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에서 칸트를 거쳐 라투르까지
들어가며: 짧은 인용문 앞에서 멈추다
요즈음 브뤼노 라투르에 대한 공부에 돌입했다. 우선 개론서부터 읽을 요량으로, 김환석이 쓰고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펴낸 아주 얇은 책 『브뤼노 라투르』를 골랐다. 다음은 이 책 44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뒤집어 철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라투르의 철학은 자연과 사회라는 양극보다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이라는 중간지대를 우선시해 근대적 헌법을 뒤집었다. 라투르는 근대적 헌법을 "하이브리드 세계에서의 하이브리드 사고"(Blok & Jensen, 2011)라고 불리는 비근대적 헌법으로 대체했다.”
세 문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대목이었지만, 나는 이 앞에서 내 지식의 한계에 직면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무엇을 뒤집었다는 것일까. 근대적 헌법이란 무엇이고, 하이브리드란 또 무엇일까. 이 문장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데카르트와 칸트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라투르에게 돌아와야 할 것 같았다. 이 글은 그 길을 따라가며 스스로 이해한 것을,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함께 걸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적은 공부의 기록이다.
세 철학자가 붙잡은 같은 질문
데카르트(1596~1650), 칸트(1724~1804), 라투르(1947~2022)는 살았던 시대가 수백 년씩 떨어져 있지만, 사실은 같은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아는 나와 알려지는 세상은 어떤 관계일까?"라는 질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세상을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세상'으로 나누었다. 칸트는 그 둘 사이에서 앎이 이루어지는 방향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리고 라투르는 이렇게 둘로 나눈 데서 출발하는 생각의 습관 자체를 문제 삼았다. 세 사람의 구분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라투르는 이것들을 서양 근대가 세상을 바라보아 온 하나의 줄기로 묶어 읽었다. 이 흐름을 한 사람씩 천천히 따라가 보자.
1. 데카르트: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찾은 '나'
왜 의심부터 시작했을까
데카르트가 살던 17세기 유럽은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교회와 옛 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갈릴레이 같은 과학자들이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서 그동안 믿어 온 것들이 틀렸다는 사실이 하나둘 드러났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배웠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데카르트는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믿은 것이 틀렸다면, 내가 아는 다른 것들도 틀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로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의심의 실험
그래서 데카르트는 집을 새로 지으려는 사람이 낡은 집을 땅바닥까지 허무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치워 버리기로 했다. 이것을 '방법적 회의'라고 부른다. 의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바닥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의심이라는 뜻이다.
먼저 그는 눈과 귀 같은 감각을 의심했다. 멀리 있는 네모난 탑이 동그랗게 보이기도 하고, 물에 넣은 막대기가 휘어 보이기도 하니 감각은 우리를 자주 속인다. 다음으로 그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도 우리는 책상에 앉아 있고 손을 움직인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더 무서운 상상까지 했다. 아주 힘센 악마가 있어서 내가 "1 더하기 1은 2"라고 생각할 때마다 일부러 나를 속이고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수학조차 믿을 수 없게 된다.
끝까지 남은 한 가지
이렇게 모든 것을 지워 나가던 데카르트는 마침내 하나를 발견했다. 악마가 아무리 나를 속인다 해도, 속임을 당하려면 '속는 나'가 있어야 한다. 꿈을 꾸더라도 '꿈꾸는 나'가 있어야 하고, 의심을 하더라도 '의심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생각하고 있는 나는 절대로 지울 수가 없다. 여기서 나온 말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데카르트는 이 문장을 모든 지식을 다시 쌓아 올릴 첫 번째 주춧돌로 삼았다.
세상을 두 개로 나누다
그런데 이 발견에는 중요한 결과가 따라왔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생각하는 나'뿐이고, 내 몸과 바깥 세상은 그다음에야 증명해야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세상에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것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크기도 무게도 없이 오직 생각만 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와 넓이를 가지고 자리를 차지하며 기계처럼 움직이는 '물체'다.
