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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 북송오자(北宋五子)와 성리학적 본체론 및 인성론의 전개

by thetraveleroftheuniverse 2023. 5. 29.

 

4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23학번 대학 새내기의 분투기 시리즈 43

 

동양사상입문

 

* 북송오자(北宋五子)와 성리학적 본체론 및 인성론의 전개

북송오자

1)주돈이(周惇頤 1017 1073) 호는 염계(濂溪), 자는 무숙(茂叔)

 

 

 

북송 유학의 창시자, 후대 주희에 의해 주자(주자)로 추존,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

)라는 저술을 통해 형이학적 우주론과 도덕 철학 전개했으며 인성론과 천도론의 결합 을 시도했다.

 

2) 소옹(邵雍 1011 1077) 호는 강절(康節)

 

 

 

상수학적 전통을 계승했으며 선후천괘위도(先後天掛位圖)를 그리고 팔괘, 육십사괘의 차서도(次序圖)를 만들어 자연의 변천 과정을 설명했으며 안락과 소요의 경지를 제창 (관물편: 도가풍의 삶의 태도)

#주돈이와 소옹 두 사람은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아 주역 이론을 끌어내고 우주론의 시단 을 염했다. 우주론(본체론)보다는 통서, 관물편에서는 심성 문제를 제기했으며 의리적인 천과의 관계를 찾아 주역, 중용을 일관되게 다루었다. 신유학의 시단은 도교의 선천상수 학과 연관을 맺고 열리지만 이내 심성의 문제로 전환하여 순수 유가경전인 주역, 중용이 이론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주장했고 결론적으로 물질적이고 상수적인 것 같지만 끝내 철 저한 도덕적 심성학으로 정착했다.

 

 

 

3) 장재(張載 1020 1077), 호는 횡거(橫渠) 처음으로 기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했다.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단절된 성 학을 계승하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 만물일체, 위민주의, 도통사상을 표현했다. 소옹, 주돈이에 이어 주역과 한 대의 기론, 맹자, 중용을 천리와 인성의 양대 근간으 로 하면서 인간 행위의 수양정식으로 예()를 내세워 수양론의 단서를 염.

 

 

 

4) 정호(程顥 1032 1085), 호는 명도(明道).

 

 

5) 정이(程頤 1033 1107), 호는 이천(伊川)

 

 

정호와 정이는 낙양에서 강론, 문화생을 훈육해서 일명 낙학(洛學)

정호는 심즉리의 입장, 육구연, 왕수인으로 이어지는 심호의 모태를 세웠다.

정이는 성즉리의 입장, 주희의 사유의 모형이 되었으며 또한 리학의 모형이 되었다.

 

남송의 성리학

남송의 역사적 조건

- 집권 관료의 도학 배척과 사공학파의 비판

- , 구법당 당쟁의 재연: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화의파(왕안석의 계승자) VS 주전파(도학파)

- 화의파에 의한 도학 배척( 1144년 도학은 곡학(곡학)으로 몰려 천자의 명으로 도학 금지 령이 반포되어 1차 수난기를 맞았다. 12년간)

- 2차 수난: 주희를 겨냥, 1195년 거짓 학문에 대한 금지 조치(위학지금 僞學之禁) 대금정 책을 둘러싼 당파적 대립 내지 권력 투쟁

- 진량과 섭적 등 사공학파의 비판: 도학의 존재 의의 자체를 회의하는 근본적 도전으로 수기 중심적 경향과 경세 중심적 경향 간의 분열 가 능성이 현실화 되었다.

- 금의 위협과 관료 대지주의 토지 겸병으로 사회 경제적 불안정

- 굴욕적 천도와 안보 대가의 조공으로 백성을 고통으로 이끌었으며 금의 타도라는 강렬 한 열망이 싹텄다.

- 관료 대지주의 수탈: 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들의 기의(起義)

- 대표적 학자로 주희(1130 1200), 장식(1133 1180), 육구연(1139 1192), 여주 겸(1137 1181), 진량(1143 1194), 섬벅(1150 1223)

a) 격물치지의 주자학/명심明心의 상산학, 절충적인 여조겸

b) 도학파는 공통적으로 천리에 근원을 둔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라는 성선적 인간 이 해를 했고 천리와 인욕, 의리의 엄격한 구분을 했으며 내면적 덕성의 실현을 강조 했다. 즉 심성과 의리 중시의 도학파

c) 사공학파는 실용과 공리를 중시한 현실 주의자들로 순자()와 연결 지으려는 노력 함.

2. 도학파의 시대 인식과 대처

- 당시 사회 전반은 과거를 위한 학문을 추구했으며 이민족 할거와 굴욕적 화의에 따른 경제적 부담, 도학파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 도학파의 대처 방안: 군주를 포함한 지배 계급의 내면적 수신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교화, 도덕 중시

- 사공학파의 대처 방안: 실질적인 제도의 보완과 확립

- 차이의 원인

a) 남송 사회 위기의 원인 진단 차이

도학파: 도학적 사유 방향 강화 방향으로 현실 문제 대응 모색

사공학파: 신법 정신의 계승을 통해 구체적 정책을 통한 현실적 효용(공리) 실현을 중시했다.

