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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현대철학자들 개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10.

 

 

 

 

아랫글은 문학연구방법론 수업에서 배포해주신 교수님의 강의 자료를 베이스로 확장한 글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

 

 

1. 개관: 슬라보예 지젝, 급진적 사유의 광대 혹은 사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문화비평가로, 20세기 후반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철학, 정신분석, 정치, 영화, 대중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문사회 분야를 넘나들며 독특한 사유를 펼쳐왔다. 그의 글쓰기는 난해한 철학적 개념과 대중문화의 예시를 결합하는 이질적 콜라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창성과 도발성, 해체성과 유머를 동시에 지닌다.

지젝의 이론적 기반은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 게오르크 헤겔의 변증법,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놓여 있다. 그는 라깡 없이 철학은 공허하고, 헤겔 없이 정신분석학은 방향을 잃는다고 주장하며, 이 두 사상을 결합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심리적 구조와 정치적 무의식을 해부한다. 지젝은 철학이 추상적인 담론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이데올로기와 실천의 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1990년대 초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을 통해 서구 이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 지젝은 라깡주의 좌파또는 헤겔적 급진주의자로 불리며 좌파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로 부상하였다. 그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병리와 상상적 동학을 분석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적 무기력을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반복적으로 이데올로기란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역설을 제기하며, 인간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환상을 어떻게 배치하는가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그는 대중영화, 정치적 언설, 일상적 행위 등에서 '잉여쾌락', '가짜행위',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같은 개념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작동 방식을 폭로한다.

지젝은 비판적 사유를 단순히 이론의 차원이 아니라, 혼란과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는 실재(Real)’와의 마주침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그는 공산주의냐 야만이냐, 아주 간단해!”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선언을 통해, 기존 체제의 붕괴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지젝은 현대 철학과 비판 이론이 당면한 질문,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며, 욕망의 구조를 성찰함으로써 실천적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말하는 급진적 해설자이자 도발적 사상가이다.

 

2. 사상들

1) “라깡 없는 철학은 공허하고, 헤겔 없는 정신분석학은 방향 감각을 결여하고 있다

이 문장은 지젝의 철학적 정체성을 가장 응축해서 드러내는 선언이자, 그의 사유 구조를 지탱하는 두 개의 대들보, 즉 자크 라깡과 게오르크 헤겔의 통합을 전제로 한 지식 구성의 방식이다. 지젝은 이 둘의 결합 없이는 현대 세계의 이데올로기, 정치, 윤리, 주체, 쾌락, 욕망 구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라깡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지젝에게 철학은 언어, 욕망, 무의식의 복잡한 층위 없이는 실질적인 주체 이론이나 현실 분석에 닿을 수 없다. 그는 라깡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고 말하며, 현대 철학이 자주 이념적 추상화에 머무르며, 주체의 욕망과 무의식, 상징 질서의 작동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라깡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인간 주체가 언어(=상징계) 속에서만 탄생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젝은 이 라깡의 구도를 철학과 정치로 확장하며, ‘상징계 속에서 욕망은 어떻게 생성되고 억압되는가’, ‘주체는 무엇에 의해 구조화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다.

, 철학이 이념, 이성, 자유 같은 개념을 다룰 때, 그 개념을 말하고 있는 주체가 어떻게 욕망을 매개로 형성되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그 철학은 현실로부터 단절된 공허한 사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헤겔 없는 정신분석은 방향 감각을 잃는다

반대로, 지젝은 정신분석도 헤겔적 변증법의 틀 없이는 방향을 상실한다고 본다. 라깡의 사유가 언어와 무의식의 구조를 해명했다면, 지젝은 그 구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실재와 충돌하며,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가를 설명하려면 헤겔이 필요하다고 본다.

