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62
제 1 강
서양의 역사와 문화
제 1 장 문명의 고향, 메소포타미아
- 헤로도토스: 인키피토스(글의 첫 부분: 라틴어로 쓰여짐.) 『역사』
-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혹은 정기문이 쓴 책도 있다.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쓴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Civilization: civitas:기원전 3500년경에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최초의 문명이 태어났다.
Culture: 라틴어 Colo에서 시작(재배하다) 공동으로 갖게 되는 습관
이 장에서 배울 내용(메소포타미아)
1.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2. 그리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3. 두 지역 신하 간의 유사성
4. 페르시아 설형문자
5. 길가메시 서사시
6. 지구라트와 바벨탑
7. 빛(문명)은 동방에서
메소포타미야: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사이 지역(희랍어,그리스어, 헬라어로 표기:역사는 기록한 사람이 승리자이다.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을 정리했으므로 희랍어로 쓰여졌다.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을 부르던 말이다.) - 이집트란 말도 멤피스의 주신인 PUTA신의 집이 있는 곳이므로 이집트인들은 이곳을 이집트라 불렀다. 로제타 스톤; 나폴레옹이 원정을 가서 발견된 돌에 이집트의 상형문자(신성문자, 민형문자, 신관문자)와 그리스어로 쓰여진 암호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리스어로 밑에 쓰여있던 것과 비교해 해독이 가능해 이집트의 역사를 알수 있게 된 사연 – 이집트는 현재 아프리카에 소속되었으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합쳐서 그리스를 포함해 동방이라고 생각했다.
* 왜 이지역에서 문명이 태어났나?
이 지역은 비옥했다. 강이 있어 농사 가능, 잉여 생산이 이루어졌다. 식수 문제 해결 가능. 우루크가 최초의 지역, 인접 지역들이 이 지역으로 많이 들어왔다.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는 여리고에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종족이 바뀌면서 수메르인(기원전 6000년) - 아카드인(2300 – 1900) – 바 빌론(2000 – 1300) – 앗시리아인( ) – 신바빌로니아( ) – 페르시아(540 – 343년)인 등이 주도권을 잡았다.
* 왕의 길(수사에서 사르디스까지의 길)
제 2 강
서양 문명 1. 헤브라이즘(현대의 이스라엘 문명은 이집트(애굽; 중국사람들의 음차). 유대인이 믿는 종교. 기원전 1290년 경에서 출애굽을 하는데( 종살이 하던 이들을 히브 리 (헤브라이:라틴어로 종살이 하는 사람들)라고 불렀다. 초대왕은 사울 – 데이 비스(다윗) - 솔로몬 Before Christ(bc)하느님이 인정한 신성한 왕. 헤브라이 왕(남쪽을 유다왕국(신바빌론에 의해 멸망, 왕족을 바빌론으로 끌고 감;바빌론 유수,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페르시아의 키르스 왕이 그들을 해방해 유다지역을 속주로 만든다.(이곳을 유대인이라고 부름- 유일신교의 절대 신앙)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이스라엘이라 부름(야곱의 별명이 이스라엘, 하나의 민 족이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2.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문명)
서양 문명의 두 뿌리(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
헤브라이즘(Hebraism)
야훼를 숭배하는 기독교
- 의지적
- 윤리적
- 종교적
2. Hellenism(헬레니즘)
- 이성적
- 과학적
- 미적
그리스인들은 이 문명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서양인들이 계속적으로 이 생각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 왜곡되었다.)
@ 그리스 문명 – 합리적
- 민주적
- 자주적
- 능동적
@ 메소포타미아 문명 – 전제적
- 수동적
- 미신적
@ 대조적으로 보는 시각의 원인
- 페르시아 전쟁(B.C 491 – B.C 479)에서 승리한 그리스인들은 경제력, 인구수, 군사력면 에서 훨씬 뒤떨어지는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이긴 데에 자부심을 느낌.
- 승리한 이유를 두 문명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찾음
-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아시아) 사람은 태만하고 무감각하여 전제적 지배의 예속을 받으며 대제국에 살고 있는데 반하여, 그리스(유럽)인은 자유가 지배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참여에 의해 운 영되는 작은 국가에서 생활한다.
@ 그리스 12신 가운데 11신의 신전이 이집트에 있다. 미노아 문명에 관한 여러 전설에 그리 스 신들이 등장한다.
@ 그리스 신화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의 유사성(그리스 신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 제우스가 소아시아에서 활동했다. 소와 관련 있다.
- 수메르에서 그리스까지 하나의 거대한 문명권 형성
- 바빌론 신화(메소포타미아 신화)가 그리스 신들의 탄생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신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거의 흡사한 이야기 구조
- 메소포타미아인 동방지역은 달을 숭배한다.
- 메소포타미안 신들도 그리스 신들과 마찬가지로 신인등형론(신과 인간이 같은 모습을 한 다.) 신들은 자연 현상을 의인화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처음에는 달신(초승달)이 태양 신보다 높다고 하는 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국기에 초승달 등장) 7일이 1주의 관념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었다.
@ 문명의 3대 요소: 도시, 청동기, 문자
제 3 강
* 페르시아의 설형문자(기원전 3400년 전)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이집트는 매우 건조해 많이 남아있다.)
페르시아인들이 이란의 선조.