데카르트는 사람의 몸도, 동물도, 강물도, 별도 모두 물체 쪽에 넣었다. 그에게 강아지는 시계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려 움직이는 정교한 기계였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로 기계였지만, 이 땅의 생명체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그 기계에 생각하는 마음이 결합된 존재였다. 흔히 이 생각을 커다란 로봇 안에 작은 조종사가 앉아 있는 모습에 빗대곤 한다. 로봇과 바깥 세상은 모두 기계이고, 조종사만이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 자신은 이 비유에 선을 그었다. 그는 나는 뱃사공이 배에 타고 있듯 몸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몸과 아주 깊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배가 부서져도 뱃사공은 아프지 않지만, 내 몸이 다치면 나는 곧바로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마음과 물체가 어떻게 그토록 단단히 붙어 있을 수 있는지는 데카르트도 끝내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렇게 세상에 마음과 물체라는 두 종류의 실체가 있다고 보는 생각을 '이원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여기에서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대상을 나누어 보는 습관이 자라났고, 이 습관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양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 되었다.
2. 칸트: 세상이 우리에게 맞춰 나타난다
두 편으로 갈라진 철학자들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크게 두 편으로 갈라져 다투었다. 한쪽은 '합리론'이라 불리는 편으로, 데카르트처럼 진짜 지식은 머릿속의 생각과 이성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다른 한쪽은 '경험론'이라 불리는 편으로, 사람은 태어날 때 하얀 도화지 같아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쌓여야만 무언가를 알게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경험론 쪽의 흄(1711~1776)이라는 철학자가 아주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공이 다른 공에 부딪히면 그 공이 굴러간다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다는 것일 뿐, 내일도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을까? '원인과 결과'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믿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 질문대로라면 과학의 법칙조차 확실하지 않게 된다. 칸트는 흄의 글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고백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질문의 방향을 뒤집다
칸트는 오랜 고민 끝에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바깥 세상이 먼저 정해져 있고, 우리 머리는 그 세상을 거울처럼 비추거나 사진처럼 찍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울이 흐리면 어쩌나, 사진이 틀리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물었다. 거꾸로, 세상이 우리 마음의 방식에 맞추어 나타나는 것이라면 어떨까? 이 생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해가 지구 둘레를 돈다는 오래된 생각을 버리고, 지구가 해 둘레를 돈다고 보는 순간 하늘의 움직임이 훨씬 잘 설명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칸트도 마찬가지로 아는 사람이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는 사람의 인식 조건에 맞추어 나타난다고 보는 순간, 많은 문제가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칸트가 뒤집은 것은 데카르트의 마음과 물체의 구분 그 자체라기보다, 앎이 이루어지는 방향이었다.
벗을 수 없는 안경
칸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는 안경 비유가 가장 좋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파란 안경을 쓰고 있고, 이 안경은 평생 벗을 수 없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파랗게 보일 것이고,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은 파랗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이 정말 파래서가 아니라 우리 안경이 파랗기 때문이다.
칸트는 우리 마음에 이런 안경이 두 겹으로 끼워져 있다고 했다. 첫 번째 안경은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든 반드시 어딘가에, 그리고 언젠가에 있는 것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아무도 할 수 없다. 두 번째 안경은 '원인과 결과', '하나와 여럿' 같은 생각의 틀인데, 칸트는 이것을 '범주'라고 불렀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저절로 "왜 그랬지?" 하고 원인을 찾게 되는데, 이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흄의 질문에도 답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는 우리 마음의 안경이니까,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학의 법칙은 확실하다. 다만 그 확실함은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상 안에서만 성립한다.
현상과 물자체
여기서 칸트는 중요한 구분을 하나 했다. 칸트는 인간에게 경험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과를 보고 빨간색과 둥근 모양을 알아보는 것처럼, 사물은 인간의 감각과 인식 능력을 거쳐 우리에게 나타난다. 반면 '물자체'는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와 상관없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할 때 쓰는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인간의 인식 조건을 벗어나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 수는 없다. 안경 비유를 빌리면, 우리는 안경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지만 안경을 벗은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는 확인할 길이 없는 셈이다.
결국 칸트는 철학의 중심을 '세상'에서 '아는 사람'으로 옮겨 놓았다.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큰 혁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칸트는 한쪽 끝에 인식하는 주체를, 다른 쪽 끝에 닿을 수 없는 물자체를 세워 두고, 둘이 만나는 자리에서만 세상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라투르가 칸트를 근대의 사고방식을 가장 날카롭게 완성한 사람으로 꼽으며 문제 삼는 것이 바로 이 양쪽 끝의 구도다.
