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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9.그녀의 수기 - 박꽃각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09. 10. 19.

그대들은 박꽃을 아시나요?

박의 꽃.

저녁이면 피었다가 아침이면 지고마는 수줍은 새악시 같은 꽃입니다.

휘영청 달밝은 밤에 헛간 지붕에 걸친 박꽃의 소박함을 보신적 있나요?

한때 그녀는 그런 박꽃 각시가 간절히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국문과에 들어가면 누구나 시인이 될것 같아

문리대에 진학 했습니다.

그당시에는 계열별 모집이라서

1학년 때는 교양학부로 공부하고

2학년부터 전공이 정해야만 했습니다.

80학번 어수선한 시절 탓에

제대로 공부도 못했고 어설픈 공명심과

지식인의 허영으로 데모행열 중간쯤에서

목이 터저라 구호를 외치던 그런 시절이었답니다.

가을빛이 농익은 시월 모처럼 만에 캠퍼스에 평화가 찾아와

눈부시게 파란하늘이 학교 소운동장에 드리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리대 26반과 29반의 여대생 족구 시합이 있는 날입니다.

그때 그녀는 센타 수비를 맡고 있었답니다.

상대편 선수가 친 공이 어찌나 센지

센타 수비인 그녀의 가지랭이를 쏜살같이  치고나가

1루와 2루 중간 쯤으로 데굴 데굴 굴러갑니다.

스탠드에서 응원하고 있었던 100여명이 넘는 양팀의 응원단들의

터질듯한 함성과 왁자지껄한 웃음을 타고

2루쪽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심장이 멋는 줄 알았습니다.

2루 심판을 담당하고 있었던

눈부시도록 하얀 얼굴의 남학생이 짓는 벅차도록 시린 미소와

그가 입었던 진 녹색 점퍼와

마지막 스러지는시월의 늦은 햇살이

그녀의 가슴에 큰 우물을 파게 되었답니다.

바로 짝 사랑의 시작이었겠죠.

이름도 모르고 시작한 그녀의 두번째 짝사랑은

남의 교실 들락거리며 그를 몰래 훔쳐보는 재미로

지루했던 1학년을 마치게 됩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손에 닿는데로 삼켯던 '위대한 시'들에 체해

감히 시인의 꿈을 접습니다.

그들처럼 그런 시들을 쓸수없다란 자괴감이 더 공부를 하자.

좀더 근원적인 공부를 하자라는 생각으로 뻗어나갑니다.

세상모르는 얄팍한 생각으로 우리문학의 발원은 중국문학이다라고 생각했으며

우리의 철학은 중국의 철학을 모태로 했으므로 중국문학을 공부해야한다

그런 다음 시를 쓰던 소설을 쓰던 그때 생각해 보자고 결정하고서 2학년 첫시간에 들어섰는데...

그가 바로 그녀 앞에 앉아있는 겁니다.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었고 그의 모습을 날마다 볼 수 있다니

심장이 날마다 떨렸고 원래 침울한 성격이었던 그녀는

그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슴떨리는 그 순간 순간들이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에게 그 또한 시인처럼 학자처럼 예술가처럼 다가옵니다.

연인이 아니라 그녀의 멘토같은 모습으로...

그가 음송하는 모든 시들과 철학과 사상이 옴팍 그녀에게 파고들때

그녀의 삶은 좀더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로

그의 반열에 들고 싶다는 열망으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미칠 것 같은 그리움에 천변을 떠돌고

사드락 사드락 빗줄기가 흐느끼던 날은

그의 집 주위를 서성거립니다.

유난히 벗꽃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날

통학버스안에서 남모르게 흘렸던 눈물들은

그리움이었는지, 혹은 아무것도 할수 없었던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지.

그렇게 3년을 옴싹 그를 향한 마음만 키움니다.

졸업논문을 쓰고 한 두달이면 졸업

마음이 급해집니다.

긴 편지를 주저리 주저리 썼습니다.

그를 느끼고 그를 마음에 둔 구절 구절을 표현한 길이 막막했지만

한번은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에

혹은 이젠 어쩜 영영 만날 수 없는 운명의 예감같은 슬픔때문에..

그리고 긴 여행을 떠납니다.

그 편지를 받고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이 지랄 같습니다.

늦가을의 해질무렵 빈 틀판을 터벅터벅 걸어

오래된 친구를 찾아갑니다.

못다한 편지의 구절 구절을 친구에게 읋펐습니다.

막 결혼한 친구의 신혼 단칸방에 이박 삼일을 머물렀습니다.

지루하고 터질 것같은 마음을 달래고

그와 만나기로 한 찻집을 찾아갑니다.

일방적으로 약속한 장소에 그는 와 있었습니다.

약속한 시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가슴이 탁 막혀버립니다.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그에게서 모든 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그를

가끔씩 지금도 먼 발치에서 훔쳐봅니다.

그의 존재가 한 없는 고마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너무 잘 살아줘서 고맙고

결코 박꽂각시로 살 수 없는 성정을 가진 나를

확실하지만 따뜻하게 거절해줘서 고맙고...

 

인생에서 쥘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긴 그리움으로 남는 법이며

또한 지루한 삶에 한 줄기 바람처럼

가끔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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