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부터 잠을 통 못잡니다.
자기는 자는데 선잠이 드는지
왕왕거리는 꿈들이 밤새 들락날락...
급기야 에라 모르겠다 새벽녁에 깨어 공상의 세계로 진입하곤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오랫만에 늦잠도 자고
빨래도 하고 집에서 DVD도 볼까하고 챙겨갔건만 3시쯤 깨어 꼴딱...
이생각 저생각으로 뒤척이다 며칠 전 전해 들은 친구네집 소식이 자꾸 머리속을 뱅뱅거립니다.
이 이야기를 먼저 정리해야겠구나.
나한테 저 세상에 있을 친구가 말을 건네오는게 아닐까하는 이상한 생각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70년대 초반쯤인가,
우리동네에 유일하게 ' 멋진 정원과 중정을 마주한 응접실을 가진 하얀 양옥집'
그 응접실을 끼고 ㄷ자모양의 너댓개의 방들이 있었던 집
그때 우리집은 딸랑 방 두칸짜리 오두막에서 살때 였으니
어린맘에
마치 신데렐라가 살거 같은 저 집에서 나도 한번 살아봤으면....
싸낙배기 우리엄마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을땐
저 양옥집 친구엄마같은 우아한 엄마가 내 엄마였으면...
숱하게 마음을 쥐었다 폈다...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했던 그 시절이 새삼 맘을 시끄럽게 합니다.
며칠전 아직도 고향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가 전한말...
"야, Y네집 내놨데."
"왜, 팔려고"
"응, Y네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셔 병원에 계시고 엄마는 큰아들이랑 합치려고 올라가신데."
"와, 아깝다, 얼마에 내 놓으셨는데."
"이억 몇천인가, 근데 그집 너무 오래 되어서 사도 수리비 상당히 나올것."
"근데 , 나무랑 정원이랑이 멋지잖아.
중학교 이학년 가을무렵이래 한번도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담장너머 울창한 정원을 꼭 한번 보고 싶드만."
"글치, 집빼고 나무랑 땅값생각함 그정도는 받아야겠드라고."
"아! 이쯤에서 내가 부자였드라면...
난 그동안 뭘하고 살았지..."
단돈 20만원도 수중에 없으면서 난 그 집이 누군가에게 팔린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멋진 정원을 가진 하얀양옥집엔 내 친구 Y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물가물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여리디 여린 하얀 얼굴, 멋드러진 뻐드렁니, 오똑한 콧날
그녀가 풍겼던 애잔한 아우라 그정도 입니다.
뒤적뒤적 아직도 나는 세장의 그녀의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쯤엔가 최신유행 큼직한 장미문양의 나팔바지와
검정 끈 구두를 신고 햇빛이 눈부셔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나란히 찍은 사진...
중학교 졸업식날 같이 졸업사진 못찍었다고 저녁무렵 찾아와
학교미끄럼틀 위에서 찍었던 사진...
또 한장은 고등학교때 세라복을 입고 스케치를 하고 있는 사진...
오늘 아침은
앨범깊숙히 숨겨놓고 몇년에 한번씩 내 맘에 파문을 던지곤 하던 사진들을 찾아보려 뒤적뒤적...
지금 사는 곳이 임시거처라서 앨범이 몽땅 친정집 창고에 쌇여 있구나...
언젠가 몰래 친구의 사진을 보고 있던 나에게 엄마가 큰 소릴 내셨습니다.
"죽은애 사진을 왜 가지고 있어, 어서 버려. 그런 거 갖고 있는 거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차마 못버리고 몇 십년을 그렇게 가슴에 묻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참 예뻣습니다.
열댓명의 동네또래 가시네들과는 차원이 틀린 아우라를 가졌던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멋진집에 사는 그녀였던 만큼 뭔지 세련미가 넘치고, 말도 살살예쁘게...
전체적으로 가는 선을 가진 몸매에 애잖함이 묻어나던...
그래서 아이들의 시샘을 대상이 되곤 했었습니다.
또래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차원이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 그녀 아버지의 영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내던 색깔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아마 샤갈의 색깔을 닮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그녀와 절친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아마 내 성적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친구엄마는 시험때쯤부터 꼭 나를 불러 그애랑 같이 공부하게끔 했던 기억...
맛있는 과일들과 살살녹는 양과자, 그리고 식모언니의 친절함에 매료되어
친구엄마의 부름에 쏜살같이 달려가곤 했던 나,
밤새 공부하는 척 하며 히히낙낙 뭔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새벽녁에서야 잠들곤 했던 기억...
중2학년 가을이었습니다.
그때 막 내 첫사랑이 시작 되었을 무렵
중간고사가 코앞에 닥쳐와 또 친구네 집으로 함께 공부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그녀의 책상위에 한아름 웬 코스모스가...
내가 젤 좋아하는 코스모스가 색색별로 한 무더기 책상위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야, 웬 코스모스를 저렇게 많이 꺽어왔어."
"응, 내가 꺽어온 것이 아니라 S가 주고 갔어."