헤겔의 철학은 부정성’, 즉 모순과 충돌이 사유의 동력이라는 점을 중심에 둔다. 지젝은 이 부정성을 통해 욕망의 구조를 단순히 고정된 시스템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주체가 어떻게 반복 속에서 실재(Real)’를 마주하고 변형되는지를 사유한다. 말하자면, 헤겔은 욕망이 역사를 만든다는 것, 욕망이 반복 속에서 어떻게 전도되고, 전복되고, 새롭게 구성되는지를 알려주는 사유의 나침반인 셈이다.

두 사상의 연결: 욕망의 구조, 실재와의 마주침

라깡은 주체의 분열과 욕망의 지연, 그리고 실재(Le Réel)라는 도달 불가능한 중심을 설명했다. 그러나 라깡은 변화나 혁명보다는 구조의 고착과 반복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지젝은 헤겔을 통해 반복 속에서의 단절’, 부정성의 사건을 끌어온다. , 우리는 같은 욕망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그 반복이 때때로 구조를 뚫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이건 라깡의 구조를 헤겔적으로 틀어쥔지젝 특유의 사유 방식이다.

요약하면, 라깡 없는 철학은 주체의 분열, 욕망, 상징 질서를 놓쳐버린 채 공허한 추상에 머문다. 헤겔 없는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동학이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전개되고, 역사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지젝은 이 둘을 통합해 욕망과 실재, 주체와 정치, 이데올로기와 쾌락의 구조를 동시에 분석하는 복합적 사유를 구축한다.

 

2) 잉여 쾌락 (Surplus-Jouissance)

슬라보예 지젝은 잉여가치(surplus-value)와 쥬이상스(jouissance, 향유)를 결합시켜 잉여쾌락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 개념은 욕망의 구조를 설명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인간 주체의 쾌락 관계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라깡에서 온 쥬이상스

라깡은 쥬이상스를 단순한 즐거움이나 쾌락이 아닌, 금기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고통을 동반하는 파괴적 향유로 보았다. 다시 말해, 쥬이상스는 쾌락 원칙(pleasure principle)을 초과하는 과잉의 정동이다. 지젝은 이 쥬이상스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욕망되며, 인간 주체는 이 욕망을 통해 존재감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서 온 잉여가치

지젝은 여기에 마르크스의 경제학 개념인 잉여가치(surplus-value)를 덧붙인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창출한 부가가치를 자본가가 탈취함으로써 이윤을 남기는 체제이다. 지젝은 이 마르크스적 구조를 쾌락 이론에 결합시켜, 자본주의는 물건을 사게 만들기 위해 단지 필요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와 욕망의 경제를 조작함으로써 잉여적인 향유를 생산하고 판매한다고 본다.

예시: 스타벅스 커피

지젝은 스타벅스 커피 광고를 예로 든다.

이 커피 한 잔은 저개발국 아동을 위한 기금의 일부가 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커피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착한 소비자라는 도덕적 만족, 자기 자신에 대한 향유까지 함께 판매한다. , 커피라는 상품에는 잉여쾌락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잉여쾌락은 왜 중요한가?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잉여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어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인 쾌락(부끄러움, 죄책감, 금기의 어긋남)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한다.

자본주의는 이 잉여쾌락을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단지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 상품을 사면 너는 특별해져’, ‘너는 윤리적인 소비자야같은 정체성과 쾌락의 환상을 판다.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잉여쾌락을 통해 작동한다.

사람들은 억압당하거나 착취당하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알면서도 쾌락을 얻기 때문에 그 체제를 유지한다.

지젝의 정치철학과의 연결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억압이 아니라 향유다.”

,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향유를 허용하면서, 그것이 자발적인 동의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교묘한 형태의 지배이며, 동시에 저항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정리

잉여 쾌락이란: 금기와 결핍을 넘어서면서 얻게 되는, 초과된 향유.

자본주의는 이 잉여 쾌락을 이용해 상품을 파는 체계이다.

이데올로기는 쾌락을 통해 주체를 끌어당기며, 현실의 착취를 가리는 작동원리 이다.

