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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사유의 가지와 감각의 촉수》: 리좀과 촉수로 다시 쓰는 문학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5. 6. 2.

 

 

 

일어나자마자 창을 연다. 상큼한 바람이 몰려들고, 부지런한 참새들의 수다가 함께 온다. 어제와 같지만 또 전혀 다른 소리들이 삶이라는 그림에 붓칠을 하며, 오묘한 서정을 수놓는다. 이 계절에는 실내에 빛이 들고 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고 말 없는 식물들이 쑥쑥 자란다. 커피를 내리고, 자판위에 손을 올리고 오늘의 문장을 소리내어 읽으며, 어설프고 느릴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그동안 정리해 온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와 어제 정리한 해러웨이의 촉수적 사유를 비교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사유의 가지와 감각의 촉수》: 리좀과 촉수로 다시 쓰는 문학

 

1. 서론: 뿌리내리지 않는 사유의 필요성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를 뿌리내림으로 이해해 왔다.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는 고정된 진리의 뿌리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그것의 기원(archê)과 목적(telos)을 탐구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부터 사유의 자명한 출발점을 설정했고, 칸트는 순수이성과 감성의 틀을 통해 보편적 인식의 구조를 구축했다. 이들 철학은 모두 위계와 중심, 기원과 분지, 보편성과 논리라는 도식을 기반으로 한 수목형 사고를 형성해 왔다. 사유는 하나의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뻗어나가며, 단단한 뿌리로부터 기원과 의미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작동해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시대의 세계는 더 이상 이러한 뿌리 중심의 사유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탈중심적 흐름, 생물학의 공진화 모델,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서로를 매개하고 교차하는 복잡한 생태계는 단일한 중심이나 위계로 환원될 수 없다. 이 세계는 접속성과 다중성, 비선형성과 얽힘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성적 장()이며, 철학은 이제 고정된 틀을 넘어, 세계의 운동성과 감응을 사유할 새로운 은유와 지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듯,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통적 사유 구조를 해체하며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을 제안했고, 도나 해러웨이는 그것을 촉수(tentacle)’의 감각적 상상력으로 확장했다. 리좀은 중심 없는 수평적 연결망이며, 촉수는 감응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다방향적 존재론의 더듬이다. 이 두 개념은 단순한 철학적 비유를 넘어서, 탈중심적 사고의 지형을 새로이 그려내는 사유의 장치이자 실천의 감각이다. 본 에세이는 들뢰즈의 리좀적 사고와 도나 해러웨이의 촉수적 사유를 비교함으로써, 이들이 제안하는 존재의 윤리와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새로운 세계-되기의 가능성을 함께 사유해 보고자 한다.

 

2. 리좀적 사고: 들뢰즈와 가타리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려낸 리좀은 단지 식물의 생장 방식을 빌려온 비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였고, 나아가 존재와 세계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선이었다. 이들이 비판한 전통적인 사고 방식은 언제나 기원을 찾고, 중심을 세우며, 위계화된 구조 안에서 지식을 배치하려 했다. 이런 방식은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어 위로 자라고 가지를 뻗는 나무와 같다.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구 형이상학은 이와 같은 수목형 모델을 통해 세계를 질서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중심화된 사유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사유를 얽히고설킨 망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리좀은 어디서든 자라고, 어디로든 연결되며, 단절되고 나서도 다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리좀에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중심이나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결, 다양체, 탈영토화, 재영토화, 지도화라는 개념들이 바로 이 리좀적 사고의 핵심을 구성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좀을 단지 자유롭고 유기적인 연결의 이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리좀 안에서의 연결이 항상 생성과 긴장을 수반하며, 통제 불가능한 흐름과 충돌을 동반한다고 말한다. 리좀은 단일한 정체성을 부정하며, 고정된 의미와 범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는 존재 양식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리좀은 체계 밖으로 도약하는 사유, 제도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정치적 실천이자 문학적 전략이 되기도 한다.

