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루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나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2012. 5. 16. 21:47
오랫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연애소설 읽기를 거부했다. 둔한 통증 같은 그리움을 안고 살기에 감정 이입의 질주를 감당하기보다는 감정의 굴곡이 없는 편안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함이리라.그러나 요사이 나는 무슨 까닭인지 오래전에 읽었던,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는 니체의 사상을 배경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자태를 드러낸다. 삶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질까?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리에게 묻기 시작한다.
결국 소설 속 이야기는 모든 삶의 무게와 얽매임으로부터 도피하며 에로틱한 우정을 진정한 삶의 자세로 여기는 토마스, 반면 스스로의 존재감에 끊임없이 회의하고 삶의 무거움 속에서 토마스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믿고 영혼의 무게감을 스스로 짊어지는 테라사,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증오하며 정치적 사회적 무거움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사비나, 그런 사비나의 가벼움을 사랑하는 프란츠 등의 4인의 사랑과 삶의 모습을 서술하며 4인의 사랑과 삶의 자세로부터 작가는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진정한 삶의 자세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을 던지며 인간의 욕망과 고통, 삶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인 듯.
오늘 나는 오랜만에 읽어보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사랑은 자아를 찾는 가장 아름다운 통로이며 동시에 그 사랑에 모든 것을 걸 때 위험천만한 모험이 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의 무거움과 가벼움, 인생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들락거리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지한다.
2015. 3. 30. 20:55
<테레사 유감>
인생이란 초벌 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 그림일까?(민음사 15쪽)
그녀는 사랑했으며 여전히 사랑한다는 사실, 또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그에 대한 사랑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건조한 그녀의 일상을 상쇄시켜줄 낱말로 포장된 것은 아닌지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전날 밤을 상기하며 그녀는 명치끝이 아려왔다.
“당신을 다 가질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내 한계를 느껴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관계의 골을 더 깊게 파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팔을 뒷머리에 두른 체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솟아나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쩌면 그로서도 그녀의 말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눈가에 어리는 눈물 때문인지, 눈을 부시게 하는 햇빛 때문인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저절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물결이 내부의 고독을 건져 올리며 그녀의 존재를 환기시켰다.
그 순간 그녀는 열 살은 더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삶에 굴복한 나머지 피로해 지친 자신을 발견한 셈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오랫동안 유보해 왔던 현실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만 했다.
“나만 사랑해줘요.”
실현 가능하지 않았던 꿈을 꾸며 뻔뻔할 만큼 지독한 열정을 퍼부었던 그와의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가,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그에 대한 고통스런 욕망을 느꼈다.
“나는 두려워. 나는 겁이 나. 제발.”
충동뿐,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거세게 소용돌이를 치다 침몰했다. 어쩌면 그도 누구에겐가 진심으로 그런 말들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단지 그의 상대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을까? 그녀는 자조의 입술을 깨물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쾌락이 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은 우둔하고 때로는 상스러운 욕망에 거침없이 몸을 맡기리라 예상되는 그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변하고자 하는 어떤 의지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육체의 쾌락이 그의 삶의 진부함을 상쇄해 주리라 기대하며 사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일으켰기에 얼마간은 참아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삼 그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곱씹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그 없이, 그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여섯 개의 연속적인 우연을 거쳐 서로에게 이르렀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사랑했고 함께 죽었다. 슬픔이란 그들에게 마지막 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행복은 그들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선율의 비장함이 그들을 파고들었다.
책 속 어디에 이런 문구들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몇 번을 뒤적였지만 찾지 못했다. 다시 읽어야 할까? 아니면 나의 유치하지만 변주된 독백이었을까?