"뭐? S가"
"응, 군산에서 오는 길에 꺽어왔다며 놓고 가데."
나, 그날 머리도는 줄 알았죠.
바로 그 S란 놈이 내가 품고 있었던 머시마, 나의 첫사랑... 그놈이었단 말입니다.
난 그날 아무말없이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는 다시는 그녀의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와 나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냥 배가 아파서 집에 갔고 혼자서 공부하고 싶으니 다시는 날 부르지 말라고 선언을 해버렸지만
표면적으로는 우린 여전히 좋은 친구였습니다.
또 내 성격이 좀 요상해서 동네또래아이들과는 잘 섞이지 않는 편이었고
아마 친구로서 그녀를 버리고 싶은 질투심에 더 가까이 갈수 없었던 고로
난 참 외로왔던 사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외로움 , 그것이 참 묘한 놈입니다.
그놈이 가슴속에 들어차기 시작하면 드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는 길을 만들어주더이다.
첫사랑을 가장 친하던 친구에게 뺏겼다는 나 혼자만의 배신감.
내 운명은 그렇게 나로부터 자꾸 뭔가를 빼았아가는구나하는 상실감.
그리고 친구의 남자를 몰래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는 죄의식...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 없지만 감성이 예민할데로 예민했던 사춘기 여자아이에겐
온 세상이 비극 덩어리였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시절엔 고등학교입학시험을 치뤄야할때였고 군산에서 공부잘한다는 애들이 모이던 학교였습니다.
우리초등학교 친구들 세명만이 그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나와 또다른아이는 원래 우수한 성적의 소유자였지만 친구 Y가 그학교에 들어갔다는 현실은
우리들 사이에 작은 스캔달을 만들었습니다.
"제는 보결생이래. 돈 많이 내고 돈으로 입학했데."
수근수근... 아마 지금 생각하면 워낙 그림을 잘 그렸던 Y였던 지라 특기생쯤 됐을텐데...
고등학교 첨 중간고사가 끝나고 며칠 뒤,
그날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아침이었습니다.
우리마을에서 군산까지 20리, 비만오면 버스가 시궁창에 빠져 지각하던 날이 허다했던때였는데...
버스정류장에 우산을 쓴 동네어른들. 학생들. 친구들이 삼삼오오모여 수근수근...
"야,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버스가 또 안온데?"
"응, Y가 죽었데. 자살했데. 가슴이 시컴게 죽어있더래..."
"뭐라고, 뭐라고..."
"애를 임신했데, S가 밤이면 담을 넘어 그애 방으로 몰래 들어가곤 했는데..."
그다음부턴 아무 소리도 나에게 들려오지 않았고
내 눈은 아직도 가슴에 몰래몰래 품고 있는 S를 찾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자살했다는 사실보다 난 내 첫사랑 그놈이 얼마나 슬플까 그애의 안색만 살폈다고나 할까.
그날은 예상했던 데로 철길따라 20리 그리고 학교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가야했었고
난 S의 기색을 살피며 바짝 그놈 뒤를 쫒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 친구 Y는 갔고 우리들은 여전히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춘기를 지나
그렇게 그렇게 잘 들 살고 있습니다.
내 첫사랑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 1학년쯤 되었을때 비로소 정리가 되고...
어느날 그동안 써왔던 다섯권의 일기장을 몽땅 태워버렸습니다.
이로써 내 사춘기도 내 첫사랑도 내 질투심과 죄의식도 끝났으려나...
그런데 사는게 그럽디다
그 미칠것같았던 심정들이 어느날 불쑥 불쑥 시도 때도 없이 되살아나더이다.
대상만 달랐지, 여전히 나는 아직도 사춘기소녀의 열병을 끊임없이 달고 살더이다.
그래서 외롭고 그 외로움이 나 자신들여다보기로 전환되고
나이와 상황에 따라 깊이와 색깔이 다를뿐 그 놈의 열병이 시작되면
속은 뒤집어져도 내 내면 깊숙이 감춰져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게되더이다.
그것이 외로움의 시작이 되고 시간이 가면 그 외로움도 고독이 되고,
고독으로의 진행과정을 음미하다보면 어느새 난 그 고독을 즐기는 마음의 여유...
그 여유가 생기다보니 그 빈공간을 채우기위해 내 내면의 어떤것들이 저 밑바닦에서
스물스물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이다.
도대체 정원이 있는 내 친구의 집이 팔릴것이라는 이야기에 난 왜그렇게
몇날 몇일을 뒤숭숭 잠을 못이루게 되었을까 오늘 아침 베게머리에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바로 내 친구 Y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내 속에 들끓고 있는 열병이 겹쳐지며
인생은 그런거야,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이런 모습으로 내 안으로 가라앉게 될거야
그런 소리들을 들려주는 듯 합니다.
아마 Y가 지금도 살아있었더라면 나의 절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감성과 나의 감성이 만나 우린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무가 되었을 것 같은...
그래서 사는 것이 지금처럼 팍팍하고 더딜때 나의 가장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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