문학의 차원에서 보면, 리좀적 사고는 서사 구조, 인물 구성, 서술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다중화된 시점, 시간의 비선형적 흐름, 장르의 경계 파괴는 모두 리좀적 사유가 문학적 상상력을 관통하며 드러나는 방식이다. 들뢰즈에게 문학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생성하고 재조직하는 힘이었으며, 리좀은 그 힘의 가장 역동적인 형식이었다. 문학은 리좀처럼 자신을 고정된 형태에 구속하지 않으며, 다양한 결들을 따라 흩어지고 이어지며, 언어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은 결국 사유의 민주화이며, 고정된 체계에 저항하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그것은 다름을 포섭하지 않고 나란히 놓으며, 중심을 세우기보다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유를 지향한다. 이로써 리좀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이며 세계를 다시 쓰는 문장들이다.

<리좀적 사고의 문학적 구현 기술>

리좀적 사고의 문학적 구현은 형식과 내용, 그리고 독서의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먼저, 다중화된 시점은 단일한 화자나 중심인물의 시각이 아니라, 복수의 시점이 병렬적으로 존재하거나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독자가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고 감응하는 관점들 속에서 유동적인 사유를 구성하게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는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대화가 서사의 바깥과 안을 넘나들며 다양한 도시들의 상상적 시점을 교차시킴으로써 다중화된 시점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에서도 두 명의 화자, 과거와 미래의 시점이 상호 교차하면서 서사를 병렬적으로 구성하고, 서로의 기억과 감각을 감싸 안는다.

비선형적 서사 구조는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회귀, 반복, 도약, 파편화 등으로 구성되는 방식이다. 이 구조에서 사건 간의 인과 관계는 해체되며, 서사는 기억과 상상, 감각의 흐름 속에서 재구성된다. 칼비노의 소설은 각 도시의 묘사가 특정한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배열되어 있으며, 도시들 간의 유기적 관계는 서사의 전통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김초엽의 경우,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미래와 과거의 실험실 장면이 직선적인 회고가 아니라, 균류적 연결망처럼 얽혀 있으며, 과거는 미래를 규정하지 않고 그 자체로 다시 살아 있는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장르의 혼성 또는 해체는 한 텍스트 안에 에세이, , 보고서, 판타지, 과학소설 등 다양한 장르가 병존하거나 혼합되는 방식이다. 이는 독자가 기대하는 장르적 일관성을 교란하며, 문학이 어떤 형식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여행기와 철학적 대화, 은유적 시문이 혼합된 장르적 경계를 넘나들고, 지구 끝의 온실은 생태과학소설임에도 시적 이미지와 감각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과학서사와 서정문학을 동시에 구성해 낸다.

정체성과 경계의 유동성은 인물들이 고정된 자아나 존재론적 범주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흐름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칼비노의 도시는 각각 이름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종국에는 하나의 도시의 다양한 양상 혹은 마르코 폴로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의 다면적 은유로 읽힐 수 있으며, 그 경계는 명확하게 구획되지 않는다. 김초엽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인간과 자연, 과학과 감성의 경계를 오가며, 존재의 정체성 또한 생태적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된다.

마지막으로, 중심 없는 서사 흐름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나 결말 지점 없이, 개별 에피소드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고, 의미는 그 접속지점에서 생성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각 도시의 묘사가 에피소드처럼 병치되어 있으며, 독자는 어느 한 도시가 전체의 핵심이라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읽게 된다. 지구 끝의 온실역시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지 않고, 기억과 관계, 감응의 층위를 따라 흘러가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새로운 생명과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처럼 칼비노와 김초엽의 작품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적 사유를 문학적으로 변주한 예이며, 각각 언어와 상상력의 지형에서, 생명과 생태의 결에서 리좀의 존재론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은 문학을 고정된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열린 감각의 연결망으로 재구성하며, 사유 그 자체가 끊임없이 운동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촉수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도나 해러웨이의 사유는 분절된 인간 주체, 이분법적 사고, 경계 짓기를 거부하고, 감응과 연결, 돌봄과 얽힘을 중심에 두는 사유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는 인간 중심주의적 인식론과 서구 과학의 절대주의를 비판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자율적 존재들이 아니라 서로를 감지하고 반응하며 살아가는 관계들이라고 주장한다. 해러웨이가 제안하는 촉수적 사유는 곧 이러한 관계적 세계관의 윤리적, 존재론적 실천이다.