2016. 7. 28. 07:24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을 감상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토마스의 정말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행동들에 반해 그의 정치적 신념은 얼마나 대단한가? 시대에 맞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죄의식 없는 바람기 밑에서 어떻게 저런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참 모를 인간이네, 비웃다가도 경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시골뜨기 여급, 인생 자체가 한없이 무거운 여자 테레사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 또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을 끄는 것은 토마스와 테레사와 사비나와 프란츠, 네 명이 이끄는 사랑과 인생의 변주곡들, 그들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여전히 깨닫고 성장하고, 각자의 운명으로 접어드는 과정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복하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틀에 매몰되어 가는 인간들의 모습, 그들 속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겠구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영원히 미완성이며 불충분한 ‘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이지만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 조금은 성장해 가는, 하여 서로의 인생에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며 상대를 이끄는 광대한 힘,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이 지닌 운명인 듯.
하여 다음 구절을 다시 새기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주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자, 미완성의 사람, 아직 불충분한 인간과 하나가 된들 무엇이 생기겠습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스스로가 성숙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부에서 무엇인가 이룩되는 일이며,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일이며, 상대방을 위해서 또 다른 세계가 되어주는 숭고한 계기인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는 저마다의 사람에 대한 엄청나게 큰 요구입니다. 그를 선택하여 광대한 것으로 이끄는 그 어떤 힘인 것입니다.“ -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
그리고 2024년 2월 21일 나는 비 오는 숲속을 걸으며 오랫동안 쿤데라와 고명섭의 글들을 되씹었다.
『광기와 천재』란 책에서 고명섭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다음 구절을 복기한다.
“수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개의 범주로 쉽게 나뉘어질 수 있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에게 고유한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개념을 찾는다. 다른 쪽은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첫 번째 부류의 집착은 낭만적 집착이며, 그들이 여자에게서 찾는 것은 그들 자신, 그들의 이상이며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실망하게 된다. 왜냐면 이상이란 우리가 알다시피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집착은 바람둥이적 집착이며 여인들은 여기에는 감동적인 것이라곤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여자들에게 주관적에서도 실망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실망하지 못하는 태도 그 자체는 뭔가 추태스러운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바람둥이의 집착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집착은 실망을 통한 죄의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쿤데라의 책 230쪽)”
더불어 고명섭은
“사랑이란 둘인 것이 하나로 되면서도 그 이원성을 완전히 지양(제거)해버리지 않는 기적적인 일이다.” 장 이폴리트의 이 명제가 맞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두 종류의 바람둥이는 사랑의 무능력에 관한 동일한 존재다. 그들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없고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지 못할 뿐이다. 편집증적 사랑도 분열증적 사랑도 불행한 사랑이란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쪽은 사랑의 이원성을 견디지 못해 그 이원성을 하나로 합쳐 자기 자신에게로 일체화하려다 그 사랑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만다. 다른 한쪽은 ‘둘인 것이 하나로 되는’ 사랑의 일원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의 표면에만 머물 뿐이다. 한쪽은 맹목적이고 다른 한쪽은 공허하다. 맹목적 사랑이든 공허한 사랑이든 두 경우 다 ‘불행한 의식’이며 ‘불행한 열망’이다, 라고(광기와 천재 15~16쪽) 피력하며 바람둥이를 삶의 보편적인 역설에 관한 하나의 비유로 해석하며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삶의 완성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운명에 반항해 아름다운 진주를 빗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운명에 반항’하는 인간이란 설정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묻는다.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여 삶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인간’을 뒤쫓다 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혹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앞으로의 내 생을 채색할 논제들일 것이다. 라는 정리를 하며 자박자박 다정하게 비 내리는 숲속을 걷는 일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 고명섭이 걷고자 하는 길, 나도 그 길을 가고 싶다, 라는 아득한 생각에 메이다, 문득 안개가 감싼 호숫가 옆, 벌거숭이 나뭇가지마다 맺힌 작은 물 봉우리들, 곳곳마다 웅덩이를 타고 급조된 길을 만들며 졸졸 흐르는 작은 냇물 소리, 갈색의 낙엽 위에 다닥다닥 리듬을 만들며 떨어지는 빗물 소리, 그리고 두런두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걷는 산책자들에 대해 나도 몰래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언뜻 든 생각, 비가 오면 그 많은 참새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겨울비에 오돌오돌 떨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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