3)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지젝은 1989년에 출간한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에서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헤겔-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결합한 독창적인 이론 틀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데올로기를 단지 허위 의식이나 지배계급의 세계관이 아니라, 욕망과 무의식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상징적 구조물로 재규정한다.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믿지 않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 현대인은 나는 저걸 믿지 않아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이 아이러니한 구조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무너졌다는 신화를 깨트린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

이 유명한 문장은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숭고한 대상’(sublime object)이다.

이는 라캉의 대상 a(autre)와 맞닿아 있으며,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잉여 욕망의 자리이자,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묶는 초월적 허구를 가리킨다. 국가, 민족, 정의, 자유, 민주주의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사람들은 이 숭고한 대상을 실체로 믿고, 그것을 위해 싸우며, 때로는 목숨까지 바친다. 하지만 이 대상은 언제나 부재하고, 그 결핍을 감추기 위해 이데올로기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든다.

이러한 지젝의 관점은 이데올로기를 욕망의 구조로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넘어선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단지 의식 고양이나 진실 폭로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무의식적 쾌락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소비하고 지탱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케 보이? (Che Vuoi?):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가져온 핵심 질문 중 하나인 "Che Vuoi?" (이탈리아어로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를 현대 사회의 욕망 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열쇠로 사용한다.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규정하고자 하는 주체의 불안을 드러낸다.

지젝은 인간 욕망의 본질이 자율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른다. 대신 우리는 타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하는가를 기준으로 욕망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망은 본능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특정한 직업, 이상, 사랑을 선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자가 그에게 기대한다고 믿는 것을 욕망한 결과일 수 있다. 이때 “Che Vuoi?”는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질문이 된다.

그들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이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타자에게 어떤 쾌락이나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왜 이데올로기를 계속 따르고 반복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어진다. 이데올로기는 단지 외부에서 강요되는 규범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타자의 시선과 그것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사회가, 가족이, 공동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 욕망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

지젝에게 있어 Che Vuoi?는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분해하는 급진적 질문이다.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질 때, 우리는 욕망의 경로를 전유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턱에 선다. 하지만 이 질문은 또한 공포를 수반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곧 타자의 욕망도, 나 자신의 욕망도 허구일 수 있다는 불쾌한 진실을 직면하게 하기 때문이다.

5) 상호 수동성 (Interpassivity)

Interpassivity는 지젝이 오스트리아 철학자 로버트 파플러(Robert Pfaller)와 함께 개념화한 중요한 현대 이데올로기 비판 개념이다. 이는 인터액티비티(interactivity)’에 대한 역설적 반대 개념이다.

상호 수동성이란 무엇인가?

상호 수동성이란,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행위를 대신 느껴주고, 대신 해주는대리 메커니즘에 의존함으로써 자신은 수동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제로 행동하거나 느끼지 않으면서, 대신 누군가(혹은 무언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는다.

📺 예시로 설명하면

우리는 슬픈 영화를 보며 울지 않지만, 주인공이 대신 울어줌으로써 감정을 표현했다고 느낀다. 텔레비전 앞에 켜둔 촛불 영상이나 벽난로 영상은 우리가 따뜻한 분위기 속에 있다는 착각을 준다. 심지어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윤리적 행위를 외주화하고는,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다한 것처럼 느낀다.

🧠 지젝의 해석

지젝은 이 상호 수동성이 현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는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실천한 것처럼 느끼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스타벅스에서 공정무역 커피를 마셔. 나 착한 소비자지.”

소비의 이면에 숨은 불평등한 노동구조를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수동성' 속에서 안도한다. 이러한 상호 수동성은 이데올로기의 은폐기제로 작용한다. , 우리는 시스템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않으면서, 대신 의미 있는 행위를 위탁하고 그로부터 도덕적 위안을 받는다. 그 결과, 현실은 그대로 유지되며 변화하지 않는다.

