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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당산나무와의 동거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12. 2. 21.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들 나름 데로의 수많은 추억이 사노라면 각박한 세상에서 가끔씩 위안을 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여 사람들은 마음이 심란하여 어지러울 때 시골을 찾고 자연을 찾아 약간의 위로와 맘의 평정을 찾곤 한다. 어떤 사람은 바닷가가 고향이고 어떤 사람은 두메산골이 고향이여서 아직도 고향에 대한 정서를 맘속에 간직하고 산다. 어렸을 적 소녀 취향으로 난 강원도 두메산골 총각하고 결혼해 쑥 캐고 달래 무쳐 알콩달콩 마당가득 잡풀들이 있는 그대로 그렇게 살고 싶었었는데...

 

내 고향은 지금은 군산으로 편입되어 있지만 말이 군산이지 아직도 시골이긴 하다. 군산에서 10분 거리 이건만 시골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좋다. 한적해서 좋고 시골스러워서 좋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수많은 이야기 거리가 고스란히 기억나 내 속에서 꺼내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하다. 뭔 놈의 이야기들이 지들 맘 데로 불쑥불쑥 찾아와 내 신경을 건드리고 나에게 빨리 세상구경하고 싶다고 조르는 듯하다. 몇 놈은 벌써 구색 맞춰 나들이 나왔고 몇 놈은 나들이 채비 중이고,  오늘은 어떤 놈 하나를 꺼내 세상구경을 시켜주고 싶다.

 

바로 당산나무이다 .당산나무는 당나무를 뜻한다. 당나무라는 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당산나무의 바른 표현이 당나무 이다. 당나무란 민속에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나무를 뜻하는데 보통 느티나무, 팽나무, 들메나무,소나무 등이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를 보통 당나무로 정하는데 이 나무들이 크고 오래가는 나무들이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 마을엔 몇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다. 길을 넓힌다고 지금은 베어져 혼령이나마 그 주위를 맴도는 지... 어느 놈은 아직도 위풍당당 계절마다 색깔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옛날처럼 그렇게 인기가 없다. 그냥 묵묵히 자기자리에서 지긋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고 사람들 세상을 건너다보고 있다. 난 오래되어 이곳저곳이 파이고 상처 나고 그렇지만 어김없이 새봄이 오면 새 옷을 입고 나오는 아름드리 당산나무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연륜이 참 좋다. 왠지 저 놈은 뭔가 인생을 아는 것처럼 느껴지고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지만 그저 묵묵히 자기 생, 자신의 여행을 즐기고 있는 그런 초연함이 좋다.

 

난 우리 마을에 있는 어떤 당산나무와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아마 동네 아이들 나름 그 당산나무와 친구 되어 놀던 기억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난 특히나 혼자 노는 걸 좋아해 어렸을 적부터 마을의 당산나무 그늘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책을 가지고 가 그 당산나무 아래서 읽다보면 톡톡 지도 심심한지 이파리를 떨어뜨리거나, 지 열매를 몇 개 떨어뜨리며 친구하자고 말을 거는 듯했다. 그럴라치면 책을 잠시 놓고 손을 나무에 비벼보거나 등을 대고 툭툭 건드려 보거나 행여 숨소리를 들을까 해서 가만히 귀를 나무에 대고 한참을 그렇게 놀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 그 놈과 대화를 한다. 오늘 엄마하고 이래서 싸웠고 선생님은 얼마나 얄미웠는지. 심지어 그날 읽은 책 내용에 관해 주절주절 수다를 떨곤 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내 모든 수다를 그놈은 이해했을 거라 믿으며... 그것도 지루하면 동네사람들이 깔아놓은 멍석에서 책을 베게삼아 한 소금 늘어지게 자곤 했다. 당산나무 아래서. 가끔씩은 당산나무를 방문한 그 놈의 벌레들이 머리칼 속으로 얼굴 위로 툭툭 떨어질 땐 기겁을 해 털털 자리를 털기도 하며... 그런 알싸한 추억의 몇 컷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하다.

 

어느 날 살다보니 어렸을 적 그런 행태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음을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린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당산나무 그늘에서 혹은 가지에서 패어진 구멍에서 놀고 울고 자고 수다를 피웠던 습관이 고스란히 전이 되어 오늘 날 내 맘속에 당산 나무 한그루를 심어 놓고 나는 놀고 울고 자고 수다를 피우고 있더라. 아니 생각해보면 내 일생 내내 당산나무 한그루를 친구삼아 입때껏 이만큼 버티고 살고 있었나보다 뭐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당산나무가 때론 외할아버지가 되었고 때론 아버지가 되었고 때론 애인이 되었고 시절에 따라 내 선택에 의한 대상만 달랐을 뿐 오늘 날마저 나는 한 그루의 당산나무를 내 맘속에 심어놓고 살고 있더라. 쓸쓸하다 외롭다 투정부리고 같이 밥 먹자, 놀아 달라 졸라대고 재미없는 내 이야기 들어 달라 윽박지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스런 내 기분 따라 쉬임 없이 불러대고 있으니 그 놈은 아마 죽을 맛일 게다. 어디 그것뿐인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살짝 뒤로 가서 숨어버리기도 하고...ㅋㅋㅋ

혼자 사는 일이 버거워 힘들고 지칠 때 나는 내 맘속에 당산나무 한 그루를 모셔놓고 그 놈에게 의지하고 오늘도 당당하게 씩씩 하게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 어떤 사람은 친구에, 어떤 사람은 남편에 그렇게 그렇게들 의지해 살고 있을 것인데 오늘 나는 햇빛도 바람도 비도, 혹은 영양주사도 놓아가며 소중한 내 당산나무를 보호하며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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