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가까이 왔음에도 찬바람에 코끝이 알싸하다. 햇빛이 만개한 호수변을 걸으며 나는 내 존재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젊은 시절, 나는 내가 태어난 궁극적 목적은 나의 행복을 실현하라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그것이 여행이었고, 글을 읽는 일이었으며, 음악에 함몰될 수 있는 순간이었고, 때때로 지인들과의 파티의 흥분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이제 나의 젊음은 가버렸고, 이승의 소풍을 마감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문득 깨닫는다. 한때는 여행과 독서, 음악과 웃음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으나, 이제는 그 모든 순간이 저문 햇살처럼 아득하다. 찬바람에 스치는 기억들이 애틋하게 피어나지만, 그조차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을 안다. 나는 과연 내 삶을 온전히 살았는가. 행복을 좇았던 나날들이 어느새 빛바랜 풍경이 되었으나, 그것이 전부 헛된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행복을 쫓기보다 다가오는 끝을 조용히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여전히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사유를 계속하며 느리게 호수변을 걸었다. 봄을 목전에 둔 호수는 아직 겨울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 위로 희미한 햇빛이 부서졌고, 바람이 스치면 미세한 파문이 번져갔다.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 사이로 연초록 새순을 품고 있었고, 물가의 갈대는 마른 잎을 떨구며 새 생명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철새들의 낮은 울음이 공기 속에 퍼지고, 한동안 얼어 있던 물가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제 모습을 드러내며 흐느적거렸다. 햇살은 여전히 차가운 공기 속에서 아슬하게 번졌고, 그 아래로 길게 드리운 내 그림자는 바람의 리듬에 맞춰 일렁였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철학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되어 왔다. 이는 존재론적, 신학적, 실존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으며, 각 시대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독창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고대 철학에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세계와 인간이 조화로운 이데아의 모방물로 존재한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목적론적 존재로, 즉 자신의 "엔텔레키아(Entelechy)"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모든 사물과 존재는 본질적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목적은 이성적 활동과 덕의 실천을 통한 ‘유데모니아(eudaimonia, 행복)’의 실현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이 태어난 이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존재의 완성을 향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중세 철학에서는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여 인간의 존재 이유를 신의 창조와 구원의 틀 안에서 설명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인간은 신의 사랑을 실현하고 그분과 합일하기 위해 태어난다고 보았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신학적으로 확장하여,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며,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신의 선함을 실현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고 하였다.
근대 철학으로 오면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사유 속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태어난 이유를 신의 의도나 세계의 목적이 아니라 개별적인 자아의 사고 과정에서 규명하려 했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은 도덕적 법칙을 따를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 철학에서는 존재의 이유를 절대적 원리나 목적론적 방식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실존적 차원에서 탐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 "피투된 존재(Dasein)"로서 세계에 던져졌다고 보았으며, 이는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태어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행위를 통해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달리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전통적인 목적론과 신학적 설명을 거부하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떤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힘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개념을 통해 인간이 자기 초월을 통해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 이유라고 하였다.
현대 후기 철학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존재의 이유를 고정된 본질이나 목적에서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흐름과 변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단일한 이유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기와 관계 속에서 존재가 구성되고 변화한다고 보았다. 또한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인간을 특정한 시대와 담론 속에서 형성되는 존재로 보며, 우리가 스스로 질문하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물음 자체가 역사적 구성물임을 지적한다.
이렇듯 철학사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단일한 정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질문의 방식과 접근을 변주해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으로, 중세 철학은 신학적으로, 데카르트와 칸트는 이성적 주체로서,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실존적 관점에서, 니체와 들뢰즈는 생성과 변이의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모색하였다. 그러므로 철학사를 따라 이 질문을 고민하는 것은 단순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해답을 구성하는 과정이 될 것이고, 여전히 21세기 철학자들도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현대적 맥락에서 이 질문을 해석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탐구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독일 철학자 토마스 메칭거(Thomas Metzinger, 1958년~)는 저서 『자아 터널(The Ego Tunnel)』에서 인간의 자아가 본질적으로 일종의 인지적 환상이며,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은 신경 과정이 만들어낸 가상적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인간의 뇌가 생성한 모델의 일부일 뿐이며, 그것을 넘어서 자유롭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메칭거는 우리가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조차도 뇌의 모델에 갇혀 있음을 지적하며, 이 제한된 터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자아라는 틀을 초월하여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경험되는지에 대한 더 근본적인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 그는 신경과학과 철학을 결합하여 자아가 허구적 구성물임을 인식하는 것이 곧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자아를 실체로 믿는 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도 하나의 가상적 이야기일 뿐이며, 그 이야기에 얽매이지 않고 더 넓은 인지적 가능성과 존재 방식을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사고할 것인가? 메칭거는 이를 위해 메타인지적 성찰, 즉 자아를 넘어서는 사고 방식을 강조한다. 그는 명상, 신경과학, 철학적 성찰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즉,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초월하는 것, 즉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고, 그 구성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존재 이유는 단순한 답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탐구와 성찰을 통해 형성되는 여정임을 강조한다.