3. 도학파 내부의 대립

- 공통점: 내면의 도덕 심성의 실현, 즉 수기가 학문의 목표이자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근 원적 방안이다.

- 육구언은 주희의 수기에 이르는 방법의 불철저성 비판

- 육구연: 도덕적 본성과 그것을 자각, 실현하는 능력은 인간 내부에 구비, 따라서 수기의 노력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것을 실현해 내는 것, 육구연 의 관점에서 주희는 내면의 심성을 향하지 않고 외부 사물을 대상으로 한 격물 궁리 공부의 필요성만을 강조. 지리支離하다고 비판, 즈희 방법론의 비효율성 지적 수기 중심의 근본적 입장에서 선 상산학의 주자학에 대한 불철저성 비 판

- 주희(朱熹, 1130 1200)

#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 滄州炳叟, 둔옹遯翁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

1130915(음력), 전란을 피해 임시 거처하던 복건 남검주 우계현에서 아버지 주 송朱松과 어머니 축씨祝氏3남으로 출생,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 지적으로 매우 조숙, “나는 5, 6세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 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 11세 때인 1140년 아버지 주송은 금나라에 대한 화친 정책에 반대하다가 중앙 관계에 서 추방당해 건안의 환계정사에 은거, 3년 뒤에 사망, 주희는 유언에 따라 호적계, 유백수, 유병산 세 사람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

# 18세 때 지방의 과거 예비 시험 해시解試에 합격, 이듬해 본시험에 합격, 115122세 때 이부吏部 임관시험에 합격하여 종 9품 좌적공랑이 되어 천주 동안현 주부 (문서처리 담당직)로 임명, 24세 때 임지에 부임한 주희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서 동안현의 학 교 행정도 담당,

# 친구 여조겸과 함께 성리학의 기준이 되는 통로인 근사록 편찬, 육상산과의 아호 논 쟁

# 28세 때 이후 제수된 관직은 대부분 실권 없는 명목상의 관직

# 많은 뛰어난 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 여조겸(呂祖謙여동래 1137 1181)과 함께 1175년에 근사록近思錄 편찬, 두 달 간 함께 지내며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글 과 말에서 622개 항목을 가려 뽑아 14개의 주제 별로 분류, 정리. 이 책은 이후 성 리학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됨.

# 근사록 편찬 이후 강서성 연산현 동부쪽의 명싱지 아호鵝湖를 유람하면서 당대의 저 명한 유학자 육산상(육구연)과 만나 학문적 토론함

# 주희는 천니에서 부여 받은 본성이 곧 이치(성즉리성즉리)라는 입장을 취했고 육상 산은 마음이 곧 이치(심즉리심즉리)라는 입장을 취함, 춧날 주희에서 비롯된 이학理 學과 육상산에서 비롯된 심학心學의 갈라짐이 이 논쟁에서 비롯

# 주희는 나중에 육상산을 백록동서원 강의에 초빙했고 육상산은 형 육구령의 묘지墓 誌를 써 줄 것을 부탁. 그들은 학문적 입장은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경

# 오경五經 중심의 유학에서 사서四書 중심의 유학으로 변함

# 주희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

# 한당漢唐 시대 유학을 오경 중심의 유학, 송대宋代 이후 유학을 사서 중심의 유학이 라 하는 데 이는 주희 업적에 따른 것

# 사서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치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 된 성()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성리학성리학의 기반을 다짐. 사서는 1313(원 원 황경皇慶 2)부터 1912(중화민국 민국民國 원년)까지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였다.

# 대학이 근본적인 큰 틀을 제시해주고 논어가 견실한 기반이 되며 맹자가 보다 세세 한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지도해주고 중용이 미묘하고 심원한 철학성을 제공해 준다고 봄

# 방대한 저술과 심원한 이론 체계를 구축했다.

# 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 화록이 140편에 달하며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함.

# 주희는 그 이전 시대까지의 유학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평가를 받음.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북송오자北宋五子라 일컬어지는 북송 시대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 합, 그리고 한 차원 높게 정리

# 탄압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학문에 정진

# 주희의 주된 주제는

- 이기 선후의 문제/이기 동정의 문제/ 이일분수/미발, 이발

- 심통성정/천명지성과 기질지성

- 주경함양/격물궁리/도심과 인심

- 지선행후

4. 신유학의 본체론, 우주론의 영역과 성격은 인간의 심성 문제,, 그 중에서도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고정시키고 당위를 존재론적으로 깊이 있게 설명한 것

5. 송 대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도학은 원원대에 들어서 관학으로 채택되면서 동아시아 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