촉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문어와 오징어, 해파리와 같은 생물들의 감각기관이자 운동기관이며, 그 자체로 사고하고 연결하며 판단하는 생명의 방식이다. 해러웨이는 인간의 손보다 문어의 촉수에 더 주목하며, 사유란 고정된 중심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방향적으로 세계와 접촉하고 반응하는 감각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촉수는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접면과 사물, 생명체와의 감응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적 기관이다.

그녀의 대표적 개념 중 하나인 심포이에시스는 이러한 촉수적 사유의 핵심 구조를 구성한다. 심포이에시스는 함께-만들기, 또는 공-생성의 뜻을 가지며, 어떠한 존재도 홀로 생성될 수 없고 항상 타자와의 얽힘 속에서 존재한다는 생태적 존재론이다. 이는 리좀적 사고의 탈중심과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촉수적 사유는 보다 감각적이며 생명적이고, 돌봄과 책임의 윤리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리좀이 추상적 연결망의 개념이라면, 촉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구체적 접촉 방식이다. 해러웨이에게 세계는 이질적 존재들이 공진화하며,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의 복잡계이며, 촉수는 그 관계들을 감지하고 지속시키는 윤리적 기관이다.

촉수적 사유는 특히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기술, 여성성과 자연, 동물성과 과학의 경계를 재구성한다. 해러웨이는 인간을 더 이상 주체이자 중심으로 놓지 않으며, 인류세적 상황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감응하고 배우는 존재로 재위치화 된다. 인간은 생명과 비생명, 유기체와 기계의 얽힘 속에서 살아가며, 이 세계를 이해하고 책임지는 방식은 일방적 설명이나 통제보다, 느리고 세심한 감응과 돌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촉수는 타자의 고통과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는 기관이며, 이는 새로운 윤리적 상상력과도 연결된다.

문학의 차원에서 촉수적 사유는 단지 감각의 표현이 아니라, 글쓰기의 윤리와 태도 자체를 바꾸는 방식이다. 중심 서사, 분리된 주체, 기승전결의 구조는 촉수적 세계와 조응하지 않는다. 대신, 문학은 감응의 흔적들, 다층적인 목소리, 생명적 파편들이 얽히는 서사로 구성된다. 이는 단지 형식의 실험이 아니라, 존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전환이다. 해러웨이는 글쓰기를 통해 세계에 돌봄의 촉수를 내미는 작업을 실천하며, 문학은 그렇게 감각을 훈련하고 존재를 다시 발명하는 윤리적 장이 된다.

해러웨이의 촉수적 사유는 결국 경계의 해체가 아니라, 경계 간의 감응을 확장하는 것이다. 리좀이 접속의 철학이라면, 촉수는 돌봄의 철학이다. 접촉은 통제와 장악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감각하고 거기서 윤리의 조건을 발생시키는 일이다. 촉수는 방향 없는 혼돈 속의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연결의 문장을 짓는다. 철학은 이처럼, 단단한 논증보다 유연한 감각, 고정된 개념보다 촉수의 진동 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촉수적 사유의 문학작품 속 구현>

촉수적 사유는 문학에서 하나의 형식 실험이기 이전에, 존재를 대하는 감각적 태도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이 사유는 인간 주체가 중심에 서서 세계를 설명하거나 정복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세계의 미세한 징후와 타자의 신호에 응답하는 감응적 주체로 자신을 위치시킨다. 촉수적 사유가 문학적으로 구현될 때, 이야기의 구조는 기승전결의 서사보다 감정과 감각의 흐름, 존재의 흔들림, 돌봄의 윤리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러한 문학은 중심적 화자나 서사적 목표를 설정하지 않으며, 서술의 방향 또한 논리적 인과보다 감응의 강도를 따라 움직인다.

