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戀書시리즈 - 독후감

戀書 - 46 - 빛의 제국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6. 16.

 

 

 

 

 

소설의 제목과 같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란 작품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윗부분은 환한 낮인데 아래 부분은 어두운 밤이다. 그가 그린 세계는 밤과 낮이 공존하는 기이한 세계다. 하지만 언뜻 보면 그 차이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잘 어울려 있다. 김영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준다. 『빛의 제국』은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기이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팔리지 않는 영화를 수입하는 '남파간첩' 기영, 그의 아내 마리, 그들의 딸 현미 그리고 기영을 쫓는 박철수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기영은 남파간첩이었으나 북에서 그의 존재를 잊어버려 근 10여 년간 아무 일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21년간 북에서 지내왔고 21년간 남에서 살아온 기영은 당의 명령을 따라야할지 자수를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박철수는 기영과 그의 아내 마리를 감시한다. 마리는 젊은 애인 성욱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욱의 친구인 '판다'와 셋이서 모텔에 들어가 난교를 벌인다. 딸 혜미는 평소 맘에 들어 했던 친구 진국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진국의 집에 간다. 폭풍 같은 하루가 마무리되는 밤, 기영과 마리는 서로 그들만의 비밀을 폭로하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헤어진다.

 

 

소설의 큰 축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남파간첩인 김기영이지만, 작가는 마리, 현미, 박철수에게도 거의 동일하게 이야기를 배분했다. 북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왔고, 남의 체제에 생애 절반을 살아온 기영. 그는 그의 비밀을 숨기고 살아왔다. 열심히 살아가고 배가 나온 중년이자 평범한 아버지. 하지만 그 자신은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기영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내 마리 역시 분열증적인 삶을 살아왔다. 정숙한 엄마이자 커리어 우먼인 그녀는 불륜인 그녀의 애인 상욱과 그의 친구와 함께 난교를 벌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지금껏 결정한 선택들이 지금 자신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 기영의 고백으로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는다.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이 오늘 겪은 일을 얘기하고 남편을 버린다. 그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내일의 그녀를 만들어 갈 것이다.

 

 

 

현미 역시 자신이 은근 좋아하는 진국의 집에 가기 위해 그녀의 단짝 친구 아영을 이용하고 거짓말을 한다. 현미는 그런 짓이 딱히 죄는 아니지만, 왠지 모를 꺼림찍함을 느낀다. 상대방을 상처주지 않지만, 남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사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이 까발려졌을 때, 내심 모른척하며 서둘러 봉합한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어른들의 세계다. 현미의 부모인 기영과 마리가 살아가는 세계다. 그리고 현미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감동, 카타르시스 보다 잊고 싶은 우리의 어두운 이면에 집중하고 있고, 선생이며 기영의 후배인 (아픔을 이겨냈고, 남을 껴안을 줄 아는) 소지와 중학생이며 영민하고 덜 상처받은 어린 딸 현미 라는 인물에게서 작은 희망을 볼 뿐이다.

 

 

작가는 현미의 말로 소설을 마무리 한다. “걱정하지 마, 뭐든 잘될 거야.” 새로운 날의 시작이었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작품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처럼 상처가 많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들, 우리 사회가 각자 소외되어 모두가 함께 인 것 같지만 모두 따로따로이고 남의 고민이나 남의 마음, 삶에는 관심조차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일상과 몸뚱이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이 소설은 남과 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내용과 학생운동 내용을 걷어낸다면 우리의 자화상인 것 같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인간이 시간 여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야.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거 하나만 바꿔도 이 세상은 지금 우리고 보는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거야. 누구에게나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며 그 선택에 따라 인생의 모든 방향이 변화하고 만다.”

 

 

작가의 말처럼 생각해보니 내 반 생애도 순간순간의 선택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어 있으며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내가 될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하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