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케가 며칠전에 전화가 왔다.
“ 고모, 어머님 수술하시는데...”
확 열이 받친다.
“ 그래서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
멀쑥한지 “ 그게 아니고요, 고모도 제 형편아시잖아요. 그래서 간병인을 쓰려고 하는데 혹시 오해하실까봐서요.“
“ 얼마나 계셔야 하는데? ”
“ 한 달 정도 계셔야 한다고 하네요. ”
“ 간병인 쓰면 그 돈도 만만치 않은데...”
난 말끝을 흐린다. “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 고모랑, 큰아빠가 좀 도와주신다고 하니 알아서 해결 할게요.”
고맙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열 받은 내가 머쓱하기도 하다, 꼭 이런 일이 있으면 모든 일을 앞장서 해결하고 적당히 내 손에서 끝내곤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형편에 짜증도 나고, 또 내 형편 고려하지 않고 내 손에서 얼마간 나오겠지 기대할 형제들이 야속해서 미리 열 받고 그러다가 자기네들 끼리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나오니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얼마 전에 엄마가 나에게 야속한 지 한 말씀하셨다.
“ 넌 참, 냉정혀. 어떻게 엄마손 한번 안 잡아보니. 미강이는(여동생) 내 손잡고 주무르고, 얼굴에 배에 문지르고 오만 짓을 다 허는디... 넌 한 번도 내 손조차 잡아보지 않는 것이 어쩔 땐 좀 야속타.“
그렇다. 난 지금 오십이 넘었어도 아직도 엄마에게 뿐만 아니라 친구에게도 심지어 애인에게도 조차도 스킨쉽에 어색하다. 가끔씩 그래서 친구들이 일부러 엉겨 붙어도 짜증을 내거나 도망친다. 틀림없이 나에겐 나도 모르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을 거야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 엄마이야기이다. 엄마는 지금도 가끔씩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해 주신다. 5살쯤에 언니랑 둘이서 석양 무렵 외할머니(엄마의 외할머니)가 와서 엄마를 끌고 가는 것을 봉창문 사이로 보면서 ‘엄마, 엄마’ 하고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엄마의 아버지 곧 나의 외할아버지가 지금 생각하면 알콜 중독자 이셨나보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외할머니 입장으로서 딸의 고된 살림이 안타까워 딸을 도로 데려다 만경 어디쯤 부잣집에 다시 시집을 보내시려고 못 간다고 못 간다고 버티는 딸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데려가셨단다. 그때를 생각하시면 지금도 가슴이 시리다고 하신다. 알콜 중독자 수준이셨던 외할아버지와 어린 두 딸의 동거,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내셨는지 짐작가고도 남는다. 아무튼 그런 세월을 살았던 분의 큰 딸이 바로 나다. 엄마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나에게 전해진 진 것은 아닐까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어찌 어찌 해서 트라우마 투성이인 아버지와 엄마가 만나서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살이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독세기에 쌀겨를 방앗간에서 얻어와 풀떼죽을 끓여먹었을 때도 있었고 외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쌀밥 한 그릇만 먹었으면 하시 길래 당시 엄마의 친정 쪽 사촌이 그래도 농사깨나 지으시는 분들이래서 쌀 한말만 다음 가실에 주기로 하고 빌려 달랬더니 거절 하셨다 해서 그 뒤로 아버지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발걸음을 끊었다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야 겨우 화해를 하셨다고 하신다. 평생에 포원이 얼마나 지었었는지 이런 저런 말씀을 어린 나에게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런 가난 속에서 내가 태어났으니 태어난 지 삼일도 안돼 들로 산으로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러 다니셨을 것이다. 당연히 아기였던 나는 외할아버지의 몫이었을 것이고 ... 아기였던 나는 또 얼마나 울었을까, 엄마 품을 떠나면서. 날마다... 엄마의 젖이 퉁퉁 부울 때면 외할아버지가 나를 안고서 들로 산으로 엄마를 찾아 다니셨다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어느 날 나에게 왜 그렇게 눈물이 많은가, 왜 그렇게 감정이 예민한가 왜 그렇게 나는 남들과 다를까 많은 생각을 하며 심리학책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나도 모르는 나의 트라우마의 시작이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짐작되어 진다. 어린 시절에도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늘 혼자였었다.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상상하고 혼자 노는 것이 가장 편했고 즐거웠었다. 그렇게 책속에 파묻혀 살았으니 내 엄마와 책속에 나오는 엄마에 대한 괴뢰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엄마의 낭캉낭캉한 목소리, 또 그 정의로운 성격, 팔팔한 활동력으로 인해 동네에 아주머니들 싸움에 주인공역할을 도맡아 하셨고 그런 엄마를 보며 저분이 제발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 동네 아주머니들이 “너 지금 엄마가 진짜 네 엄마 아니야. 넌 칠다리 다리 밑에서 주워왔단다.” 라고 곧잘 놀리셨다. 난 그것이 정말인지 알고 얼마나 많이 울었었는지... 또 내 반응에 재미있으셨던 분들이 또 놀리고 놀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난 정말 저분이 내 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했다. 어느 날 고등학교 무렵 아버지에게 울면서 정말 우리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생떼를 썼던 기억이 날 정도로...수없이 엄마와 싸운 기억이 난다. 난 고집불통이었고 괄괄한 성격에 그런 날 꺽어 보겠다고 대립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참 이상한 것은 똑 같은 부모에게서 생산된 아이들의 성격이 왜 그렇게 다를까 고 생각해 본 적이 많다. 나와 내 동생들... 아마 나는 어떤 연유로든지 나의 엄마상과 실제의 엄마상의 간격이 너무 커서 도저히 엄마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비극 아닌 비극의 세상에
갇혀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렇게도 생각되어진다. 한 번도 어떤 일을 엄마에게 상의해본 적도 엄마의 괴로움, 엄마의 아픔에 뭔가 내 감정을 표시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큰 딸이고 나름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해택을 받고 자랐던 까닭에 나는 엄마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만이 팽배했다. 이제 칠순이 넘어 이쪽저쪽이 아프다고 하시는데 ‘날 보고 어떻하라고’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내가 형편이 좋았을 때는 엄마는 내가 책임지어야지 그런 의무감만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자신이 없다.
어제 밤 병원에 입원하신 엄마를 위해 단호박죽을 한 그릇 끓여 병원을 찾아갔다. 기운도 없어 보이고 환자복을 입고 계시는 엄마의 모습에 속이 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응, 이거 단호박죽 이야. 렌지에 데워서 따뜻하게 잡수시라고. 내일 다시 또 올게.” 간지 오분도 안돼서 집에 간다고 했더니. “왜 저 연속극 보고 가지.” 날 좀 더 붙잡아 놓고 싶은 엄마의 핑계를 알면서도 나는 서둘러 자리를 뜨고 말았다. “저기, 냉장고에 떡이랑, 찰밥찐거 있으니 가지고가.” 간병인에게 보따리를 챙기게 하신다. 문병 온 동네 엄마들이 가져온 음식을 그렇게 한보따리 챙기신다. 난 어찌해야 하나. 난 무엇으로 갚아야 하나. 가슴이 울컥...
내 쌀쌀맞은 성격, 마음은 있지만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나, 나, 나... 참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