🔥 결론

Interpassivity는 지젝이 제시한 이데올로기의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로, “진짜 행동은 없고, 행위의 환상만 남은 세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행동하는 대신, 우리가 행동했다고 느끼는 체계를 해체하며, 진정한 정치적·윤리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급진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6) 가짜 행위 (Acte Manqué / Misfire Act)

💥 정의

지젝은 진정한 행위(act)’가짜 행위(pseudo-act, acte manqué)’를 구분한다. ‘가짜 행위는 마치 뭔가를 용기 있게 결단하거나 변화시키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복무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 용어는 원래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온 것으로, 무의식적 실패행위, 실수로 한 것 같지만 의미 있는 실수를 가리키지만, 지젝은 이 개념을 사회이론적으로 확장한다.

🙈 예시

부패한 정권을 향해 과감한 발언을 던지는 정치인이 있지만, 그는 근본적인 시스템 비판은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고발자 역할을 자처하면서도, 결국 구조적인 착취에는 눈감고 조직 안에서 안전하게 기능하는 비판자 역할만 수행한다.

영화나 광고에서 종종 등장하는 저항적 캐릭터는 체제에 반항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체제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 지젝의 분석

지젝은 이 가짜행위를 통해 자기 기만적 안도감이 발생한다고 본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며 윤리적 주체로 자기를 위치시킨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진정한 행위란 현실 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단절적인 사건이다.” , 행위란 기존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전복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의 재현에 불과하다.

🧨 진짜 행위란?

지젝은 진짜 행위(the Act)”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진정한 행위란 주체의 좌표를 바꾸는 사건이며,

그 이후로는 자신조차 이전의 자기가 아니다.”

, 진짜 행위는 주체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며,

이는 고통스럽고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는 실재와의 조우를 수반한다.

🧭 요약

가짜 행위: 변화의 제스처만 있을 뿐, 체제를 지속시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퍼포먼스'

진짜 행위: 상징계를 근본적으로 전복하고, 주체 자신의 존재도 바꾸는 급진적 단절

지젝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묻게 만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저항은, 정말 변화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체제의 일부가 된 비판인가?”

7) 현실도피 (Escape from / into Reality)

📌 개념 요약

지젝은 독특하게도 현실도피를 두 방향으로 나눈다.

현실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Reality)

현실로의 도피 (Escape into Reality)

이 두 가지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지젝에게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는 이를 통해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더욱 깊게 파고든다.

1현실로부터의 도피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현실도피.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판타지에 몰입하거나, 소비·오락·인터넷에 빠지는 것.

: 힘든 현실 대신 연애 판타지 드라마나 게임 세계에 몰입하기.

지젝의 분석:

이는 실재(the Real)의 고통스러움이나 불안정함을 회피하려는 상징계 안의 안정된 이야기 구조로의 후퇴다. 우리는 판타지를 통해 현실 너머의 실재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안락한 가상의 장막을 두른다.

2현실로의 도피

그런데 지젝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종종, 진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현실로 도피한다.”

이것은 가짜 현실에 자신을 투영하며, 마치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 현실을 직시한다며 매일 뉴스와 통계에 몰두하지만, 그것이 구조를 전복하는 실천과는 무관할 때.

지젝의 통찰:

이때의 현실은 진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미 조직된 현실이다.

우리는 그 조직된 현실속으로 도피함으로써, 불편한 실재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 이중적 도피

둘 다 결국 실재(the Real)를 회피하는 방식이다. 판타지를 향한 도피는 말할 것도 없고,

현실이라 믿는 뉴스, 여론, 실용주의마저도 체제가 허용한 틀 내에서만 사고하게 한다.

🧠 실재를 직면하려면?

지젝은 말한다:

실재(the Real)란 감각할 수 없지만, 우리를 괴롭히고 분열시키는 어떤 것.

우리는 그것을 향해 도약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단지 더 진짜 같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좌표 자체를 의심하고 전복하는 실천을 의미한다.

요약

현실로부터의 도피: 판타지, 오락, 소비로의 회피

현실로의 도피: 이데올로기적 현실 안에서의 안주

둘 다 실재(the Real)와의 조우를 회피하는 방식

지젝은 진정한 정치적 실천이란 바로 그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행위임을 강조한다.

