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9] 4기 김은
[원문장] 『서양고대철학2』 강상진, 김재홍, 박승찬, 유원기, 조대호 외 지음
“헬레니즘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마음의 평안이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는 자연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앎을 얻음으로써 우리가 고통에서 해방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회의주의자들은 감각이 진리의 기준일 수 없음을 논증하면서 진리와 허위를 판별할 기준을 발견할 수 없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의 문장)
헬레니즘 시대의 회의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요한 학파 중 하나로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년)부터 로마 제국의 확장(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로,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이 번성했던 때였다. 이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건설로 많은 국가들이 제국의 통치 속으로 편입되면서, 개인주의적 성향의 철학이 등장했는데 이때 회의주의자들은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으로서 행복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집중했다.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독단적인 주장을 거부했다. 그들은 객관적 진리의 확실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무지를 자각하고 평정심을 유지하여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방법을 탐구했다. 즉 헬레니즘 회의주의자들은 내면의 평정심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판단을 유보하며, 객관적 진리의 확실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철학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적 풍경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회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잠깐 살펴본다면,
1. 엘리스의 피론 (Pyrrho of Elis 서기전 360-270)
피론주의의 창시자인 피론은 급진적인 회의론을 주장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물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특정 지식을 주장할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epoché)을 중단해야 한다고 믿었다. 피론은 우리의 인식과 추론이 항상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독특한 형상 세계의 존재를 확인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지각은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말로 어떤 주장도 확실히 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에포케(ἐποχή, 판단의 중지)를 통해 평온(아타락시아, ἀταραξία)을 얻고자 했다.
그의 결론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그로부터 도출된 결론(예: 플라톤의 이론)은 신뢰할 수 없으며 따라서 추상적이고 불변적인 형태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으로 회의주의자가 분명하지만 위에서 말한 선입견이나 편견 등을 통한 판단 중지를 통해 계속적인 철학적 탐구를 하기를 권유한다.
2.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Sextus Empiricus 서기 후 160–210)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피론주의의 탁월한 옹호자였으며 그는 세 종류의 탐구자(독단주의자, 아카데미아 학파, 피론주의자)를 구분하면서 아카데미아 회의주의자는 진리가 파악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독단주의(부정적)에 빠지고 있는 반면 피론주의자는 외부 재상의 본성이 파악 가능하지 여부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고 탐구를 계속 진행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회의주의자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현실에 대한 특정 지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플라톤과 같은 독단적인 철학 체계를 비판하며 감각이 종종 속이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속임수에 기초한 추론에는 결함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플라톤을 포함한 철학자들이 인간 경험 너머에 있는 것들(예: 형태의 세계 즉 이데아)에 대해 가정을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이해가 겉모습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데아와 같이 관찰할 수 없는 현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의 결론은 이성이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념에 도전하며 형상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모든 주장에 대해 똑같이 유효한 반론이 있으며 판단을 유예한다는 것이다.
3. 아르케실라우스 (Arcesilaus 서기전 316-241)
플라톤 이후 아카데미아의 지도자인 아르세실라우스는 플라톤 자신의 학파에 회의론을 도입했다. 그는 인간 이성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철학적 탐구를 통해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공격하며 플라톤의 이데아가 흥미로운 지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조차 결함이 있다고 제안한다. 특히 그가 주로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독단주의는 스토아학파로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그와 함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지만 이는 소크라테스의 해석과 달랐기 때문으로 아르케실라우스와 제논 모두 ‘진리에 대한 앎이 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제논은 소크라테스가 발견하지 못한 진정한 앎을 자기 스스로 찾아냈다고 주장한 반면 아르케실라오스는 제논이 찾았다고 주장하는 앎이 결국 또 다른 의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의 결론은 우리가 이성을 통해 형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이 의심스러우므로 플라톤의 이론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대신에 그는 형태에 대한 독단적인 확실성 없이 지식에 대한 확률적 접근 방식을 옹호한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주요 사상인 지각의 불확실성, 진리의 불가능성, 판단의 보류, ataraxia (평온)은 다양한 철학적 사조에 영감을 주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했는데 특히 헬레니즘 시대 회의주의는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확실한 진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현대 철학의 회의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대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주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거부한다. 또한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모든 과학적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과학적 연구에 적용되는 회의주의적 태도를 거론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적 연구의 한계를 인정하고, 과학이 모든 질문에 답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종교적 경험과 교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는 믿음은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적 회의주의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회의주의 태도를 가지며 다양한 종교적 관점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듯 헬레니즘 시대 회의주의 사상은 현상학, 해석학, 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철학적 사조에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까지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흔적을 남겼다.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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