점토에서는 쐐기문자를 기본으로 한다. (수메르인, 페르시아인도 . 그러나 언어는 달랐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한 여행가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최초로 유럽에 가져왔다. - 메소포타미아에 위대한 고대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문명이 자신들의 믿음과 역사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 하노버 사람 니부어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왕궁 터에서 많은 비문을 발견
이 비문 해독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은 독일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로테펜트
페르세폴리스가 페르시아의 수도였고 페르시아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이야기가 비문 에 쓰여 있을 것이라고 추측, 쐐기 문자와 페르시아 왕들의 이름을 수없이 대조해가면서 암호 풀이에 열중, 1802년 설형문자 해독의 기반을 마련. 비문에 페르시아의 위대한 왕인 다리우스와 그의 아버지 히스타스페스,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
주원준: 길가메시 비문 해설
헨리 롤린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인간 중심의 문화
바벨탑(고유명사)과
지구라트(지구라트는 보통명사:산꼭대기, 높이 세우기에서 유래, 신전)
각 지역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이 수호신을 제사 지낸 곳
지구라트: 높은 봉우리란 뜻으로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아 올린 계단식 신전
기원전 4000년대 말부터 만들기 시작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지구라트와 바벨탑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이 전설을 변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벨탑은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건설된 7층 탑
바벨: 아카드어 ‘바브이루’, 바부: 문, 이루: 신 – 신의 문
그리스인들이 바벨을 바빌론이라고 부르고 이 지방을 바빌로니아라고 불렀다.
바벨은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을 말하는 것이고 바벨탑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쌓았던 탑
빛(문명)은 동방에서
- 서양인들이 서양 문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신화와 종교, 현세 중심적인 문화가 메소포 타미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언어, 교육, 천문학, 수학 등 많은 분야에서 서양 문명의 근간을 제공 했고 알파벳과 60진법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졌다.
제 4 강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보시길
민주주의 원형을 만든 아테네
아테네의 전성시대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1694 – 1778)는 인류사에 위대한 시대가 네 번 있었다고 말했다. 페리클레스가 다스리던 ‘아테네의 전성시대’가 그 첫 번째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던 로마제국의 시대가 그 두 번째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가 그 세 번째요.
루이 14세 시대가 그 네 번째이다.
파르테논 신전(아테나 여신의 별명: 파르테누스: 유네스코가 인류가 보존해야할 문화유산의 첫 번째로 꼽는다)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네인들이 이룩한 민주주의는 현대의 어느 나라도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다. - 소크라테스 활동
Democracy(민주주의)의 원형을 만든 시대: 페리클레스 시대
B.C. 431년 페리클레스 연설(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의 전쟁사 속의 글)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시대)
“우리의 정치 체제는 이웃 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 보다는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 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 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 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 는 일도 없습니다.”(페리클레스의 두 번 째 부인 아스파시아가 썼다. 소크라테스도 아스파 시아의 제자였다.)
프랑스 인권 선언문은 혁명이 추구할 이념이고 페리클레스 연설은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자랑이다.
1789년 주권재민의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체제를 수립
나폴레옹: 혁명의 지도자 마라, 당통, 로베스 피에르가 죽고 나폴레옹(독재자)가 혁명 사산
2. 아테네 민주주의의 아버지, 페리클레스
*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 어머니: 아가리스테
투구를 쓴 이유는 정수리가 뾰족했고 머리가 길었다.
스키노팔로스 = 무릇머리(스키노:무릇, 케팔로스:머리)
매력적인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성품은 단아하고 깨끗했다.
* 페리클레스의 스승인 아낙스고락스는 지성을 강조하며 지성이 최초의 혼돈 상태를 질서있 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과학에도 깊은 지식을 소유했다.
* 일식에 관련된 페리클레스의 일화:
아낙사고라스에게 배운 페리클레스는 밝은 과학적 지식이 있었다.
* 제논과 교류로 연설 능력을 향상시켰다.
* 투키디데스는 “내가 페리클레스를 쓰러뜨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쓰러진 것이 아니라고 주 장할 것이고, 그가 쓰러진 것을 바라본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가 쓰러지지 않았다고 믿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페리클레스를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 페리클레스의 약점: 지독하게도 자식 복이 없었다.
장남 크산티포스와 갈등이 심했고 막내 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3. 사연 많은 아테네 민주화
* 호메로스
“그러나 데모스 가운데 누가 고함을 치며 말하는 것을 볼 때면 오디세우스는 홀로 내려치 며 이렇게 야단쳤다. 돌았어, 얌전히 앉아서 너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의 말이나 듣도록 해. 너는 전쟁도 할 줄 모르는 허약한 자며, 전쟁에서나 회의에서나 축에 끼지도 못하니 까 말이다. - 일리아스(일리아드는 영어식 표현)
* 데모스(Demos) = 피지배의 대상으로 사회 & 정치의 주역은 아니다.
* 귀족회의가 정치와 행정을 주도(아레오파고스라는 귀족회의)
* 민회가 있었지만 귀족회의가 민회의 소집 시기, 논의 내용을 결정했다. 민중은 찬반 의견 을 표시했을 뿐이다.
* 재판도 거의 전적으로 귀족이 담당했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레오파고스 의원들이 의회는 법을 수호하고 도시의 많고 중요한 사무를 처리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사람을 벌하고 벌금을 징수하는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다.“
* 귀족들이 법을 수호하고 집행하고 재판하는 권한을 독점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 민중들은 재판에 대한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 아네테 민중의 정치 주도 기반은 솔론이 만들었다.
