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끝 무렵 마지막 햇살을 맞으며 지천으로 넘쳐나는 코스모스들을 보면 오랜 첫사랑 그놈이 생각납니다.
그날은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아침일찍 군산으로 가는 통학버스를 타러 세라복인 교복을 입고 무거운 가방과 비닐 우산을 들고 정류장으로 나섰습니다. 학교에 제 시간에 등교하려면 그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에 근동의 모든 고등학생들, 시장가는 동네엄마들로 정류장이 한껏 붐볐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우시두시 모여 소근거리고 있더군요.
왜그래 왜그래 물으니 'Y가 자살했데.. 농약먹고...'뭐 Y가 자살했다고. 왜 !!! 정말 너무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모르겠어. 청산가리를 먹고 가슴이 시꺼먼해져서 죽었데.' 그날 이후로 나의 사춘기는 우울 그 자체였고 또래 아이들이 싱거웠고 또 마음한구석에 무거운 죄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애를 오랫동안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중2학년 늦가을 요만때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던때부터.
그애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던 양옥집에 살았습니다. 거실을 중심으로 데 여섯개의 방이 있고 거실앞에는 나무와 꽃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거실에 앉아 있으면 마치 현실이 아닌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때가 있곤 했습니다.
아마 중간고사를 볼 무렵이었죠. 공부에 다소 약한 그녀를 위한 그녀 엄마의 배려로 시험때만 되면 그집에서 같이 공부하곤 했습니다. 그날 그녀의 방에 들어갔더니 책상위에 한 아름의 코스모스가 꽂아져 있더군요. 너무 기분 좋아서 이렇게 많이 어디서 났을까 물었더니 교회의 전도사님 아들 우리와 같은 학년이었던 그가 군산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 오다가 그녀를 위해 안고온 코스모스였습니다.
그때의 먹먹했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됩니다. 바로 그애가 가져왔다고.. 그녀를 위해. 그둘은 그때 이미 사귀는 중이었다는 소식을 그뒤 친구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교회의 전도사님 아들이었답니다. 그애를 처음 만났던 시간들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까까머리에 교모를 눌러쓰고 저 멀리서 걸어오는 그애을 볼때는 가슴시려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여서 그런지 항상 여전도사님이 교회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남자전도사님이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다니기 시작했던 교회인지라 사춘기소녀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신심도 만만치 않았고 또 시골 마을의 유일한 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곳이라서 그땐 교회와 그곳에 딸린 식구들이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남 전도사님이 부임하시고 한참 지난뒤 토요일 밤에 삐딱 모자를 쓰고 그애는 나타났습니다. 약간 탄듯한 얼굴에 건들거리는 걸음걸이 미소띤얼굴로 나타난 토요일 그밤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야말로 도시아이의 냄세를 물씬 풍기며 약간 우수 띤 표정이던 그 애의 모든것이 시골 중학교 사춘기 소녀였던 내 또래의 칠 팔명이나 되는 아이들 모두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었었다고 먼 훗날 웃으며 그 날을 회상할 말큼이나.
그 날 이후로 난 그애를 내 영혼의 동반자로 나의 가슴속의 제롬이 되게했습니다,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처럼 나는 수없이 그애을 부르고 그애를 세기고 그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애를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를 가는 일조차 하느님께 죄가 되지 않을까 회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가슴속의 은밀한 나의 사랑이 하느님보시기에 그지 없는 죄악으로 비쳐질 것이기에 눈물로 회개를 한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이 나의 죄를 감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몇 밤을 철야기도를 올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그 죄의식의 무거움때문에 방언이라는 무의식의 발현까지 이르렀다면 그 부담감이 얼마나 큰것이었는지 짐작코도 남음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짐작치 못했던 주위 사람들은 나의 신심이 너무 도탑다고 칭찬 까지 해 주셨는데 그 칭찬의 소리조차 나의 죄의식에 무게감만 실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남몰래 눈물지으며 끌어안고 있던 비밀의 나의 제롬을 나의 친구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알리사가 될 수 없었고 나의 제롬은 분노의 대상이었으며 내 친구였던 그애를 향한 나의 질투심은 순진했던 사춘기 소녀에겐 너무 큰 짐이었습니다. 눈물의 회개의 기도를 올리며 자신을 근근히 지탱해 오던 시절 그 즈음에 친구의 자살은 내 질투심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느껴져 또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그녀가 자살한 날 아침 마침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날 통학 버스가 중간에 고장이 났습니다. 자살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내 마음의 남자친구에게서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교모를 푹 눌러쓰고 고장난 버스를 뒤로하고 철길을 따라 학교를 가던 그의 뒷 모습이 너무 애잔해서 내 친구가 자살했다는 사실보다 나의 제롬이 감당해야할 슬픔에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비를 흠뻑 맞고 학교에 와 보니 친구의 자살 소식에 온통 뒤 숭숭했습니다. 일설엔 미술특기생으로 입학했던 그녀가 중간고사 성적이 꼴찌여서 전날 담임선생님께 엄청 혼났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하고 또 일설에 그애 남자친구와 저녁마다 담을 타고 만나다 임신까지 하게 돼 자살했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도 왜 그녀가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내렸던 비가 오후들어가며 개기 시작하고 종일 그녀의 자살생각으로 수업은 하나도 안 들어오는데 하필 그날 교실 창밖 화단에 서있던 목련꽃 잎이 뚝 뚝 떨어지더군요. 그 전날에도 틀림없이 잎을 떨구었을 목련 꽃잎들이 그날 그애가 죽은 날 오후에 내 마음에 새겨져 지금도 가끔씩 내 눈앞에서 뚝 뚝 지곤합니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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