3. 라투르: 우리는 한 번도 깔끔하게 나뉜 적이 없었다
실험실을 구경한 철학자
라투르는 조금 특이한 철학자였다. 책상에 앉아 생각만 하지 않고, 1970년대에 미국의 한 과학 연구소에 들어가 2년 동안 과학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마치 낯선 부족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처럼 말이다.
그가 본 과학의 모습은 교과서와 달랐다. 교과서에서는 과학자가 자연을 들여다보고 진리를 '발견'한다고 하지만, 실제 실험실에는 값비싼 기계, 실험용 쥐, 시약, 연구비를 주는 기관, 논문을 심사하는 동료들, 서로 경쟁하는 다른 연구팀이 한데 얽혀 있었다. 하나의 과학적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서로 밀고 당기고 연결되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자연만으로도, 사람만으로도 과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근대인들의 약속, '근대적 헌법'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라투르는 1991년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를 '근대인'이라고 부른 서양 사람들이 세상을 두 개의 상자에 나누어 담기로 한 큰 약속을 했다고 말한다.
한 상자에는 '자연'을 넣는다. 돌, 바람, 바이러스, 별, 화학물질처럼 사람이 만들지 않았고 사람의 뜻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들이다. 이 상자는 과학자가 맡는다. 다른 상자에는 '사회'를 넣는다. 사람, 법, 돈, 나라, 정치처럼 사람들이 함께 만들고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상자는 정치가와 시민이 맡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규칙은 두 상자를 섞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정치에 끼어들면 안 되고, 정치가는 자연의 사실을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된다.
라투르는 이 약속이 한 나라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규칙인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고, 이것을 '근대적 헌법'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의 마음과 물체, 칸트의 인식하는 주체와 물자체, 그리고 자연과 사회는 서로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라투르는 이것들을 세상을 양쪽 끝으로 갈라놓는 같은 사고방식이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읽었고, 그 가운데 칸트를 이 헌법을 가장 날카롭게 완성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데 세상은 섞인 것투성이다
문제는 실제 세상이 이 약속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데 있다. 라투르는 신문을 펼쳐 보라고 말한다. 한 면 안에 남극 오존층의 구멍, 냉장고 회사의 이익, 화학자들의 연구, 여러 나라 정상들의 회의, 피부암에 대한 걱정이 한꺼번에 실려 있다. 오존층의 구멍은 자연일까, 사회일까? 대기와 햇빛이라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만든 냉매와 공장과 국제 협약이 뒤엉켜 생긴 것이다. 어느 한 상자에 깔끔하게 넣을 수가 없다.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미세먼지는 바람과 공장과 자동차와 환경법이 얽혀 생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자연에서 왔지만 비행기 노선과 마스크 정책과 백신 공장과 사람들의 두려움과 뗄 수 없이 엮여 퍼져 나갔다. 바다를 떠도는 플라스틱, 기후 위기, 우리 손안의 스마트폰도 모두 반은 자연이고 반은 사회다. 라투르는 이렇게 두 상자 사이에 걸쳐 있는 것들을 '하이브리드', 곧 '잡종'이라고 불렀다.
앞에서는 나누고, 뒤에서는 섞고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 사회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 왔다. 한편으로는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건 자연의 일이야", "이건 사회의 일이야" 하고 이름표를 붙여 깨끗하게 걸러내는 이 일을 라투르는 '정화'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과 정치, 기술과 자연, 사람과 사물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 새로운 존재와 현상을 만들어 낸다. 이 일을 라투르는 '번역'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근대 사회가 자연과 사회를 구분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렇게 구분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두 영역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잡종을 만들어 왔고, 그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신기하게도 근대인들은 두 상자가 따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놓고 잡종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이름표를 붙여 버리면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따져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플라스틱도, 화학비료도, 기후 위기도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은 채 불어났다. 그래서 라투르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인들은 스스로 세상을 깔끔하게 나누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다.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
사물도 행동한다
라투르는 사람만 무언가를 '하는' 존재라는 생각에도 의문을 던졌다. 학교 앞 도로의 과속방지턱을 떠올려 보자. 예전에는 교통 지도를 하는 사람이 서서 "천천히 가세요"라고 말해야 했다. 지금은 과속방지턱이 그 일을 대신한다. 운전자는 차가 덜컹거리지 않게 스스로 속도를 줄인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지키는 일을 하는 것은 누구일까? 도로를 만든 사람, 규칙을 정한 사람, 시멘트 덩어리, 운전자, 자동차의 바퀴가 모두 함께 그 일을 하고 있다.