제 5 강
3. 사연 많은 아테네 민주화 계속
* 솔론: 귀족과 평민의 대립 원인
1. 사회 경제 문제(극심한 빈부격차)
2. 중갑보별술 도입 & 상공업 발달
3. 평민의 권리 신장을 위해 개혁 단행
400인 협의회 – 민중법정(Heliaia)준비
민회의 독자성 확보(규정에 따라 정기적 소집)
의제 선택에서 자율성 확보(의사 발언)
행정관 선출에 대한 실질적 권한 확대
다수결(1인 1표)로 행정관 선출:이후 행정관 업무 집행 심사
데모스테네스: 그리스인은 법을 보편적인 원리를 구현하는 정의라고 여겼다
”본성이란 개개인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불균등하며 또 특이한 성질을 지니지만 또 특이한 성질을 지니지만 법은 모든 사람에게 통례적이고 평등하며 동일하다네. 법은 본질적으로 정의롭고 명예로우며 유용한 것을 요구한다네. 이 법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이 와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이 있다면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하나의 보편적인 법령으로서 공포되는 것일세.“
재판에서 민중의 큰 권리 확보
- 항소 법정(처음에는 민회 자체였다가 후에 배심원을 선출하여 구성)
민중은 관리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3. 아테네 민중은 법정 고발 가능
- 시민 개개인의 분별력과 권위 존중
실패: 귀족들은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생각
민중들은 얻은 것이 없다고 불만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정 – 독재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
망명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낮은 지대로 민중에게 임대
순회 재판제 도입 – 귀족의 사법권 악화
클레이스테네스: 민주적 개혁을 약속하면서 권력 장악
1. 500인 협의회: 민회의 의사 일정마련, 결의 내용을 집행
2. 부족제 개편: 지역 단위에 근거한 새로운 행정 조직을 만들었다.
(데모스. 트리티스, 필레)
3. 도편추방제: 독재자 출현 방지
민주주의 확고하게 정착
페르시아 전쟁: 해군력 강화를 위해 평민들을 입대시킨다. 평민들이 국가를 위해 활동하자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들이 등장한다.
에피알데스: B.C. 462년 민중을 위한 개혁
귀족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
권한의 대부분을 민회로 이관했고 이후 민회는 1년 에 최소한 40회 열렸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통해 아테네의 재판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인류 최초의 사상범)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 운 신들을 들여와서 퍼뜨렸으며 또한 젊은이들을 타 락시켰다. 형벌로는 사형을 제안한다. ”
배심원을 결정으로 판결났다. 281: 220으로 유죄
판결 후 소크라테스는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면서 적은 금액의 벌금을 내겠다고 주장
화가 난 배심원들은 361 : 140로 사형 선고
소크라테스 사형(400년에 사형)
당시의 배심원? 시민은 대략 2만 – 4만 명이었고 해마다 6000명의 자원자들로 배심원단을 구성해 재판시 일상적 사건 201명의 배심원, 보통 재판 501명의 배심원, 중요한 사건인 경우 1501의 배심원을 꾸렸다.
특정한 계층이나 당파가 결정을 주도할 수가 없었다.
재판에 참가한 사람은 일당을 받았다. 극빈자 & 노인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페리클레스: 민주주의 아버지로 ‘그리스의 학교’ 민주주의 전성기 : 1. 민회의 권한 강화
2. 관직 수당 도입
3. 관리 추첨제: 민중이 실질적으로 아테네를 이끄는 시대를 만들었다.
4.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 아테네 민주주의 역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 아테네 제국주의
* 델로스 동맹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 군대 유지를 위해 폴리스 간에 동맹)
델로스 동맹을 반대했던 멜로스를 아테네가 정복: 멜로스의 스파르타 지지로 군대를 파견 한다.
우리가 교섭 상대로서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약육 강식의 원칙과 객관적인 인간 이성의 논리적 필연성이 정의라는 원칙에 따르고 쌍방이 희 망하는 것을 명시할 필요가 있음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테네의 노예제도
최전성기 인구 30만, 그 중 노예는 10 – 20만이었다.
일반 인구 30만 중 시민은 4 – 5만명 시민 대게 한 두 명의 노예를 거느린 것이다
노예가 집안 일을 거들었기에 민회 참석이 가능했다.
민중 주도 민회는 분별력을 잃기도 한다.: 아르기누사이 해전 승리 후 벌어진 사건
아네테 민주주의 비판에는 허점이 있다.
- 아테네 제국주의는 가혹하지 않았다. 아테네가 300여개의 소국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나 지배가 온건했기에 아테네에 헌신적인 속국이 많았다. 특히 속국 민중의 지지를 많이 받 았다.(민주주의 수출)
- 공납금 문제
공납금 = 속곡의 안전 보장 – 당시 해적이 횡행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에서 아테네의 해 군이 절실했다.
- 민중의 분별력 부족 – 수백 년에 걸친 민회 역사상 치명적인 실수는 몇 차례 없다.
- 소수의 권력자가 통치했다고 해서 실수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 다. ( + 다수의 이익을 정책에 덜 반영)
민주주의 옹호론
민주주의는 지혜롭지도 않고 공평하지도 않으며 재산가들이 역시 통치에 가장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립니다. 첫째, 데모스라는 말 은 구가 전체를 포함하지만 과두주의라는 말은 단지 일부만을 포함합니다. 다음으로 부자 들은 최상의 재산 수호자들이고 현인들은 최상의 조언자들일지 모르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 도 다중처럼 잘 경청하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과두주의는 다중에게 위험 부담을 주면서도 그 자체는 단지 이익의 최대 몫이 아닌 이익의 전부를 다 차지하지요.
제 6 강
페르시아 전쟁
전쟁의 명칭: 그리스인의 시각에서 만들어짐
현대에서는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이라 쓴다.