문학에서 촉수란 상징이 아니라 촉각 그 자체이며, 독자는 이야기의 전개보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미세한 진동, 생명들의 얽힘, 침묵과 부재가 남기는 자국을 따라 독해하게 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종종 자연, 비인간 존재, 사물, 기억, 죽음 등과 같은 비언어적 영역을 언어의 감각 안으로 초대하며, 관계의 윤리와 감응의 정치학을 실현한다. 감각은 이때 단순한 심상의 수단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인지하고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 조건으로 기능한다. 촉수적 문학은 타자와의 거리를 지우거나 완전히 일체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얽혀 있으면서도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감응의 공간을 구성한다.

도나 해러웨이의 촉수적 사유가 구현된 작품으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이 사유가 예감되듯 선취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환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생태학적 고전이자, 동시에 감응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문학적 선언이다. 카슨은 이 작품에서 농약의 위협을 설명하거나 통계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죽어가는 숲의 소리를, 한 마리 새의 부재를 통해 세계의 고통을 청각적 감각 속에서 증폭시킨다. 이처럼 감각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글쓰기 방식은 해러웨이가 말한 촉수, 즉 타자의 변화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존재의 기관으로서의 감각과 깊은 친연성을 지닌다.

침묵의 봄에서 침묵은 생태계의 붕괴를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라진 소리의 감각, 존재의 부재, 기억의 진동으로 감각되게 한다. 카슨은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그 안에 조심스럽게 발 디뎌야 하는 존재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인간은 더 이상 지시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의 일시적인 통로이며, 감응하고, 돌보며, 책임져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해러웨이의 촉수적 존재론과 겹쳐진다. 두 사유 모두에서 윤리는 지식이 아니라 감각에서 출발하며, 타자의 신호를 감지하는 민감성은 존재의 존엄성과 직결된다.

카슨은 과학자였지만 그의 문장은 이성보다 감응에, 분석보다 직관에 가까운 문학적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에 내려앉지 않는 새, 연못 속을 떠다니는 죽은 물고기, 봄이 와도 울리지 않는 새소리. 그것들은 논리적 명제로 환원되지 않으며, 촉수처럼 피부를 간질이며 독자에게 다가오는 감각의 형상들이다. 침묵의 봄은 과학서이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윤리적 감각의 훈련장이며, 해러웨이가 말하는 촉수적 글쓰기의 선구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화자이며 대상이며, 또한 고통을 전달하는 존재이다. 카슨의 문장에는 세계의 비명이 은유나 수사 없이 울려 있으며, 그것은 인간 중심의 언어를 흔들고, 책임의 언어로 나아가게 한다.

 

4. 비교 분석: 리좀 vs 촉수

들뢰즈의 리좀적 사고와 도나 해러웨이의 촉수적 사유는 모두 고정된 중심과 정체성을 해체하고, 다중적 접속과 관계 속에서 존재를 다시 구성하려는 사유 형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위계적 사고에서 벗어나, 되기(becoming)라는 끊임없는 생성과 변형의 운동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목하는 연결의 방식과 감각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은 뿌리 없는 덩굴이나 균근처럼 어디서든 자라고 어디로든 연결될 수 있는 사유의 지도를 구성한다. 그들은 중심 없이 분산되는 개념의 운동성과 다중적인 접속 구조를 통해 사고의 탈영토화를 시도하며, 파편화되고 유동적인 사유의 장을 형성한다. 리좀은 철학의 공간을 개념적 망으로 시각화하고 지도화하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해러웨이의 촉수는 문어와 해파리처럼 살아 있는 존재가 세계와 접촉하고 감응하는 방식으로 사유를 조직한다. 촉수적 사고는 개념의 분산보다 존재 간의 감각적 교감과 윤리적 얽힘에 초점을 맞추며, 사유의 운동을 감각과 돌봄, 공존의 감수성으로 구체화한다. 해러웨이에게 연결이란 단순한 접속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책임을 지는 윤리적 태도이며, 공진화적 관계망 속에서 지속되는 돌봄의 실천이다.

