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의 원형: 그림자, 아브젝트, 그리고 문학적 자아
국문과 시론 수업에서 융의 원형을 공부했다. 처음엔 문학이 심리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융의 ‘원형’ 개념을 접하면서 문학 속 반복되는 인물과 서사 구조가 단순한 창작이 아니라, 인간 무의식의 공통된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문학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상징과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그 반복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적 패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시론 교재인 김준오의 『시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프레이저를 중심으로 한 비교인류학파가 원형적 상징을 의식의 사회적 현상에서 발견한 것과는 달리 융은 인간의 정신구조 안에서 원형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타고난 정신의 세 가지 구성요소는 그림자(shadow), 영혼(soul), 탈(persona)이다. 그림자는 무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자 열등하고 즐겁지 않은 자아의 측면이다, 이것은 문학에 악마로 투사된다. 영혼은 인간의 내적 인격, 내적 태도로서 인간이 자신의 내부세계와의 관계를 맺는 자아의 즉면이다. 이것은 다시 아니마(anima, 몽상, 꿈의 언어, 이상적 자아, 조용한 지속성, 밤, 휴식, 평화, 사고기피, 식물, 다정한 부드러움, 수동적, 선, 통합, 개인적, 비합리적, 등의 양상을 지님)와 아니무스(animus, 현실, 삶의 언어, 현실적 존재, 역동성, 낮, 염려, 야심, 계획, 사고, 동물, 엄격한 힘의 보관자, 능동, 지, 분열, 합리적이고 추상적 사고, 국가 사회 중심 등 양상을 지닌다)로 양분된다. 탈은 인간의 외적 인격, 외적 태도로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는 자아의 측면이다.”
— 김준오, 『시론』, 삼지사, p. 235.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문학 속 인물들이 단지 상상에서 만들어진 허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구조적 투사이며, 무의식이 빚어낸 상징적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내부로부터 왔으며, 우리가 부정하고 억누르며 가면 뒤로 감춰둔 그 모든 심상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융이 말하는 ‘원형(archetype)’이란 단순히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심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태곳적부터 반복해온 생존과 상실, 고통과 구원, 욕망과 공포 등의 경험이 집단 무의식 안에 각인되며 만들어진 ‘심리적 본형’이다. 이 원형은 직접적으로 인식되진 않지만, 꿈, 신화, 예술, 종교, 문학 등의 형태로 반복되며 드러난다. ‘영웅’, ‘위대한 어머니’, ‘늙은 현자’,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같은 원형적 형상은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 유사하게 나타나며, 이는 인간 정신 안에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융의 이론은 몇 가지 중요한 원형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자아(Ego)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이지만, 그것은 자기(Self)의 일부에 불과하다. 자기란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한 전체적인 존재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도달하고자 하는 심리적 통합의 상징이다. 자기 실현의 여정을 걷기 위해 우리는 내면의 ‘그림자(Shadow)’와 마주해야 한다. 그림자는 우리가 억압하거나 부정해온 내면의 부정적 측면이며, 이것이 외부로 투사될 때 타자에 대한 분노, 공포, 혐오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페르소나(Persona)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쓰는 가면이며, 이 역시 진정한 자기와의 괴리를 낳을 수 있다.
아니마는 남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적 원형으로, 수용성과 직관, 부드러움, 자연, 감정과 관련된 상징으로 나타나며,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남성적 원형으로, 이성적 사고, 의지, 언어, 질서와 사회성 등의 속성과 연결된다. 이 둘은 단순한 성별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양극성과 균형을 상징한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매혹이나 저항을 느낄 때가 있는데, 융은 그것이 바로 이 원형과의 무의식적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으며 게드의 여정을 융의 원형 이론으로 다시 해석하게 되었다. 게드는 어린 시절 자신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실수로 그림자 같은 존재를 현실로 불러낸다. 그는 그 존재를 피해 도망치지만, 결국 그것을 직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자아에 이른다. 그는 그림자의 이름을 부르고,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얼굴임을 받아들이는 데 이른다. 이 여정은 자기 내부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그것을 통합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가는 전형적인 개성화의 과정이며, 인간이 평생 반복하는 내면의 싸움과 조율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과 자아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육식을 거부하고, 주변과 단절된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채식은 단지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언어, 페르소나로 구성된 외부 세계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억압된 내면의 감각이 외화되는 방식이다. 영혜는 말 대신 몸으로 반응하며, 점차 침묵과 수동성, 감각의 해체로 진입해 간다.