헤르도토스가 쓴 역사서: 인키피트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르도토스는 그의 탐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이는 인간들이 이룬 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지 않도록 하고, 또 헬라스 인들과 이방인들이 보여 준 위대하고 놀라운 행적들과 특히 그들이 서로 전 쟁을 벌인 원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사)
페르시아: 인구 약 3, 4천 만 명, 넓이 5,500,000 제곱킬로미터
그리스: 인구 약 1천 만 명 현대 그리스 넓이: 131,957(한반도 223,646) 제곱킬로미터
페르시아: 이란 고원의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에서 시작
인도 – 유럽어족 출신의 페르시아인
초기 페르시아는 메디아의 속국이었음
고대 이란인이 그리스인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 ‘파르스’라는 지역에서 발흥한 집 단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음 – 페르시아의 명칭의 유래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제국을 이룩했고 페소포타미아 문명을 종합했 음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일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함
크세노폰(키루스 대왕의 열렬한 지지자)
페으시아 사람 키루스는 거대한 도시들, 수많은 국민과 민족들을 잘 지배했다. 하여튼 우리가 알기로는 키루스가 있는 곳으로부터 며칠씩 혹은 몇 달씩 걸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키루스를 본 적도 없는 사람들, 그리고 키루스를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기꺼이 키루스에게 복종했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키루스의 신민이 되려 했다.
키루스 대왕 사후 그의 아들 캄바세스 1세(기원전 529 – 522)가 계승, 캄비세스 1세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 수차례 반란 발생하였고, 유력 귀족 출신의 다리우스 1세가 계승
왕 중의 왕 다리우스 1세
새로운 수도인 ‘페르세폴리스’건설 후 페르시아, 메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그리스 등 여러 문화를 융합하여 거대한 왕궁 건립.
페르세폴리스(파르사) 궁전 유적(상)과 조공 행렬 부조 아케메네스 왕조 때의 수도로, 다리우스1세가 착공해서 3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건축 양식은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 영향으로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알현전 돌계단 벽에는 주요 피정복 민족의 조공 행렬이 새겨져 있다.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1 –486)
활발한 정복활동 이후 전국을 36개의 속주로 새롭게 편제, 총독 파견하여 행정과 조세 징수를 담당케 함.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관 파견
제국에서 통용되는 주화를 제작하여 상품 유통을 원할히 함
왕의 명령이 신속하게 전달되기 위해 ‘왕의 길’이라는 도로 건설: 가장 빠른 길은 ‘사르디스’에서부터 ‘리디아’, ‘니느웨’, ‘수사’까지 총 2700킬로의 대로임
말을 탄 사자가 9일 이내에 주파할 수 있었음.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
비시툰(베히스톤 산)비문
“나는 다리우스 왕이다.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왕 중의 왕이고 페르시아인이고, 페르시아의 왕이다. 다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 엘람, 바빌론을 비롯한 23개국을 지배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왕이 된 것은 아후라 마즈다의 보호를 통해서다. 나는 1년 동안 열하홉 번 전투했다고 아후라 마즈다의 보호 아래 승리했다.”
다리우스는 서쪽 지역 정복을 위해서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79년까지 그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킴 결과는 그리스의 승리
*아후라 마즈다는 여러 부족에 존재하는 차별을 철폐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것을 요구,
- 아후라 마즈다는 부족신의 한계를 넘어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신의 개념임.
- 통치자들이 아후라 마즈다의 명령을 받들어 통합을 추구한다는 주장은 결국 세계 정복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함.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519 – 466)
아버지 다리우스의 뒤를 이어 그리스를 침공 – 결국 그리스에게 패배
페르시아 전쟁 패배 이후 페르시아는 쇠퇴하기 시작함
크세르크세스 암살, 150년 가량의 쇠퇴기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 군대에게 패배하여 멸망.
2. 교전국 – 그리스
그리스: 500 – 1000여개의 폴리스로 구성(인구 증가, 해외 식민으로 점차 증가함)
- 그리스인은 본래 자신들을 헬레네스(헬렌의 후예라는 뜻)라 자신들의 나라를 헬라스라 고 부름. 지금도 그리스의 정식 명칭은 헬라식 공화국(Hellenic Republic)임
- 그리스인이라는 명칭은 로마인에 의해 불리게 됨. 로마인은 나폴리만의 정착지에서 처 음 만난 그리스인이 바로 그라키아인(Graikoi)였기 때문임.
(페르시아 전쟁 이전 주요 폴리스)
스파르타, 아르고스, 코린토스, 아테네, 테베, 밀레토스, 사모스, 키오스, 시라쿠사
올림피아: 4년마다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제우스 신전 제사 후 행사)
아테네: 시민 수가 약 2 – 4만명 이었으며 상공업이 발달하였고 민주 정치를 구현하였다.
스파르타: 시민 수는 약 9천 명이었고 소수의 시민이 다수의 피지배인을 지배하였다.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 언어와 혈통
- 종교
- 올림픽
- 정치 체계에 대한 자부심 – 폴리스에 속한 자유인
3. 페르시아 전쟁의 계기
1)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지배
2) 이오니아의 반란: 밀레토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의 출세 욕심에서 비롯
기원전 499년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 함대 200척 지원받고 낙소스섬 점령 시도
점령 실패 후에 참주직 박탈에 대한 걱정, 태도 바꿔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을 선동(페르 시아에 대한 적대심 생성시킴. 아테네 지원- 헤로도토스 ‘한 사람을 속이는 것보다 다수를 속이는 것이 쉽다 ’라는 명언을 남김)
이오니아가 페르시아군 전선 600척에 맞서지 못했고, 반란은 실패함.