8) 실재에의 열망 (Desire for the Real)

🧩 개념 핵심

지젝의 철학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개념 중 하나는 실재(the Real)’이다. 이 실재는 단순한 현실(reality)이 아니다. 라깡적 맥락에서의 실재란 언어화할 수 없고, 상징계로도 포착되지 않는 결핍과 균열의 자리, 다시 말해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그런데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그 실재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열망한다.”

이 말은 역설처럼 들리지만, 바로 그 모순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 욕망은 결핍에서 생긴다

우리는 늘 뭔가 빠진 상태로 살아간다. 그 빠진 것을 채우기 위해 판타지를 만든다. 그런데 판타지는 언제나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 불만족이 우리를 실재(the Real)를 향해 계속 욕망하게 만든다.

:

연애 판타지 관계 형성 기대와 다름 실망 새로운 판타지 생성 반복

, 우리는 끊임없이 실재의 흔적을 따라 움직이지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 판타지와 실재

지젝은 라깡을 따라 말한다.

욕망은 판타지를 통해 구조화된다.”

우리는 실재 자체를 욕망하지 않고, 실재에 접근한다고 믿게 하는중개된 환상을 욕망한다.

하지만 진정한 전복은 판타지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 너머에 있는 실재의 공백을 직면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 실재를 열망한다는 것

실재는 때때로 트라우마적 사건이나 사회적 파국, 윤리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 9.11 테러, 팬데믹, 전쟁, 혐오범죄의 발생 등.

이때 인간은 말한다.

이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아.”

바로 여기서 실재와의 조우가 발생한다.

지젝은 묻는다.

우리는 실재를 원하지 않지만, 실재를 느끼고 싶어한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욕망 구조다.”

🌪 욕망은 실재로부터의 탈주이자 귀환

실재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 불편함 없이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젝은 실재를 열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의해 전복당하라고 요청한다.

요약

실재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고통, 결핍, 트라우마이다.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열망한다. 욕망은 판타지를 통해 구조화되지만, 실재와의 조우만이 진정한 변화를 낳는다.

9)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To dwell in the negative / 타자의 불쾌함과 함께 살아가기)

🕳 ‘부정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지젝에게 부정성(negativity)’은 단순한 슬픔, 고통,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피하려 하거나 부정하려는 실존의 근본적 불안정성이며, ‘완전한 삶’, ‘조화로운 사회’, ‘성취된 주체같은 이데올로기의 신화를 깨는 진실이다.

우리는 결코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진정한 조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그 결핍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조건으로 본다.

🧨 긍정보다 중요한 부정

우리는 긍정적 사고치유 담론에 익숙하다. 그러나 지젝은 그런 것들이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덮어버리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이런 말들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일을 방해한다.

🧬 라깡과 헤겔의 부정성

지젝은 헤겔의 부정성(dialectical negativity)과 라깡의 결핍의 구조를 이어 받아 말한다. 진리는 항상 모순 안에서만 나타난다. 주체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사회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충돌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순과 결핍을 회피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는 실존적 태도를 길러야 한다.

🧠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부정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문제를 당장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문제와 함께 머무르면서 그 구조적 원인을 사유해야 한다.”

단기적 위안보다, 근본적 전복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 머무르기인가?

머무른다는 건 고통을 빨리 지워버리지 않고 모순을 내면화하고 불편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그 안에서 새로운 윤리와 정치를 실험한다는 것이다.

요약

부정적인 것(고통, 결핍, 모순)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조건이다. 지젝은 긍정의 강박대신 부정 속에 머무르기를 제안한다. 그것은 우리를 성급한 해답이 아니라 급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10) 감염병의 다섯 단계 (Pandemic and the Five Stages of Grief): 지젝의 팬데믹!(2020)에서 제시된 사회·정치적 통찰

지젝은 팬데믹과 같은 대재난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가 겪는 정동의 단계를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의 5단계 모델'에 빗대어 분석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단순한 심리 모델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반응 구조로 확장시켜 해석한다.