영혜는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 인간이라는 종의 형상을 거부하며 침묵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려 한다. 이는 통합에 이르지 못한 아니마의 파열이며, 개성화가 실패한 세계에서 자아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융의 이론과 더불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 크리스테바에게 아브젝트란 주체가 자신을 형성하기 위해 바깥으로 밀어내야 했던 것, 그러나 여전히 그 경계에서 불쾌하게 흔들리는 존재이다. 피, 오물, 시체와 같이, 인간이 인식과 언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혐오하고 배제하지만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경계적 잔존물’. 그것은 주체 내부에서 불쑥 솟아오르며, 언어 이전의 감각적 공포와 접속하는 존재다. 이러한 아브젝트의 출현은 ‘나’의 경계를 위협하며, 주체로서의 통합된 자아를 불안하게 만든다.
영혜는 바로 그 아브젝트가 된다. 그녀는 말하기를 거부하고, 몸을 비우며, 끝내 인간과 식물의 경계로 자신을 내맡긴다. 그녀는 자아를 구성하는 페르소나나 사회적 역할을 하나씩 거세하며, 언어와 기호 이전의 ‘침묵하는 몸’으로 존재하려는 자가 된다. 『채식주의자』는 이처럼 융의 원형적 그림자와 더불어,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abjection)이라는 탈주적 존재론을 함께 구현한다. 영혜는 거부된 자로서 스스로를 내던지며, 기표 이전의 감각적 실체로 전이된다. 그녀의 존재는 ‘정상성’의 주체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불쾌함이며, 그러한 불쾌함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진정한 윤리와 타자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두 작품을 통해 문학이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구조를 탐색하는 상징적 형식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나의 글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반복적으로 쓰는 인물들은 누구이며, 왜 그 인물들은 항상 경계에 서 있거나, 상실을 경험하거나, 외부의 말이 아닌 내부의 소리를 따르려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내 안에 억눌린 아니마, 혹은 나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그림자의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의 글쓰기는 어떻게 이 융의 원형을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이야기의 구조를 의식적으로 원형에 맞추지는 않지만, 글을 쓸 때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징과 이미지, 인물 유형은 분명 내 무의식의 패턴과 관련되어 있다. 내가 창조하는 서사는 내 안의 ‘영웅’이 그림자와 마주하고, 내면의 부드러움과 이성, 상처와 욕망이 충돌하고 화해하려는 어떤 여정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 무의식의 지형을 더듬는 일이며, 내 안의 다양한 원형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언어화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다른 이의 그림자 또한 이해하려는 가능성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하나의 방향을 더 추가해 생각해 본다. 융의 무의식적 상징뿐만 아니라,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말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즉 아브젝트의 윤리에도 나의 글쓰기가 응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서사 속에서 지워지거나 말할 수 없는 존재들—침묵하는 여성, 경계에 놓인 신체, 혐오와 불쾌로 규정된 타자들—의 목소리를 언어 바깥에서 불러오는 글쓰기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침묵, 파열, 혹은 몸이 발화하는 감각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방식으로 문학을 쓰고 싶다. 말이 도달하지 못하는 자리에 글이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인간 중심의 주체가 배제해온 존재들을 다시 호명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경계에서, 문학은 윤리가 된다. 그것은 완성된 통합의 서사가 아니라, 부정되고 흔들리는 자리를 가시화하려는, 아브젝션의 자리에서 시작하는 글쓰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쓰며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 안의 그림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아브젝트를 지우며 쓰고 있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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