4. 페르시아 전쟁의 과정
-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의 1차 그리스 공격
페르시아 함대가 아토스산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함선 300척을 잃고 돌아감.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의 2차 그리스 침공, 마라톤 전투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의 3차 그리스 침공, 테르모필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 페르시아의 1차 아테네 약탈,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79년 페르시아의 2차 아테네 약탈, 플라타이아, 미칼레(소아시아 사모스섬 옆), 이오니아 해방 전투
페르시아 군대(기병, 보병, 궁수)
아테네 군대(보병 중심:시민병, 기병, 궁병은 보조병), 해군
중장보병밀집대(팔랑크스)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의 2차 그리스 공격,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함대가 아티카로 가는 도중 에게해 섬을 점령하자 아테네인 히피아스의 인도를 받아 마라톤 상륙(보병 25,000/기병 1,000/보조병 100,000)
아테네가 폴리스들에게 군사 지원 요청하자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제전 때문에 늦게 파견 하고 플라타이아가 소수의 군대 지원하고 다른 폴리스들은 페르시아와 대립을 원하지 않아 마라톤에서 밀티아데스 장군이 지휘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전하는 전투 과정
페르시아인은 아테네인이 구보로 전진해 오는 것을 보자 맞아 싸울 준비를 했다. 페르시아 인은 아테네의 기병이나 궁수도 없이 적은 인원으로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멸망을 자초하는 미친 행위라고 생각했다.... 실제 우리가 아는 한 구보로 공격을 시도한 것은 아테 네인이 그 효시였고 또한 페르시아풍의 복장과 그 복장을 한 인간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 지 않은 것은 아테네인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리스인은 페르시아라는 말만 들 어도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전사자 6,400명, 아테네 전사자 192명, 아테네 승
-마라톤 경기의 진실
상식: 마라톤 경기는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42,195킬로미터를 달려 승리의 소식을 전하고 죽었던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의 달리기를 기념.
-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다르면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에서 스파르타(246킬로미터)까디 달려 이틀째 날(3일만에 돌아왔는지 서술하지 않음)에 도착함, 스파르타는 Carneia 축제를 끝내고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함. 헤로도토스는 이후 페이디피데스에 대해서 묘사하지 않음. - 대신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페르시아 해군이 아테네로 향하는 것을 보고,아테네 전병력이 신속하게 이동하여 페르시아군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전함.
마라톤에스 급사(급사)가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전함
기원후 1 세기 전기 작가인 플루타르코스 ‘아테네인들의 영광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전한다.
- 헤라이클레이데스 폰티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의 소식은 테르시푸스 (Thersippus of Eroeadae)가 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에우클레스(Eucles) 가 완전 무장을 하고 달렸고, 아테네의 최고 관리 앞에 도착한 후 “기뻐 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 라고 말한 직후에 죽었다, 라고 전한다.
기원 후 2세기 루키아노스(Lucianos)가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에 전하고 죽었다고 최초로 기록함.
“마라톤의 소식을 가져온 페이디피데스는 아르콘들이 전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 라고 말한 후 그의 마지막 숨을 쉬고 죽었다.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는 정확한 거리는 36.75Km. 1896년 약 40킬로미터의 거리를 달리다가 42.195 킬로미터로 정해진 것은 1908년 런던 올림픽 때임.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3차 그리스공격
이집트 반란 진압 후 군대 징집하여 육로를 통해 그리스 침입
총 병력 520만 명을 동원9해군 51만 7000여 명/보병 170만 명/기병 8만 명/전투 보조원 260만 명 등)
페르시아의 재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아테네는 삼단노선을 건조함
기원전 481년 코린토스의 이스트모스에서 폴리스들의 동맹을 맺음(그리스 폴리스의 반정도는 중도나 친페르시아)
총병력 20만 명을 동원(400여 척의 전함, 해군 약 8만 명, 육군 12만명)
페르시아 전쟁 준비 전 신탁 받은 내용
팔라스(아테네 여신의 별명 중 하나)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교묘한 재치로 애원한다해도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리라. 그래서 나는 재차 그대에게 강철 처럼 단단한 말을 하리라. 케크롭스 언덕(아크로폴리스)과 신성한 키타이론 산골짜기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지만 트리토게네이아(아테네 여신의 별명 중 하나)여, 멀리 보시는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 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
테미스트텔레스 중심 세력 왈
나무성채는 배를 말한다. 아테네를 떠나 살라미스로 이주
원로들 왈
나무성채는 아크로폴리스를 말한다.
-육군은 테르모필라이 계곡에서 해군은 아르테미시온 곶에서 대기, 가능한 한 좁은 곳으로 페 르시아군을 유인해 싸우기로 결정함.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테르모필라이 전투의 사령관
페르시아군이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하였고 스파르타인 300명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군 300만 대군을 맞섬.
영화 300등으로 끊임없이 기억됨. 그러나 300은 역사를 심하게 왜곡함.
5. 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 델로스 동맹
1) 델로스 동맹 – 아테네 제국주의
- 기원전478년 아테네가 주도하여 에게해와 소아시아의 폴리스들을 규합해 ”델로스 동맹 “을 결성, 델로스섬에서 동맹회의가 열렸고 동맹국들에서 거둔 기금을 관리하는 금고는 아폴론 신전에 설치한다.
- 소아시아와 에게해에서도 페르시아군이 모두 격퇴되자 전쟁의 위협이 없어졌고 일부 폴리 스들은 델로스 동맹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 많은 폴리스들은 아테네의 힘이 거대해지는 걸 염려, 기원전 465년 타소스는 공식적으로 동맹 탈퇴. 이후 낙소스, 사모스, 칼키스 등도 탈퇴 시도
- 아테네의 응징, 3년 동안의 타소스 공격 끝에 함락
-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동맹의 금고를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옮겼고 동맹국들은 아테 네 해군의 유지 비용을 계속 지불했다.
-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동맹국들에 대한 아테네의 지배가 심해졌다.
- 금고의 돈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고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됨.
2) 아테네 민주주의 발달
* 아테네 민주정치의 발전 과정
- 폴리스 성립 초기: 귀족들로 구성된 아레오파고스 회의가 정치 주도, 민회는 동의 기구 에 불과함
- 솔론의 개혁: 평민에게 피선거권 부여, 400인 협의회 창설(민회의 예비 모임). 민회 독립 성 강화, 항소 법정 창설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지역에 근거해서 행정 구역 정비. 500인 협의회 창설, 도편 추 방법 제정
- 에피알데스: 아레오파고스 회의 권한 축소
- 페리클레스: 수당제 도입(배심원, 관극 관람). 관직 추첨제.