또한 리좀적 사고가 개념적 수준에서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구조를 그리는 데 비해, 촉수적 사유는 생명과학, 환경학, 젠더 정치 등의 구체적이고 생물학적 기반 위에서 작동하는 감각적 사유라는 점에서도 구분된다. 리좀이 사유의 형식과 구조를 재편한다면, 촉수는 존재의 방식과 감응의 윤리를 재구성한다.

요약하자면, 리좀은 개념의 지도를 그리는 철학적 장치라면, 촉수는 살아 있는 관계망을 감각하는 윤리적 사고의 방식이다. 이 둘은 모두 중심 없는 세계를 상상하지만, 하나는 그 세계의 구조를 묘사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를 실천적으로 묻는다.

 

5. 리좀과 촉수의 문학 연구방법론적 활용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과 도나 해러웨이의 촉수는 단순히 문학 텍스트에 덧붙여지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문학 연구 방법론 자체를 바꾸는 사유의 틀이 된다. 이들은 문학을 바라보는 방식, 읽는 방식, 분석의 지점과 대상, 연구자의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텍스트를 중심과 주변,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주제와 형식으로 구분하던 이분법적 틀을 해체하고, 그 대신 연결, 얽힘, 감응, 생성, 되기라는 개념들을 중심에 놓는다.

1) 리좀적 방법론: 다중성, 접속성, 탈영토화의 독해

리좀은 문학 연구에서 텍스트를 고정된 구조나 중심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 내부의 파편적 구성, 병렬적 구조, 이질적 목소리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고 읽어내는 도구가 된다. 이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선형 서사 대신 비선형 흐름을 분석한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니라, 단락 간의 접속, 전환, 반복, 도약, 간섭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다중 시점과 복수적 의미망을 병렬적으로 독해한다. 중심 인물이나 사건을 따라가지 않고, 주변적 요소나 부차적인 서사의 미세한 흐름들을 등가적으로 다룬다.

장르나 담론의 경계를 넘나드는 접속 방식에 주목한다. 문학과 철학, 과학, 신화, 일기, 대화, 논평 등이 어떻게 하나의 텍스트에서 리좀처럼 얽혀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방식은 특히 탈경계적 텍스트(: 김초엽, 장정일, 이탈로 칼비노, 보르헤스 등)의 해석에 유효하며, 문학을 하나의 지식 생산의 그물망으로 다시 읽을 수 있게 한다.

2) 촉수적 방법론: 감응, 관계, 윤리의 독해

촉수는 문학 연구를 감응의 감각과 돌봄의 윤리로 전환시킨다. 이는 분석의 중심을 구조나 플롯, 주제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진동과 타자의 감각으로 옮겨간다. 비인간적 존재들(동물, 식물, 사물, 공간 등)의 감각과 행위를 텍스트 내에서 분석하며, 이들이 단순한 배경이나 비유가 아닌 서사의 행위자임을 드러낸다.

감정, 애도, 공감, 돌봄과 같은 정서적 요소를 윤리적·존재론적 층위에서 독해한다. 예컨대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이나 한강의 에서처럼 말 없는 존재와의 관계성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텍스트를 독해하는 연구자의 위치도 감응하는 주체로서 재정립한다. 읽는 행위는 해석을 위한 소유가 아니라, 타자적 감각을 수용하는 돌봄의 실천이 된다. 이러한 방법론은 페미니즘 비평, 생태비평, 포스트휴먼 이론, 동물연구, 비인간 사유의 문학 연구에 특히 강력한 이론적 기반이 되며, 연구 대상과의 감각적 관계 맺기를 중심으로 문학 연구의 윤리적 전환을 이끌어낸다.