1부인 (Denial)

🗣 “이건 그저 독감이야. 너무 호들갑 떨지 마.”

팬데믹 초기에 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현실을 부정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불확실성을 통제 가능한 리스크로 환원하려고 한다.

, "현실은 이대로 지속 가능하다"는 이데올로기적 믿음을 고수한다.

2분노 (Anger)

😡 “중국 때문이야!” “정부가 다 책임져야 해!”

위기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하며,

타자(이민자, 특정 국가,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분노는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게 하는 또 다른 도피 수단이다.

3타협 (Bargaining)

🤝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약간의 감염은 감수하지.”

생명과 경제 사이에서 부분적 타협을 시도.

백신 패스, 방역완화, 거리두기 완화는 그 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 변화 없이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충이다.

4우울 (Depression)

😔 “앞으로는 아무것도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체제 전환의 불가능성과 일상의 상실에서 오는 무력감

하지만 지젝은 이 우울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본다.

무의미함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5수용 (Acceptance)

🧠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해야 해.”

단순한 현실 수용이 아닌,

다른 삶, 다른 세계, 다른 제도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태도

지젝은 이를 공산주의적 상상력으로 연결시킨다.

핵심 포인트

팬데믹은 정치적 감정의 드라마이며, 우리가 어떤 단계에 머무르느냐에 따라 사회 구조의 변혁 가능성도 달라진다. 지젝은 이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새로운 윤리의 형성을 제안한다.

11) 팬데믹 패닉: “네가 나에게 했던 것을 내가 지금 너에게 하고 있다.”: 지젝의 팬데믹 담론에 나타난 관계적 복수와 전복의 서사

이 문장은 지젝이 팬데믹!(2020)에서 강조한 구절 중 하나로, 팬데믹을 통해 드러난 국가 간, 계층 간, 인간 간의 관계의 왜곡과 복수심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말은 단순한 원한의 재현이 아니라, 지젝 특유의 전도된 행위, 즉 억압받던 자가 권력을 되돌려주는 역전의 장면을 지시한다.

🔁 이 문장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억눌렸던 타자의 역전된 응답

팬데믹은 그동안 무시되던존재들, 예컨대 이민자, 저임금 노동자, 의료 취약계층이 사실상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들이 감염의 주범으로 몰리거나, 사회적 지원 없이 방치되었을 때,

네가 나에게 했던 것을, 내가 너에게 한다는 반응이 가능해진다.

지젝은 이를 비도덕적 복수로 보지 않고,

👉 억압의 구조를 뒤집는 인식적 순간으로 해석한다.

2무의식적 폭력의 전가 구조

감염병 공포는 내가 병을 옮길까 봐가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옮길까 봐의 공포에서 시작된다.

이런 공포는 자기 보호로 위장된 타자 배제이며,

결국 이 말은 내가 그렇게 했듯이, 너도 나에게 그렇게 할 거지?”라는

무의식적 투사와 불신의 정동을 보여준다.

3현대 사회의 시스템적 복수

지젝은 팬데믹이 단지 자연재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 도시화, 기후 위기, 의료 불평등의 축적된 결과임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행한 모든 착취가

🌍 바이러스라는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복수하고 있다는 것.

이는 자연의 복수라기보다는, 우리가 만든 시스템의 응답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치적이다.

🔥 요약

네가 나에게 했던 것을 내가 지금 너에게 하고 있다는 말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지배-피지배 구조의 균열,

사회적 무의식의 폭로,

그리고 역사적 전환의 징후를 드러내는 언표이다.

지젝은 이 언어를 통해 단지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구조를 재조정하는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12) “공산주의냐 야만이냐, 아주 간단해!”: 지젝의 팬데믹 이후 정치철학적 진단이자 선언

이 구절은 지젝이 팬데믹! COVID-19는 세계를 어떻게 흔들었는가(2020)에서 주장한 급진적인 결론이다. 원래 이 표현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1차 세계대전을 비판하며 쓴 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 or Barbarism)”를 변형한 것이다.