*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기원전 5세기.
- 민중이 정치 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페르시아 전쟁기 해군의 육성 때문이었음.
- 해군에 수병으로 참가하게 된 민중은 정치 권리 요구
- 민중이 민회를 장악, 민회가 입법, 사법, 행정 주도
- 관직 추첨제, 관직 수당, 관극 수당을 통해서 민중의 정치 참여
3) 문명의 중심지 이동
- 페르시아 전쟁 이전 문명의 중심지는 메소포타미아 ’빛은 동방에서‘
-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철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
- 페르시아 전쟁을 전후하여 이오니아인이 대거 아테네로 이주함
- 아테네에서 철학, 문학, 과학의 발달(소피스트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아테네로 이주한 사람 들, 아스파시아,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외부인들)이 발달하면서 서양 문명의 원 류 형성
4)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강화 – 페르시아 전쟁 이전 동족 의식 약함
-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도 그리스인 동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 종족, 종교, 관심
- 페르시아 전쟁 말기 아테네 사절이 스파르타인에게 한 말
”아테네인이 종전을 위한 협상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거절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들의 위대한 신들의 조각상들과 신전들이 파괴되었는데 이런 결과를 가져온 적들과 연맹을 맺을 수는 없고 이를 되갚아 주어야 할 것이다. 둘째 같은 피와 말과 공동의 의 식과 희생 제사와 생활 습관을 가진 헤레네스 사이의 유대 때문이다. 이를 배신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페르싱 전쟁 이전이나 이후에도 그리스인은 끊임없이 서로 싸운다.
-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그리스인 절반이 전쟁을 기피하거나 심지어 페르시아 편을 듬(『역 사』 7138)
- 동족 의식이 약했음을 의미
-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지식인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이긴 이유 논의
- 페르시아인(동방인)에 대한 규정
1. 물질적 풍요와 사치를 탐닉하는 자들
2. 군사적으로 허약한 자들
3. 노예 근성을 가진 자들
4. 합리적 사유 능력이 없는 자들
5. 잔혹하고 무지한 ㅏ들
6. 부도덕한 자들
- 그리스인에 대한 규정
1. 검약하고 절제하는 자들
2. 군사적으로 뛰어난 자들
3. 자유를 누리는 자들
4.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자들
5. 교양있고 도덕적으로 뛰어난 자들
*그리스인의 동족 의식 – 오리엔탈리즘의 원형
- 서양인들은 민주적이고 능동적이며 자율적인 반면 동양인들은 전제적이고 수동적이며 타 율적이라고 주장
- 서양인들에게 ’페르시아 전쟁‘은 아시아를 물리치고 유럽을 구한 대사건으로 평가됨
-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첫 번째 ’서양은 우월하고 동양은 열등하다‘라는 서양인들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다. 두 번째 동양은 획일적이며 게으르며 정적이기 때문에 동적이 서양이 동양에게 가르침을 주 어야 한다.
- 존 스튜어트 밀 왈
”영국 역사에서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마라톤 전투가 훨씬 중요하다.“
- 서양을 주제로 두고 동양을 교화나 서양의 삶에 맞춰 적응시켜야 하는 존재로 간주
제 7 강
천 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영원한 로마 제국
세계사 경이 로마 제국
제국의 기반,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수립
200여 년 지속된 팍스 로마나
정복보다 포용 택한 ’보편 제국‘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제국 후원
*로마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 정치사 – 공화정 정치(귀족 + 인민이 권력의 근점을 이룬다), 제국 운영의 원리(보편 제국, 유럽의 근간 마련)
- 실용 문화 – 법, 토목과 건축
- 고전 문화 종합 – 그리스 문화를 종합하여 근대에 전수,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
1. 세계사 경이 로마 제국
징기즈칸 몽골 제국 150년만 유지
로마 제국: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붕괴
B.C. 202년 – A.D. 800년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
의문점 : 로마는 476년에 멸망했다.
* 비잔티움제국이라고 부른 나라의 사람들은 1453년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로마인이고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라고 생각했다.
비잔티움 = 유럽인의 동로마제국 무시
B.C. 753 – A.D. 1453년 존속기간 2200년
로마 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 로마라는 국가의 명칭
로마의 명칭(플루타르코스)
1 – 1 로마라는 이름의 기원
1설 – 펠라스기아가 로마에 정착하고 그들을 군사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지었다.
(그리스어 힘을 의미)
2설 – 트로이인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로마‘라는 여인이 배를 태우고 정착을 요청해 그녀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3설 – 토로이 여인 가운데 로마라는 동명이인이 있다.(이탈로스의 딸, 텔라푸스의 딸, 아스카 니오스의 딸)
4설 – 로물루스와 이름이 비슷한 여러 사람이 창설자이다.
5설 – 창설자가 로물루스(유력)
1 – 2 로물루스 출생설
1설 – 아이네아스 + 텍시테아의 아들 – 동생 레무스와 함께 어린 시절 이탈리아로 건너옴
2설 – 트로이의 여인 로마의 아들
3설 – 아이네아스의 딸 아이밀리아 + 마르스의 아들
4설 – 알바와 타르케티우스가 남자의 형상을 보고 딸을 바치라는 신탁을 받았으나 시녀를
바쳤다. 시녀가 쌍둥이를 낳았고 양육은 늑대가 했다.