3) 리좀과 촉수의 통합적 활용

리좀은 언어의 조직 원리와 사유의 구조에, 촉수는 감각의 방향성과 윤리의 태도에 중점을 둔다. 이 둘을 통합할 때, 문학 연구는 다음과 같은 전환을 맞이한다. 텍스트를 정적인 구조물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감응의 장으로 인식하게 된다. 비판 대신 응답, 객관적 해석 대신 관계적 이해, 이론적 해설 대신 감각의 공명으로 연구자의 언어 태도가 바뀐다.

연구란 이해가 아니라 접촉이고, 독해란 설명이 아니라 윤리적 되기의 과정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기존 문학 연구 방법론에서 배제되거나 부차화되었던 감정, , 감각, 생명성, 관계의 정동들을 새롭게 연구의 중심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6. 맺음말

결국 나는 묻게 된다. 이러한 사유들, 리좀의 무중심적 접속성과 촉수의 감응적 윤리를 내 글쓰기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이 단지 인용되거나 장식되는 개념이 아니라, 문장의 결을 따라 흐르고, 장면의 숨결 속에서 움직이며, 인물의 감정과 문체의 호흡에 스며드는 사유의 리듬이 되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리좀은 내 글을 단선적 구조로부터 해방시킨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 수렴하지 않도록, 주변을 배제하지 않도록, 언제든 옆으로 가지를 치며, 우회하고 교차하는 다중의 감각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내가 빚어내는 인물들과 그들의 언어, 침묵, 몸짓은 하나의 선형적 서사로 포획되지 않고, 서로를 건드리고 흔들며 흩어지는 접속의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중심에 고정된 메시지를 향해 모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균질한 세계들이 공존하는 서사의 군락처럼 자라나는 글. 그것이 내가 꿈꾸는 산문적 리좀이다.

촉수는 다시 다른 방식으로 나를 멈추게 한다. 타자의 고통을 쓰려할 때, 세계를 감각하려 할 때, 재현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촉수는 내가 감지할 수 없는 타인의 진동 앞에서 어떤 문장은 지워야 하며, 어떤 거리는 유지해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글쓰기란 단지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침묵과 감응 사이에서 망설이며 그 자리에 머무는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점점 더 알게 된다. 윤리는 지식에서가 아니라, 다가갈 수 없는 것에 다가서려는 몸의 예민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리좀과 촉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쓰기의 구조와 태도를 다시 묻는 감각의 기술이다. 리좀은 문장의 형식을 해체하고, 촉수는 그 문장을 쓰는 윤리적 손끝을 바꾼다. 하나는 서사의 구조를 유랑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타자의 고통 앞에 멈추게 한다. 이 두 감각이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면, 내 글쓰기는 단지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가 아니라, 존재와 세계의 감각을 재구성하는 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 중심을 해체하고 감각을 세우는 문장들. 내가 지향하는 문학은, 아마 그런 문장들일 것이다.

이제 나는 서두로 되돌아온다. 왜 뿌리내린 사유를 벗어나야 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하나의 중심이나 기원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단일한 진실을 향한 수렴의 방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들뢰즈와 해러웨이의 사유는 이러한 시대의 감각에 응답하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 철학을 글쓰기의 구조와 태도, 감각과 윤리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나의 문장들은 이제 하나의 줄기를 따라 성장하는 대신, 가지를 치며 흩어지고, 타자의 침묵에 닿기 위해 촉수를 뻗는 사유의 몸짓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문학이란 곧 되기의 길이며, 동시에 돌봄과 감응의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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