지젝은 이 표현을 통해, 팬데믹이 단지 의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 사회 시스템의 문제임을 고발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기존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전환, 커먼즈 기반의 새로운 공산주의라고 주장한다.

🔍 어떤 공산주의인가?

지젝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구소련식 통제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가진 윤리적이고 생태적인 공산주의.

1공공의 재산, 공공의 생존권

백신, 마스크, 식량, 주거는 상품이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 필수 재화는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관리 하에 있어야 한다.

2커먼즈(common) 재정립

자연환경, 데이터, 보건의료, 과학지식은 모두 인류 공동의 유산. 이는 사유화되어서는 안 되며, 공동의 거버넌스 구조가 필요하다.

3국제 연대와 새로운 형태의 계획경제

국경과 이기주의를 넘는 초국가적 대응 시스템이 요구된다.

지젝은 국가주의적 통제를 넘어서야 하며,

👉 동시에 전 지구적 협력 체계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 야만인가?

지젝이 말하는 야만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팬데믹 속에서 드러난

👉 의료 시스템의 붕괴,

👉 인종주의적 배제,

👉 자본의 자기보호 기제,

👉 취약 계층의 희생

이 지속될 경우 나타나는 문명 붕괴의 전조를 의미한다.

📌 핵심 정리

공산주의냐 야만이냐는 이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 “이대로 살 것인가, 전혀 다른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를 묻는다.

지젝은 이에 대해 두려움을 넘는 윤리적 결단, 그리고 새로운 공존의 정치학을 요청한다.

 

3. 머무름의 사유와 나로부터 시작되는 공산주의

나는 슬라보예 지젝을 만났을 때, 단지 한 명의 급진적 좌파 철학자를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장은 마치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며 나를 찔러왔다. 그가 직시하게 한 것은 자본주의의 표면 아래 숨겨진,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일상, 욕망, 불안, 도피, 그리고 가짜 회복의 구조였다. 그는 라깡과 헤겔의 언어를 통해 욕망의 미끄러짐과 주체의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해체했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믿고 있는 그것,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깊이 억압하는 거울이라는 것을, 그는 웃으며 말해주었다.

팬데믹의 시대, 지젝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공산주의냐, 야만이냐.”

그 물음은 선택지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였고, 인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전부 찬탄의 대상일 수는 없다. 실천 가능성 없는 급진성, 아이러니와 퍼포먼스로 전락하는 언어, 그리고 젠더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의도적 침묵.

이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그의 언어를 한 번 더 걸러 읽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젝을 통해 삶을 견디는 방식을 배웠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라.”

그 말은 너무도 오래 회피해온 나의 어두운 감정들을 다시 불러내는 주문처럼 들렸다. 나는 종종 너무 빨리 괜찮은 척을 했다. 슬픔이 다가오기도 전에 회복을 이야기했고, 상처의 바닥까지 가보기도 전에 다음 희망을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진실은 결코 밝은 얼굴로 오지 않는다. 진실은 부정적인 얼굴을 하고, 침묵 속에 스며들고, 우리를 멈추게 한다.

그래서 나는 머무르기로 했다. 희망을 덧칠하지 않고, 어두운 감정의 내면에 잠시 침잠한 채

그 안에서 사유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감정이 미래의 자양분이 되기를.

또한 지젝이 말한 공산주의는 어쩌면 더 이상 '혁명'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공산주의여야 한다.

내가 선택하는 말, 내가 지키는 약속, 내가 응시하는 타인의 고통.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공동체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거창한 기획이 아니라,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바라보는 작고 사적인 정치일 것이다. 불완전한 세계를 견디는 인내, 회복이 아니라 공존을 말하는 연대,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하나의 몸짓. 나는 아직 그 공산주의를 완전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상상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지젝이 말했듯,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해야 할 때에 와 있다. 나는 이제, 그 실천의 첫 발을 내가 먼저 딛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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