5설 – 아이네아스 18대손(현재 통용되고 있는 설)
1 – 3 현대 학자들의 설
로마라는 명칭이 먼저 존재하고 로물루스라는 명칭은 거기에서 유래
티베르 강의 옛 이름 Rumon이나 Rumen에서 유래
움브리아어 Ruma, 흐르는 물(의 도시)
에트루리아의 ruma에서 유래, 이 단어는 늑대를 의미함.
urosma, hill. urobsma(urbs 도시)
S.P.Q.R(Snatus Populusque Romanus)
로마의 원로원과 대중
기원전 80년 경부터 쓰이던 국호(이전 국호는 Roma)
고대 문헌과 유적에 풍부하게 나타나며 310년대 콘스탄티누스의 동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6. 카피톨리누스 박물관에서
- 로마인의 조각상은 사실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다.
- 조상이 죽으면 imago(마스크)를 만들었다
- 마스크를 사당에 보관. 가문의 인물들을 흉상으로 만들어 집을 장식
공공 건물에도 많은 흉상을 설치한다.
키케로의 흉상(1C)
2. 고대 작명 방식
2-1 다른 사람이 지어줌
1. 기독교: ”최초의 그리스도 교도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
-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붙여준 명칭
-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교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
2. 그리스: 헬렌의 후예라는 의미의 헬레네스라고 불렀는데 로마인이 그리스인이라 부르기 시작
- 현재도 그리스인은 자기 나라를 헬라스 공화국(Hellenic Republic)이라고 부른다
3. 게르만족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북동 갈리아의 한 종족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
- 1세기 이후 갈리아 족 북쪽에 사는 모든 종족을 게르만족이라고 부름
4.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은 도시 이름”
- 이 이름을 이용하여 동로마제국을 지칭한 것은 1555년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 (Hieronymus Wolf in 1555)가 처음
1-1 여성의 이름 차용 – 여성의 생식력이 만물을 낳았다고 생각
5. 유럽 “에우로페(Europa)”
- 티로스인(페니키아인)은 에우로페가 끌려간 곳이라 하여 크레타 지역을 유럽이라고 불렀다.
6. 아시아 “아사리아 시대 언어 asu – 해가 뜨는 곳”
1설. 프로메테우스의 아내 아시아에서 아시아라는 이름이 유래
2설. 마네스의 손자이자 코티스의 아들인 아시아스의 이름에서 유래
7. 아프리카
- 고대에 리비아라 지칭했다.(여성 이름)
- 그리스인들이 바다의 “포말(아프로스)“ 너머의 세계를 아프리카라고 불렀을 수도 있 다.
- ”먼지, 땅“을 의미하는 아랍어 afar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 로마 지배 전
- 로마는 6000만 – 7000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종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
- 각각 독특한 문명을 발달 시켰다.
- 언어, 정부 형태, 종교, 사고 방식등이 다르다.
- 쉬지 않고 싸웠다.
그리스vs트로이, 이집트vs히타이트, 그리스vs페르시아, 스파르타vs아테네, 게르만인의 남 하
- 사람들 사이의 교역이 존재, 교환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화폐 존재
- 저울을 가진 환전 상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했다.
* 로마 지배 후
- 종족의 차이 극복
- 문화의 통일 (기독교) 라틴어 & 그리스어 언어 통일
- 로마법으로 법적 보호를 받았다.
-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는 인류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언급했다.
- 보편 제국으로 유럽 문화의 기반 마련
현재 서양의 정치제도, 법률, 종교, 문화생활의 기반 형성
나라는 달라도 유럽인이라는 동질 의식 형성
제 8 강
2. 공화정 정치 구조
초기 왕정 7명의 왕(기원전 753 – 509)
로물루스 (첫번째 왕)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가 루크레티아 겁탈을 해서 왕정이 폐지되었다. 공화정 시작
공화정의 정치 구조 – 2명의 콘술(민회에서 선출 통치권, 군대 통수권, 원로원, 민회 소집 권, 제정 집행권)이 통치
그러나 독재는 불가(상호 견제 및 원로원과 민회의 견제) - 원로과 민회
콘술(집정관), 통령. 임기 1년. 원로원은 가부장 100명으로 구성. 전직 관리들 중
@ 원로원
- 국고 관장: 세입 & 세출 규제
- 중요 범죄에 관한 조사 & 재판
- 외교권
- 원로원의 결의 (국정 주도)
- 원로원의 비상 결의(계엄령)
@ 민회
- 성인 남성으로 구성
- 관리 선출
- 법 제정
- 국가 중대사 결정(전쟁)
- 외교 문제
1. 세계적인 경이, 로마제국
* 로마의 민회는 복수 쿠리아, 켄투리아, 트리부스(인민회, 평민회) 트리부스 평민회에 입법 권(호르텐시우스 법) 호르텐시우스 법으로 귀족과 평민의 법적 평등 구현
* 콘솔, 원로원, 민회은 견제와 균형을 유지
공화정(현재의 공화정과 차이가 있음). 국가는 공공의 것이고 귀족과 평민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했다.
2. 제국의 기반, 포에니 전쟁(3차 전쟁, 기원전 264년 – 기원전 146년)에서의 승리
* 기원전 270년 경 이탈리아 반도 전체 통일로 지중해 재해권을 장악했던 카르타고와 대립 은 불가피 했다. - 카로타고의 로마 팽챙 저지
* 포에니 전쟁(2차 전쟁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코끼리를 동반. 이 10년 동안 이탈리아 본토를 유린)
3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기원전 146년)하며 그리스, 이집트, 아시아 일대를 정복한 대제국 건설
* 통일 과정 – 라틴인, 에트루리아, 삼니움, 마그나그라이키아 차례로 정복
3. 공화정의 몰락과 제정의 수립
* 귀족의 대농장 조성으로 부를 얻었지만 평민(자영농)은 오랜 군복무로 몰락했다.
