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오늘 하루 어떤일이, 어떤 만남이, 어떤 생각이 나를 찾아올까?
은근한 설레임에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맘속에 하고 싶은 말들은 채곡채곡 쌇여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부터풀어나가야 할지
낙시줄을 늘어뜨리며 물고기가 찌를 건드릴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갑자기 열심히 열심히 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으흐!!! 걸렸당...ㅋㅋㅋ
얼핏 어디에선가 어느 작가가 툭 던진 말이 생각났어요.
"세상에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어요. 피카소의 게르니카 앞에 서본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요."
그 말을 빗데서 오늘 아침 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답니다.
스스로 발열을 하는 사람과 그 열을 받아서 자신을 뎁힐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ㅋㅋㅋ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념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도시 게르니카가 1937년 4월 독일 나치의 공습에 의해
무자비하게 폭격당하여 시의 70%가 파괴되었던 참혹한 사건을 그린것이라 합니다.
열심히 열심히 몇년간 미술클럽활동을 하면서 일상의 사치를 누리긴 누렸는데
웬만한 유명한 그림들 앞에서도 그리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의 부재 였으리라 지금은 생각합니다.
제 오만중의 하나가 제 직관에 대한 맹신입니다.
그림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알게되면 제가 느낄수 있는 고유의
감상을 해칠 수 있다는 가짢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오만때문인지 그렇게 많은 세상의 명화들을 직접눈으로 접해보고도
내안으로 들어오는 몇몇 작품들밖에 소화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미에 대한 쾌락을 누리고 싶은 허영끼가 여전히 남아있어 종종
그림에 관한 책들을 접하다보면 뜻밖에도 어느그림에 대한 눈이 확 트일때가 있답니다.
게르니카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게르니카앞에서 폭력과 저항이라는 주제를 읽는답니다.
저도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 주은 저 "그림에, 마음을 놓다."라는 책에서 주은님의
해설을 읽고 아하 그렇구나 이해의 폭을 넓히니
비로소 게르니카에 대한 제대로된 감상의 기회를 얻게되었습니다.
다음이야기는 주은님의 책에서 따온 이야기 입니다.
"피카소가 마리 테라즈 발테르란 여자와 동거를 하는중
도라 마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답니다.
마리는 그리스 여신상처럼 깍아놓은 듯한 얼굴에 반짝이는 금발, 그리고 청회색눈동자를
지닌 완벽한 육체의 소유자였으며, 순진하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여자였고
도라는 얼굴 윤곽이 강하고 뚜렸했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정머리에 까만 눈동자를 지닌
자의식과 자기 표현력이 강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도라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내내 함께 했던 여성으로서
게르니카속에 이 두여인이 항상 대비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게르니카의 화면 맨 오른쪽에 절규하는 여인은 도라이고 그림 왼쪽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은
마리, 중앙의 날뛰는 말처럼 보이는 것은 피카소자신, 이말은 혀에 날카로운 칼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공격적으로 변한 도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뒤로 왕왕 긴 설명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책을 찾아 읽어보시길...)
잠시 해찰을 했지만 본론으로 넘어가면
얼마전 아주 예쁘고 야무진 젊은 처자로 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언니, 제 스스로를 뎁힐 수 있는 방법좀 말해주세요."
으흐...
제가 요즈음 줄창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제 사는 꼴이 넘 쓸쓸해 가슴이 시린 날들이 너무 많습니다.
맨날 울고 짜고 설치고 발치고...
내 가슴은 연한 홍시마냥 물러터졌는데 내 말투와 표정에는 단호함이 넘쳐납니다.
카멜레온처럼 철저히 상황에 따라 나 자신을 변신시키며 살아온 덕택에
전 우아한 백조가 되었습니다. 아니 외로운 백조가 되었답니다.
아니 흑조인가? ㅋㅋㅋ
암튼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듭디다.
나 도저히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난 우아함도 위장도, 단단함도, 세련됨도 다 싫다.
난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울고 싶으면 울자, 소리내어 통곡하며...
감정은 피하려 하면 오히려 더 커진다고 합니다.
"가눌수 없는 감정때문에 내는 통곡이라면
억누리지 말고 터뜨려 버리자.
헛되고 헛된 세상사, 남의 시선, 관계의 법칙 모두모두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통곡했습니다. 어느날 밤새 내내 그렇게 울고 짜고...
그런 몇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뭔가를 시작했습니다.
" 자, 지금부터 나를 뎁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참 이상합니다. 구하라 하면 주실것이요. 찾으라 하면 찾을 것이라,
고마운 하느님의 말씀!!!
" 마음이 흐르는 데로 살기 "
내 도덕적 양심이 허용하는한,
관계의 인연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이라는 조건하에 이젠
"내 맘의 물코를 터주자." 이런 주문...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보여주기,
화나면 화나는 만큼 알려주기,
참아야 한다면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아내기,
즐길 수 있으면 즐길 수 있을만큼 즐기기,
내 용량에 따라 모든 기준과 크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주문을 걸어보니
어느 새
내 맘이 조금씩 조금씩 데워지고 있더라구요.
스스로 발열을 하려니, 엔진이 돌아가려니 처음에는 용을 쓰게 됩니다.
생각나세요.
우물펌프에서 물을 뽑아내기전 한 두어바가지 펌프에 물을 채워줘야
차고 시리지만 맛있는 지하수를 품어나오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내 맘속의 달빛을 길어내기 위해 이미 난 내 주문을 걸어두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를 뎁혀가고 있습니다.
드뎌 스스로를 뎁히는 방법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참 부러운 것은 어떤 사람은 이런 저런 잡생각 없이 행운아처럼 주어진 환경에 의해
이미 뜨끈뜨끈한 아랫목 구둘장을 누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고 또 부러워했습니다.
난 왜 그런 사람으로 살수 없었을까 자아연민에 오랫동안 푸념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이것이 내 성정이요, 내 팔자려니 그런 적당한 체념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했습니다.
참 힘든 발걸음입니다.
따뜻한 마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자신을, 타인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고
따뜻한 관계의 연을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뜻한 인연을 만들지 않고서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나처럼 스스로 발열을 해야하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은 쉼없이 자신을 데울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젊은 처자의 질문에 제가 뭐라고 답했냐면요.
" 내 마음이 흐르는데로 살면,
나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면서 살면,
사랑하고 살면,"
그렇게 답했답니다.
스스로 발열을 해야만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발열된 열로 뎁힘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
어찌보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난 오늘 스스로 발열을 내야만 하는 사람편에 서야하는 내 운명에 대한 생각에 좀 씁쓸했지만
빨리 빨리 펄펄 끓는 뜨거움으로 다른 편에 서있는 누군가를 뎁힐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갑자기 분주한 오늘아침,
잔뜩 황토흙 묻힌 흔적을 사방에 펼쳐놓고 간 어젯밤 손님들에 대한 조그만 푸념을 하면서
이것하나 품지 못하는 내 용량을 책하며
그래 너 그것밖에 되지 않니, 열을 내, 열을 내, 발열을, 뎁혀 니 마음을 따뜻하게...
이런 소소한 실천부터 시작해야지, 그렇게 푸념하는 자신에게 피식 웃으며 주문을 걸어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