또한 영국 국적으로 현재 레바논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최근 한국의 경희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할 예정이라는(아직 확인되지 않음),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1965년~)는 저서 『소각하는 사유(Nihil Unbound)』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인간 중심적 사고의 잔재라고 비판한다. 그는 인간 존재가 필연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우리는 냉혹한 우주적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특별한 이유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철학적 태도라고 보았고,
현재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교로 재직 중인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년~)는 그의 저서 『유한성 이후(After Finitude)』에서 인간이 어떤 필연적 이유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하나의 필연적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와 존재 자체가 필연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영문학자로, 현재 미국 라이스대학교 영문학과의 리타 시어 거피(Rita Shea Guffey)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인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 1968년~ )은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물음을 인간 중심적 사고의 결과로 보고,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서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에서 그는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기보다, 거대한 생태적 네트워크 속의 일부로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우리의 존재 이유는 어떤 개별적 목적에 있지 않고 더 넓은 생태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모튼의 철학에서 "넓은 생태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얽혀 있는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환경 윤리나 생태철학과는 다르게, 인간을 단순히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서로 얽혀 있는 거대한 생태적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튼은 이를 ‘어두운 생태학(Dark Ecology)’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자연(nature)’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독립적이고 순수한 실체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되었으며, 인간 자신도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는 모호하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사용하는 기술, 먹는 음식은 모두 비인간적 요소들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 역시 인간을 별개의 개체로 상정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사고방식이 깨지면 존재 이유를 묻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하나의 "초개체(hyperobject)" 속에서 상호작용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는 인간의 행위가 초래한 것이지만, 그 영향은 인간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지구 전체에 걸쳐 펼쳐진다. 인간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생태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며, 따라서 개별적인 ‘나는 왜 태어났을까?’보다는 ‘나는 어떤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전통적인 목적론적 사고와도 충돌한다. 우리가 보통 "나는 왜 태어났을까?"를 묻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이유나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되지만, 모튼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의 의미는 개별적인 주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힌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이 환경과의 관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독립된 존재’가 아닌 ‘연결된 존재’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로, 현재 런던 킹스턴 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캐서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 1959년~)는 저서 『형태 없는 미래(The Future of Hegel)』와 『뇌의 변화(On Neuroplasticity)』에서 인간이 태어난 이유를 결정론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는 신경 가소성과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즉, 우리는 이미 주어진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위와 같이 현재, 21세기 철학자들은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을 신경과학, 존재론, 생태철학, 우연성, 탈인간중심적 사고 등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의 답변은 과거 철학자들처럼 절대적 목적이나 필연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 자체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각각의 견해를 엿보며 지금에 이르러, 나라는 존재는 필연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냉혹한 우주적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즉, 내가 특별한 이유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한 기회, 우연한 충돌로(어머니와 아버지)로 태어났을 뿐이고 그 태어남의 의미를 특별히 부여할 필요 없이 살아있는, 존재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생명이 다할 때까지 애써 살아가는 것만이 진정한 나의 삶의 방식임을 나 자신에게 주입시키려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한켠에서 바람처럼 스치는 존재일 뿐이다. 마치 봄의 꽃잎이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흩날리는 것처럼, 나의 존재 또한 그저 우연히 형성된 조화 속에서 일시적으로 빛나고 있을 뿐인데, 이러한 의식은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든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커피 한 잔의 향기와 햇살이 내 방을 가득 채우는 순간, 나는 단순한 생명으로서의 소중함을 느낀다. 나의 존재는 의미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탐색이 아닌, 그저 존재하고 느끼는 것 자체가 진정한 삶의 기쁨임을 깨닫는다.
하늘의 별들은 나의 우연한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나는 그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잠시나마 내 자리를 찾는다. 나의 하루는 특별한 목적이 없는 빈 캔버스처럼, 내가 그리는 대로 색칠할 수 있는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우주의 무관심 속에서도, 나는 이 순간의 존재를 즐기고, 나의 감정을 느끼며, 주변의 아름다움에 눈을 기울인다.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우연히 시작되었지만, 그 안에서 매일 매일 나만의 작은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감사하자,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세상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를 요구하지 않지만,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의 삶을 지켜보는 자연의 섭리를 느끼자. 날마다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들은 그 자체로 나에게 의미가 있으며 지나가는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 나를 스치는 이들의 미소, 그리고 평범한 일상이 쌓여가는 순간들은 모두 나의 존재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러한 사유는 나를 더욱 자유롭게 하고,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나는 우연히 태어났지만, 그 우연 속에서 내가 만들어가는 순간들이 모여 나를 구성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하루하루의 작은 일들 속에서 나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끼기를, 내가 스치는 이 세상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색깔로 캔버스를 채워가며, 비록 그 의미가 사소하더라도 나에게는 특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나의 여정은 결국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며, 매일매일의 순간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내 존재를 긍정하며, 나에게 주어진 이 생명으로 작은 기쁨들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내가 특별한 이유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존재의 이유가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더 진정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나에게 주입시키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고 싶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세상의 한켠에서 바람처럼 스치는 존재로, 내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