- 병력 부족, 도시 문제 발생(대농장인 라티푼디아- 귀족들이 평민들의 토지를 사들여 대 농장을 이룸)
* 그라쿠스 형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호민관) – 농지법
기아누스 그라쿠스(호민관. 형의 농지법을 부활시키고) – 곡물법(세계 최초의 복지법)
* 귀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영농 체제 복원을 위해 노력
공화정의 파국
귀족과 평민의 계급 대립 극심
장군들이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권력 장악
100년에 걸친 내전 시작
마리우스, 카이사르 (평민파)
술라, 폼페이우스 (귀족파)
Civil War(내전)
카이사르 암살(기원전 44년) 후 내란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제 9 강
악티움 해전(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오스와 클라오파트레의 군을 물리침)
아우구스투스(신이 선택한 사람. 종신 집정관, 종신 호민관, 사실상의 황제)
- 원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구세주, 살바토르, 세이버)는 카이사르의 누나의 아들
- 그는 자신은 프린켑스라고 불렀다.(제1시민이다)
- 종신 집정권 & 종신 호민관 – 제정시대
- 원로원에게 제국 반에 대한 통치권을 주었다. - 원수정(프린키파투스;황제정이다.)
- 제 1 시민(프린켑스)
* 원수정은 공화정의 외피를 입고 있다
콘술을 비롯한 공화정의 관리들을 계속 선출
원로원은 제국의 반에 대한 통치권과 입법권 장악
민회의 약화로 원로원이 권한 접수
원수정은 실질적으로 제정이다.
군사와 제정을 장악함.
4. 200여 년 지속된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란 뜻)
* 오현제의 등장 – 로마의 평화(아우구스투스서 시작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까지)
문명의 확산 – 유럽 지역을 문명화(켈트족과 게르만족 로마화) 리메스(목책을 쌓음)
- 법률 & 건축의 실용 문화 발전
- 12표법: 사회의 다양한 현상을 법으로 규정 & 조정
- 시민법: 로마 시민이 부당한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다.
- 만민법(자연법): 외국인도 로마의 시민과 같이 로마법을 따르시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로마법 대전 편찬. 성소피아성당 건축
로마법의 원리를 지중해로 확장시켜 힘과 폭력에 근거해서 작동하던 고대 세계를 법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로 변모시켰 다.
토목 & 건축의 발달 : 로마 제국 도로망 85,000킬로미터
상수도. 수도교. 목욕탕.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을 넉넉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이 상수도 시설들을 보라! 그 리고 어디 한 번 이것을 그리스의 건축물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교해보라! 그러면 이 시설이야말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건축 물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을 수 있으리라!”
-1세기 로마의 상수도 관리관 프론티누스
- 콜로세움,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 경기장), 극장: 거대 건축물 가능 공법 – 아치, 콘 크리트 덕분이다.
- 세고비아 수도교, 트리어 목욕탕, 아를 원형 극장,
오랑주 극장(루이 14세 “우리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
5. 정복보다 포용 택한 ‘보편 제국’
로마의 치안, 도로망으로 교류 및 교역 증가.
로마시에 많은 동방인들 이주 주민의 다수가 됨
원래의 로마인은 사라졌다. 이주인들이 정통 로마인 행세를 했다.
로마시 거주자 90%가 외국인
출신이 다양하여 언어, 생활방식, 종교 등에서 이국적인 요소가 넘쳐났다.
로마에 외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룬다.
*카라칼라 – 212 년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정복한 사람들을 진정한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
로마의 시민권 확대
- 로마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시민권 수여
- 로마군 복무자
- 노예
- 노예를 쉽게 해방
- 해방된 노예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
- 피호제
- 노예가 해방된다 하더라도 주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봉사
- 여러 경제적 부담
- 반쪽 자유민 그러나 그의 자식은 로마 시민권자가 됨
- 시민권 부여가 형식에 그치지 않음. 속주민 출신이 황제, 원로원 의원이 많이 됨. 많은 지 식인도 배출됨
6. 21세기까지 이어지는 로마제국 후광
* 2세기 말 팍스 로마나가 흔들렸다.
게르만족 남하: 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황제
사산조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일대 점령
서기 235 – 284: 군인 황제 시대 50년의 위기
* 로마의 중흥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권 강화 추구
- 원로원 완벽히 무력화
- 도미나투스(도미누스)
- 황제가 제국과 신민의 주인으로 통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해서 비잔티움으로 천도해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함
- 니케아 공의회
- 게르만족의 남하로 압박
- 중흥을 위해서는 동방의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했다.
디오클레티아노스는 사분 체제로 로마를 다스림
훈족 아틸라의 압박
게르만족의 남하로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토아케르가 서로마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르스를 폐위시킴으로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로마를 차지한 지배자들은 동로마 황제의 비준을 받았다.
교황도 동로마 황제가 통제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족 대이동
메로빙거 왕조
피핀 – 카를루스 왕조. 교황령 기증
동로마 – 내흥
이레네의 섭정
옛서로마 지역 영토 회복
카를링거 르네상스 – 문화의 중흥
800년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추대
유럽의 아버지라 불림
오토 1세
962년 신성로마제국 건설
동로마 제국 = 비잔티움 제국
비잔티움 = 근대 유럽학자의 동로마 제국 무시
러시아의 이반 3세 : 러시아가 로마를 계승한다
모스크바 = 제 3 의 로마
미국의 의회당이 있는 언덕 – 캐피톨: 로마의 신성한 언덕
1달러 동전 : 여럿으로 이루어진 하나:라틴어 사요
미국 정부 문장
신은 우리가 하는 일을 좋아하시니라. ANNUIT COEP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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