,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그 속에 숨은 유머와 은유가 쿤데라의 작품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이제껏 한국 문학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답고 품격 있는 문학 전집이 탄생되었다. 이로써 독자들은 쿤데라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힘을 얻어 새롭게 태어나는 마그리트의 작품까지 함께 소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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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 전집 14 『만남』의 표지 이미지로는 마그리트의 「아르곤의 전투」(The Battle of Argonne)가 쓰였다.

 

1 농담 La Plaisanterie, 소설, 역자 방미경
2
우스운 사랑 Risibles amours, 단편집, 방미경
3
삶은 다른 곳에 La vie est ailleurs, 소설, 방미경
4
이별의 무도회 La Valse aux adieux, 소설, 권은미

5 웃음과 망각의 책 Le Livre du rire et de l'oubli, 소설, 백선희
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egerete de l'etre, 소설, 이재룡
7
불멸 L'Immortalite, 소설
, 김병욱
8
느림 La Lenteur, 소설, 김병욱
9
정체성 L'Identite, 소설, 이재룡
10
향수 L'Ignorance, 소설, 박성창
11
소설의 기술 L'Art du roman, 에세이, 권오룡
12
배반의 약속 LesTestaments trahis, 에세이, 김병욱
13
커튼 Le Rideau, 에세이, 박성창
14
어느 만남 Une rencontre, 에세이, 한용택
15
자크와 그의 주인 Jacques et son maitre, 희곡, 백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