라투르는 이렇게 다른 것에 영향을 주어 세상을 바꾸는 모든 것을 '행위자'라고 불렀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바이러스든 동물이든, 이 행위자들이 서로 이어진 그물망을 따라가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다.
새로운 약속, '비근대적 헌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투르는 옛날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는다. 과학을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 사회의 차이가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낡은 약속을 고쳐 쓰자고 제안했고, 그것을 '비근대적 헌법'이라고 불렀다.
새 약속의 핵심은 출발점을 옮기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아는 나'라는 한쪽 끝에서 출발해 반대쪽 끝에 있는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 고민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세상을 아는 사람 쪽으로 돌려세운 것이었다면, 라투르는 양쪽 끝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가 뒤섞여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가운데'에서 출발하자고 말한다. 인용문이 말한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이라는 중간지대를 우선시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자연과 사회는 세상을 설명하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잡종들이 만들어지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 나중에 생겨나는 결과라는 것이다.
라투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물의 의회'라는 상상도 했다. 기후, 강, 숲, 바이러스처럼 말을 하지 못하는 것들도 과학자나 주민 같은 대변인을 통해 함께 회의 자리에 앉혀서, 어떤 잡종을 만들고 어떤 잡종은 만들지 말지를 모두 함께 따져 보자는 것이다. 숨기지 말고, 섞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섞임을 함께 책임지자는 뜻이다.
인용문에 나오는 "하이브리드 세계에서의 하이브리드 사고"는 블록과 옌센이 라투르의 사상을 소개한 책 『Bruno Latour: Hybrid Thoughts in a Hybrid World』(2011)의 제목에서 온 표현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이 잡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생각하는 방식도 한쪽 상자에 갇히지 않는 잡종이어야 한다는 것이 라투르 사상의 요점이다.
다시 인용문 앞에서: 세 철학자를 한 장의 그림으로
이제 처음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자. "칸트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뒤집어 철학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문장은, 칸트가 데카르트 이후 이어져 온 앎의 방향을 뒤집어 세상이 아는 사람의 인식 조건에 맞추어 나타난다고 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리킨다. "라투르의 철학은 자연과 사회라는 양극보다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이라는 중간 지대를 우선시해 근대적 헌법을 뒤집었다"는 문장은, 라투르가 세상을 두 상자로 나누어 양쪽 끝에서 설명하던 습관을 거두고, 잡종들이 만들어지는 가운데에서부터 세상을 보자고 한 것을 말한다. 칸트가 철학을 한 번 돌려세웠다면, 라투르는 칸트가 굳혀 놓은 그 양쪽 끝의 구도를 다시 한번 돌려세운 셈이다.
세 철학자의 생각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 보면 이렇다. 데카르트는 종이 한가운데에 선을 긋고 왼쪽에 '생각하는 나', 오른쪽에 '생각되는 세상'을 적었다. 칸트는 그 선을 더 굵게 칠한 다음, 오른쪽 세상은 왼쪽에 있는 나의 안경을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화살표의 방향을 뒤집었다. 그리고 라투르는 그 종이를 들어 올려 이렇게 말한다. "이 선은 세상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중에 그어 놓은 것입니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곳은 늘 선 위, 바로 이 가운데였어요."
데카르트와 칸트에게 철학은 '아는 나'를 단단하게 세우는 일이었다면, 라투르에게 철학은 사람과 사물이 얽혀 있는 그물망을 정직하게 따라가는 일이다. 미세먼지와 기후 위기와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라투르의 생각이 자꾸 불려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얇은 개론서의 세 문장에서 시작한 공부는 이렇게 사백 년의 철학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우리가 지금 발 딛고 선 세상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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